디모데 전서 2:1-15

2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이것을 권고합니다.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 관해 간구와 기도와 탄원과 감사를 드리고, 2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 관해서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경건한 정성과 진지함을 온전히 나타내며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하십시오.+ 3  이것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보시기에 훌륭하고 받아들이실 만한 일입니다. 4  그분의 뜻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정확한 지식에 이르는 것입니다. 5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6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상응하는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정해진 때가 되면 분명히 이것이 증거될 것입니다. 7  이것을 증거하도록+ 나는 전파자와 사도로,+ 믿음과 진리에 관해 이방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8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화를 내거나+ 논쟁하는 일 없이+ 어디에서나 충성스러운 손을 들고 계속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9  마찬가지로, 여자들도 단정한 옷을 입고 겸허와 건전한 정신으로 자기를 단장하기 바랍니다. 땋은 머리 모양과 금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가 아니라,+ 10  하느님을 섬긴다고 공언하는 여자에게 어울리게,+ 선행으로 단장하기 바랍니다. 11  여자는 온전히 복종하면서+ 잠잠히 배우십시오. 12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잠잠해야* 합니다.+ 13  하느님께서 아담을 먼저 지으시고 그다음에 하와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14  또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철저히 속아+ 죄를 지은 것입니다. 15  그러나 여자가 건전한 정신과+ 더불어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자녀를 낳는 일로 안전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각주

또는 “조용히 있어야”.

연구 노트

감사와 더불어 기도와 간구로: 여기서 바울이 말한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숭배의 일부로서 그분께 말씀드리는 것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간구”는 더 구체적인 단어로, 간청하거나 탄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강한 표현이다. 그러한 간구는 강렬한 감정에서 우러나와 눈물을 흘리며 하는 경우가 많다. (히 5:7) 한 참고 문헌에서는 간구를 “개인적인 필요를 위해 부르짖는 것”으로 정의한다. 바울은 “감사와 더불어”라는 표현을 덧붙임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언제나 합당하다는 점을 밝힌다. 상황이 절박할 때에도 감사해야 할 이유들이 있다. 바울은 경험을 통해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행 16:22-25; 엡 5:19, 20) 또한 바울은 청원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요청”을 의미하는 단어로 여기서는 기도로 요청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춘 표현으로 쓰였다. 바울이 이 구절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다양한 필요에 대해 청원할 수 있다.—이 구절에 나오는 모든 일에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간구와 기도와 탄원과 감사를 드리고: 여기서 바울은 의미가 비슷한 여러 표현을 사용하여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빌 4:6 연구 노트 참조) 이 문맥에서 “탄원”이라는 표현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하느님께 하는 청원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성경에는 그처럼 하느님께 탄원을 드린 사례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중 한 가지 예로, 모세는 미리암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재하는 탄원을 드렸다. (민 12:10-13; 21:7)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도 하느님의 종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하는 내용이 나온다. (고후 1:11; 살후 3:1; 히 13:18, 19; 약 5:14-18) 여기서 바울은 “감사”를 드리라는 말도 하는데,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로 감사를 표하라고 거듭 권했다.—고후 4:15; 골 2:7; 4:2.

위에 있는 권위: 세속 정부의 권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권위”로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 엑수시아의 복수형이다. 그리스어 「칠십인역」을 읽는 사람들은 이 단어가 통치권이나 지배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에 익숙했을 것이다. (단 7:6, 14, 27; 11:5 참조. 「칠십인역」의 이 구절들에서는 “통치하는 권위; 통치권; 권력”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와 아람어 단어들을 번역할 때 엑수시아가 사용되었다.) 눅 12:11에 나오는 “정부 관리와 권위를 가진 자”라는 표현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위에 있는”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딤전 2:2에 나오는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또는 “권위를 가진”, 각주]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에 사용된 단어와 어근이 같다. 일부 문맥에서는 이 단어가 단지 다른 사람에 대해 힘이나 권위를 행사하는 지위에 있는 것을 가리키며, “가장 높은” 권력이라는 의미는 들어 있지 않다. 빌 2:3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는데, 그 구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른 사람을 가장 높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라고 권고한다.

경건한 정성: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유세베이아)는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함으로 나타내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숭상심과 경외심을 가리킨다. 의미 폭이 넓은 이 단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행동을 하도록 마음을 움직이는 하느님에 대한 충성스러운 사랑이나 개인적인 애착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한 사전에서는 이 단어의 의미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신 대로 생활하다”라는 말로 요약한다. 또한 바울의 말을 보면 경건한 정성이 타고나는 특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디모데에게 이 특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운동선수가 훈련하듯이 열심히 노력하라고 권고한다. 3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건한 정성을 나타내는 면에서 최고의 본을 남기셨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딤전 3:16 연구 노트 참조.

주: 이 구절에 나오는 “주”(키리오스)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문맥을 통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성경 학자들도 여기서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한 것인지 주 여호와를 언급한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롬 10:9에 나오는 주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롬 10:11에 인용된 사 28:16도 예수에게 적용된다. 따라서 롬 10:12에 나오는 “주”가 롬 10:11에 나오는 “그”를 가리키는 표현이라면, 롬 10:12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롬 10:9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에 대해 말한다. 또한 롬 10:13에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욜 2:32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따라서 롬 10:12에 나오는 “주”가 롬 10:13과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면, 롬 10:12의 “주”는 여호와 하느님일 것이다. 그렇다면 롬 10:12에 언급된 사상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한 하느님이 계시다는 롬 3:29의 내용과 일치할 것이다. 이것은 신세계역 성서 번역 위원회가 키리오스(주)가 나오는 모든 경우에 하느님의 이름을 복원할 것인지 결정할 때 문맥을 고려했음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예이다. 히브리어 성경과의 연관성과 문맥을 고려할 때 하느님의 이름을 복원할 만한 근거가 확실치 않은 경우, 신세계역 성서 번역 위원회는 번역자로서의 한계를 넘어가 해석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주”라는 표현을 남겨 두었다.—부록 다1 참조.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 또는 “권위를 가진 모든 사람”. 이 표현은 다양한 정부 당국자와 관리를 가리킨다. (롬 13:1 연구 노트 참조) 이 구절에 나오는 왕들에는 로마 황제뿐만 아니라 지역 통치자들도 포함되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쓸 당시 (기원 61-64년경) 로마 황제는 네로였는데, 그는 기원 54년에서 68년까지 통치했다.

경건한 정성: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유세베이아)는 하느님에 대한 숭상심과 깊은 존경심을 가리킨다. (“경건한 정성”으로 번역된 그리스어에 대해 알아보려면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동일한 그리스어가 「칠십인역」에서도 때때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사 11:2; 33:6에 그 단어가 나온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그 부분이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표현 역시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리킨다. 기원 5세기에 만들어진 시리아어 「페시타」의 번역자들은 딤전 2:2에 나오는 이 그리스어를 번역할 때 “하느님”이라는 말을 넣어 “하느님에 대한 숭상심”이라고 명시적으로 표현했다. 그와 비슷하게, 후에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히브리어로 옮긴 일부 번역판에서는 이 구절을 비롯한 여러 구절에서 유세베이아를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번역했다. (딤전 3:16; 4:7, 8; 6:3, 6, 11) 하지만 신세계역 성서 번역 위원회는 이 구절의 본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할 만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다른 구절들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복원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부록 다 참조. 롬 10:12 연구 노트 비교.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하십시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정부의 고위 당국자들에 관해 기도해야 하는 한 가지 이유를 알려 준다. 그러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지 않고 그분을 계속 섬기고 “경건한 정성과 진지함을 온전히 나타내며” 평화롭게 살아가게 할 수 있도록 당국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실 수 있다. (렘 29:7 비교)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더 많은 자유를 갖고 전파 활동을 계속 수행하면서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도울 수 있다. (딤전 2:4) 그 당시 디모데가 섬기고 있던 에베소 회중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몇 년 전에 바울이 3차 선교 여행(기원 52-56년경)을 할 때 한 정부 관리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수행하던 전파 활동에 반대한 폭도를 진정시킨 적이 있었다. (행 19:23-41)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세속 통치자들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전파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다.—행 4:23-31.

모든 부류의 사람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표현을 직역에 가깝게 옮기면 “모든 사람”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문맥을 고려할 때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예를 보려면 요 12:32; 행 2:17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신다. (벧후 3:9) 따라서 그분은 성별, 민족적 배경, 경제적 형편,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신다. (마 28:19, 20; 행 10:34, 35; 17:30) 하지만 성경은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아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히 알려 준다. (마 7:13, 21; 요 3:16, 36; 살후 1:9) 따라서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그러한 구절들과 조화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앞 구절들인 딤전 2:1, 2에서도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 구절들에서 바울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 관해”,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 관해서도” 기도하라고 권한다.

구원을 받고: “구원하다” 또는 “구원”에 해당하는 원어 표현들은 성경에서 때때로 위험에서 구출하거나 멸망되지 않도록 구해 준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출 14:13, 14; 행 27:20, “살아남다”) 하지만 이 표현들은 종종 죄에서 구출하는 것을 가리킨다. (마 1:21) 죽음의 원인은 죄이므로, 죄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은 영원히 살 희망을 갖게 된다.—요 3:16, 17. 딤전 1:1 연구 노트 참조.

정확한 지식에 이르는: 하느님의 뜻은 사람들이 가능한 한 정확히 즉 온전히 그분과 그분의 목적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다.—여기서 “정확한 지식”으로 번역된 그리스어에 대해 알아보려면 롬 10:2; 엡 4:13 연구 노트 참조.

정확한 지식: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지식”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그노시스에피그노시스이다. 두 단어 모두 “알다; 이해하다; 깨닫다”를 의미하는 동사 기노스코와 어근이 같다. 여기 사용된 에피그노시스그노시스의 강조형(에피는 문자적으로 “위에”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부가적인”이라는 의미)이다. 에피그노시스는 문맥에 따라 흔히 “정확한, 참된, 온전한 지식”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여기서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들의 열심은 약속된 메시아인 예수를 통해 밝혀진 하느님의 뜻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부류의 사람: 예수께서는 국적, 인종, 경제적 형편에 관계없이 온갖 배경의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끌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행 10:34, 35; 계 7:9, 10. 요 6:44 연구 노트 참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얼마 전에 ‘그리스인 몇 명’이 예수를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점은 유의할 만하다. (요 12:20 연구 노트 참조) 많은 번역판에서는 그리스어 파스를 “모든 사람; 모든 이”로 번역한다. 그럴 경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분이 결국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끄실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그것은 영감받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조화되지 않는다. (시 145:20; 마 7:13; 눅 2:34; 살후 1:9) 그리스어 파스의 문자적인 의미가 “모두; 모든 사람”이기는 하지만 (롬 5:12) 마 5:11과 행 10:12을 보면 이 단어가 “온갖; 온갖 종류의; 모든 부류의”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많은 번역판이 그 구절들에서 “온갖; 각종” 같은 번역 표현을 사용한다.—요 12:32과 비슷한 경우를 보려면 요 1:7; 딤전 2:4 비교.

모든 부류의 육체: 또는 “모든 부류의 사람”. 직역하면 “모든 육체”. 여기서 그리스어 사르크스(흔히 “육체”로 번역됨)는 살아 있는 인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많은 경우 “모든 육체”라는 표현은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요 17:2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모든 육체”라는 그리스어 표현이 좀 더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땅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 주지는 않으셨다. 또한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신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모든 부류의 사람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아들딸, 젊은이, 노인, 남종, 여종’ 즉 모든 부류의 사람에게 부어 주셨다. (행 2:17, 18) “모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파스)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 예를 딤전 2:3, 4에서도 볼 수 있다. 그 구절에서는 하느님의 뜻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알려 준다.—요 12:32 연구 노트 참조.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바울이 기록한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에는 “구원자”라는 표현이 여호와 하느님을 가리키는 데 여섯 번 사용되었다. (이 구절과 딤전 2:3; 4:10; 딛 1:3; 2:10; 3:4) 이것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표현이 하느님을 가리키는 데 두 번밖에 사용되지 않은 것과 대비가 된다. (눅 1:47; 유 25)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주 언급한다. (시 106:8, 10, 21; 사 43:3, 11; 45:15, 21; 렘 14:8) 여호와께서 예수를 통해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때문에, 예수도 “구원자”로 언급된다. (행 5:31; 딤후 1:10) 예수는 “구원의 수석 대표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히 2:10) 천사는 하느님의 아들을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를 의미하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부르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가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오.” (마 1:21연구 노트) 따라서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근원이 여호와이시라는 점을 강조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구원자로 언급한다. (딛 2:11-13; 3:4-6) “구원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칠십인역」에서 그 단어를 번역하는 데 사용된 그리스어는 하느님의 백성을 적들로부터 “구할 구원자들”로 일으켜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된다.—느 9:27; 삿 3:9, 15.

정확한 지식: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지식”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그노시스에피그노시스이다. 여기 사용된 에피그노시스그노시스의 강조형(에피는 문자적으로 “위에”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부가적인”이라는 의미)이다. 에피그노시스는 문맥에 따라 흔히 “정확한, 참된, 온전한 지식”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롬 10: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아들 즉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온전한 지식을 얻는 면에서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일치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 준다.—고전 1:24, 30; 엡 3:18; 골 2:2, 3; 벧후 1:8; 2:20.

중개자: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이 중개자는 모세였다. 그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법적 구속력이 있는 합의 즉 계약을 맺으실 때 그 사이에서 중개하는 역할을 했다. (용어 설명 “중개자” 참조) “중개자”로 번역된 그리스어 메시테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6번 나온다. (갈 3:19, 20; 딤전 2:5; 히 8:6; 9:15; 12:24) 그 단어는 법률 용어이다. 한 사전에 따르면, 이 단어는 “두 당사자가 평화와 우호 관계를 맺거나 회복하도록 또는 협정[즉 합의]에 이르도록 개입하는 사람 혹은 계약을 정식으로 확인하기 위해 개입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모세는 율법 계약의 중개자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그 계약을 지키고 그 혜택을 누리도록 도왔다. 예를 들어 모세는 그 계약이 발효될 때 자신의 직무를 수행했다. (출 24:3-8; 히 9:18-22) 그는 제사장들의 임직식을 거행하고 제사직이 운영되게 했다. (레 8:1-36; 히 7:11) 또한 그는 600여 가지의 규정으로 이루어진 법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달했으며 그들을 처벌하지 말아 달라고 여호와께 간청하는 일도 했다.—민 16:20-22; 21:7; 신 9:18-20, 25-29.

중개자: “중개자”라는 표현은 새 계약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하시는 법적인 역할을 가리킨다. 히 9:15에서 예수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라고 불리신다. (용어 설명 “중개자” 및 갈 3:19 연구 노트 참조)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상응하는 대속물로” 주심으로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새 계약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셨다. (딤전 2:6) 새 계약은 하느님과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14만 4000명의 그리스도인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다.—눅 22:20; 히 8:6, 10-13; 계 7:4-8.

모든 사람: 또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마 20:28; 요 3:16. 딤전 2:4 연구 노트 참조.

자신을 상응하는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상응하는 대속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안티리트론이다. 이 그리스어는 “교환하는; 상응하는; 대신하는”을 의미하는 안티와 “대속물; 대속의 값”을 의미하는 리트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수께서 희생으로 바치신 완전한 인간 생명은 아담이 하느님에게 반역함으로 잃은 완전한 인간 생명과 정확히 상응하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예수의 희생이 공의에 대한 그분의 높은 표준에 온전히 달했기 때문에 그 희생을 “상응하는 대속물”로 받아들이실 수 있었다. 많은 성경 번역판에서는 이 구절에 나오는 안티리트론을 단지 “대속물”이라고 번역한다. 마 20:28이나 막 10:45에 나오는 리트론과 동일하게 번역하는 것이다. (마 20:28 연구 노트; 용어 설명 “대속물” 참조)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단어는 안티리트론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한 참고 문헌에서는 이 단어를 “대속물, 구속의 값,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응하는 대속물”로 정의한다. (「신약 희영 사전」[A Greek and English Lexicon to the New Testament], 존 파크허스트) 이러한 점을 볼 때 “상응하는 대속물”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고전 15:45 연구 노트 비교.

모든 부류의 사람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표현을 직역에 가깝게 옮기면 “모든 사람”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문맥을 고려할 때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예를 보려면 요 12:32; 행 2:17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신다. (벧후 3:9) 따라서 그분은 성별, 민족적 배경, 경제적 형편,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신다. (마 28:19, 20; 행 10:34, 35; 17:30) 하지만 성경은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아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히 알려 준다. (마 7:13, 21; 요 3:16, 36; 살후 1:9) 따라서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그러한 구절들과 조화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앞 구절들인 딤전 2:1, 2에서도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 구절들에서 바울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 관해”,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 관해서도” 기도하라고 권한다.

대속물: 성경 외의 그리스 문헌에서 그리스어 리트론(“풀어 주다; 석방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리오에서 파생)은 속박되어 있거나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풀어 줄 때 또는 전쟁 포로를 석방할 때 지불되는 값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는 이 단어가 이 구절과 막 10:45에 두 번 나온다. 딤전 2:6에는 이 단어와 같은 어근에서 나온 안틸리트론이 나오는데, “상응하는 대속물”로 번역되었다. 그 밖에 어근이 같은 단어들로는 “해방시키다; 대속하다”를 의미하는 리트로오마이(딛 2:14; 벧전 1:18 및 각 구절의 각주 참조)와 흔히 “대속물에 의한 석방”으로 번역되는 아폴리트로시스(엡 1:7; 골 1:14; 롬 3:24; 8:23; 히 9:15; 11:35)가 있다.—용어 설명 참조.

첫 사람 아담은 ··· 마지막 아담은: 이 구절의 앞부분에서 바울은 창 2:7(“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을 인용하면서, “첫”과 “아담”이라는 단어를 덧붙인다. 이 구절의 뒷부분에서 그는 예수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고전 15:47에서 바울은 아담을 “첫 사람”, 예수를 “둘째 사람”이라고 부른다. 첫 사람 아담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생명을 주신 분께 불순종했지만 마지막 아담은 그분께 온전히 순종했다. 첫 사람 아담은 자손들에게 죄를 퍼뜨렸지만 마지막 아담은 자신의 인간 생명을 속죄 제물로 바쳤다. (롬 5:12, 18, 19) 후에 여호와께서는 예수를 영의 몸으로 부활시키셨다. (벧전 3:18) 예수께서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인간이셨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공의에 대한 자신의 표준을 지키시면서, 예수의 희생을 아담의 후손들을 도로 사기 위한 “상응하는 대속물”로 받아들이실 수 있었다. 이 대속 희생으로 인해 인류는 첫 사람 아담이 잃어버린 생명의 전망을 되찾게 될 것이었다. (딤전 2:5, 6) 따라서 예수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한 일이었다. 이 표현은 그분의 뒤에 또 다른 아담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눅 3:38; 롬 5:14 연구 노트 참조.

전파자…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이 받은 임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이 구절과 딤후 1:11에서 세 가지 표현(“전파자”; “사도”; “가르치는 사람”)을 사용하는데, 각 표현은 그가 받은 임명의 특정한 부면을 강조해 준다. 그는 예수와 침례자 요한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소식을 선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전파자”였다. (마 4:17; 눅 3:18. 마 3:1 연구 노트 참조) 노아도 그와 비슷한 의미에서 “의의 전파자”였다.—벧후 2:5.

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을 “사도” 즉 “보냄을 받은 자”로 선택하셨다. (행 9:15; 롬 1:5) 또한 바울은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진 사도”가 되었다고 말한다.—고전 1:1; 롬 11:13연구 노트. 롬 1:1 연구 노트 참조.

이방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 바울은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과 토론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득했다. (행 17:2; 28:23. 마 28:20 연구 노트 참조) 그는 많은 비유대인들을 가르쳤다는 의미에서 “이방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이 1세기에 시작한 전파하고 가르치는 활동이 세계적인 규모로 수행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 반대자들이 바울이 거짓 사도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그러한 주장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고후 11:4, 5; 갈 1:6, 7, 11, 12) 바울을 깎아내리려고 했던 사람들 중 몇몇은 에베소에서 디모데가 맞서 싸워야 했던 거짓 선생들 가운데 포함되었을 수 있다. (딤전 1:3, 4) 여기서 바울은 당시 로마에서 법적 절차가 진행될 때 흔히 하는 맹세와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 디모데와 에베소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참된 사도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롬 9:1; 갈 1:20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가르치십시오: “가르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에는 교훈하고 설명하고 논증을 사용하고 증거를 제시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마 3:1; 4:23 연구 노트 참조) 예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계속되는 과정이며, 그렇게 하는 것에는 그들도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을 가르치고 그분의 가르침을 적용하고 그분의 본을 따르도록 돕는 것이 포함될 것이다.—요 13:17; 엡 4:21; 벧전 2:21.

사도: 그리스어 명사 아포스톨로스는 “보내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포스텔로에서 나온 단어이다. (마 10:5; 눅 11:49; 14:32) 요 13:16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에 이 단어의 기본 의미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그 구절에서는 이 단어가 “보냄을 받은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다. 바울은 부활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선택에 의해 이방 사람들 즉 비유대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행 9:1-22; 22:6-21; 26:12-23) 바울은 자신이 부활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고전 9:1, 2) 기적을 행했다는 (고후 12:12) 점을 들어 자신의 사도직을 확증했다. 또한 침례받은 신자들에게 성령이 내려질 때 그가 통로 역할을 했다는 점 역시 그가 진정한 사도라는 증거였다. (행 19:5, 6)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점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자신을 “열두 제자” 가운데 포함시킨 적은 한 번도 없다.—고전 15:5, 8-10; 롬 11:13; 갈 2:6-9; 딤후 1:1, 11.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진 사도: 비유대인들에게 보내진 사도라는 의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때는 아마도 기원 34년경이었던 것 같은데, 부활되신 예수께서는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에게 그리고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그릇이다.” (행 9:15) 이처럼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진 사도[“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선택되었다. (행 26:14-18; 롬 1:5; 갈 1:15, 16; 딤전 2:7)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선택되었다고 강하게 확신했으며 그에 대한 증거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가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을 대치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은 없으며, 그는 한 번도 자신을 “열두 제자” 가운데 포함시키지 않았다.—고전 15:5-8. 행 1:23 연구 노트 참조.

전파하며: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기본적으로 “공식 사자로서 소식을 선포하다”를 의미한다. 이 표현은 선포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공개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을 가리킨다.

남자들이 … 계속 기도하기를: 여기서 바울은 회중을 대표해서 공개 기도를 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남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고전 14:34; 딤전 2:11, 12) 손을 들고라는 표현은 성경 시대 사람들이 기도할 때 흔히 취하던 자세를 묘사한 것이다. 공개 기도를 드리는 남자는 하늘을 향해 손을 든 채 하느님의 축복을 구했던 것 같다. (왕상 8:22, 23 비교) 하지만 충실한 숭배자들은 다른 자세로 기도하기도 했으며 성경에서는 특정한 자세가 더 낫다고 알려 주지 않는다. (대상 17:16; 막 11:25; 행 21:5)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드리는 사람의 마음가짐이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기도하는 사람이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충성스러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거룩한; 순결한; 성별된”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충성스럽게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다.—딛 1:8 연구 노트 비교.

화를 내거나 논쟁하는 일 없이: 이 영감받은 교훈은 바울이 이 편지의 다음 장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인 감독자의 자격 조건 중 다투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조화된다. (딤전 3:1, 3) 따라서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인 남자가 분열을 일으키는 태도, 혹은 한 번역판의 표현에 따르면 “분한 마음이나 다투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공개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은 기도의 내용과 방식에 쉽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러한 교훈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앙심을 품거나 분열을 일으키는 논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바울의 말과 조화를 이룬다.—엡 4:31; 빌 2:14; 골 3:8연구 노트.

격분, 분노: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두 단어는 의미가 매우 비슷하다. 일부 학자들은 처음에 나오는 오르게는 원래 속으로 분노를 느끼는 것에 초점을 맞춘 단어이고, 그다음에 나오는 티모스는 그 감정을 겉으로 터뜨리는 것과 관련이 있는 단어라고 말한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에는 그러한 구분이 불분명해졌을 수 있다. 바울은 두 단어를 모두 사용함으로 분노를 마음속에 품는 경향과 그러한 감정을 터뜨리는 것에 대해 경고한 것이다.—엡 4:31. 엡 4:26 연구 노트 참조.

충성스럽고: 충성스러운 감독자는 여호와께 꺾을 수 없는 정성을 나타내며 하느님의 말씀에 나오는 원칙들에 충실히 고착한다. 그는 동료 숭배자들이 시련이나 박해를 겪을 때 변함없이 그들 곁을 지킨다.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는 (일부 번역판의 표현처럼) “거룩하다”, “경건하다”라는 의미도 담고 있지만, “충성스럽다”로 번역할 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다. 예를 들어, 이 그리스어는 「칠십인역」에서 “충성스럽다”나 “충성스러운 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를 번역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 (삼하 22:26; 시 18:25; 97:10) 한 참고 자료에서는 이 그리스어가 “하느님께 충성스러운 사람”을 묘사하는 말이라고 설명한다.—딤전 2:8 연구 노트 참조.

정신이 건전하고: 또는 “좋은 판단력이 있고; 지각력이 있고”. 한 사전에 따르면 “정신이 건전한”과 “건전한 정신”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들은 “신중한, 생각이 깊은, 자제력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정신이 건전한 사람은 균형이 잡혀 있으며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다.

단정한: 또는 “품위 있는”.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이 문맥에서 옷이 사람들 보기에 품위 있고 합당하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하느님의 봉사자라고 공언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옷이 적합할 것이다.

겸허: 또는 “정숙함”. 이 문맥에서 겸허에는 자신의 양심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고려하는 것이 포함된다. 겸허한 그리스도인은 단정하지 않게 여겨지거나 지나치게 눈길을 끌거나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하거나 걸려 넘어지게 할 만한 옷차림을 하지 않을 것이다.—고전 10:32, 33.

건전한 정신: 또는 “좋은 판단력; 지각력”.—딤전 3:2 연구 노트 참조.

땋은 머리 모양과 금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가 아니라: 바울 시대에 이교를 믿는 많은 여자들은 부와 명성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들을 단장했다. 그들은 머리를 화려하게 땋아 금장신구를 달았으며 매우 값비싼 옷을 입고 많은 보석으로 치장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많은 사람들도 그러한 치장을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처럼 자신을 과시하는 몸단장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이었다. 경쟁을 일으키거나 많은 사람이 참숭배에서 주의를 돌리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여자들에게 외모를 단장할 때 좋은 판단력을 사용하고 극단적이 되지 말라고 권고했다. 그와 비슷하게 베드로도 충실한 여자들에게 외적인 단장이 아니라 “마음의 숨은 사람”을 꾸미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교훈했다.—벧전 3:3, 4. 잠 31:30 비교.

경건한 정성: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유세베이아)는 하느님에 대한 숭상심과 깊은 존경심을 가리킨다. (“경건한 정성”으로 번역된 그리스어에 대해 알아보려면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동일한 그리스어가 「칠십인역」에서도 때때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사 11:2; 33:6에 그 단어가 나온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그 부분이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표현 역시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리킨다. 기원 5세기에 만들어진 시리아어 「페시타」의 번역자들은 딤전 2:2에 나오는 이 그리스어를 번역할 때 “하느님”이라는 말을 넣어 “하느님에 대한 숭상심”이라고 명시적으로 표현했다. 그와 비슷하게, 후에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히브리어로 옮긴 일부 번역판에서는 이 구절을 비롯한 여러 구절에서 유세베이아를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번역했다. (딤전 3:16; 4:7, 8; 6:3, 6, 11) 하지만 신세계역 성서 번역 위원회는 이 구절의 본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할 만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다른 구절들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복원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부록 다 참조. 롬 10:12 연구 노트 비교.

경건한 정성: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유세베이아)는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함으로 나타내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숭상심과 경외심을 가리킨다. 의미 폭이 넓은 이 단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행동을 하도록 마음을 움직이는 하느님에 대한 충성스러운 사랑이나 개인적인 애착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한 사전에서는 이 단어의 의미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신 대로 생활하다”라는 말로 요약한다. 또한 바울의 말을 보면 경건한 정성이 타고나는 특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디모데에게 이 특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운동선수가 훈련하듯이 열심히 노력하라고 권고한다. 3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건한 정성을 나타내는 면에서 최고의 본을 남기셨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딤전 3:16 연구 노트 참조.

주: 이 구절에 나오는 “주”(키리오스)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문맥을 통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성경 학자들도 여기서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한 것인지 주 여호와를 언급한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롬 10:9에 나오는 주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롬 10:11에 인용된 사 28:16도 예수에게 적용된다. 따라서 롬 10:12에 나오는 “주”가 롬 10:11에 나오는 “그”를 가리키는 표현이라면, 롬 10:12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롬 10:9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에 대해 말한다. 또한 롬 10:13에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욜 2:32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따라서 롬 10:12에 나오는 “주”가 롬 10:13과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면, 롬 10:12의 “주”는 여호와 하느님일 것이다. 그렇다면 롬 10:12에 언급된 사상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한 하느님이 계시다는 롬 3:29의 내용과 일치할 것이다. 이것은 신세계역 성서 번역 위원회가 키리오스(주)가 나오는 모든 경우에 하느님의 이름을 복원할 것인지 결정할 때 문맥을 고려했음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예이다. 히브리어 성경과의 연관성과 문맥을 고려할 때 하느님의 이름을 복원할 만한 근거가 확실치 않은 경우, 신세계역 성서 번역 위원회는 번역자로서의 한계를 넘어가 해석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주”라는 표현을 남겨 두었다.—부록 다1 참조.

하느님을 섬긴다고: 또는 “하느님을 숭상한다고”.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테오세베이아)는 “하느님”에 해당하는 단어와 “정성” 또는 “숭상”에 해당하는 단어가 합쳐진 것이다. 이 단어는 하느님을 깊이 존경하고 그분께 정성을 바치고 참숭배를 드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경건한 정성”으로 번역되는 유세베이아와 의미가 비슷하지만, 그 단어와는 달리 “하느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를 포함하고 있다. (딤전 2:2; 4:7 연구 노트 참조)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하지만 이 단어는 「칠십인역」에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창 20:11과 욥 28:28에 이 단어가 나오는데,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에 해당하는 표현이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표현들은 그분에 대한 숭상심과 깊은 존중심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히브리어로 옮긴 일부 번역판에서는 이 구절 즉 딤전 2:10에 “여호와를 두려워한다고”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신세계역 성서 번역 위원회는 이 구절의 본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할 만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다른 구절들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복원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부록 다 참조. 롬 10:12 연구 노트 비교.

여자들은 회중에서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앞 구절들에서 바울은 방언을 하는 사람이 통역자가 없으면 “잠자코 있어야” 하고, 예언을 하는 사람도 다른 사람이 계시를 받으면 “잠자코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회중 집회에서 때를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말하는 여자들에게 지시한다. (고전 14:28, 30, 34) 일부 여자들은 남자들이 가르치는 일을 할 때 중간에 끼어들거나 그들의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했던 것 같다. 바울은 그런 여자들에게 질문이나 알고 싶은 점이 있으면 집회를 방해하기보다는 “집에서 남편에게 물어보라”고 권했다. (고전 14:35) 또한 바울이 영감을 받아 이 구절에서 한 말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감독하는 역할을 남자들에게 맡기신다는 성경의 지침과 일치한다. (딤전 2:12) 하지만 사도 바울이 여자들이 동료 봉사자나 좋은 소식의 전파자로서 수행하는 역할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롬 16:1, 2; 빌 4:2, 3) 바울이 영감을 받아 한 지시는 여자들이 회중 집회 때 참여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니었다.—고전 11:5; 히 10:23-25.

여자는 … 잠잠히 배우십시오: 여기서 바울은 당시 많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견해를 반박한 것이다. 그들은 여자는 성경에 대해 배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바울은 그러한 전통이 히브리어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며 예수께서도 그러한 견해를 지지하지 않으셨다. 사실 예수께서는 공개적으로 여자들을 가르치셨다. (수 8:35; 눅 10:38-42; 요 4:7-27) 여기서 바울은 영감을 받아 여자가 회중에서 “잠잠히”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사용한 그리스어는 “조용히”로 번역할 수도 있다. 바울은 이전에 고린도 회중에도 비슷한 교훈을 베푼 적이 있다. 그 회중에는 일부 여자들이 집회를 방해하는 일이 있었던 것 같다.—고전 14:34 연구 노트 참조.

온전히 복종하면서: 바울은 이 영감받은 교훈을 통해, 그리스도인 여자들에게 회중 내에서 여호와의 머리 직분 마련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하느님께서 회중을 가르치는 책임을 남자에게 맡기셨음을 보여 준다. (딤전 2:12) 바울은 복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여자들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예수가 여호와께 “복종할 것”이며 (고전 15:27, 28) “회중이 그리스도께 복종한다”고 말한다. (엡 5:24) 또한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 남자와 여자가 회중에서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히 13:17.

하느님께서 아담을 먼저 지으시고 그다음에 하와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여자가 회중에서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창조된 순서를 언급한다. (딤전 2:12; 창 2:7, 18-22) 바울은 여호와께서 아담을 하와보다 더 나은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을 먼저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가장이라는 역할을 맡기셨다. 후에 하느님께서는 하와를 만드시고 그에게도 영예로운 역할을 맡기셨다. 그는 남편의 “돕는 자” 즉 “그의 보완자”가 될 것이었다. (창 2:18) 바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머리 직분 마련은 사람에 대한 여호와의 원래 목적의 일부였다. 그 마련은 사람이 죄를 지어 불완전해지기 전에 시작된 것이었다. (고전 11:3) 바울의 말을 볼 때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도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에게 각기 다른 역할을 주셨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모두가 죄를 지었으므로: 이 구절에서 바울은 죄와 죽음이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퍼졌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진리를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은 ‘하느님께서 편파적이 아니시며 죄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의 대속 희생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신다’는 로마서의 주제와 일치한다. 바울은 유대인과 비유대인 모두가 죄인이며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신분을 얻으려면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아들이 치른 대속 희생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야 한다고 설명한다. (롬 1:16, 17) 이 구절에 언급된 세상은 인류 전체를 가리킨다. (요 3:16 연구 노트 참조) 일부 그리스어 본문에는 이 구절의 끝에 줄표가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자신이 하던 논증을 잠시 멈추었음을 보여 준다. 바울의 논증은 18절에서 다시 이어지는 것 같다. 따라서 정리해 보면, 바울은 12절에서 아담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논증을 시작하고 (“한 사람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18절(“한 의로운 행위를 통해 모든 부류의 사람이 생명을 위해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과 19절에서 논증을 끝마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 죽기까지 충절을 지키신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나타내어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또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기서 바울은 영감을 받아 창세기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한 가지 점을 알려 준다. 아담은 속임수에 넘어가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불순종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뱀이 하와에게 하느님께 불순종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한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창 3:4-6, 12) 하지만 아담은 여호와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하와를 따라 죄를 지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다. 그가 저지른 잘못은 심각한 것이었으며 바울은 아담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했다.—롬 5:12 연구 노트 참조.

여자가 철저히 속아 죄를 지은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죄를 짓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합당한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하와는 하느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하신 명령을 잘 알고 있었다. 뱀에게 그대로 이야기해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창 3:3) 바울은 하와가 “철저히 속아” 뱀의 거짓말을 믿었다고 말한다. 하와 자신이 이렇게 말했다. “뱀이 저를 속여서 제가 먹었습니다.” (창 3:13)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와에게 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여호와께 반역하기로 고의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유의할 점은 하와가 가장의 인도를 구하지 않고 혼자서 결정을 내렸다는 점이다. 또한 그는 남편의 충성스러운 돕는 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남편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잘못 사용하여 그가 죄를 짓게 했다. (창 2:18; 3:1-6, 12) 바울은 하와의 경우를 예로 들어, 하느님께서 정하신 한계를 지키면 축복과 보호를 받게 된다는 점을 설명한다.

건전한 정신: 또는 “좋은 판단력; 지각력”.—딤전 3:2 연구 노트 참조.

자녀를 낳는 일로 안전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자가 자녀를 낳아 돌보고 집안일을 하면, 남의 이야기를 하거나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에서 “안전을 누리게” 될 것이다. (딤전 5:11-15)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가운데 머물면서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면 여호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정신이 건전하고: 또는 “좋은 판단력이 있고; 지각력이 있고”. 한 사전에 따르면 “정신이 건전한”과 “건전한 정신”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들은 “신중한, 생각이 깊은, 자제력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정신이 건전한 사람은 균형이 잡혀 있으며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다.

미디어

로마 시대 여자들의 머리 모양
로마 시대 여자들의 머리 모양

1세기에 많은 여자들은 머리를 양 갈래로 나눈 다음 뒤로 모아 틀어 올렸다. (1) 일부 여자들은 머리를 땋고 말아서 더 화려한 머리 모양을 하기도 했다. (2) 머리를 말 때는 속이 빈 막대를 불에 데워 그 막대에 머리를 감았다. 부유한 여자들은 더 화려한 머리 모양을 했으며, 일반적으로 종들이 그들의 머리를 단장해 주었다. 그처럼 화려한 모양으로 머리를 고정하기 위해 머리핀, 빗 핀, 리본, 머리 망을 사용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여자들에게 지나치게 화려한 머리 모양을 해서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끌지 말라고 교훈했다. 여자들은 “겸허”와 “조용하고 온화한 영”으로 “자기를 단장해야” 했다.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특성들을 높이 평가하신다.—딤전 2:9; 벧전 3: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