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 전서 1:1-20

1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과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바울이 2  믿음 안의 진정한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오는 과분한 친절과 자비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3  내가 마케도니아로 가려고 할 때에 그대에게 권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대에게 권하는데,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그것은 그대가 일부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다른 교리를 가르치거나 4  거짓 이야기와+ 족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결국 쓸모가 없으며,+ 믿음과 관련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을 전해 주기보다는 억측만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5  참으로 이러한 지시를 하는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위선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6  일부 사람들은 이것들에서 벗어나 의미 없는 이야기에 빠졌습니다.+ 7  그들은 법을 가르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자기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나 그토록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8  우리가 아는 것처럼,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올바로 적용한다면 좋은 것입니다. 9  우리는 이것을 인정합니다. 율법은 의로운 사람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불법한 자와+ 반역적인 자,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 충성스럽지 않은 자*와 신성을 더럽히는 자,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 살인하는 자, 10  성적 부도덕을 저지르는 자, 동성애를 하는 남자, 납치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그리고 건전한* 가르침에+ 반대되는 그 밖의 모든 것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11  그 가르침은 행복하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좋은 소식에 따른 것으로, 그 좋은 소식이 나에게 맡겨졌습니다.+ 12  나에게 능력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합니다. 그분이 나를 충실한 자로 여기시고 봉사의 직무를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13  내가 전에는 신성을 모독하는 자, 박해하는 자, 불손한 자였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모르고 믿음 없이 한 일이기 때문에 나는 자비를 받았습니다. 14  우리 주의 과분한 친절이 나에게 넘치도록 풍성했으며, 믿음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도 그러했습니다. 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믿을 만하고 온전히 받아들일 만합니다. 나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입니다.+ 16  그런데도 나는 자비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장 큰 죄인인 나에게 그분의 오래 참음을 온전히 나타내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그분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나를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17  영원하신 왕,+ 곧 부패하지* 않으시고+ 보이지 않으시며+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께+ 영원무궁토록 영예와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18  내 아들 디모데, 그대에 관한 예언들과 일치하게 나는 이 지시를 그대에게 맡깁니다. 그것은 그대가 이 예언들에 의해서 훌륭한 싸움을 계속하면서+ 19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한 양심을 저버려서 믿음의 파선을 겪었습니다. 20  그들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징계를 통해 가르침받게 했습니다.

각주

또는 “충성스러운 사랑이 없는 자”.
또는 “유익한”.
또는 “썩어 없어지지”.

연구 노트

디모데 전서: 이 편지의 원문에는 이러한 제목이 없었던 것 같다. 고대 사본들을 보면 이러한 제목이 나중에 붙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편지들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기원 4세기에 만들어진 잘 알려진 사본인 시나이 책자본에는 이 편지의 끝에 “디모데 전서”라는 제목이 들어 있다. 다른 초기 사본들에도 이와 비슷한 형태의 제목이 들어 있다.

예수: 히브리어 이름 여호수아(“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의 축약형인 예수아에 해당하는 이름.

그분에 의해 “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이 예수를 통해 확증되고 성취되고 실현되었다는 의미이다. 예수를 통해 즉 그분의 모든 가르침과 그분이 하신 일을 통해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이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흠 없이 충절을 지키심으로 여호와의 약속들에 대한 의심의 여지를 말끔히 지워 버리셨다.

그분을 통해 하느님께 “아멘”이라고 함으로: “아멘”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렇게 되소서” 또는 “확실히”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를 음역한 것이다. 계 3:14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아멘”이라고 하셨다. 그분이 지상에 계실 때 자신에 관한 모든 예언을 성취시키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아멘”이시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그분이 충실한 삶을 살다가 희생적인 죽음을 맞이하심으로 하느님의 모든 선언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보증이 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러한 보증이 되신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를 끝마칠 때 “아멘”이라고 하는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전 14:16 연구 노트 참조.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바울이 기록한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에는 “구원자”라는 표현이 여호와 하느님을 가리키는 데 여섯 번 사용되었다. (이 구절과 딤전 2:3; 4:10; 딛 1:3; 2:10; 3:4) 이것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표현이 하느님을 가리키는 데 두 번밖에 사용되지 않은 것과 대비가 된다. (눅 1:47; 유 25)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주 언급한다. (시 106:8, 10, 21; 사 43:3, 11; 45:15, 21; 렘 14:8) 여호와께서 예수를 통해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때문에, 예수도 “구원자”로 언급된다. (행 5:31; 딤후 1:10) 예수는 “구원의 수석 대표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히 2:10) 천사는 하느님의 아들을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를 의미하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부르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가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오.” (마 1:21연구 노트) 따라서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근원이 여호와이시라는 점을 강조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구원자로 언급한다. (딛 2:11-13; 3:4-6) “구원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칠십인역」에서 그 단어를 번역하는 데 사용된 그리스어는 하느님의 백성을 적들로부터 “구할 구원자들”로 일으켜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된다.—느 9:27; 삿 3:9, 15.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 바울은 여호와를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으로 여겼다. (롬 15:13) 여기서 그는 디모데에게 여호와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신뢰할 만한 희망을 주신 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예수께서는 여호와의 모든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시며 영원한 생명의 희망이 실현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신다.—고후 1:20연구 노트; 벧전 1:3, 4 참조.

디모데: 디모데는 성경에서 이 구절에 처음으로 언급된다. 디모데라는 그리스어 이름은 “하느님을 공경하는 자”를 의미한다. 디모데가 언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디모데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의 유대인 어머니 유니게가 유대인의 “거룩한 기록들” 즉 히브리어 성경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아마 할머니 로이스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딤후 1:5; 3:15) 유니게와 로이스는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중에 리스트라를 방문했을 때 그리스도인이 된 것 같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그리스인으로 언급되는데, 이것은 그리스인의 후손이거나 다른 민족에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중이던 기원 49년 말이나 50년 초에 디모데의 고향이었을 리스트라를 방문했다. 당시 디모데는 그리스도인 제자로서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행 16:2) 그때 디모데의 나이는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그 점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그로부터 약 10년 또는 15년 뒤에 바울은 딤전 4:12에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그대의 젊음을 얕보지 못하게 하십시오.” (디모데 전서는 기원 61년에서 64년 사이에 기록된 것 같다.) 따라서 디모데는 바울이 이 말을 기록할 당시에도 비교적 젊은 나이였던 것 같다.

과분한 친절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들 가운데 11통의 편지에서 이러한 인사말을 사용한다.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딛 1:4; 몬 3) 그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들에서도 매우 비슷한 인사말을 사용했지만 그 인사말에는 “자비”라는 특성이 함께 언급되어 있다. (딤전 1:2; 딤후 1:2) 학자들은 바울이 일반적으로 인사말로 사용되는 단어(“안부를 전합니다!”, 카이레인)가 아니라 그와 발음이 비슷한 다른 그리스어 단어(카리스)를 자주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들은 바울이 그렇게 함으로 회중들이 “과분한 친절”을 온전히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 15:23 연구 노트 참조) “평화”를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이 인사할 때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샬롬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막 5:34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과분한 친절과 평화”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대속을 통해 여호와 하느님과 누리게 된 관계를 강조한 것 같다. 바울은 관대한 친절과 평화의 근원으로 하느님 우리 아버지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분하여 언급한다.

진정한 아들: 바울은 이러한 애정이 담긴 말을 사용하여,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따뜻한 감정을 표현한다. 성경은 바울이 디모데와 그의 가족에게 좋은 소식을 처음으로 전했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하지만 디모데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바울의 여행 동료가 되었다. (행 16:1-4)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 편지를 쓸 당시 디모데를 자신의 믿음 안의 아들 즉 영적 아들로 여겼다. (딛 1:4 비교) 두 사람 간의 그런 특별한 관계는 1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이었다.—고전 4:17; 빌 2:20-22.

디모데: “하느님을 공경하는 자”라는 의미.—행 16:1 연구 노트 참조.

과분한 친절과 자비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롬 1:7 연구 노트 참조.

먼저 배교가 일어나고: 데살로니가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여호와의 날”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두 가지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고 상기시켜 준다. (1) 배교가 일어나고 (이 구절에 나오는 배교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2)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것이었다. (살후 2:1-3) 배교가 널리 퍼져 그리스도인 회중에 해를 끼칠 것이라는 바울의 말은 밀과 가라지에 대한 예수의 비유와 조화를 이룬다. (마 13:24-30, 36-43) 바울은 다른 구절들에서도 배교가 회중에 침투할 것이라는 예언적인 경고를 했다. 후에 사도 베드로도 그러한 경고를 했다.—행 20:29, 30; 딤전 4:1-3; 딤후 4:3, 4; 벧후 2:1-3.

다른 좋은 소식: “거짓 형제들”은 (갈 2:4)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이 배운 것과는 “다른” 가르침을 전파하고 있었다.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좋은 소식 가운데는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갈 1:7, 8) 그 소식은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시는 자유, 즉 유전받은 죄와 모세 율법에 속박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갈 3:13; 5:1, 13연구 노트) 그 좋은 소식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갈 1:8, 9, 11, 12; 고후 11:4. 갈 1:8 연구 노트 참조.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이 구절은 디모데 전서의 배경에 대해 중요한 점을 알려 준다. 디모데는 이 편지를 받을 당시 에베소 회중에서 감독자로 섬기고 있었다. 바울은 그 회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행 19:1, 9, 10; 20:31) 그는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면서 ‘일부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다른 교리를 가르치지 않게’ 하라고 권한다. 바울은 로마의 가택 연금에서 풀려난 때와 로마에서 마지막으로 수감된 때 사이의 어느 시점 즉 기원 61-64년경에 이 편지를 기록했다.—디모데 전서 소개 및 미디어 갤러리 “기원 61년경 이후에 바울이 한 여행” 참조.

다른 교리를 가르치거나: 바울은 디모데가 에베소 회중에서 상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한다. 디모데는 예수와 예수께서 임명하신 사람들의 영감받은 가르침과 다른 교리를 가르치지 않도록 일부 사람들에게 명령할 권한을 받았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명령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긴급히 수행해야 할 의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바울의 이러한 지시를 보면 그가 계속해서 배교와 맞서 싸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살후 2:3 연구 노트 참조) 몇 년 전인 기원 56년경에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압제적인 이리들”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책임 맡은 남자들 가운데서 이리 같은 사람들이 일어나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것을 말할 것”이라고 했다. (행 20:29, 30) 바울은 다른 영감받은 편지들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른 좋은 소식”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갈 1:6연구 노트; 고후 11:4) 그러한 거짓 가르침을 조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당시 에베소 회중에도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불경스러운 거짓 이야기들: 바울 시대에 사람들이 퍼뜨리던 “거짓 이야기들”(그리스어 미토스)은 “불경스러운” 즉 속된 것이었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표준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신성하고 건전한 진리와 상충되는 것이었다. (딤전 6:20; 딤후 1:13) 이 거짓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니라 지어낸 것이었으므로 무가치한 것이었다.—딤전 1:4 연구 노트 참조.

거짓 이야기: 딤후 4:4에서 바울은 “거짓 이야기”와 “진리”를 대조한다. 한 사전에서는 “거짓 이야기”로 번역된 그리스어 미토스를 “전설, 설화 … 꾸민 이야기, 신화”로 정의한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바울은 종교적 거짓말을 조장하는 꾸며 낸 전설이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소문을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딛 1:14; 벧후 1:16.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거짓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고, 다시 말해 정신을 빼앗기지 말라고 교훈한다. 그러한 이야기는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며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진리에 정신을 쏟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딤후 1:13.

족보: 바울은 개인의 가계 즉 가문의 혈통을 적은 기록물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을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것들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는 데 주의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가문을 자랑하거나 지식을 뽐내려고 그렇게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족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쓸모가 없는 일이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혈통을 연구할 이유가 없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두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갈 3:28)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다윗 가계에서 나온 그리스도의 혈통에 대해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마 1:1-17; 눅 3:23-38.

억측: 여기서 바울은 거짓 이야기와 족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위험한 한 가지 이유를 언급한다. (이 구절에 나오는 거짓 이야기족보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한 사전에서는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를 “쓸모없는 추측”으로 정의한다. 다른 참고 문헌에서는 이 표현이 “답을 알 수도 없고 답할 가치도 없는 의문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바울은 그러한 추측을 “믿음과 관련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과 대조한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확고한 성경적 근거에 기초한 건전한 생각과 추리를 언급한 것이 아니다. (행 19:8; 각주; 고전 1:10)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연합시키기보다는 분열시킬 가능성이 높은 헛된 질문과 의심스러운 대답에 대해 경고한 것이다.

마침: 일반적으로 “끝”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텔로스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단어는 시작과 대비되는 끝, 마침을 가리킬 수 있다. (마 24:14; 막 3:26; 계 21:6) 여기에서 이 단어가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모세 율법이 온전히 끝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 1:17; 롬 6:14; 갈 5:18; 골 2:14, 16, 17) 하지만 텔로스는 목표나 목적이라는 의미로서의 끝 즉 “마침”을 가리킬 수도 있다. (동일한 그리스어가 “목적”으로 번역된 딤전 1:5 비교) 바울이 모세 율법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보호자”로 언급했으므로, 그리스도는 율법이 지향하는 목적 또는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갈 3:24) 따라서 이 구절에서 텔로스는 두 가지 의미를 다 담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이 정결한: 내면이 깨끗한 즉 도덕적•영적으로 깨끗한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에는 애정, 열망, 동기가 깨끗한 것도 포함된다.

양심: 그리스어 시네이데시스(함께)과 에이데시스(지식)가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공동 지식”, 즉 “자신과 함께 있는 지식”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은 하느님의 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양심, 즉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훈련받고 하느님의 뜻에 민감한 양심만이 사물을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양심이 올바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알려 준다. 약한 양심도 있고 (고전 8:12) 낙인이 찍힌 양심도 있으며 (딤전 4:2) 더럽혀진 양심도 있다. (딛 1:15) 바울은 자신의 양심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이렇게 표현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함께 증언합니다.” (롬 9:1) 바울의 목표는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유지하는” 것이었다.—행 24:16.

위선자들: 그리스어 히포크리테스는 원래 그리스(또한 훗날 로마)의 배우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시 배우들은 목소리가 더 크게 울리게 해 주는 커다란 가면을 썼다. 이 단어는 후에 비유적인 의미를 갖게 되어, 속임수를 쓰거나 가식적인 행동을 하여 본래의 의도나 성격을 숨기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신다.—마 6:5, 16.

지시: 또는 “명령”.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앞서 디모데에게 했던 말 즉 회중 내에서 “일부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다른 교리를 가르치거나 거짓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하라는 지시를 언급한 것이다. (딤전 1:3, 4) 한 사전에 따르면 여기서 “지시”에 해당하는 단어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울은 그 단어와 그와 어근이 같은 표현들을 이 편지에서 여러 번 사용한다.—딤전 1:18; 4:11; 5:7; 6:13, 17.

목적: 또는 “목표”.—롬 10:4 연구 노트 참조.

깨끗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 이 구절에서 바울은 비이기적인 그리스도인 사랑을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 “위선이 없는 믿음”과 연관 짓는다. 그리스도인이 마음 즉 속사람이 깨끗하다는 것은 도덕적, 영적으로 깨끗한 것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은 동기가 순수하며 여호와께 온전히 정성을 바친다. (마 5:8연구 노트) 그러한 깨끗한 마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도록 그를 움직인다.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사랑: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양심 즉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판단하는 능력을 주셨다. 불완전한 인간은 여호와의 표준에 따라 문제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사용해 자신의 양심을 훈련해야 한다. 선한 양심 즉 하느님의 뜻에 따라 훈련받은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회개하고 악한 일에서 돌아섰으며 현재 옳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벧전 3:16, 21. 롬 2:15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바울이 한 말은 선한 양심이 비이기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위선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 바울은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그로 인한 해로운 결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행 26:4, 5. 마 23:13 비교) 그는 그처럼 진실하지 않고 가식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디모데에게 권고한다. (딤전 4:1, 2) 위선이나 위선자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단어들은 원래 연극 중에 여러 등장인물의 역할을 하기 위해 얼굴에 가면을 쓴 배우를 가리켰다. (마 6:2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위선이 없는”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연기하지 않는”; “배우처럼 가장하지 않는”으로 정의된다. 바울은 진실하고 참된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이 비이기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들은 법을 가르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바울이 언급한 사람들은 회중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될 때 얻게 되는 것으로 보이는 명성과 권위를 이기적으로 갈망했던 것 같다. 그런 야심에 찬 사람들은 하느님의 양 떼를 돌보고 가르칠 자격을 갖춘 것도 아니었고 그런 역할을 하도록 임명된 것도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과는 달리, 사랑에서 우러나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함으로 그들을 섬기려고 하고 성경적 자격 조건을 갖춘 그리스도인 남자들은 “훌륭한 일을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딤전 3:1.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올바로 적용한다면 좋은 것입니다: 바울 시대에 일부 사람들은 모세 율법 규정들이 구원의 필수 조건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규정들을 밀접히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이 율법을 잘못 적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세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대속이 구원을 위한 수단이라고 믿는다. (갈 2:15, 16) 하지만 모세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법에 담긴 원칙을 “올바로”(직역하면 “적법하게”) 적용한다면 그들에게 유익을 준다. 율법은 그리스도 예수와 관련하여 “오게 될 좋은 것들의 그림자”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연구함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히 10:1) 또한 율법은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이 필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갈 3:19) 무엇보다도 율법은 여호와의 생각을 밝혀 준다.—출 22:21; 레 19:15, 18; 롬 7:12.

그리스도의 법: 이 법에는 예수의 모든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기록한 내용이 포함된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처럼, 이 법은 모세 율법 계약을 대치하는 것이었다. (렘 31:31-34; 히 8:6-13)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법과 원칙을 독자적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위대한 입법자이신 여호와로부터 받으셨다. (요 14:10)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그리스도와 관련된 법’이라는 표현이 고전 9:21에 사용되었다. 이 법은 “자유에 속한 완전한 법”, (약 1:25) “자유민의 법”, (약 2:12) “믿음의 법”(롬 3:27)이라고도 불린다.

율법은 의로운 사람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하느님의 표준을 받아들였다는 의미에서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영의 영향력에 기꺼이 순응했다. (갈 5:16-23) 따라서 그들에게는 모세 율법에 나오는 것과 같은 세세하고 많은 법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에 기초한 더 우월한 법인 “그리스도의 법”을 따랐다.—갈 6:2연구 노트.

성적 부도덕을 저지르는 자들: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명사 포르노스는 명사 포르네이아(성적 부도덕, 고전 5:1)와 동사 포르뉴오(성적 부도덕을 저지르다, 고전 6:18)와 어근이 같다. (용어 설명 “성적 부도덕” 참조) 고대부터 고린도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아프로디테 여신을 숭배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프로디테 숭배는 관능적인 생활 방식과 부도덕을 조장했다. (고전 7:2 연구 노트 비교) 바울은 고린도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이전에 부도덕한 생활을 했지만 행실을 변화시켜 이제는 좋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동료가 되었다고 알려 준다.—고전 6:11.

성적 부도덕: 성경에서 그리스어 포르네이아는 하느님의 표준에 위배되는 모든 성행위를 두루 일컫는 용어이다. 한 사전에서는 포르네이아를 “매춘 행위, 음란 행위, 음행”으로 정의하면서 이 단어가 “온갖 불법적인 성교”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고 설명한다. 그러한 불법적인 행위 가운데는 매춘 행위, 간음, 미혼끼리의 성관계만이 아니라 동성애와 수간도 포함되는데 성경에서는 이러한 모든 행위를 정죄한다. (레 18:6, 22, 23; 20:15, 16; 고전 6:9. 용어 설명 참조) 예수께서는 성적 부도덕을 살인, 도둑질, 모독과 함께 언급하심으로 그것이 악한 것임을 보여 주셨다.—마 15:19, 20; 막 7:21-23.

동성애에 자기를 내주는 남자나 동성애를 하는 남자: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이 부분에 서로 다른 두 단어가 사용되었다. 첫 번째 단어(그리스어 말라코스)는 기본적으로 “부드러운”(눅 7:25 비교)을 의미하며, 이 문맥에서는 동성애 관계에서 수동적인 역할, 여자와 같은 역할을 하는 남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따라서 동성애에 자기를 내주는 남자로 번역되었다. 두 번째 단어(그리스어 아르세노코이테스)는 문자적으로 “남자와 함께 눕는 남자”를 의미하며 딤전 1:10에도 나온다. 이 단어는 동성애 관계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남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따라서 동성애를 하는 남자로 번역되었으며,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남자”로 번역될 수도 있다. 바울은 수동적인 역할을 의미하는 단어와 능동적인 역할을 의미하는 단어를 구체적으로 사용함으로, 하느님께서 모든 동성애 행위를 승인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성적 부도덕을 저지르는 자: 고전 5:9; 갈 5:19 연구 노트 참조.

동성애를 하는 남자: 또는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남자”. 직역하면 “남자와 함께 눕는 남자”.—고전 6:9 연구 노트 참조.

주 예수의 말씀: 여기서 사도 바울이 인용한 예수의 말씀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취지의 말씀이 복음서와 영감받은 성경의 다른 부분들에 나온다. (시 41:1; 잠 11:25; 19:17; 마 10:8; 눅 6:38) 바울은 예수께서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은 사람에게서 그 말씀을 전해 들었을 수 있다. 또는 부활되신 예수에게서 직접 듣거나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 들었을 수 있다.—행 22:6-15; 고전 15:6, 8.

행복합니다: 그리스어 마카리오스.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처럼 단지 마음이 유쾌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 표현이 사람에게 사용될 경우에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그분의 은혜를 누리는 상태를 가리킨다. 또한 이 표현은 하느님과 하늘에서 영광 가운데 계신 예수를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딤전 1:11; 6:15.

행복합니다: 그리스어 마카리오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50회 나온다. 바울은 여기서 “행위와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사람의 행복”을 묘사한다. (롬 4:6) 이 그리스어는 하느님과 (딤전 1:11) 하늘에서 영광 가운데 계신 예수를 (딤전 6:15)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또한 이 단어는 예수께서 산상 수훈 가운데서 하신 행복에 관한 유명한 말씀에도 사용되었다. (마 5:3-11; 눅 6:20-22) 롬 4:7, 8에 나오는 “행복하다”라는 표현은 시 32:1, 2에서 인용한 것이다. ‘~는 행복하다’와 같은 표현은 히브리어 성경에 자주 나온다. (신 33:29; 왕상 10:8; 욥 5:17; 시 1:1; 2:12; 33:12; 94:12; 128:1; 144:15; 단 12:12) “행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표현은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처럼 단지 마음이 유쾌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려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기르고 그분을 충실히 섬기고 그분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에 관한 영광스러운 좋은 소식: 좋은 소식에 담긴 내용을 생각해 볼 때 그 소식은 참으로 “영광스럽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식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하느님의 신성한 비밀의 놀라운 전개, (골 1:27) 왕국의 공동 통치자들의 역할, (살전 2:12; 계 1:6) 하느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약속하신 놀라운 미래에 대해 알려 준다. (계 21:3, 4) 이 그리스어 표현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좋은 소식”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자신에 관한 영광스러운 지식: 성경에서 “알다”에 해당하는 원어 동사들과 “지식”에 해당하는 명사들은 단순히 사실을 알거나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 단어들은 누군가를 개인적으로 알고 그의 지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순종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을 수 있다. (요 17:3 연구 노트 참조) 고후 4:6에서는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종들에게 비추시는 영적인 과 관련짓는다. 하느님에 관한 지식이 “영광스럽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지식이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성품과 특성들을 밝혀 주기 때문이다. “자신에 관한 영광스러운 지식”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자신의 영광에 관한 지식”으로 옮길 수도 있는데, 이 표현은 그 지식이 하느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합 2:14에도 나오는데, 그 구절에서는 “땅이 여호와의 영광에 관한 지식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 알려 준다.

행복하신 하느님: 여기서 바울은 행복이 여호와의 성품 가운데 두드러진 특성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존재하시며 늘 행복하신 분인데, 혼자 계실 때도 그러하셨다. (말 3:6) 그분은 맏아들을 창조하시고 그와 함께하시면서 더 큰 행복을 느끼셨다. (잠 8:30) 사탄의 반역과 중상으로 인해 슬픔과 고통이 초래되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행복하신 분이며 충성스러운 자들이 그분을 충실히 섬기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신다. (잠 27:11)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만났을 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했다. (행 20:35연구 노트) 그 말씀은 여호와께서 “행복하신 하느님”이신 한 가지 이유를 알려 준다. 그분이 주는 일을 하는 면에서 우주에서 으뜸가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시 145:16; 사 42:5) 여호와를 본받는 그분의 숭배자들도 행복할 수 있다. (엡 5:1) 시 1:1, 2에서는 여호와의 법을 매일 읽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알려 준다. 「칠십인역」의 이 구절에서는 바울이 딤전 1:11에서 사용한 것과 동일한 그리스어가 사용되었다. 산상 수훈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고난을 겪고 박해를 받을 때에도 행복할 수 있다는 점을 거듭 알려 주셨다.—마 5:3-11. 마 5:3; 롬 4:7 연구 노트 참조.

영광스러운 좋은 소식: 좋은 소식은 그 내용이 얼마나 놀랍고 인상적인지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영광스럽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좋은 소식은 그 놀라운 소식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성품과 특성을 밝혀 준다. 이 좋은 소식을 사용하여 “행복하신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희망을 주셨다. 따라서 바울이 그러한 좋은 소식을 맡게 된 것을 영예롭게 생각한 것도 당연하다.—고후 4:4, 6 연구 노트 참조.

나의 봉사의 직무: 예수께서는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의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라는 사명을 주셨다. (마 28:19, 20) 바울은 그 일을 “화해의 직무”라고 불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하느님과 멀어진 세상에게 “하느님과 화해하라”고 “부탁한다.” (고후 5:18-20) 바울은 이방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했지만, 한편으로는 유대인들 중 얼마의 사람들이라도 마음이 움직여 구원을 위해 필요한 단계들을 밟기를 간절히 바랐다. (롬 11:14) 그리스어 디아코니아는 기본적으로 “봉사”를 의미하며,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동사는 성경에서 때때로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것과 같은 개인적인 성격의 봉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눅 4:39; 17:8; 요 2:5) 이 구절에서는 디아코니아가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를 가리킨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영적인 필요를 위해 섬기는 더 숭고한 봉사이다.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진 “봉사의 직무”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에게 나타내신 자비와 사랑과 신뢰의 증거로 여겼다. 이전에 그는 “박해하는 자, 불손한 자”였으며 스데반이 살해된 것을 좋게 여기기까지 했다. (딤전 1:13; 행 6:8; 7:58; 8:1, 3; 9:1, 2) 바울은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다른 사람들의 영적 필요를 위해 기꺼이 봉사했다. 예를 들어 그는 좋은 소식을 열정적으로 전파했다.—롬 11:13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 바울이 과거에 예수와 제자들을 심하게 반대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행 9:3-5) 그가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을 강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용어 설명 “과분한 친절” 참조) 바울은 자신이 봉사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 덕분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고전 15:10; 딤전 1:13, 14) 그는 에베소의 장로들을 만났을 때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을 두 번 언급했다. (행 20:24, 32) 또한 바울은 “과분한 친절”을 다른 어떤 성경 필자보다도 많이 언급했다. 14통의 편지에서 약 90회나 언급한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히브리서를 제외한 모든 편지의 서두 인사말에서 하느님이나 예수의 과분한 친절을 언급했으며, 각 편지의 맺음말에서도 그 표현을 사용했다.

나는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여호와를 섬기면서 무엇을 이루었든 그에 대한 영예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점을 겸손하게 인정한다. 그는 이 구절에서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을 세 번이나 언급함으로 그 점을 강조한다. (용어 설명 “과분한 친절” 참조) 이 구절에 나오는 나는 그들 중 그 누구보다도 즉 다른 사도들보다도 많이 수고했다는 바울의 말은 그가 이처럼 과분한 친절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과 연관 지어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자신을 선택하여 사도가 되게 하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딤전 1:12-16) 그는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육지와 바다로 엄청난 거리를 여행하면서 좋은 소식을 전하고 많은 회중을 세웠다. 그는 봉사를 수행하면서 훗날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일부가 된 14통의 영감받은 편지를 기록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바울을 축복하셔서 그가 방언을 하고 환상을 보게 해 주셨으며,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과 같은 다른 기적들도 행할 수 있게 해 주셨다. (행 20:7-10; 고전 14:18; 고후 12:1-5) 바울은 자신이 수행한 모든 봉사와 이러한 축복들을 여호와께서 주신 과분한 친절로 여겼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신을 넘겨주신: 여기서 바울은 “나”라는 대명사를 사용함으로 예수에게 믿음을 나타내기로 선택하는 사람 각자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이 주는 유익을 강조한다. (요 3:16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큰 사랑을 나타내셨다는 점을 이해했으며 그 사랑을 자신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사랑에 마음이 감동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따뜻하고 관대한 태도를 나타내게 되었다. (고후 5:14 연구 노트 참조. 고후 6:11-13; 12:15 비교)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는데도 예수께서 자신을 이끌어 제자가 되게 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했다. 바울은 예수께서 의로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죄에 짓눌린 사람들을 위해서도 자신의 생명을 내주심으로 사랑을 나타내셨다는 점을 이해했다. (마 9:12, 13 비교) 바울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대속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우리 주의 과분한 친절: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함으로 죄를 지었다는 것을 늘 잊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을 받았다는 긍정적인 점에 초점을 맞춘다. (행 13:43; 고전 15:10; 갈 2:20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여호와의 친절이 자신에게 넘치도록 풍성했다고 말함으로 그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그가 사용한 그리스어 동사는 액체가 용기에 가득 차서 넘치는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한 참고 문헌에서는 이 단어를 “넘치고 또 넘칠 정도로 풍성하다”로 정의한다.

나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죄인들에 대해 한 말을 보면 그가 얼마나 겸손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강한 희망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함으로 지은 죄를 축소하려고 하지 않음으로 겸손을 나타냈다. 또한 그러한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희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확신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마 9:13 비교.

나를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자비를 통해 자신이 얻은 유익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여기서는 자신의 예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유익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서 바울에게 베푸신 자비에 대해 알게 되면 죄를 용서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가장 큰 죄인”이었던 바울은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다는 살아 있는 증거가 되었다.

영원한 목적: 이 문맥에서 “목적”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달성할 수 있는 특정한 목표를 가리킨다. 이 표현은 에덴에서 반역이 있었는데도 인류와 땅에 대해 자신이 원래 뜻한 바를 이루시려는 여호와의 의지와 관련이 있다. (창 1:28) 반역이 있은 직후에 여호와께서는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와 관련해 이 목적을 세우셨다. 그분은 반역자들이 초래한 해를 바로잡을 “자손”이 나타날 것을 예언하셨다. (창 3:15; 히 2:14-17; 요1 3:8) 이 목적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영원한 목적”(직역하면 “시대들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1) “영원하신 왕[직역하면 “시대들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딤전 1:17) 그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데 여러 시대가 걸리도록 허용하셨기 때문이다. (2) 그 목적이 이루어진 결과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8:28 연구 노트 참조.

아멘: 또는 “그렇게 되소서”. 그리스어 아멘은 히브리어 아멘을 음역한 단어이다. 히브리어 아멘은 “충실하다, 신뢰할 만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어근 아만에서 나온 것이다. (용어 설명 참조) 사람들은 맹세나 기도 또는 다른 사람의 말에 동의할 때 “아멘”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필자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표현을 하면서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아멘”을 자주 사용했다. 바울도 여기서 “아멘”을 그렇게 사용한 것이다. (롬 16:27; 엡 3:21; 벧전 4:11) 또는 상대방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아멘”을 사용하기도 했다. (롬 15:33; 히 13:20, 21) “아멘”은 앞서 나온 표현에 필자가 진심으로 동의한다는 것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계 1:7; 22:20.

영원하신 왕: 직역하면 “시대들의 왕”. 이 칭호는 여호와 하느님에게만 사용된다. 또한 그분은 “옛날부터 계신 분”이라고도 불리신다. (단 7:9, 13, 22) 그분은 우주에 다른 누군가나 다른 어떤 것이 있기 전부터 영원히 존재해 오셨으며 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하실 것이다. (시 90:2) 따라서 여호와만이 “영원한 목적”을 세우고 이루실 수 있다. (엡 3:11연구 노트) 또한 그분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 (요 17:3; 딛 1:2) “영원하신 왕”이라는 칭호는 계 15:3에서 “하느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 가운데도 나온다. 출 15:18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으로 통치하실 것입니다.”—시 10:16; 29:10; 146:10.

아멘: 롬 1:25 연구 노트 참조.

아들이여: 예수께서는 애정을 나타내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하셨다.—딤후 1:2; 딛 1:4; 몬 10.

진정한 아들: 바울은 이러한 애정이 담긴 말을 사용하여,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따뜻한 감정을 표현한다. 성경은 바울이 디모데와 그의 가족에게 좋은 소식을 처음으로 전했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하지만 디모데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바울의 여행 동료가 되었다. (행 16:1-4)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 편지를 쓸 당시 디모데를 자신의 믿음 안의 아들 즉 영적 아들로 여겼다. (딛 1:4 비교) 두 사람 간의 그런 특별한 관계는 1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이었다.—고전 4:17; 빌 2:20-22.

예언에 따라: 여기서 “예언”은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중에 리스트라를 방문했을 때 있었던 디모데에 관한 예언들 중 하나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 예언들은 디모데가 앞으로 회중에서 할 역할에 대한 것이었던 것 같다. (딤전 1:18 연구 노트 참조) 따라서 여호와의 영이 디모데가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인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점을 인식한 리스트라의 장로들은 디모데가 특별한 봉사를 수행하고 바울과 함께 가게 하는 데 기꺼이 동의했다.—행 16:1-5.

지시: 또는 “명령”.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앞서 디모데에게 했던 말 즉 회중 내에서 “일부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다른 교리를 가르치거나 거짓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하라는 지시를 언급한 것이다. (딤전 1:3, 4) 한 사전에 따르면 여기서 “지시”에 해당하는 단어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울은 그 단어와 그와 어근이 같은 표현들을 이 편지에서 여러 번 사용한다.—딤전 1:18; 4:11; 5:7; 6:13, 17.

싸우지는 않습니다: 직역하면 “군 복무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고후 10:3-6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회중을 파괴적이고 거짓된 추리와 가르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신과 동료들이 벌여야 하는 영적 싸움을 묘사하면서 군사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고전 9:7; 엡 6:11-18; 딤후 2:4. 고후 10:4, 5 연구 노트 참조.

내 아들: 바울은 애정을 나타내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했다.—딤후 1:2; 딛 1:4; 몬 10. 마 9:2; 딤전 1:2 연구 노트 참조.

그대에 관한 예언들과 일치하게: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에 관한 예언들이 있었음을 언급한다. 그 예언들은 디모데가 회중에서 할 역할에 대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 예언들은 하느님의 영의 작용에 의한 것이었다. (딤전 4:14 연구 노트 참조) 그 예언들에는 디모데를 임명하는 것을 승인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던 것 같다. 바울이 디모데가 이 예언들에 의해서 거짓 선생들에 맞서 영적 싸움을 계속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지시: 또는 “명령”.—딤전 1:5 연구 노트 참조.

훌륭한 싸움을 계속하면서: 고후 10:3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바울은 해로운 영향으로부터 회중을 보호하려고 계속 애쓰는 것을 싸움에 비한다. 이 싸움에서 디모데의 역할은 회중에 침투해서 거짓 교리로 회중을 오염시키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회중을 보호하는 것이었다.—딤전 1:3, 4. 고후 10:3 연구 노트 참조.

세 번 파선을 당했고: 성경에는 바울이 겪었던 한 차례의 파선에 관한 생생한 기록이 들어 있는데, 그 일은 바울이 이 편지를 기록한 뒤에 있었다. (행 27:27-44) 바울은 자주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행 13:4, 13; 14:25, 26; 16:11; 17:14, 15; 18:18-22, 27) 따라서 그는 파선을 겪을 만한 상황이 많이 있었다. 밤낮 하루를 드넓은 바다에서(직역하면 “깊음에서”) 보냈다는 바울의 말은 그가 어느 때인가 한 차례 파선을 당했을 때 겪은 일을 묘사한 것 같다. 바울은 난파된 배의 파편을 붙잡고 밤낮 하루를 거친 바다에서 이리저리 밀려다니다가 구조되었거나 해안가로 밀려갔을 수 있다. 그처럼 절박한 상황들을 겪으면서도 그는 배를 타고 여행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믿음의 파선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믿음과 선한 양심을 저버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 주기 위해 생생한 비유를 사용한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잃는 것을 배가 파선하는 것에 비한 것이다. 바울은 이전에 쓴 편지에서 자신이 세 번 문자적인 파선을 당했다고 언급했다. (고후 11:25연구 노트) 바울은 디모데 전서를 쓸 무렵에는 적어도 한 번 더 파선을 경험했다. (행 27:27-44) 따라서 그는 파선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바울이 고의적으로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이 결코 회복되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한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파선을 당한다고 해서 반드시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잃는 안타까운 일을 겪은 사람들도 영적 도움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회복될 수 있다.—갈 6:1; 약 5:14, 15, 19, 20.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말하면서: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은 에베소의 일부 거짓 선생들은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비유적인 의미로 부활되었다고 가르친 것 같다. 몇몇 거짓 선생들은 심지어 바울의 말을 왜곡해서 자신들의 잘못된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했을 수 있다. 바울은 죄인이 침례를 받을 때 이전의 생활 방식에 대해 죽고 비유적인 의미로 살아나게 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그러한 상징적인 부활은 성경에서 알려 주는 문자적인 부활의 희망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미래에 있을 문자적인 부활의 희망을 부인하는 것이었으며 배교자들이었다.—롬 6:2-4, 11; 엡 5:14. 엡 2:1 연구 노트 참조.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약 10년 전에 바울은 이미 부활의 희망을 약화시키는 거짓 가르침에 맞서 싸웠다. (고전 15:2연구 노트, 12. 행 17:32 비교) 미래에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완전한 생명으로 부활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부정한 사람들은 영감받은 성경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것이었다. (단 12:13; 눅 23:43; 고전 15:16-20, 42-44) 그리스도인이 부활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 인해 믿음이 무너진다면, 그 약속된 미래의 상을 받을 희망을 잃게 될 것이었다.—요 5:28, 29.

구리 세공인인 알렉산더: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과 동료들이 전한 소식을 “심하게” 반대한 알렉산더라는 사람에 대해 경고한다. (딤후 4:15) 바울은 그를 “구리 세공인”으로 언급하는데,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1세기에 금속으로 물건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 가리킬 수 있는 단어였다. 여기 나오는 알렉산더는 딤전 1:20에 언급된, 회중에서 추방된 것으로 보이는 알렉산더와 동일한 인물일 수 있다.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이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를 입혔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바울이 체포되는 데 관여했을 수 있으며 심지어 바울에 대해 거짓 증언을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이것은 그 사람을 회중에서 추방하라는 즉 제명하라는 명령이었다. (고전 5:13; 딤전 1:20) 그러면 그 사람은 사탄이 신이자 통치자로 군림하는 세상의 일부가 될 것이었다. (요1 5:19) 그 사람을 추방하면 회중에서 육이 멸망될 다시 말해 부패시키는 요소가 사라질 것이었다. 그 결과 회중의 긍정적인 즉 지배적인 태도가 보존될 것이었다.—딤후 4:22.

모독하는 것: 여기서 “모독하다”로 번역된 원어 표현은 하느님에 대해 혹은 신성한 것에 대해 모욕적인 말이나 명예를 훼손시키는 말 또는 욕설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거룩한 즉 성령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므로, 영의 작용을 고의적으로 반대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마 12:24, 28에 나오는 것처럼,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영의 작용으로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도 그 능력이 사탄 마귀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모욕적인 말: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그리스어는 블라스페미아인데, 이 단어는 하느님에게 하는 불경스러운 말을 가리킬 경우 “모독” 또는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계 13:5, 6) 하지만 원래 이 말은 하느님에게 하는 불경스러운 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 하는 악한 말이나 중상하는 말을 가리킬 수도 있으며, 문맥을 보면 여기서 바울이 그런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엡 4:31 참조) 다른 번역판들에서는 이 구절에 “중상”이나 “비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한 참고 자료에서는 이 단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 단어는 다른 사람을 깎아내려서 평판이 안 좋아지게 하거나 나쁜 평판을 갖게 만들려고 하는 것을 가리킨다.”

믿음의 파선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믿음과 선한 양심을 저버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 주기 위해 생생한 비유를 사용한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잃는 것을 배가 파선하는 것에 비한 것이다. 바울은 이전에 쓴 편지에서 자신이 세 번 문자적인 파선을 당했다고 언급했다. (고후 11:25연구 노트) 바울은 디모데 전서를 쓸 무렵에는 적어도 한 번 더 파선을 경험했다. (행 27:27-44) 따라서 그는 파선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바울이 고의적으로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이 결코 회복되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한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파선을 당한다고 해서 반드시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잃는 안타까운 일을 겪은 사람들도 영적 도움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회복될 수 있다.—갈 6:1; 약 5:14, 15, 19, 20.

그들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습니다: “믿음의 파선”을 겪은 이 사람들은 (딤전 1:19) 거짓 교리를 퍼뜨리고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딤후 2:16-18에 나오는 바울의 말에 따르면, 후메내오는 빌레도와 함께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일부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딤후 2:18 연구 노트 참조) 여기에 나오는 알렉산더는 딤후 4:14, 15에 언급된 구리 세공인과 동일한 인물일 수 있다. 그는 바울에게 “많은 해를 입혔”으며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전파하는 소식을 “심하게” 반대했다. (딤후 4:14 연구 노트 참조) “그들 가운데”라는 표현을 볼 때 믿음에 고착하지 않고 그리스도인 회중의 일부 형제 자매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던 사람들이 이미 많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나는 그들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이 표현은 그들을 회중에서 추방하는 즉 제명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한 조처가 필요했던 이유는 바울이 언급한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고의적으로 계속 죄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고전 5:5 연구 노트 참조.

신성을 모독하지: 또는 “모욕적으로 말하지”.—마 12:31; 골 3:8 연구 노트 참조.

징계를 통해 가르침받게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죄를 저지르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탄에게 넘겨주는” 즉 회중에서 추방하는 한 가지 목적이 무엇인지 밝힌다. (이 구절에 나오는 나는 그들을 사탄에게 넘겨주어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이 구절에 언급된 두 사람은 믿음의 파선을 겪었으며 “신성을 모독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도록 제명되어야 했다. (딤전 1:19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그들이 처벌을 받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훈을 얻게 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 참고 문헌에서 알려 주듯이, “그들이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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