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 후서 1:1-18
각주
연구 노트
디모데 후서: 이 편지의 원문에는 이러한 제목이 없었던 것 같다. 고대 사본들을 보면 이러한 제목이 나중에 붙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편지들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기원 4세기에 만들어진 잘 알려진 사본인 시나이 책자본에는 이 편지의 끝에 “디모데에게”라는 제목이 들어 있다. 다른 초기 사본들에는 “디모데 후서”라는 제목이 들어 있다.
사도: 그리스어 명사 아포스톨로스는 “보내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포스텔로에서 나온 단어이다. (마 10:5; 눅 11:49; 14:32) 요 13:16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에 이 단어의 기본 의미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그 구절에서는 이 단어가 “보냄을 받은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다. 바울은 부활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선택에 의해 이방 사람들 즉 비유대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행 9:1-22; 22:6-21; 26:12-23) 바울은 자신이 부활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고전 9:1, 2) 기적을 행했다는 (고후 12:12) 점을 들어 자신의 사도직을 확증했다. 또한 침례받은 신자들에게 성령이 내려질 때 그가 통로 역할을 했다는 점 역시 그가 진정한 사도라는 증거였다. (행 19:5, 6)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점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자신을 “열두 제자” 가운데 포함시킨 적은 한 번도 없다.—고전 15:5, 8-10; 롬 11:13; 갈 2:6-9; 딤후 1:1, 11.
사도: 롬 1:1 연구 노트 참조.
내 아들: 바울은 애정을 나타내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했다.—딤후 1:2; 딛 1:4; 몬 10. 마 9:2; 딤전 1:2 연구 노트 참조.
진정한 아들: 바울은 이러한 애정이 담긴 말을 사용하여,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따뜻한 감정을 표현한다. 성경은 바울이 디모데와 그의 가족에게 좋은 소식을 처음으로 전했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하지만 디모데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바울의 여행 동료가 되었다. (행 16:1-4)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 편지를 쓸 당시 디모데를 자신의 믿음 안의 아들 즉 영적 아들로 여겼다. (딛 1:4 비교) 두 사람 간의 그런 특별한 관계는 1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이었다.—고전 4:17; 빌 2:20-22.
과분한 친절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들 가운데 11통의 편지에서 이러한 인사말을 사용한다.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딛 1:4; 몬 3) 그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들에서도 매우 비슷한 인사말을 사용했지만 그 인사말에는 “자비”라는 특성이 함께 언급되어 있다. (딤전 1:2; 딤후 1:2) 학자들은 바울이 일반적으로 인사말로 사용되는 단어(“안부를 전합니다!”, 카이레인)가 아니라 그와 발음이 비슷한 다른 그리스어 단어(카리스)를 자주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들은 바울이 그렇게 함으로 회중들이 “과분한 친절”을 온전히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 15:23 연구 노트 참조) “평화”를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이 인사할 때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샬롬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막 5:34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과분한 친절과 평화”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대속을 통해 여호와 하느님과 누리게 된 관계를 강조한 것 같다. 바울은 관대한 친절과 평화의 근원으로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분하여 언급한다.
사랑하는 아들: 바울과 디모데 사이에는 매우 친밀하고 따뜻한 유대가 있었다. 사실 바울은 영적인 의미에서 디모데의 아버지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고전 4:17; 빌 2:22) 디모데 전서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진정한 아들”, “내 아들”이라고 불렀다. (딤전 1:2, 18) 바울이 디모데 후서를 쓴 때는 두 사람이 함께 봉사한 지 적어도 1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았던 바울은 이 편지가 자신이 디모데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딤후 4:6-8)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름으로 자신의 애정을 따뜻하게 표현한다.—딤전 1:2, 18 연구 노트 참조.
과분한 친절과 자비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롬 1:7 연구 노트 참조.
신성한 봉사를 드리는: 또는 “섬기는(숭배하는)”. 그리스어 동사 라트류오는 기본적으로 “섬기다” 또는 “봉사하다”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나 그분의 숭배와 관련이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마 4:10; 눅 2:37; 4:8; 행 7:7; 빌 3:3; 딤후 1:3; 히 9:14; 12:28; 계 7:15; 22:3) 여기서 바울은 신성한 봉사를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좋은 소식과 연관 짓는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이 이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것은 신성한 봉사 즉 여호와께 숭배를 드리는 행동이다.
내가 … 신성한 봉사를 드리고 있는 하느님께: 또는 “내가 … 섬기고(숭배하고) 있는 하느님께”. 여기서 바울은 충실한 유대인 조상들 즉 히브리어 성경에 탁월하게 묘사된 사람들처럼 자신도 하느님을 숭배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신성한 봉사를 드리다”라는 표현은 유대 제도 내에서 하느님을 숭배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고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 하느님을 숭배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칠십인역」은 모세가 백성에게 여호와를 섬기라고 명령한 (신 6:13) 내용을 번역할 때 바울이 이 구절에서 사용한 것과 동일한 그리스어 동사를 사용한다. 마 4:10에서 예수께서는 신명기의 그 내용을 인용하여 마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에게만 신성한 봉사를 드려야 한다.” (마 4:10 연구 노트 참조. 또한 출 3:12; 신 10:12, 20; 수 22:5; LXX 참조) 바울은 로마서에서 신성한 봉사의 중요한 부면이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것임을 밝혔다.—롬 1:9 연구 노트 참조.
깨끗한 양심으로: 바울은 감옥에 갇혀 죄수로 쇠사슬에 매여 있지만, (딤후 1:16) 자신이 깨끗하고 비이기적인 동기로 충실하게 여호와 하느님을 섬겨 왔다는 확신을 표현한다. (딤후 1:12 연구 노트 참조) 그는 이전에 고린도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부당한 일을 하지 않았고, 아무도 타락시키지 않았으며, 아무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고후 7:2. 롬 2:15; 딤전 1:5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께 나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쓴 많은 편지의 서두에는 감사하는 표현이 나온다. (롬 1:8; 고전 1:4; 엡 1:15, 16; 빌 1:3-5; 골 1:3, 4; 살전 1:2, 3; 살후 1:3; 몬 4) 로마에 수감된 바울은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딤후 4:6-8) 그는 심한 반대를 받았으며 그의 친구들 중 일부는 그를 버렸다. (딤후 4:10-12, 14-17) 그런데도 그는 슬픔이 아니라 감사를 표현하는 말로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이 구절의 뒷부분에서 그는 자신이 감사하는 한 가지 이유를 밝힌다. 바로 친구인 디모데 때문인데 바울은 그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특히 디모데의 뛰어난 믿음에 대해 감사하며 그는 그 믿음을 “위선 없는 믿음”이라고 표현한다.—딤후 1:5.
그분에게만 신성한 봉사를 드려야 한다: 또는 “오직 그분만 섬겨야 한다”. 그리스어 동사 라트류오의 기본 의미는 “섬기다” 또는 “봉사하다”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하느님을 섬기거나 숭배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므로 “신성한 봉사를 드리다; 섬기다; 숭배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눅 1:75; 2:37; 4:8; 행 7:7; 롬 1:9; 빌 3:3; 딤후 1:3; 히 9:14; 12:28; 계 7:15; 22:3) 예수께서 인용하신 신 6:13에서 “섬기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아바드이다. 이 단어도 그리스어 라트류오와 마찬가지로 “섬기다”를 의미하지만 “숭배하다”로도 번역할 수 있다. (출 3:12; 각주; 삼하 15:8, 각주) 예수께서는 여호와께만 전적인 정성을 드리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계셨다.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파자와 사도와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임명을 수행했기 때문에 현재 고난을 겪고 있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딤후 1:11) 박해하는 사람들의 목표는 그가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들어 그를 잠잠해지게 하려는 것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수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고 형주를 인내하신” 예수처럼, 바울도 여호와의 뜻을 행하다가 박해를 받고 수감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히 12:2) 그는 디모데와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그처럼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바랐다.—딤후 1:8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마 16:24 연구 노트 참조.
양심: 그리스어 시네이데시스는 신(함께)과 에이데시스(지식)가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공동 지식”, 즉 “자신과 함께 있는 지식”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은 하느님의 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양심, 즉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훈련받고 하느님의 뜻에 민감한 양심만이 사물을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양심이 올바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알려 준다. 약한 양심도 있고 (고전 8:12) 낙인이 찍힌 양심도 있으며 (딤전 4:2) 더럽혀진 양심도 있다. (딛 1:15) 바울은 자신의 양심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이렇게 표현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함께 증언합니다.” (롬 9:1) 바울의 목표는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유지하는” 것이었다.—행 24:16.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사랑: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양심 즉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판단하는 능력을 주셨다. 불완전한 인간은 여호와의 표준에 따라 문제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사용해 자신의 양심을 훈련해야 한다. 선한 양심 즉 하느님의 뜻에 따라 훈련받은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회개하고 악한 일에서 돌아섰으며 현재 옳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벧전 3:16, 21. 롬 2:15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바울이 한 말은 선한 양심이 비이기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기억하며: 바울은 디모데나 자신이 눈물을 흘린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언급한다. (고후 2:4; 빌 3:18) 바울은 힘겨운 문제나 비참한 일을 겪은 동료를 디모데와 함께 도우면서 그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을 수 있다. 바울이 고난을 겪는 것 때문에 디모데가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다. (롬 12:15; 딤후 3:10, 11) 바울은 자신이 디모데와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 그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다. (행 20:37, 38 비교) 그러한 눈물은 디모데가 다른 사람의 감정에 잘 공감하는 동정심 많고 따뜻한 사람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위선 없는 믿음: 딤전 1:5 연구 노트 참조.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 로이스는 디모데의 외할머니였을 것이다. 디모데의 가족은 리스트라에 살았던 것 같다. (행 16:1-3)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맘메는 어린아이가 할머니를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었으며, 좀 더 격식을 갖추어야 할 때는 테테를 사용했다. 바울은 디모데와 할머니가 매우 가깝고 친밀했기 때문에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일 수 있다. 로이스는 유니게가 디모데에게 히브리어 성경의 내용을 가르칠 때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딤후 3:15 연구 노트 참조.
어머니 유니게: 유니게와 로이스는 바울이 리스트라에 처음 머물렀던 기원 47-48년경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을 것이다. (행 14:6) 여기서 바울은 두 사람 모두가 “위선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유니게는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을 하도록 디모데를 떠나보낼 때 그런 믿음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이전에 바울이 리스트라에 왔을 때 사람들이 그를 돌로 치고 죽은 줄로 생각하고 내버려 두었던 일을 알고 있었다. (행 14:19) 유니게와 로이스가 좋은 본을 보이고 디모데를 부지런히 가르친 것은 분명 디모데가 스스로 “위선 없는 믿음”을 기르고 영적으로 훌륭하게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행 16:2; 빌 2:19-22; 딤전 4:14) 그들이 나타낸 본이 더욱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인이었던 디모데의 아버지가 아내와 같은 믿음을 갖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행 16:1, 3 연구 노트 참조.
위선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 바울은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그로 인한 해로운 결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행 26:4, 5. 마 23:13 비교) 그는 그처럼 진실하지 않고 가식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디모데에게 권고한다. (딤전 4:1, 2) 위선이나 위선자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단어들은 원래 연극 중에 여러 등장인물의 역할을 하기 위해 얼굴에 가면을 쓴 배우를 가리켰다. (마 6:2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위선이 없는”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연기하지 않는”; “배우처럼 가장하지 않는”으로 정의된다. 바울은 진실하고 참된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이 비이기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유아기부터 거룩한 기록들을 알았습니다: 디모데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유니게와 아마도 할머니 로이스로부터 유대인의 “거룩한 기록들” 즉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에 대해 배웠다. (딤후 1:5; 3:14. 롬 1:2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유아기”로 번역된 그리스어 브레포스는 아주 어린 아이와 신생아,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까지 가리킬 수 있는 단어이다. (눅 1:41; 2:12; 행 7:19; 벧전 2:2. 눅 18:15 연구 노트 참조) 디모데가 어릴 때 받은 히브리어 성경에 관한 교육은 그가 믿음을 길러 나갈 수 있는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디모데는 청소년이었을 때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얻는 구원’에 대해 배웠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 후로 디모데는 계속 훌륭하게 발전했다.—행 16:1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빌 2:19-22 참조.
디모데: 디모데는 성경에서 이 구절에 처음으로 언급된다. 디모데라는 그리스어 이름은 “하느님을 공경하는 자”를 의미한다. 디모데가 언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디모데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의 유대인 어머니 유니게가 유대인의 “거룩한 기록들” 즉 히브리어 성경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아마 할머니 로이스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딤후 1:5; 3:15) 유니게와 로이스는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중에 리스트라를 방문했을 때 그리스도인이 된 것 같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그리스인으로 언급되는데, 이것은 그리스인의 후손이거나 비유대인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중이던 기원 49년 말이나 50년 초에 디모데의 고향이었을 리스트라를 방문했다. 당시 디모데는 그리스도인 제자로서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행 16:2) 그때 디모데의 나이는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그 점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그로부터 약 10년 또는 15년 뒤에 바울은 딤전 4:12에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그대의 젊음을 얕보지 못하게 하십시오.” (디모데 전서는 기원 61년에서 64년 사이에 기록된 것 같다.) 따라서 디모데는 바울이 이 말을 기록할 당시에도 비교적 젊은 나이였던 것 같다.
할례를 베풀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행 15:6-29) 디모데의 아버지가 믿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디모데는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다. 바울은 그들이 전파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될 유대인들 중 일부가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않은 것 때문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울은 전파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디모데에게 고통스러운 할례를 받으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함으로 바울과 디모데는 좋은 본을 보였다. 후에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내가 유대인을 얻으려고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되었다”고 한 말과 일치하게 행동한 것이다.—고전 9:20.
그들에게 손을 얹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사람이나 동물에게 손을 얹는 일이 언급되는데, 그러한 행동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창 48:14; 레 16:21; 24:14) 어떤 사람에게 손을 얹는 것은 대개 그 사람을 특별한 면으로 인정하거나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일하도록 지정한다는 의미였다. (민 8:10) 예를 들어 모세는 여호수아를 자신의 후임자로 인정한다는 뜻으로 그에게 손을 얹었다. 그 결과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이 충만”하게 되어 이스라엘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었다. (신 34:9) 이 구절(행 6:6)에서는 사도들이 형제들에게 손을 얹어 그들을 책임 맡은 위치에 임명했다고 알려 준다. 사도들이 기도한 후에 손을 얹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했다는 점을 보여 준다. 후에 장로들이 디모데가 특별한 봉사를 하도록 임명할 때도 그들은 그에게 손을 얹었다. (딤전 4:14) 나중에 디모데도 사람들에게 손을 얹어 그들을 임명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기 전에 그들의 자격을 주의 깊이 검토해야 했다.—딤전 5:22.
그대가 지닌 선물…을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바울은 여호와께서 성령을 통해 디모데에게 주신 선물을 언급한다. 이 선물은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디모데에게 주어진 특별한 역할 또는 책임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가 이 선물을 받은 것은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중에 리스트라를 방문한 때였을 것이다. 그때 디모데가 앞으로 받을 임명에 대한 “예언”이 있었다. 후에 디모데는 여행하는 감독자가 되었다. 또한 한동안 에베소에 머물면서 감독자로 일하라는 임명을 받기도 했다. (딤전 1:3) 바울은 선물을 받았어도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디모데에게 그가 받은 선물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고, 다시 말해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함으로 그 선물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일깨워 주었다. 그는 디모데가 활력을 쏟아 열정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함으로 그 선물을 계속 소중히 여기기를 바랐다.—또한 딤후 1:6 및 연구 노트 참조.
내가 그대에게 손을 얹었을 때: 행 6:6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의 선물: 바울은 이전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디모데가 과거에 받은 선물을 언급한다. (딤전 4:14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두 기록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디모데에게 손을 얹었다고 말한다. 또한 이전 편지에서는 장로의 회와 예언을 언급했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따라서 두 기록이 동일한 일을 언급한 것인지, 서로 다른 일을 언급한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어떤 경우이든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선물은 성령의 선물 즉 디모데가 임명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받은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불처럼 타오르게 하십시오: 바울은 이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디모데에게 그가 받은 선물을 계속 열심을 다해 사용하라고 권고한다. 여기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계속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형태로 되어 있다. 한 학자는 이 단어가 “불이 계속 활활 타오르게 하다”라는 의미라고 말한다. 고대 사람들은 대개 필요할 때 불을 즉시 붙일 수 있도록 늘 불씨를 준비해 두었다.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가 받은 영적인 “하느님의 선물”이 마치 꺼져 버린 불과 같아서 다시 살려야 한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 불이 이미 뜨겁게 타오르고 있지만 더욱 활활 타오르게 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비겁함: “비겁함”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불건전한 두려움, 도덕적 약함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두려움을 가지면 용기를 완전히 잃고 참숭배를 저버리게 될 수 있다.
영이 아니라 … 영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영”에 해당하는 그리스어(프뉴마)는 하느님의 성령을 가리킬 수도 있고, 사람의 지배적인 정신 태도를 가리킬 수도 있다. (용어 설명 “영” 참조) 바울은 어쩌면 두 가지 의미를 다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사용했을 수 있다. 이 구절은 이러한 의미일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은 우리 속에 비겁함의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정신의 영이 생기게 합니다.”
능력[의] 영: 바울은 이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용기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디모데에게 확신시킨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봉사의 직무를 완수하고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문제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주실 것이다.—고후 4:7-10; 12:9, 10; 빌 4:13.
사랑[의] 영: 여호와에 대한 사랑은 두려움을 이겨 내게 해 주는 해독제 역할을 한다. (요1 4:18) 사랑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자신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앞자리에 두게 해 준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위해 생명의 위험을 기꺼이 무릅쓰게 해 준다.—요 13:34; 롬 16:4 연구 노트 참조.
건전한 정신의 영: 바울은 여러 차례 건전한 정신이라는 특성을 언급한다. (롬 12:3; 딤전 2:9, 15; 3:2 및 연구 노트) 여기서 바울이 한 말을 볼 때, 건전한 정신은 그리스도인이 당황하게 만드는 위험에 직면해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전한 정신은 그리스도인이 여호와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점을 잊지 않는 데도 도움이 된다. 능력, 사랑, 건전한 정신이라는 세 가지 특성 모두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바울은 이 특성들을 언급함으로 디모데가 그가 받은 선물을 사용하고 고난에 참여할 준비를 잘 갖추었다는 점을 확신시켜 준다.—딤후 1:6, 8.
새 계명: 모세 율법에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레 19:18) 그 규정이 이웃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계명이 “새” 계명 즉 이전에 없었던 계명인 이유는 그분이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희생적인 삶을 사는 면에서 제자들이 따라야 할 완벽한 모범을 남기셨다.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이 새 계명이 요구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다.—요 15:13.
자기들의 목을 내놓았습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자기들의 목을 아래에 두다”를 의미한다. 일부 사람들에 따르면, 이것은 로마 시대에 시행되던 참수형에서 나온 비유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곧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의 강한 표현이었다.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가(브리스길라)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런 일이 에베소의 은세공인들이 소동을 일으켰을 때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 19:28-31) 바울이 자신의 생사마저 매우 불확실하다고 느꼈을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가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개입하여 그를 구해 주었을 수 있다. (고후 1:8) 하지만 바울이 어떤 일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했는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 않는다.
정신이 건전하고: 또는 “좋은 판단력이 있고; 지각력이 있고”. 한 사전에 따르면 “정신이 건전한”과 “건전한 정신”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들은 “신중한, 생각이 깊은, 자제력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정신이 건전한 사람은 균형이 잡혀 있으며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갇혀 있는 나 바울: 사도 바울은 비유대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활동했기 때문에 동족인 유대인들의 분노를 샀다. 그로 인해 그는 처음에는 유대에서, 나중에는 로마에서 수감되었다. (행 21:33-36; 28:16, 17, 30, 31) 따라서 그는 자신이 이방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갇혀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바울은 로마에 첫 번째로 수감되어 있는 2년 동안 (기원 59-61년경) 여러 통의 편지를 썼다. (행 28:30 연구 노트 참조) 에베소서에서 그는 자신이 갇혀 있거나 쇠사슬에 매여 있다고 두 번 더 언급한다.—엡 4:1; 6:20.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파자와 사도와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임명을 수행했기 때문에 현재 고난을 겪고 있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딤후 1:11) 박해하는 사람들의 목표는 그가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들어 그를 잠잠해지게 하려는 것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수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고 형주를 인내하신” 예수처럼, 바울도 여호와의 뜻을 행하다가 박해를 받고 수감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히 12:2) 그는 디모데와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그처럼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바랐다.—딤후 1:8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마 16:24 연구 노트 참조.
우리 주에 관해 증언하는 일: “우리 주에 관해 증언하는 일”에는 예수께서 형주에서 돌아가심으로 수치와 굴욕을 주는 방식으로 처형되신 일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포함되었다. (고전 1:23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바울은 예수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포함하는 그분에 관한 “좋은 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롬 1:16.
그분을 위해 갇혀 있는: 직역하면 “그분의 갇힌 자인”. 바울은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자, 즉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좋은 소식을 선포한다는 이유로 결박된 자로 여긴다. 그는 로마에서 첫 번째로 수감되어 있을 때 쓴 편지들 중 일부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했다. (엡 3:1 및 연구 노트; 4:1; 몬 1, 9) 디모데 후서는 바울이 로마에서 마지막으로 수감되어 있을 때 쓰여졌는데, 아마도 기원 65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딤후 4:6-8.
그분을 위해 갇혀 있는 나를: 일부 사람들은 바울이 수감된 것을 부끄럽게 여겼던 것 같다. 정부 당국에 의해 결박을 당하거나 처벌을 받거나 수감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바울은 디모데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시련을 겪으면서도 충실하게 인내하는 것을 보면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격려를 받기를 바랐다. (빌 1:14) 바울은 그들도 그러한 시련을 겪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딤후 3:12.
부끄러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수치를 당할 것이 두려워 어떤 것을 옹호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리스와 로마 문화권에서는 일반적으로 수치를 당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으며, 명예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지나치게 중시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의 그러한 가치관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여호와를 숭배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확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딤후 1:12 및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가 당시 부끄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한 것이다.—막 8:38 비교.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고: 율법에 따르면 기둥에 달린 사람은 “하느님께 저주받은” 자였다. (신 21:22, 23; 갈 3:13) 따라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죽임을 당한 방식이 메시아에게 걸맞지 않는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여기서 “목적”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프로테시스는 문자적으로 “앞에 놓아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롬 9:11(“뜻”); 엡 1:11; 3:11에도 나온다. 하느님의 목적은 모두 틀림없이 성취되므로, 그분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아시고 예언하실 수 있다. (사 46:10) 예를 들어 여호와께서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집단이 있을 것임을 미리 아셨다. 하지만 그분은 이 집단을 구성할 개개인을 미리 정해 두지는 않으신다. 또한 그분은 자신의 목적이 반드시 성취되도록 행동을 취하신다.—사 14:24-27.
우리를 … 미리 정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한 집단의 사람들을 예수와 함께 하늘에서 통치하도록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하기로 미리 정하셨다. 그분은 그러한 집단이 있을 것임을 미리 정하신 것이지, 그 집단을 구성할 개개인을 미리 정하신 것이 아니었다. 여호와의 그러한 목적이 아담이 죄를 지은 직후에 그분이 말씀하신 창 3:15의 예언에 포함되어 있다.—갈 3:16, 29. 롬 8:28 연구 노트 참조.
오래전에: 예수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한 집단의 사람들이 아들 예수와 함께 하늘 왕국에서 다스리게 하시려는 여호와의 목적은 창 3:15의 예언과 관련이 있었다. (갈 3:16, 29) 여호와께서는 아담이 죄를 지은 직후에 그 목적을 밝히셨는데, 그때는 바울이 이 편지를 쓰기 수천 년 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 과분한 친절이 “오래전에” 베풀어졌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일부 번역판에서는 이 표현을 “영원 전에”라고 번역하는데, 그러한 번역 표현은 바울이 언급한 일들이 영원 전에 미리 결정되어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한 사전에서는 “오래전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이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간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롬 16:25 비교. 롬 8:28 연구 노트 비교) 하느님께서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오래전에 예언하시는 분이며, 그분의 목적은 반드시 이루어진다.—사 46:10; 엡 1:4.
그리스도 예수와 관련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인데: 바울은 여호와께서 일부 사람들에게 베푸신 즉 나타내신 한 가지 “과분한 친절”을 언급하는데, 그 친절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서 통치하는 거룩한 자가 되도록 부르신 것이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 여호와께서는 예수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한 집단의 사람들을 아들로 입양하기로 미리 정하셨다. 이 과분한 친절은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 희생에 근거한 것이었다.—롬 8:15-17; 딤후 2:10. 엡 1:5 연구 노트 참조.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 여기서 바울은 9절에 언급된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이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을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고 설명한다. 이 문맥에서 “예수의 나타나심”은 여호와께서 아들을 땅으로 보내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 이 나타나심은 요 1:14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그 구절에서는 “‘말씀’이 육체가 되어 [사람들] 가운데 사셨다”고 알려 준다. 마찬가지로 딤전 3:16(연구 노트 참조)에서도 예수께서 “육체로 나타나신” 일을 언급한다. 이 표현은 예수의 지상 생애와 봉사에 적용되는데, 그분이 요르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신 이후를 가리키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봉사를 수행하시는 내내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죄에서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분명히 가르쳐 주셨다.—마 1:21; 눅 2:11; 3:6.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생명과 썩지 않음에 대해 환히 밝혀 주셨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죽은 사람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언급한다. (욥 14:14, 15; 시 37:29; 사 26:19; 단 12:2, 13) 하지만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비추는 참빛”으로 불리신다. (요 1:9) 예수께서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대해 “환히 밝혀 주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분의 말씀에 대해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요 5:24; 6:40; 14:6)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바쳐 죽음을 폐할 즉 없앨 것이라고 알려 주심으로 ‘생명에 대해 환히 밝혀 주셨다.’ (마 20:28; 요 3:16; 5:28, 29; 11:25, 26) 그에 더해 예수께서는 일부 사람들이 하늘 생명을 누리고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라는 점을 밝혀 주셨다. (눅 12:32; 요 14:2, 3) 그들은 그 하늘의 상을 받을 때 “썩지 않을 몸으로 일으켜진다.”—고전 15:42 및 연구 노트; 벧전 1:3, 4.
육체로 나타나셨고: 이 표현은 요르단강에서 침례받으신 이후의 예수를 가리키는 것 같다. (마 3:17 연구 노트 참조) 그때 나사렛 예수는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 즉 메시아가 되셨다.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나신 분이었지만 살과 피를 가진 완전한 인간이셨으며 종종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언급하셨다.—마 8:20. 용어 설명 “사람의 아들” 참조.
썩지 않을 몸: 또는 “썩지 않을 것”. 그리스어 아프타르시아는 썩거나 부패할 수 없는 것, 소멸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썩을 수밖에 없는 멸성인 몸으로 하느님을 충실하게 섬기다가 죽은 뒤 부활되어 썩지 않는 영적인 몸을 받는다. (고전 15:44) 그들이 받는 “썩지 않을 몸”은 본질적으로 부패하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아마도 스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몸일 것이다.—고전 15:53 연구 노트 비교.
이방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 바울은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과 토론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득했다. (행 17:2; 28:23. 마 28:20 연구 노트 참조) 그는 많은 비유대인들을 가르쳤다는 의미에서 “이방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이 1세기에 시작한 전파하고 가르치는 활동이 세계적인 규모로 수행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전파자…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이 받은 임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이 구절과 딤후 1:11에서 세 가지 표현(“전파자”; “사도”; “가르치는 사람”)을 사용하는데, 각 표현은 그가 받은 임명의 특정한 부면을 강조해 준다. 그는 예수와 침례자 요한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소식을 선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전파자”였다. (마 4:17; 눅 3:18. 마 3:1 연구 노트 참조) 노아도 그와 비슷한 의미에서 “의의 전파자”였다.—벧후 2:5.
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을 “사도” 즉 “보냄을 받은 자”로 선택하셨다. (행 9:15; 롬 1:5) 또한 바울은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진 사도”가 되었다고 말한다.—고전 1:1; 롬 11:13 및 연구 노트. 롬 1:1 연구 노트 참조.
형주: 또는 “고통의 기둥”. 고전 그리스어에서 스타우로스라는 단어는 주로 수직의 기둥이나 말뚝을 가리켰다. 이 단어는 예수의 제자라는 이유로 겪게 되는 고통, 수치, 고난, 죽음을 상징하기도 한다.—용어 설명 참조.
부끄러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수치를 당할 것이 두려워 어떤 것을 옹호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리스와 로마 문화권에서는 일반적으로 수치를 당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으며, 명예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지나치게 중시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의 그러한 가치관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여호와를 숭배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확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딤후 1:12 및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가 당시 부끄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한 것이다.—막 8:38 비교.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파자와 사도와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임명을 수행했기 때문에 현재 고난을 겪고 있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딤후 1:11) 박해하는 사람들의 목표는 그가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들어 그를 잠잠해지게 하려는 것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수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고 형주를 인내하신” 예수처럼, 바울도 여호와의 뜻을 행하다가 박해를 받고 수감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히 12:2) 그는 디모데와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그처럼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바랐다.—딤후 1:8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마 16:24 연구 노트 참조.
나는 내가 믿어 온 분을 알고 있으며: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주된 이유를 밝힌다. 그는 여호와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갈 4:9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사랑 많은 아버지께서 주신 임명은 무엇이든 영예로운 것으로 여겼다.
내가 그분에게 맡긴 것: 직역하면 “나의 보관물”. 바울은 자신이 하느님께 생명을 맡겼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한 것 같다.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여호와께서 자신을 부활시키시는 “그 날까지” 자신의 충실한 생애를 기억해 주실 것임을 확신했다. (롬 8:38, 39) “보관물; 맡긴 것”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누군가에게 관리하도록 맡기는 물건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이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동사가 행 14:23과 20:32에서 사람들을 ‘여호와 하느님께 맡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일부 성경 번역판에는 딤후 1:12의 이 부분이 바울이 지키도록 그에게 무언가가 맡겨졌다는 의미로 번역되어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에게 맡겨진 것을 “지키라”고 권한 딤전 6:20; 딤후 1:14 비교) 하지만 문맥을 볼 때 여기서 “맡긴 것”은 하느님께서 맡아 지키시는 것을 가리킨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바울의 전파 활동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이 구절에 2번 나오는 “알게 되다”로 번역된 동사는 한 대상과 그가 아는 대상이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다. (고전 8:3; 딤후 2:19) 따라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에 대해 기본적인 사실을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그분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이 포함된다.—요 17:3 연구 노트 참조.
건전한 말씀: “건전한 말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이 딤전 6:3에서는 “건전한 교훈”으로 번역되었다. 그 구절에서 바울은 이 교훈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참그리스도교 가르침을 가리킨다. (딤전 6:3 연구 노트 참조)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은 성경에 나오는 다른 모든 가르침과 조화를 이룬다. 따라서 “건전한[또는 “유익한”] 말씀”이라는 표현은 넓은 의미에서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표준: “표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틀; 윤곽”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이 단어는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밑바탕으로 사용하는 윤곽선 즉 밑그림을 가리킬 수 있다. “건전한 말씀의 표준”에는 분명한 지침이 들어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그 표준을 통해 여호와 하느님이 무엇을 바라시는지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이면에는 어떤 원칙들이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디모데는 새로운 사상이 무엇이든 그 “표준”과 비교해 봄으로 거짓 선생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갈 1:7; 딤후 2:16-18.
건전한 교훈: 여기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수의 모든 가르침은 성경의 다른 부분과 일치하므로, 넓은 의미로 보면 “건전한[또는 “유익한”] 교훈”이라는 표현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가리킬 수 있다.—딤후 1:13 연구 노트 참조.
맡겨진 이 훌륭한 것을 … 지키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맡겨진 것’에는 그가 앞 구절에서 언급한 “건전한 말씀” 즉 성경에 들어 있는 진리가 포함된다. 바울은 디모데 전서에서도 이렇게 권고했다. “그대에게 맡겨진 것을 지키십시오.” (딤전 6:20 및 연구 노트) 디모데는 바울의 권고에 따라 회중 안팎의 사람들에게 참그리스도교의 소식을 정확히 알림으로 맡겨진 것을 지켜야 했다. 그렇게 하면 거짓 선생들과 배교자들이 맡겨진 것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지킬 수 있을 것이었다. (딤후 4:2, 5) 디모데가 그렇게 하려면 여호와의 성령과 말씀에 의지해야 했다.—딤후 3:14-17.
우리 안에 머물러 있는 성령: 하느님의 성령은 바울과 디모데를 비롯하여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머물러 있었다. 이것은 성령이 그들 안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작용했다는 의미이다. (롬 8:11; 엡 3:20) 성령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훌륭한 것’ 즉 자신들에게 맡겨진 그리스도교 가르침과 봉사의 직무를 지키도록 도와주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성령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봉사의 직무를 완수하고 “영의 열매”를 기르도록 도와준다.—갈 5:22, 23; 행 1:8.
그대에게 맡겨진 것을 지키고: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맡겨진 것”에는 디모데에게 맡겨진 성경 진리가 포함된다. (살전 2:4; 딤후 1:14. 롬 3:2 및 연구 노트 비교) “맡겨진 것”으로 번역된 단어는 은행에 보관된 귀중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누군가에게 관리하도록 맡기는 물건을 가리키는 데도 쓰였는데, 그리스어 「칠십인역」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레 6:2, 4 [5:21, 23, LXX]) 디모데는 신성한 소식을 다른 사람들이 접할 수 없게 숨겨 두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일을 할 때 그 소식을 주의 깊이 정확하게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지켜야 했다. (딤후 2:2) 그렇게 한다면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들에 의해 귀중한 진리가 변질되거나 더럽혀지지 않도록 지킬 즉 보호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시아 속주: 용어 설명 “아시아” 참조.
자비로운: 성경에서 “자비롭다”나 “자비”로 번역되는 단어에는 단지 용서하거나 너그러운 판결을 내린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단어는 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솔선하여 돕고 싶어 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께서 …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바울은 여호와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안”에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도한다. 오네시보로는 로마에 있는 동안, 감옥에 갇힌 바울을 만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임으로 큰 친절과 자비를 보였다. (딤후 1:17. 이 구절에 나오는 감옥에 갇혀 쇠사슬에 매인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따라서 바울이 기도한 내용은 예수께서 산상 수훈에서 하신 이러한 말씀과도 조화를 이룬다. “자비로운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자비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5:7 및 연구 노트) 히브리어 성경과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여호와가 “자비로운” 분, “자비가 풍부하신” 분이라고 말한다.—출 34:6; 엡 2:4. 딤후 1:18 비교.
오네시보로: 이 충실한 그리스도인은 바울을 충성스럽고 희생적으로 지원함으로 뛰어난 본을 보였다. 바울은 그가 이전에 에베소에서 행한 “모든 봉사”에 대해 칭찬한다. 디모데는 오네시보로를 알았던 것 같다. “그[오네시보로]는 로마에 있을 때”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네시보로는 로마에 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기록은 그가 로마에 간 것이 바울을 만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딤후 1:17, 18) 여기서 바울은 하느님께 오네시보로의 집안을 축복해 주실 것을 청한다. 나중에 그는 이 편지를 끝맺으면서 그 집안에 자신의 안부를 전한다.—딤후 4:19.
감옥에 갇혀 쇠사슬에 매인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앞 구절에서 언급한 두 사람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그 두 사람을 포함해 아시아 속주에 있는 모든 사람은 바울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에 그를 버렸다. (딤후 1:15, 17, 18)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수감되어 있는 바울을 방문하는 사람은 수감되거나 죽임을 당할 위험을 무릅써야 했을 수 있다. 상황이 어떠했든, 오네시보로는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때문에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는 바울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할 수 있는 한 그를 돕고 위로함으로 여러 번 새 힘을 주었다. “감옥에 갇혀 쇠사슬에 매인”이라는 표현은 단지 바울이 수감되어 있었다는 의미일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문자 그대로 쇠사슬에 매여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이었다면 오네시보로의 도움이 훨씬 더 고맙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 부지런히 나를 찾아: 바울이 두 번째로 수감되어 있을 때 오네시보로는 로마에서 바울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로마는 인구가 약 100만 명이었으며 거리 이름이나 번지수도 없었다. 오네시보로는 마침내 바울이 감금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장소를 찾아냈다. 오네시보로가 그렇게 찾아와 준 것은 분명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주께서 …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바울은 여호와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안”에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도한다. 오네시보로는 로마에 있는 동안, 감옥에 갇힌 바울을 만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임으로 큰 친절과 자비를 보였다. (딤후 1:17. 이 구절에 나오는 감옥에 갇혀 쇠사슬에 매인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따라서 바울이 기도한 내용은 예수께서 산상 수훈에서 하신 이러한 말씀과도 조화를 이룬다. “자비로운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자비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5:7 및 연구 노트) 히브리어 성경과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여호와가 “자비로운” 분, “자비가 풍부하신” 분이라고 말한다.—출 34:6; 엡 2:4. 딤후 1:18 비교.
주께서 … 그에게 여호와의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16절과 18절에 나오는 “주”는 여호와 하느님을 가리키는 것 같다. (딤후 1:16 및 연구 노트) 18절에서 바울이 사용한 표현은 다소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 즉 여호와께서 “여호와의”(원어의 의미는 “여호와로부터”) 자비를 베푸신다고 말한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도 그처럼 반복되는 형태가 나오며, 그리스어 「칠십인역」도 그러한 형태를 살려서 번역한다. 예를 들어 창 19:24의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여호와께서 여호와로부터 유황과 불을 비처럼 내리셨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직접 유황과 불을 내리셨다는 의미이다. (또한 호 1:6, 7; 슥 10:12 참조) 이 구절 즉 딤후 1:18에 나오는 반복되는 형태는 여호와께서 사람이 자비를 구하게 하시며 그 자비를 베푸신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일 수 있다.—이 구절에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 알아보려면 부록 다3 소개; 딤후 1:18 참조.
그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달리 번역하면 “그대는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가 에베소에서 행한 많은 봉사를 디모데가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원어 표현은 오네시보로가 에베소에서 한 선한 일들에 대해 디모데가 바울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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