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1-32
연구 노트
겸손히: 겸손은 교만하거나 오만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겸손은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보는지로 나타난다. 겸손은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정신 상태이다. 진정으로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은 연합하여 함께 일할 수 있다. (엡 4:2; 빌 2:3; 골 3:12; 벧전 5:5)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나오는 타페이노프로시네(“겸손”)는 “낮추다”라는 의미인 타페이노오와 “정신”을 의미하는 프렌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는 “자기를 낮추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타페이노스는 “겸손하다”(마 11:29)나 “겸손한 사람들”(약 4:6; 벧전 5:5)로 번역되었다.—마 11:29 연구 노트 참조.
겸손: 또는 “자기를 낮추는 정신”.—행 20:19 연구 노트 참조.
연합시키는 띠인 평화: “연합시키는 띠”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함께 묶어 주는 것; 동여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골 2:19에서 문자적인 의미로 쓰였는데, 뼈와 뼈를 잇는 띠 모양의 튼튼한 조직을 가리키는 “인대”로 번역되었다. 평화는 인대처럼 회중의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결속시켜 주는 튼튼한 띠이다. 그러한 평화는 단지 분쟁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평화는 사랑에 기초해 있으며 노력을 해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엡 4:2) 바울은 골 3:14에서도 동일한 그리스어를 사용했는데, 그 구절에서 그는 사랑이 “완전한 연합의 띠”라고 말했다.
영의 일치를 유지하기 위해: 이 조언을 적용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영의 영향력에 순응하며 영의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은 사람들을 연합시키는 강력한 힘이다. (고전 2:12; 갈 5:22, 23) 앞 구절에서 바울은 연합을 증진시키는 특성들인 겸손, 온화함, 참을성, 사랑을 언급했다.—엡 4:2.
몸도 하나이고: 여기서 “몸”은 사람의 몸에 비해지는 그리스도인 회중을 가리킨다. 그 영적인 몸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엡 1:22, 23.
하나: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엡 4:4-6에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회중을 연합시켜 주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언급한다.
영도 하나입니다: 여기서 “영”은 하느님의 성령을 가리킨다.—고전 12:13; 고후 5:5.
하나의 희망으로: 이 문맥에서 “하나의 희망”은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하늘의 희망을 가리킨다. (히 3:1) 기름부음받은 자들이 하늘에서 왕 겸 제사장으로 일하게 될 때, 하느님을 섬기기를 바라고 믿음을 나타내는 모든 인류는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느님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롬 8:20, 21, 24.
요한의 침례: 요한이 베푼 침례는 각 사람이 율법을 범한 자신의 죄를 회개했음을 공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과거에 유대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주신 그 율법을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출 24:7, 8) 하지만 율법 계약이 폐지된 기원 33년 오순절 이후로는 요한의 침례가 더는 유효하지 않았다. (롬 10:4; 갈 3:13; 엡 2:13-15; 골 2:13, 14) 그 이후로 여호와께서는 예수의 명령에 따라 제자들이 베푼 침례만을 승인하셨다. (마 28:19, 20) 여기에 언급된 아볼로와 관련된 사건들은 기원 52년경에 있었던 일이다.
주도 한 분이고: 여기서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전 8:6.
믿음도 하나이며: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시는 숭배 방식이 하나라는 의미이다. 이 믿음은 단 하나뿐인 소식, 즉 그리스도인들이 전파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에 근거해 있다.—요 3:16; 4:23, 24; 롬 10:16, 17; 고후 4:13.
침례도 하나입니다: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하나의 침례’가 그들이 연합을 이루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 28:19, 20) 바울이 3차 선교 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만난 몇몇 제자들은 “요한의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침례를 받은 시점은 “요한의 침례”가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된 이후였던 것 같다. (행 18:25 연구 노트 참조) 그들은 하느님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인 침례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해 설명해 주자,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행 19:1-6) 그런 후에야 그들은 에베소와 그 밖의 지역에 있는 모든 침례받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여호와를 섬길 수 있었다.
모든 것의 하느님 아버지도 한 분이시니: 여호와 하느님을 가리킨다.—신 6:4.
감독자: 감독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에피스코포스이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동사 에피스코페오는 “주의 깊이 살피다”를 의미한다. (히 12:15에서는 “주의하다”로 번역되었다.) 또한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명사 에피스코페는 “검사”(눅 19:44; 벧전 2:12), “감독자”(딤전 3:1), “감독의 직책”(행 1:20)을 의미한다. 따라서 감독자는 회중 성원들을 찾아가서 검사하고 감독하는 사람이었다. 기본적으로 이 그리스어에는 보호할 목적으로 감독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인 회중의 감독자들은 동료 신자들의 영적 필요를 돌볼 책임이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에베소 회중의 “장로들”에게 이야기하면서 “감독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행 20:17) 또한 디도서에서 그리스도인 회중 “장로들”의 자격 조건을 언급하면서 “감독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딛 1:5, 7) 따라서 감독자와 장로 모두 동일한 직책을 가리킨다. 프레스비테로스는 그 직책에 임명된 사람의 장성된 특성에 초점을 맞춘 말이며, 에피스코포스는 그 직책에 따르는 임무에 초점을 맞춘 말이다.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을 만난 일에 관한 이 기록을 보면 당시 그 회중에 여러 명의 감독자들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한 회중에서 섬기는 감독자의 수는 정해져 있지 않았으며, 회중 내에 “장로”의 자격을 갖춘 사람 즉 영적으로 장성한 남자의 수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달랐다. 바울은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곳의 “감독자들”을 언급했다. (빌 1:1) 이 점을 볼 때 그 회중의 일을 감독하는 장로의 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행 1:20 연구 노트 참조.
사람들로 된 선물을: 또는 “사람들을 선물로”. 바울은 여기서 시 68:18을 언급한 것인데, 그 구절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표현한다. 여호와께서는 시온산 위에 있는 도시를 정복하심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다.” 그분은 또한 정복당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포로로 주셨는데, 그 강인한 사람들은 후에 유용한 일꾼으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영감을 받아 예언적인 의미가 담긴 이 시편의 내용을 예수께서 그리스도인 회중을 위해 정복자로 행동하시는 것에 적용한다. (엡 4:10) 예수께서는 하늘 즉 “높은 곳으로 올라가신” 후에 매우 큰 권한을 받으셨다. (마 28:18; 엡 1:20, 21) 그분은 자신이 받은 권한으로 유능한 “사람들로 된 선물”을 회중에 주셔서 하느님의 양 떼를 돌보는 사랑 많은 목자이자 감독자가 되게 하셨다.—엡 4:11. 행 20:28 연구 노트 참조. 사 32:1, 2 비교.
모든 하늘보다 훨씬 높이 올라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있는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높은 지위로 올려지셨다.—엡 1:20-23; 빌 2:9-11.
복음 전파자: “복음 전파자”로 번역된 그리스어 유앙겔리스테스는 기본적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마 4:23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좋은 소식을 전할 사명을 받았지만 (마 24:14; 28:19, 20; 행 5:42; 8:4; 롬 10:9, 10) 그리스어 유앙겔리스테스가 나오는 세 성구의 문맥을 살펴보면 “복음 전파자”라는 표현이 특별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행 21:8; 엡 4:11; 각주; 딤후 4:5; 각주) 예를 들어 그 단어는 좋은 소식이 전파된 적이 없는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 “선교인”으로 번역될 수 있다. 오순절 이후에 빌립은 사마리아시로 가서 전파 활동을 개척했으며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그는 천사의 인도를 받아 에티오피아 환관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파했고 그 결과 그 환관이 침례를 받았다. 그 후 빌립은 영의 인도를 받아 아스돗에 가서 전파했으며, 카이사레아까지 가는 길에 있는 모든 도시에 좋은 소식을 전했다. (행 8:5, 12, 14, 26-40)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나 이 성구(행 21:8)에 나오는 일이 일어난 때에도 빌립은 여전히 “복음 전파자”로 언급된다.
복음 전파자: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그리스어는 기본적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즉 알리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복음” 즉 “좋은 소식”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와 어근이 같으며,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과 다른 두 구절에만 나온다. (딤후 4:5. 행 21:8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좋은 소식을 전할 사명을 받았다. (마 24:14; 28:19, 20)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복음 전파자”라는 단어를 “선교인”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바울, 디모데, 바나바, 실라는 좋은 소식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먼 곳까지 가서 전파 활동을 수행했다.—행 13:2-4; 15:40, 41; 16:3, 4.
바로잡는: 또는 “올바로 조정하는”. “바로잡는”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카타르티시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카타르티시스와 그와 어근이 같은 다른 단어들은 어떤 것을 올바른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예를 들어, 마 4:21에서는 카타르티조라는 동사가 그물을 “수선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갈 6:1에서는 이 동사가 걸음을 잘못 내디딘 동료 그리스도인을 영적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내용 가운데 사용되었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명사 카타르티스모스는 엡 4:12에서 “바로잡다”로 번역되었는데, 이 단어는 뼈나 팔다리나 관절을 맞추는 것을 가리키는 의학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바로잡고: 여기서 “바로잡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명사(카타르티스모스)는 어떤 것을 올바른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 올바로 조정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이 단어는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해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다. 이 단어는 뼈나 팔다리나 관절을 맞추는 것을 가리키는 의학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고후 13:9 연구 노트 참조) 예수께서는 “거룩한 자들”의 생각과 태도와 행실을 하느님의 생각과 뜻과 일치하게 조정하심으로 그들을 바로잡으셨다. 그러한 “바로잡는”(또는 “훈련하는”) 일은 예수께서 회중에 주신 “사람들로 된 선물” 즉 영으로 임명된 감독자들을 통해 이루어졌다.—엡 4:8, 11, 12; 고전 16:15-18; 딤후 2:2; 딛 1:5.
정확한 지식: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지식”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그노시스와 에피그노시스이다. 두 단어 모두 “알다; 이해하다; 깨닫다”를 의미하는 동사 기노스코와 어근이 같다. 여기 사용된 에피그노시스는 그노시스의 강조형(에피는 문자적으로 “위에”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부가적인”이라는 의미)이다. 에피그노시스는 문맥에 따라 흔히 “정확한, 참된, 온전한 지식”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여기서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들의 열심은 약속된 메시아인 예수를 통해 밝혀진 하느님의 뜻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가 … 이르게 됩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장성에 이르고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연합하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 준다.—이 구절에 나오는 성숙한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믿음…에 있어서 하나가 되고: 이 표현은 일치된 신앙과 가르침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엡 4:5; 골 1:23; 2:7) “하나가 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일치하게 되다; 일치 연합하게 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정확한 지식: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지식”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그노시스와 에피그노시스이다. 여기 사용된 에피그노시스는 그노시스의 강조형(에피는 문자적으로 “위에”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부가적인”이라는 의미)이다. 에피그노시스는 문맥에 따라 흔히 “정확한, 참된, 온전한 지식”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롬 10: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아들 즉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온전한 지식을 얻는 면에서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일치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 준다.—고전 1:24, 30; 엡 3:18; 골 2:2, 3; 벧후 1:8; 2:20.
성숙한: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으로 “성숙한” 즉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권한다. (고전 14:20) 그들은 그리스도의 온전함과 같은 수준에 이르는 것 즉 하느님의 아들에 관해 알게 된 정확한 지식에 따라 생활함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했다. 그들이 그렇게 영적으로 장성한다면 거짓된 사상이나 가르침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사도들, 예언자들, 복음 전파자들, 목자들, 가르치는 사람들을 비롯한 회중의 모든 마련은 그들이 그러한 영적 수준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되었다.—엡 4:11-14.
사람의 책략: 이 표현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오며, “사람의 주사위 놀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고대에 사용된 이 관용구는 주사위 놀이를 할 때 속임수를 쓰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다. (미디어 갤러리 “로마 시대의 주사위” 참조) 여기서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어린아이 즉 영적으로 장성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런 사람들은 경험과 판단력이 없기 때문에 “사람의 책략”에 영향을 받아 영적으로 진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짓 선생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여호와께서는 “사람들로 된 선물”을 주셨다.—엡 4:8. 부록 가1 참조.
진리를 말하며: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는 의미 폭이 넓은 단어이며 “진실하며”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성경에서는 “진리대로 살며”, “진리를 행하며”와 같은 표현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바울은 14절에서 거짓 선생들의 책략과 교활한 속임수에 대해 경고한 다음, 이 구절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행실이 그와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엡 4:25에서도 비슷한 점을 강조하는데, 그는 그 구절에서 슥 8:16을 인용한 것 같다. 진실함에 관한 여호와의 표준은 변하지 않는다. 그분은 자신의 종들에게 말과 행동을 통해 항상 진리를 옹호할 것을 요구하신다.—레 19:11; 잠 19:9.
관절과 인대를 통해: 사람의 몸은 관절을 통해 결합되어 있다. 사람의 몸에는 “인대” 즉 뼈와 뼈를 잇고 장기를 지지해 주는 띠 모양의 튼튼한 조직도 있다. 일부 주석가들은 바울이 여기서 의학 용어들을 사용한 이유 중 하나가 “사랑받는 의사” 누가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누가는 바울이 골로새서를 쓸 당시 그와 함께 있었다. (골 4:14) 여기서 “인대”로 번역된 그리스어 신데스모스는 엡 4:3(“연합시키는 띠”)과 골 3:14(“연합의 띠”)에서 ‘결속시킨다’는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서로 조화롭게 연결되어: 이 표현은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에베소서 소개” 참조)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모두 연합하여 여호와께 나아갈 수 있었다. 또한 그들 모두 성령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하느님께서 영으로 거하시는 장소”인 영적 성전을 이루었다.—엡 2:22. 바울이 그리스도인 회중을 사람의 몸에 비하면서 동일한 표현(“조화롭게 함께 결합되고”)을 사용한 엡 4:16 참조.
모든 관절: 사람의 몸은 관절을 통해 결합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몸의 지체들 즉 회중에 속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관절을 통해”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 그분은 영적 양식을 나누어 주는 마련, 회중 내의 의사소통 마련, 회중의 활동을 조직하는 마련을 통해 그렇게 하신다. 그러한 마련을 통해 “몸”은 영적 양식을 잘 공급받게 되고, 각 부분은 임명받은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침을 받게 된다. (엡 4:7-16. 골 2:19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이 사용한 “관절”이라는 표현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의사들이 사용하는 표현이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에베소에는 의학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다. 바울이 회중을 사람의 몸에 비한 것은 그러한 배경 때문이었을 수 있다.
조화롭게 함께 결합되고: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이 문맥에서 사람의 몸을 이루는 여러 지체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각 지체는 온몸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회중에 속한 그리스도인들도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서로 협력한다. (엡 1:22, 23; 4:4, 15) 모두가 그리스도의 머리 직분에 순종하면서 조화롭게 함께 일할 때 회중은 자라게 되고 회중 안에 사랑이 넘치게 된다. (고전 12:14-27; 골 2:19; 3:14) 바울은 엡 2:21(연구 노트 참조)에서도 동일한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 구절에서 그는 회중을 “서로 조화롭게 연결된” 건물로 묘사한다.
협력하게: 직역하면 “함께 가게”. 한 사전에 따르면 이 그리스어 동사는 “하나로 모으다; 연합시키다”를 의미한다.
허무한 것: 또는 “공허한 것; 헛된 것; 좌절”. 이 그리스어는 「칠십인역」에서 히브리어 헤벨(문자적으로 금방 사라지는 “입김”이나 “수증기”를 가리킴)을 번역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히브리어는 전도서에 35회 이상 나오는데, “지극히 헛되다”나 “모든 것이 헛되다”와 같은 표현에 사용되었다. (전 1:2; 2:17; 3:19; 12:8) 전도서의 필자인 솔로몬은 때때로 이 단어를 “바람을 쫓아다니는 것”이라는 표현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했다. (전 1:14; 2:11) 이 구절(롬 8:20)에서 바울은 열심히 노력하지만 목표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가리켜 이 단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희망도 언급하는데, 그것은 피조물이 지금까지 복종해 온 “허무한 것”에서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희망이다.—롬 8:21.
쓸모없는: 또는 “공허한; 헛된”. 한 사전에 따르면, 이 구절에 나오는 표현은 이방 사람들이 “쓸모없는 것들에 생각을 집중한 채 걷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생활 방식은 좌절과 실망을 가져올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이유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이방 사람들이 … 걷는 것처럼 걷지 말라”고 권고한다.—“쓸모없다; 허무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롬 8:20 연구 노트 참조.
무감각: 직역하면 “둔함”. 불의한 이 세상의 생각과 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무감각해져 있다. 즉 둔해져 있다. (고전 2:12; 엡 2:2; 4:17)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무감각”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명사는 주로 굳은살 때문에 무감각해진 피부를 가리키는 의학 용어에서 나온 것이다. 이 구절에서 이 단어는 마음이 어떻게 하느님에 대해 서서히 굳어질 수 있는지 즉 감각이 없어질 수 있는지 묘사한다.
정신적으로 어둠 속에: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무지하다는 의미로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흔히 이해력이 없는 것, 특히 영적인 의미에서 이해력이 없는 것을 어둠에 비한다. (욥 12:24, 25; 사 5:20; 60:2; 요 8:12; 고후 4:6; 엡 1:17, 18; 5:8, 11; 벧전 2:9; 요1 2:9-11) 여호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어둠 속에” 있다. 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인도해 주는 빛도 없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요 17:3; 롬 1:21, 28; 고후 4:4.
하느님께 속한 생명: 한 참고 자료에 따르면, 여기서 “생명”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본질적인 생명, 절대적 의미에서의 생명”을 의미한다. 따라서 바울은 사람들이 정신적, 영적 어둠으로 인해 생명의 근원이자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의 근원이신 여호와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말한 것이다.—시 36:9; 롬 1:21; 갈 6:8; 골 1:21.
방종: 또는 “자유분방함”. 성경에서 그리스어 아셀게이아는 하느님의 법을 심각하게 범하는 행위이자, 뻔뻔스럽거나 불경스럽거나 대담할 정도로 경멸적인 태도를 반영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막 7:22; 롬 13:13; 고후 12:21; 갈 5:19; 엡 4:19; 벧전 4:3; 벧후 2:2, 7, 18; 유 4) 한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방탕함, 음탕함, 음란함 즉 도덕적으로 무절제한 태도와 행실”로 정의한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교도인 이세벨 왕비가 이스라엘에 바알을 위한 신당을 세운 일을 묘사할 때 이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대중의 생각과 예의를 뻔뻔스럽게 무시한 충격적인 행동이었다.—「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 8권 13장 1항 (로브 8.318). 용어 설명 참조.
더러움: 또는 “불결함; 타락; 음란”. 이 구절에서 “육체의 일”로 가장 먼저 언급된 세 가지 가운데 “더러움”(그리스어 아카타르시아)이 가장 의미 폭이 넓다. 그리스어 아카타르시아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10번 나온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더럽거나 불결한 것을 가리킨다. (마 23:27)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면 온갖 종류의 불결함을 포괄하는 단어로 쓰이는데, 그 가운데는 성 문제, 말과 행동, 그리고 거짓 신을 숭배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문제 등에서의 불결함이 포함된다. (롬 1:24; 6:19; 고후 6:17; 12:21; 엡 4:19; 5:3; 골 3:5; 살전 2:3; 4:7) 따라서 “더러움”에는 여러 종류의 잘못된 행동이 포함되며, 그러한 행동들은 더러움의 정도가 각기 다를 수 있다. (엡 4:19 연구 노트 참조) “더러움”은 잘못된 행동이나 상태가 갖는, 도덕적으로 불쾌감을 주는 측면을 강조하는 표현이다.—용어 설명 “부정함; 더러움” 참조.
탐욕: 또는 “탐심”. 그리스어 플레오넥시아의 문자적 의미는 “더 갖고 있는 것”이며, 더 갖고 싶어 하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뜻한다. 이 그리스어 단어는 엡 4:19; 5:3에도 나온다. 바울은 골 3:5에서 “탐욕”에 대해 언급한 다음 “탐욕은 우상 숭배”라고 덧붙인다.
모든 도덕 감각을 상실한: 여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더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맥에서 이 단어는 윤리적,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것을 가리킨다. 그처럼 무감각해진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하느님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딤전 4:2.
방종: 그리스어 아셀게이아. 방종은 하느님의 법을 심각하게 범하는 행위이자, 뻔뻔스럽거나 대담할 정도로 경멸적인 태도를 반영하는 행위이다.—용어 설명 및 갈 5:19 연구 노트 참조.
온갖 더러운 일: “더러운 일”(그리스어 아카타르시아)이라는 표현은 의미 폭이 넓은 단어이다. 여기서 이 단어는 온갖 종류의 불결함을 포괄하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쓰였는데, 그 가운데는 성 문제, 말과 행동, 영적인 문제 등에서의 불결함이 포함된다. (고전 7:14; 고후 6:17; 살전 2:3 비교) 이 단어는 잘못된 행동이나 상태가 갖는, 도덕적으로 불쾌감을 주는 측면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갈 5:19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사람들이 그러한 더러운 일을 탐욕으로 행했다고 말한다. “탐욕”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플레오넥시아는 더 갖고 싶어 하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뜻한다. 바울은 “탐욕으로”라는 표현을 덧붙임으로, “더러운 일”에 해당하는 행동들이 그 심각성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롬 1:29 연구 노트 참조.
영적인 사람: 직역하면 “영적인 (자)”. 여기서 바울은 앞 구절에 언급된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대조한다. (고전 2:14 연구 노트 참조)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며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다. 영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을 매우 실제적인 분으로 여기며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엡 5:1) 그런 사람은 사물에 대해 하느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생활에서 그분의 표준을 따르려고 애쓴다. 영적인 사람은 육적인 사람의 잘못된 행로를 판단한다. 다시 말해 그런 행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명확히 분별한다.
자신을 지배하는 정신 태도를: 또는 “자신의 정신을 움직이는 힘을”. 이 그리스어 표현을 직역하면 “여러분의 정신의 영을”이 된다. 여기서 “영”은 사람이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의미한다. (용어 설명 “영” 참조) 따라서 “정신의 영”이란 정신적 성향, 욕망, 동기를 포함하여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생각을 틀 잡는 힘을 가리킨다. 불완전한 사람은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러한 경향으로 인해 정신이 육적이거나 물질적인 방향으로 이끌리게 된다. (창 8:21; 전 7:20; 골 1:21; 2:18)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을 지배하는 정신 태도를 새롭게’ 하여, 그 강력한 힘이 자신의 생각을 올바른 방향으로 즉 하느님의 생각과 일치한 방향으로 이끌도록 해야 한다. (고전 2:15 연구 노트 참조)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성경을 연구하고 하느님의 영이 자신에게 작용하게 하여 자신을 지배하는 정신 태도를 “계속 새롭게” 해야 한다.
계속 새롭게 하고: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계속적인 동작을 표현하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볼 때 자신을 지배하는 정신 태도를 바꾸는 것이 계속되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빌 3:12, 13.
영의 열매: 또는 “영이 산출하는 것”. 농사와 관련된 그리스어 카르포스(“열매”)는 성경에 자주 나온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성령 즉 활동력이 사람 속에 산출할 수 있는 특성들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갈 5:16) 나무를 잘 기르면 나무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성령의 영향력 아래 있게 하면 “영의 열매”를 맺게 된다. (시 1:1-3 비교) 그러한 특성들은 성령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느님의 성품을 반영한다. (골 3:9, 10) 바울은 이 구절들에서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도움으로 기를 수 있는 특성들을 전부 열거한 것이 아니다. (갈 5:23 연구 노트 참조) 이 특성들이 어우러져 새 인간성의 바탕이 된다. (엡 4:24)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그리스어 카르포스(“열매”)는 단수 형태이다. 성경 주석가들에 따르면, 바울이 여기서 단수 형태를 사용한 것에는 이 구절들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훌륭한 특성들이 하나의 열매를 구성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특성들 모두가 중요하며 다른 특성들과 별개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계속 새롭게 하고: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계속적인 동작을 표현하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볼 때 자신을 지배하는 정신 태도를 바꾸는 것이 계속되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빌 3:12, 13.
자신을 지배하는 정신 태도를: 또는 “자신의 정신을 움직이는 힘을”. 이 그리스어 표현을 직역하면 “여러분의 정신의 영을”이 된다. 여기서 “영”은 사람이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의미한다. (용어 설명 “영” 참조) 따라서 “정신의 영”이란 정신적 성향, 욕망, 동기를 포함하여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생각을 틀 잡는 힘을 가리킨다. 불완전한 사람은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러한 경향으로 인해 정신이 육적이거나 물질적인 방향으로 이끌리게 된다. (창 8:21; 전 7:20; 골 1:21; 2:18)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을 지배하는 정신 태도를 새롭게’ 하여, 그 강력한 힘이 자신의 생각을 올바른 방향으로 즉 하느님의 생각과 일치한 방향으로 이끌도록 해야 한다. (고전 2:15 연구 노트 참조)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성경을 연구하고 하느님의 영이 자신에게 작용하게 하여 자신을 지배하는 정신 태도를 “계속 새롭게” 해야 한다.
새 인간성: 직역하면 “새 사람”. 그리스도인은 “옛 인간성”(직역하면 “옛 사람”)을 그 행위와 함께 벗어 버려야 한다. (엡 4:22) 그에 더해, “새 인간성”을 입음으로 진정한 변화를 해야 한다. 그러한 새 인간성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창조된” 것으로, 여호와 하느님의 성품의 형상 즉 그분의 성품을 반영하는 것이다. (골 3:9, 10)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그분의 형상에 따라 변화하고 갈 5:22, 23에 언급된 것과 같은 아름다운 특성들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갈 5:22; 엡 4:23 연구 노트 참조.
이웃: 직역하면 “가까이 있는 사람”. 이 단어는 단지 가까이 사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자신과 어떤 식으로든 교류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가리킬 수 있는 표현이다.—눅 10:29-37; 롬 13:8-10. 마 5:43 연구 노트 참조.
이웃: 마 22:39 연구 노트 참조.
분개하여 ··· 몹시 한탄스러워하시며: 이 일이 있었을 때 예수께서 종교 지도자들의 마음이 무감각한 것을 보시고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지를 기록한 복음서 필자는 마가뿐이다. (마 12:13; 눅 6:10)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던 베드로가 그때 예수께서 어떤 심정이셨는지를 자세히 알려 주었을 것이다.—“마가복음 소개” 참조.
격분하더라도: 바울은 여기서 시 4:4을 인용한 것이다. 이것을 볼 때 그리스도인이 분노를 느끼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악과 불공정에 대해 분노를 표현하신다. 하지만 그러한 분노는 항상 의와 완벽한 판단력에 따른 것이다. (겔 38:18, 19. 막 3:5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인들도 의로운 분노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다 하더라도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한다. 그들은 분노에 사로잡혀 화를 터뜨리거나 모욕적인 말을 하거나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엡 4:31) 시 4:4에서는 하느님의 종들에게 자신이 무엇 때문에 분노하게 되었는지 여호와께 개인적인 기도로 말씀드리라고 권한다.
해가 질 때까지 화난 상태로 있지 마십시오: 유대인의 하루는 해가 질 때 시작되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바울은 다음 날까지 화를 계속 품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것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에 대해 계속 분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셨다. (마 5:22) 화를 계속 품으면 상대에게 반감이나 앙심을 갖게 되고 그와의 관계에 금이 가고 회중에 분열이 생길 수도 있다. (레 19:18; 시 36:4; 갈 5:19-21) 바울은 상대방과의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라고, 가능하다면 그날이 지나가기 전에 해결하라고 권한 것이다.—롬 12:17-21; 엡 4:2, 3.
격분하더라도: 바울은 여기서 시 4:4을 인용한 것이다. 이것을 볼 때 그리스도인이 분노를 느끼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악과 불공정에 대해 분노를 표현하신다. 하지만 그러한 분노는 항상 의와 완벽한 판단력에 따른 것이다. (겔 38:18, 19. 막 3:5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인들도 의로운 분노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다 하더라도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한다. 그들은 분노에 사로잡혀 화를 터뜨리거나 모욕적인 말을 하거나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엡 4:31) 시 4:4에서는 하느님의 종들에게 자신이 무엇 때문에 분노하게 되었는지 여호와께 개인적인 기도로 말씀드리라고 권한다.
마귀에게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 이 말을 직역에 가깝게 표현하면 “마귀에게 틈을 허용하지 마십시오”로 옮길 수 있다. 이 표현은 분노를 계속 품어서는 안 된다는 바울의 경고에 힘을 더해 준다. (엡 4:26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인이 계속 분노나 적대적인 감정을 마음에 품으면 비유적으로 말해 마귀에게 틈을 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탄은 그러한 틈을 이용해 그리스도인이 심각한 죄를 짓도록 영향을 줄 수 있다. (시 37:8) 또한 그리스도인이 계속 분을 품어서 회중의 연합을 깨뜨리면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약 4:1, 7.
천막을 만드는 것: 이 구절에서 바울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직업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그리스어는 스케노포이오스이다. 이 단어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지(천막 만드는 사람인지, 장식용 직물을 짜는 사람인지, 밧줄을 만드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많은 학자들은 아마도 “천막 만드는 사람”을 가리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길리기아의 타르수스 출신이었는데, 길리기아는 천막을 만드는 재료인 킬리키움이라는 염소 털 천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행 21:39) 기원 1세기에 유대인 사회에서는 소년이 나중에 고등 교육을 받을 예정이라 해도 직업 교육을 받는 것이 영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따라서 바울은 어릴 때에 천막 만드는 기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천막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킬리키움은 흔히 거칠고 뻣뻣해서 자르거나 바느질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 이상 도둑질하지 말고: 바울의 말은 에베소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마음에 와닿았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특정 계절에만 일이 있거나, 일이 일정하지 않거나,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도둑질을 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바울은 이 구절에서 어떤 경우에든 도둑질을 해서는 안 되며 자기 손으로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교훈한다. (신 5:19; 살전 4:11) 이전에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열심히 일함으로 본을 보였는지 일깨워 준 적이 있다. (행 20:17, 34. 또한 행 18:3 연구 노트 참조)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교훈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하느님께서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실 것임을 신뢰할 필요가 있었다.—마 6:25-33.
소금으로 맛을 내듯: 소금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여러 차례 언급되는데,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도 있고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 그러한 용례를 살펴보면 바울이 이 구절에서 어떠한 의미로 이 말을 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마 5:13; 막 9:50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소금이 음식에 맛과 풍미를 더해 주고 부패를 막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한 것 같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보존해 주는 소식을 전할 때 듣는 사람들에게 잘 맞도록 “맛을 낸” 말을 해야 한다고 권고한 것이다.
썩은 말: “썩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부패된 과일이나 생선이나 고기를 가리키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마 7:17, 18; 12:33; 눅 6:43) 이 구절에서 이 단어는 불건전하거나 모욕적이거나 음탕한 말을 가리키는 생생한 표현으로 쓰였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소금으로 맛을 낸” 단어들을 사용하여 ‘세워 주고 유익을 주는 말’을 해야 한다.—골 4:6 및 연구 노트.
그가: 여기서 “그”는 앞 구절에 나오는 “돕는 자”를 가리킨다. (요 16:13 연구 노트 참조) 예수께서는 의인법을 사용하여, 비인격적인 힘인 성령을 돕는 자로 언급하셨다. 그분은 이 돕는 자가 “가르치고”, ‘증언하고’, ‘증거를 제시하고’, ‘인도하고’, ‘말하고’, ‘듣고’,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 14:26; 15:26; 16:7-15) 의인법이란 인격체가 아니거나 생명이 없는 것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는 영이 죄에 관해 ··· 납득할 만한 증거를 세상에 제시할 것이라고 알려 준다. 이것은 세상이 하느님의 아들에 대해 믿음을 나타내지 못했다는 점을 영이 드러낼 것이라는 의미였다. 영이 의에 관해 납득할 만한 증거를 세상에 제시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심으로 그분이 의로운 분이라는 점이 증명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또한 영은 “이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이 불리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이유를 분명히 보여 줄 것이었다. (요 16:9-11) 여기서 ‘납득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엘렝코는 “책망하다”로 번역되기도 한다.—딤전 5:20; 딛 1:9.
그: 13, 14절의 “그”는 요 16:7에 나오는 “돕는 자”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그리스어로 중성형인 성령 즉 비인격적인 힘을 의인화하여 (그리스어로 남성형인) “돕는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요 14:16 연구 노트 참조.
그 영이 뜻하는 바: 또는 “그 영의 정신(생각)”. 여기서 “영”은 하느님의 영 즉 활동력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영을 사용해 성경 필자들이 성경에 나오는 생각들을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 영감받은 생각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신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바울은 하느님께서 마음을 살피시는 분으로서, 지상에 있는 자신의 종들이 너무 괴로워서 기도로 무엇을 청해야 할지 모를 때 성경에 나오는 어떤 생각들이 그들의 심정을 잘 대변해 주는지도 아신다고 알려 준다. 그것은 마치 영으로 영감받은 그 내용이 하느님의 거룩한 자들을 위해 탄원하는 즉 중재하는 것과 같다. (롬 8:26) “영”에 해당하는 단어를 “정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나 “탄원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와 함께 사용한 것은 성경에서 하느님의 영을 의인화한 또 다른 예이다.—요 14:16 연구 노트 참조.
인장: 성경 시대에 인장은 어떤 사실이나 소유권이나 합의를 확증하기 위한 서명으로 사용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통해 비유적인 인장을 찍으셨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자신의 소유이며 하늘 생명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확증하셨다.—엡 1:13, 14.
오게 될 것의 증표: 또는 “계약금; 오게 될 것의 보증(담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는 그리스어 아라본이 세 번 나오는데, 모두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영 즉 하느님의 성령 또는 활동력으로 기름부으시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고후 5:5; 엡 1:13, 14) 성령의 이러한 특별한 작용은 오게 될 것의 계약금과도 같다.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증표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희망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 그들이 받을 온전한 값 즉 상에는 하늘에서 썩지 않을 몸을 입는 것이 포함된다. (고후 5:1-5) 또한 불멸성이라는 선물을 받는 것도 포함된다.—고전 15:48-54.
하느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근심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슬프게 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여기서 바울은 의인법을 사용하여 비인격적인 힘인 성령이 마치 사람인 것처럼 근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요 16:8, 13; 롬 8:27 연구 노트 비교)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사용해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고 그들에게 힘을 주신다. 성령은 그들이 “영의 열매”를 맺게, 즉 좋은 특성을 기르게 해 준다. (갈 5:22-24) 성령에 대한 인식이 없고 성령의 작용을 거스르며 영으로 영감받은 성경의 교훈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다.—엡 4:17-29; 5:1-5; 사 63:10; 행 7:51.
대속물에 의한 석방의 날을 위해 …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의 성령으로 인장이 찍혀 있다. 이 인장은 그들이 하느님의 소유이고 하늘 생명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나타내 준다.—고후 1:22 연구 노트 참조.
친절하게 대하고: 엡 4:31에서 바울은 좋지 않은 특성과 태도 몇 가지를 열거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는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친절과 같은 좋은 특성들을 나타내라고 권한다. (골 3:12, 13) “대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에는 “~하게 되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그들이 친절을 나타내는 면에서 발전할 필요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미디어

여기 보이는 것은 로마 시대의 주사위이다. 이 주사위는 상아로 만든 것이지만, 당시에는 뼈나 돌 같은 재료로 주사위를 만들기도 했다. 사람들은 주사위 놀이를 할 때 속임수를 많이 썼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람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할 때, 문자적으로 주사위 놀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표현을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엡 4:14) 따라서 이 표현을 “사람의 책략”으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