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1-30

2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 그리스도 안의 격려나 사랑의 위로나 영적인 친교나 부드러운 애정과 동정심이 있다면,+  같은 정신과 같은 사랑을 가지고 온전히 연합하여 하나의 생각을 가짐으로+ 내가 기쁨으로 충만해지게 해 주십시오.  아무 일도 다툼이나+ 자기중심적으로 하지 말고,+ 오히려 겸손하게 남을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일에도 관심을 가지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던 이러한 정신 태도를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고 계셨지만,+ 하느님과 동등하게 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으로 오셨을 때에 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아니, 형주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탁월한 위치로 높이시고+ 친절하시게도 그분에게 다른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 곧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의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 11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항상 순종해 왔습니다. 내가 함께 있을 때만이 아니라 지금처럼 떨어져 있을 때에도 더욱더 기꺼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계속 이루어 나가십시오. 13  하느님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바를 위해 여러분에게 힘을 주시고, 여러분에게 의욕과 그것을 행할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14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논쟁하지 말고+ 하십시오. 15  그리하여 나무랄 데 없고 순결하게 되어,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세대 가운데서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십시오.+ 이 세상에서 여러분은 빛을 비추는 사람들로서 빛나고 있습니다.+ 16  생명의 말씀을 계속 굳게 잡으십시오.+ 그러면 내가 달린 것이 헛되지 않았고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내가 그리스도의 날에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17  하지만 여러분이 믿음으로 바친 희생과+ 거룩한 봉사 위에 내가 음료 제물처럼 부어지고+ 있다 해도, 나는 즐거워하며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합니다. 18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즐거워하고 나와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19  주 예수 안에서 나는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속히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에 관한 소식을 듣고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20  내게는 그 사람과 같은 성향을 가지고 여러분의 일을 진실하게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21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22  그러나 여러분은 디모데가 자기에 대해 제시한 증거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녀가+ 아버지와 함께하듯이 좋은 소식의 진전을 위해 나와 함께 섬겼습니다.* 23  그러므로 내 상황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게 되는 대로 그를 보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4  그리고 나 자신도 곧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합니다.+ 25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에바브로디도를 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나의 형제이자 동료 일꾼이자 동료 군인이며, 또 여러분이 보낸 사절이자 나의 필요를 돌보아 주는 수종입니다.+ 26  그가 여러분 모두를 간절히 보고 싶어 하며, 자기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여러분이 들은 것을 알고 우울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7  사실, 그는 병들어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에게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베푸셔서 내가 또 다른 슬픔을 겪지 않게 하셨습니다. 28  그래서 나는 아주 급히 그를 보냅니다. 여러분도 그를 보고 다시 기뻐하고 나도 근심을 덜기 위해서입니다. 29  그러므로 크게 기뻐하면서 주 안에서 그를 관례대로 환영하십시오.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들을 계속 소중히 여기십시오.+ 30  여러분이 여기에서 나에게 해 주지 못하는 봉사를 그가 대신하려고 하다가+ 자기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했으며 그리스도의 일로 인해 죽을 뻔했기 때문입니다.

각주

직역하면 “사람의 모양”.
또는 “종으로 섬겼습니다.”

연구 노트

격려하는 일: 또는 “권고하는 일”. 그리스어 명사 파라클레시스는 문자적으로 “곁으로 부르는 것”을 의미하며, 많은 경우 “격려”(행 13:15; 빌 2:1)나 “위로”(롬 15:4; 고후 1:3, 4; 살후 2:16)를 의미한다. 이 구절에는 파라클레시스와 그와 어근이 같은 동사 파라칼레오가 함께 사용되었는데, 대체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두 단어 모두 “권고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일부 문맥에서는 본문에 “권고”로 번역되었다. (살전 2:3; 딤전 4:13; 히 12:5) 이 그리스어 단어들이 권고, 위로, 격려라는 세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에게 권고할 때 결코 거칠거나 불친절한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려 주는 것일 수 있다.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그리스어 파라클레시스(“격려하다”)와 파라미티아(“위로하다”)에는 둘 다 “격려”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만 파라미티아가 훨씬 더 부드럽고 따뜻하게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동사 파라미테오마이요 11:19, 31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구절들에서는 나사로가 죽은 뒤에 유대인들이 그의 누이들인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로했다고 알려 준다.—또한 이 동사가 “위로의 말을 하다”로 번역된 살전 5:14 참조.

교제하는 일: 또는 “서로 나누는 일”. 그리스어 코이노니아의 기본 의미는 “나누는 일; 친교”이다. 바울의 편지에는 이 단어가 여러 번 나온다. (고전 1:9; 10:16; 고후 6:14; 13:14) 문맥을 볼 때 이 구절에 언급된 사람들이 단순히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온전히 연합하여: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신프시코스)는 (함께)과 프시케(“영혼”으로 번역되기도 함)가 결합된 말로, “영혼이 연합되고(함께 결합되고)”로 번역할 수도 있다. 바울은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이 연합을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문맥에서 이 표현을 비롯한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한다.—빌 2:1 연구 노트 참조.

하나가 되어: 또는 “연합되어”. 예수께서는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인 것처럼 자신의 참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이것은 예수와 아버지가 일치된 생각을 가지고 협력하는 것처럼, 제자들도 동일한 목적을 위해 함께 연합하여 일하게 해 달라는 의미였다. (요 17:22) 고전 3:6-9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봉사자들이 동료들과 함께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일하면서 누리는 그러한 연합을 묘사한다.—고전 3:8요 10:30; 17:11 연구 노트 참조.

부드러운 애정: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스플랑크논은 문자적으로 몸속에 있는 장기들을 가리킨다. 행 1:18에서는 “내장”으로 번역되었다. 이 구절(고후 6:12)에서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강렬한 감정을 가리킨다. 이것은 동정심을 매우 강하게 표현하는 그리스어 단어 중 하나이다.

격려 … 위로: 여기서 바울은 의미가 비슷한 그리스어 명사 2개를 사용한다. “격려”로 번역된 그리스어(파라클레시스)는 의미 폭이 넓다. 이 단어는 이 구절과 다른 구절들(행 13:15; 히 6:18)에서처럼 “격려”로 번역될 수도 있고, “권고”(살전 2:3; 딤전 4:13; 히 12:5)나 “위로”(롬 15:4; 고후 1:3, 4; 살후 2:16)로 번역될 수도 있다. (롬 12:8 연구 노트 참조) “위로”로 번역된 그리스어(파라미티온)는 “위로하다; 기운을 북돋다” 또는 “긍정적이고 친절한 방식으로 말하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고전 14:3 연구 노트 비교) 바울의 말에는 빌립보 사람들이 서로 격려하고 위로한다면 회중의 연합이 강화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빌 2:2.

영적인 친교: 또는 “영을 함께 나누는 일”. 이 표현은 서로 관심을 갖고 함께 나누는 친밀한 관계를 가리킨다. (“나누는 일; 친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에 관해 설명하는 행 2:42 연구 노트 참조) 이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목표를 함께 추구하고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 아래 서로 협력하여 일하면 세상이 깨뜨릴 수 없는 연합을 이루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빌 2:2 연구 노트 참조) 한 성경 사전에서는 이 구절에 사용된 그리스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처럼 함께 나누려면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후 13:14. 요 17:21 연구 노트 참조.

부드러운 애정: 이 문맥에서 그리스어 스플랑크논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강렬한 감정을 가리킨다.—고후 6:12 연구 노트 참조.

영적인 친교: 또는 “영을 함께 나누는 일”. 이 표현은 서로 관심을 갖고 함께 나누는 친밀한 관계를 가리킨다. (“나누는 일; 친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에 관해 설명하는 행 2:42 연구 노트 참조) 이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목표를 함께 추구하고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 아래 서로 협력하여 일하면 세상이 깨뜨릴 수 없는 연합을 이루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빌 2:2 연구 노트 참조) 한 성경 사전에서는 이 구절에 사용된 그리스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처럼 함께 나누려면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후 13:14. 요 17:21 연구 노트 참조.

온전히 연합하여: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신프시코스)는 (함께)과 프시케(“영혼”으로 번역되기도 함)가 결합된 말로, “영혼이 연합되고(함께 결합되고)”로 번역할 수도 있다. 바울은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이 연합을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문맥에서 이 표현을 비롯한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한다.—빌 2:1 연구 노트 참조.

자기중심적이 되어: 바울은 “육체의 일”과 “영의 열매”를 대조한 후에 (갈 5:19-23) 이 구절에 나오는 권고를 덧붙인다. “자기중심적”으로 번역된 그리스어(케노독소스)는 문자적으로 “헛된 영광; 허영”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한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자기 자신을 부풀려서 생각하는 것, 자만하는 것, 자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이 단어에는 무가치하고 헛된 이유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기를 강하게 열망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을 수 있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그리스어 단어가 빌 2:3에도 나온다.

겸손히: 겸손은 교만하거나 오만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겸손은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보는지로 나타난다. 겸손은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정신 상태이다. 진정으로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은 연합하여 함께 일할 수 있다. (엡 4:2; 빌 2:3; 골 3:12; 벧전 5:5)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나오는 타페이노프로시네(“겸손”)는 “낮추다”라는 의미인 타페이노오와 “정신”을 의미하는 프렌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는 “자기를 낮추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타페이노스는 “겸손하다”(마 11:29)나 “겸손한 사람들”(약 4:6; 벧전 5:5)로 번역되었다.—마 11:29 연구 노트 참조.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을 가리킨다.—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그리스어가 사용된 갈 5:26 연구 노트 참조.

겸손하게: 또는 “자기를 낮추는 정신으로”.—행 20:19 연구 노트 참조.

남을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십시오: 또는 “남을 자기보다 더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십시오”.—롬 12:3; 고전 10:24; 빌 2:4.

이러한 정신 태도를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또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여러분 안에 가지십시오”. 문맥을 보면 예수께서 가지셨던 “이러한 정신 태도”가 겸손한 태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빌 2:3, 4.

하느님은 영이십니다: 여기서 그리스어 프뉴마는 영적 존재를 가리킨다. (용어 설명 “” 참조) 성경은 하느님과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와 천사들이 모두 영이라고 알려 준다. (고전 15:45; 고후 3:17; 히 1:14) 영은 사람과는 매우 다른 형태의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영적 존재는 “육적인 몸”보다 훨씬 고등한 “영적인 몸”을 가지고 있다. (고전 15:44; 요 1:18) 성경에서 하느님을 얼굴, 눈, 귀, 손 등이 있는 분으로 묘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비유적인 표현이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인격체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계시다고 분명히 알려 준다. 또한 그분은 물질계가 아닌 영계에 존재하시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 간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요 16:28) 히 9:24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그 자체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해 하느님 앞에 나타나 계신다”고 알려 준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고 계셨지만: “모습”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모르페)는 기본적으로 “본성; 겉모습; 모양; 닮은 것”을 가리킨다. “하느님이 영이신” 것처럼 예수께서도 영적 존재이셨다. (요 4:24연구 노트) 예수께서 “종의 모습”을 취하여 “육체가 되신” 즉 사람이 되신 것을 가리키는 데도 동일한 그리스어가 사용되었다.—요 1:14; 빌 2:7.

하느님과 동등하게 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는 “하느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장악해야(취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께서 나타내신 것과 같은 훌륭한 태도를 길러 나가도록 격려한다. 빌 2:3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남을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라”고 말한다. 5절에서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던 이러한 정신 태도를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하느님을 더 나은 분으로 여기신 예수께서는 결코 “하느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 순종하셨다.” (빌 2:8; 요 5:30; 14:28; 고전 15:24-28) 마귀는 예수와 전혀 다른 태도를 나타냈다. 마귀는 하와에게 하느님처럼 되라고, 즉 그분과 동등하게 되라고 부추겼다. (창 3:5) 바울이 여기서 강조한 요점, 다시 말해 겸손과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예수께서는 완벽하게 모범으로 보여 주셨다.—이 구절에 나오는 ~하게 되려는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하게 되려는: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명사 하르파그모스(직역하면 “장악해야 할 것”)는 기본적으로 “장악하다; 채어 가다”를 의미하는 동사 하르파조에서 나온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 단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계속 보유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 단어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계속 보유한다는 의미로 결코 쓰이지 않는다. 이 단어는 “차지하다”나 “빼앗다”, “채어 가다”와 같은 표현들로 자주 번역된다. (마 11:12; 12:29; 13:19; 요 6:15; 10:12, 28, 29; 행 8:39; 23:10; 고후 12:2, 4; 살전 4:17; 유 23; 계 12:5) 예수께서 “하느님과 동등하게 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셨다”는 표현을 볼 때 그분이 하느님과 동등한 적이 결코 없었음이 분명하다.

자신을 비우고: “비우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어떤 것의 내용물을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은 그 단어를 예수와 관련된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예수께서는 땅에서 사람으로 살면서 고통을 당하기 위해 영적 존재로서의 삶을 포기하셨다. 천사들이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 위해 육의 몸을 입은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천사들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영의 몸과, 영적 존재로서 누리던 영광과 특권을 완전히 포기하셨다. 이제껏 그 어떤 인간이 치른 희생도 예수께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포기하신 것에 비할 수 없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고 계셨지만: “모습”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모르페)는 기본적으로 “본성; 겉모습; 모양; 닮은 것”을 가리킨다. “하느님이 영이신” 것처럼 예수께서도 영적 존재이셨다. (요 4:24연구 노트) 예수께서 “종의 모습”을 취하여 “육체가 되신” 즉 사람이 되신 것을 가리키는 데도 동일한 그리스어가 사용되었다.—요 1:14; 빌 2:7.

사람으로 오셨을 때에: 직역하면 “사람의 모습으로 계셨을 때에”.—빌 2:6 연구 노트 참조.

형주: 또는 “고통의 기둥”. 예수께서는 범죄를 저지르고 신성을 모독했다는 누명을 쓴 채 기꺼이 ‘형주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 겸손과 순종에 대한 가장 강력한 교훈을 남기셨다. (마 26:63-66; 눅 23:33. 용어 설명 “기둥(2)”; “형주” 참조) 그분은 인간이 극도로 시험을 받을 때에도 여호와께 충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문의 여지 없이 증명하셨다.—요 5:30; 10:17; 히 12:2.

하느님의 은혜: 또는 “과분한 친절”. 그리스어 카리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150회 이상 나오며,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카리스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과분한 친절을 가리킬 때는, 그분이 무엇인가를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주시는 관대한 선물을 뜻한다. 이 단어는 받을 만한 노력도 하지 않았고 받을 자격도 없는 대상에게 하느님께서 관대한 마음에서 우러나와 베푸시는 풍성한 선물, 관대한 사랑과 친절을 가리킨다. (롬 4:4; 11:6) 하지만 이 단어가 언제나, 친절을 받는 대상이 자격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하느님으로부터 이 은혜 즉 친절을 받으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와 관련된 문맥에서는 이 단어가 이 구절에서처럼 “하느님의 은혜”로 번역되거나 “호의”로 번역되었다. (눅 2:40, 52) 다른 문맥에서 이 그리스어 단어는 “은혜”, “호의”, “고마운 선물”로 번역되었다.—눅 1:30; 행 2:47; 7:46; 고전 16:3; 고후 8:19, 각주.

내 이름 때문에: 성경에서 “이름”이라는 말은 때때로 그 이름을 지닌 사람 자신이나 그의 평판,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마 6:9 연구 노트 참조) 예수의 경우, 그분의 이름은 아버지께서 주신 권한과 지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마 28:18; 빌 2:9, 10; 히 1:3, 4)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그분의 이름이 상징하는 것, 즉 하느님께서 임명하신 통치자이자 왕들의 왕, 생명을 얻기 위해 모든 사람이 복종해야 할 분으로서의 그분의 지위 때문에 사람들이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요 15:21 연구 노트 참조.

친절하시게도 … 주셨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 카리조마이는 그리스어 카리스와 어근이 같은데, 카리스는 “과분한 친절”로 자주 번역되지만 “하느님의 은혜”로 번역되기도 한다. (요 1:14연구 노트) 이 문맥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께서 사랑 넘친 관대함과 은혜로 예수에게 높여진 이름, 즉 “다른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는 사상을 전달한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아들에게 그러한 이름을 주실 수 있는 것을 볼 때,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예수보다 더 크신 분이며 예수께서는 아버지보다 낮은 위치에 계신 분임이 분명하다. (요 14:28; 고전 11:3) 따라서 이처럼 높여진 지위로 인해 예수께 돌아가는 모든 영예는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빌 2:11.

다른 모든 이름: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를 직역하면 “모든 이름”(「왕국 행간역」[Kingdom Interlinear])이 된다. 실제로 많은 번역판에서는 그런 번역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럴 경우 예수의 이름이 하느님의 이름보다 더 뛰어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표현은 문맥에 조화되지 않는다. 바울이 이 구절에서 “하느님께서는 그분[예수]을 탁월한 위치로 높이시고 친절하시게도 그분에게 … 이름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일부 문맥에서 “다른 모든”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한 예로 눅 13:2(“다른 모든”); 눅 21:29(“다른 모든”); 빌 2:21(“다른 사람들은 모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문맥과 이 그리스어가 다른 구절들에서 사용된 방식을 볼 때 이 표현을 “다른 모든”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의 이름이 그분에게 그 이름을 주신 분인 여호와의 이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름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설명한 것이다.—또한 고전 15:28 참조.

이름: 성경에서 “이름”이라는 표현은 단지 다른 대상과 구별시켜 주는 말일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 24:9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하느님께서 예수에게 주신 “이름”은 예수께서 아버지에게서 받은 권위와 지위를 상징한다. 빌립보서 2장의 내용을 볼 때 예수께서는 부활되신 후에 그처럼 높여진 이름을 받으셨다.—마 28:18; 빌 2:8, 10, 11; 히 1:3, 4.

이름으로: “이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오노마에는 개인의 이름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다. 이 문맥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권위와 지위를 인정하고 성령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누리게 된다.—마 10:41 연구 노트 비교.

예수의 이름 앞에 …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지성 있는 피조물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예수의 지위를 인정하고 그분의 권위에 복종한다는 의미이다.—마 28:19 연구 노트 참조.

땅 아래 있는 자들: 죽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죽은 사람들이 “기념 무덤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요 5:28, 29) 무덤에서 부활되면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빌 2:11.

예수가 주이심을: 예수께서 땅에 계실 때 그분의 제자가 아닌 사람들도 그분을 “주”라고 불렀다. “주”라는 표현을 존경심이나 예의를 나타내는 칭호로 사용한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가 그분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도 존경심의 표현이었다. 성경 필자들이 사용한 이 그리스어 단어(키리오스)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문맥에 따라 “선생님”, “주인”, “주”로 번역될 수 있다. (마 8:2; 요 4:11) 하지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의 제자들(학생들)이 그분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을 주인 즉 주로 인정한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요 13:13, 16) 특히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되어 하늘에서 높은 지위를 갖게 되신 후로는 주라는 칭호가 더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바치심으로 제자들을 사셨으며, 그렇게 하여 그들의 주인이자 (고전 7:23; 벧후 2:1; 유 4; 계 5:9, 10) 왕이 되셨다. (골 1:13; 딤전 6:14-16; 계 19:16) 예수를 주로 인정하는 것에는 단지 그분을 주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관련된다. 참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지위를 인정하고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마 7:21; 빌 2:9-11.

주: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키리오스는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명사로 사용된다. 엄밀히 말하면 이 단어는 형용사로서 능력(키로스)이나 권위를 소유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디도서와 요한의 편지들을 제외하고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모든 책에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아들이자 종이므로, 그분이 자신의 아버지이자 하느님을 (요 20:17) “주”(키리오스) 즉, 더 탁월한 능력과 권위를 소유하신 분, 자신의 머리라고 부르시는 것은 합당하다. (마 11:25; 고전 11:3) 하지만 성경에서 “주”라는 칭호가 여호와 하느님께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칭호는 예수 그리스도(마 7:21; 롬 1:4, 7), 요한이 환상 가운데서 본 하늘의 장로들 가운데 하나(계 7:13, 14), 천사들(단 12:8), 사람들(행 16:16, 19, 30. “주인들”, “선생님들”로 번역됨), 거짓 신들(고전 8:5)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된다. 일부 사람들은 “예수가 주이시다”라는 표현이 예수와 그분의 아버지인 여호와가 동일한 인격체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맥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알려 주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지신 주로서의 권위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었다.—마 28:18; 요 3:35; 5:19, 30. 이 구절에 나오는 예수가 주이심을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예수가 주이심을: 예수께서 땅에 계실 때 그분의 제자가 아닌 사람들도 그분을 “주”라고 불렀다. “주”라는 표현을 존경심이나 예의를 나타내는 칭호로 사용한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가 그분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도 존경심의 표현이었다. 성경 필자들이 사용한 이 그리스어 단어(키리오스)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문맥에 따라 “선생님”, “주인”, “주”로 번역될 수 있다. (마 8:2; 요 4:11) 하지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의 제자들(학생들)이 그분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을 주인 즉 주로 인정한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요 13:13, 16) 특히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되어 하늘에서 높은 지위를 갖게 되신 후로는 주라는 칭호가 더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바치심으로 제자들을 사셨으며, 그렇게 하여 그들의 주인이자 (고전 7:23; 벧후 2:1; 유 4; 계 5:9, 10) 왕이 되셨다. (골 1:13; 딤전 6:14-16; 계 19:16) 예수를 주로 인정하는 것에는 단지 그분을 주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관련된다. 참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지위를 인정하고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마 7:21; 빌 2:9-11.

공개적으로 전하고: 그리스어 호몰로게오는 일부 성경에서 “고백하다”로 번역되었다. 많은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공개적으로 전하다(인정하다)”로 정의한다. 10절에서는 이 동사가 “공개적 선언을 하다”로 번역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마음으로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 믿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시 40:9, 10; 96:2, 3, 10; 150:6; 롬 15:9) 그리스도인들은 침례를 받을 때와 같은 경우에 단 한 번 그러한 공개적 선언을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공개적 선언을 한다. 그들은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모일 때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구원에 관한 좋은 소식을 선포할 때 계속 공개적 선언을 한다.—히 10:23-25; 13:15.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롬 10:9 연구 노트 참조.

‘주’: 롬 10:9 연구 노트 참조. 일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는 표현이 예수와 그분의 아버지 여호와가 동일한 인격체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맥을 볼 때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탁월한 위치로 높이시고 친절하시게도 그분에게 다른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알려 주기 때문이다.—빌 2:9. 롬 10:9 연구 노트 참조.

공개적으로 인정하여: 또는 “공개적으로 전하여; 고백하여”. 문맥을 보면 그렇게 인정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시키셨다고 확신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롬 10:9 연구 노트 비교.

임재: 그리스어 파루시아(많은 번역판에서는 “오다”라는 동사를 사용해서 이 단어를 번역한다)는 문자적으로 “곁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단지 오거나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 동안 머물러 있는 것을 가리킨다. 마 24:37-39에서 “노아의 날 ··· 홍수 이전 시대”를 “‘사람의 아들’의 임재”에 비한 것을 보면 파루시아에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빌 2:12에서 “함께 있을 때”로 번역된 표현에도 동일한 그리스어가 사용되었는데, 바울은 이 단어를 “떨어져 있을 때”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그리스도의 임재 중에: 임재라는 표현은 예수의 몇몇 제자가 ‘그분의 임재의 표징’에 관해 질문하는 내용이 나오는 마 24:3에서 처음 사용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란 그분이 현 세상 제도의 마지막 날이 시작될 때 메시아 왕으로 보이지 않게 즉위하셔서 왕으로서 와 계시는 상태를 가리킨다. “임재”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파루시아이다. 많은 번역판에서는 “오다”라는 동사를 사용해서 이 단어를 번역하지만,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곁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분의 임재는 단지 그분이 오시거나 도착하시는 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계속되는 일이었다. 마 24:37-39에서 “노아의 날 ··· 홍수 이전 시대”를 “‘사람의 아들’의 임재”에 비한 것을 보면 파루시아에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빌 2:12에서 “함께 있을 때”로 번역된 표현에도 파루시아가 사용되었는데, 바울은 이 단어를 “떨어져 있을 때”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고전 16:17 연구 노트 참조) 따라서 여기서 바울은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의 형제들이자 공동 상속자들 즉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하늘 생명으로 부활되는 일이 예수께서 하늘에서 하느님의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시고 얼마 후에 있을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내가 다시 여러분과 함께 있게 될 때: 여기서 바울은 문자적으로 “곁에 있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명사 파루시아를 사용했다. 이 단어는 “임재”로 자주 번역되는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임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마 24:37; 고전 15:23) 여기서 바울은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방문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 빌 2:12(연구 노트 참조)에서 바울이 파루시아(“함께 있을 때”)를 “떨어져 있을 때”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한 것을 볼 때, 이 단어를 “함께 있는” 것 또는 “임재”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 24:3; 고전 16:17 연구 노트 참조.

함께 있을 때 … 떨어져 있을 때: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는 기간을 가리켜 그리스어 파루시아를 사용한다. 바울이 이 그리스어를 아푸시아 즉 “떨어져 있을 때”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이 단어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임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예수의 임재는 현 세상 제도의 마지막 날이 시작될 때 그분이 하늘에서 메시아 왕으로 즉위하시면서 시작되었다.—마 24:3; 고전 15:23; 빌 1:26 연구 노트 참조.

계속 이루어 나가십시오: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기본적으로 “성취하다; 달성하다”를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이 동사는 계속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형태로 되어 있어서, 어떤 일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여러분에게 힘을 주시고: 또는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고”. 그리스어 에네르게오는 이 구절에 2번 나오는데, “힘을 주시고”와 “행할 능력을 주시는”으로 번역되었다. 하느님의 성령 즉 활동력은 우주에서 우리에게 능력 즉 힘을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근원이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사용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 1:2; 시 104:30; 사 40:26)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종들이 힘이 빠질 때 성령을 사용해 필요한 힘 즉 “행할 능력”을 주신다. (사 40:31) 또한 여호와의 영은 필요에 따라 어떤 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을 향상시켜 줄 수 있다. (눅 11:13; 고후 4:7) 사도 바울은 자신이 열심히 노력할 때 하느님께서 지원해 주시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빌 4:13; 골 1:29.

의욕 … 을 주시는: 과거에 살았던 하느님의 종들 중 일부는 낙담이나 개인적인 약점 같은 것들 때문에 하느님을 섬기려는 의욕을 잃었다. 심지어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왕상 19:4; 시 73:13, 14; 욘 4:2, 3) 여기서 바울은 그처럼 의욕이 없을 때 하느님께서 기꺼이 의욕을 주신다고 말한다. 그분은 특히 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그렇게 하신다.—시 51:10, 11; 73:17, 18.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이 투덜거린 것처럼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여러 번 여호와께 불평하며 투덜거렸다. 예를 들어, 그들은 가나안 땅을 살피고 돌아온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이 나쁜 보고를 했을 때 모세와 아론을 심하게 비난했다. 그들은 모세 대신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자고 제안하기까지 했으며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민 14:1-4) 후에 반역자들인 고라, 다단, 아비람과 그들의 편에 선 자들이 멸망되자 “온 회중이 ··· 투덜거렸다.” 그처럼 투덜거린 사람들은 그러한 처벌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한 것 같으며, 그들의 불평하는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재앙을 가져오셨으며, 그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 1만 47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민 16:41, 49)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투덜거린 것을 그분 자신에게 투덜거린 것으로 여기셨다.—민 17:5.

투덜거리거나: 투덜거리는 것은 불평하거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대개 공개적으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계속 투덜거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동조를 얻으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이나 입장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겨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의를 이끌 수 있다. 그러한 행동은 동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켜, 연합하여 여호와를 섬기려는 그들의 노력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기원 55년경에 바울은 고린도 회중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투덜거려 여호와를 노엽게 했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고전 10:10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모든 불평이 다 하느님을 불쾌하시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구절에 사용된 그리스어가 행 6:1에도 나오는데, 그 구절에서는 예루살렘의 그리스어를 하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과부들이 물질적으로 소홀히 여겨졌기 때문에 “불평하기 시작했다”고 알려 준다. 그로 인해 사도들이 그러한 상황을 바로잡게 되었다.—행 6:1-6.

봉사 활동: 또는 “공적 봉사의 직무”. 여기서 바울은 예루살렘과 유대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한 “봉사의 직무” 즉 구호 활동을 가리켜 “공적 봉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한 봉사 활동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참으로 큰 유익을 주었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는 레이투르기아인데,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단어들로는 레이투르게오(공적 봉사를 행하다)와 레이투르고스(공적 봉사자; 공복)가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이 단어들을 국가나 행정 당국을 위해 수행되며 일반 대중에게 유익을 주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일이나 봉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단어들은 성전에서 수행되는 봉사나 그리스도인이 수행하는 봉사의 직무를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다. 그러한 용법을 보려면 눅 1:23; 행 13:2; 롬 13:6; 15:16 연구 노트를 참조할 수 있다.

거룩한 봉사: 또는 “공적 봉사”.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는 레이투르기아인데,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단어들로는 레이투르게오(공적 봉사를 행하다)와 레이투르고스(공적 봉사자; 공복)가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이 단어들을 국가나 행정 당국을 위해 수행되며 일반 대중에게 유익을 주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일이나 봉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예를 들어, 롬 13:6(각주)에서는 세속 권위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봉사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공복”(레이투르고스의 복수형)이라고 불린다. 이 구절에서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칠십인역」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과 비슷한데, 「칠십인역」에서는 이 단어의 동사형과 명사형이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수행하는 성전 봉사를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다. (출 28:35; 민 8:22) 성전에서 수행되던 봉사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공적 봉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봉사에는 거룩함이라는 개념도 들어 있었는데, 레위 제사장들이 하느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백성의 죄를 덮는 희생 제물을 바쳤기 때문이다.—대하 15:3; 말 2:7.

섬기며: 또는 “공적 봉사를 행하며”.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는 레이투르게오인데,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단어들로는 레이투르기아(공적 봉사)와 레이투르고스(공적 봉사자; 공복)가 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이 단어들을 국가나 행정 당국을 위해 수행되며 일반 대중에게 유익을 주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일이나 봉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예를 들어, 롬 13:6(각주)에서는 세속 권위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봉사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공복”(레이투르고스의 복수형)이라고 불린다. 눅 1:23(연구 노트 참조)에서는 레이투르기아가 침례자 요한의 아버지 스가랴가 수행한 봉사와 관련하여 사용되어 “거룩한 봉사”(또는 “공적 봉사”)로 번역되었다. 그 구절에서 레이투르기아가 사용된 방식은 「칠십인역」에서 레이투르기아 및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단어들이 사용된 방식과 비슷하다. 「칠십인역」에서는 그 단어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장막이나 (출 28:35; 민 1:50; 3:31; 8:22) 성전에서 (대하 31:2; 35:3; 욜 1:9, 13; 2:17) 수행한 봉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한 봉사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봉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 문맥에서는 그 봉사에 거룩함이라는 개념도 들어 있었는데, 레위 제사장들이 하느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대하 15:3; 말 2:7) 백성의 죄를 덮는 희생 제물을 바쳤기 때문이다. (레 1:3-5; 신 18:1-5) 이 구절(행 13:2)에서 레이투르게오는 시리아 안티오크의 회중에서 그리스도인 예언자들과 가르치는 사람들이 수행한 봉사를 가리키는 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하느님께 정성을 바치고 그분을 섬기기 위해 하는 다양한 일을 가리키는데, 그 가운데에는 기도하고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의 여러 부면이 포함된다. 이 예언자들과 가르치는 사람들이 수행한 봉사에는 틀림없이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일이 포함되었을 것이다.—행 13:3.

일꾼: 또는 “공복”.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는 레이투르고스(공적 봉사자; 공복)인데,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단어들로는 레이투르게오(공적 봉사를 행하다)와 레이투르기아(공적 봉사)가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이 단어들을 국가나 행정 당국을 위해 수행되며 일반 대중에게 유익을 주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일이나 봉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이 그리스어 단어들은 “백성; 민족; 사람들”을 의미하는 라오스와 “일”을 의미하는 에르곤에서 유래했다.) 이 구절에서는 세속 권위들이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일꾼” 즉 공복(레이투르고스의 복수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그리스어 단어들은 성전에서 수행되는 봉사나 그리스도인이 수행하는 봉사의 직무를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다. 그러한 용법을 보려면 눅 1:23; 행 13:2; 롬 15:16 연구 노트를 참조할 수 있다.

일꾼: 또는 “공복”. 그리스어 레이투르고스는 “백성; 민족; 사람들”을 의미하는 라오스와 “일”을 의미하는 에르곤에서 유래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원래 이 단어를 행정 당국의 감독 아래 일반 대중에게 유익을 주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일을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그러한 일은 대개 개인의 비용으로 수행되었다. 로마 제국에서도 그와 비슷한 마련이 시행되었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주로 신성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레이투르기아「칠십인역」에서는 장막이나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이 수행하는 “임무”(민 7:5)나 “봉사”(민 4:28; 대상 6:32[6:17, LXX])를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다. 여기서 바울은 하느님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도록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진 사도”인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레이투르고스를 사용한다. (롬 11:13) 이 전파 활동은 일반 대중, 특히 이방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줄 것이었다.

거룩한 봉사: 또는 “공적 봉사”. 바울은 이 단어를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를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 그는 빌립보의 동료 숭배자들을 위해 사랑으로 부지런히 봉사했으며, 그것은 그들에게 참으로 유익이 되었다.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러한 봉사를 수행했다. 로마의 식민 도시인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어 레이투르기아를 보고 공공의 유익을 위해 시민이 의무적으로 수행하는 봉사를 떠올렸을 수 있다. (고후 9:12 연구 노트 참조) 그러한 의무를 이행하는 데는 비용이 들었으므로,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은 충실한 봉사에는 개인적인 희생이 따른다는 점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그리스어 단어와 그와 어근이 같은 단어들은 성전 봉사나 그리스도인의 봉사의 직무를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다. 그러한 용법을 보려면 눅 1:23; 행 13:2; 롬 13:6; 15:16 연구 노트를 참조할 수 있다.

내가: 또는 “내 생명이”.—이 구절에 나오는 내가 음료 제물처럼 부어지고 있다 해도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내가 음료 제물처럼 부어지고 있다 해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부분의 제물을 바칠 때 포도주를 제단에 부어 음료 제물로 함께 바쳤다. (레 23:18, 37; 민 15:2, 5, 10; 28:7)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음료 제물에 비한다. 그는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희생을 바치고 하느님께 “거룩한 봉사”를 드리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자신을 기꺼이 쏟아 부으려는 마음을 표현했다. (고후 12:15 비교) 그는 죽기 얼마 전에 디모데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나는 이미 음료 제물처럼 부어지고 있으며, 놓일 때가 임박했습니다.”—딤후 4:6.

‘아피오 장터’: 또는 “아피오 광장”. 라틴어 아피이 포룸.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약 6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장터였다. 이곳은 로마의 유명한 간선 도로인 아피아 가도에 있던 널리 알려진 역참이었다. 아피아 가도는 로마에서 카푸아를 거쳐 브룬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까지 뻗어 있었다. 아피아 가도와 아피오 장터라는 이름은 건설자인 기원전 4세기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이 역참은 로마에서 출발한 여행자들이 일반적으로 첫날 여행을 마칠 때 쉬어 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교역 중심지이자 장터 역할을 했다. 이곳이 중요한 곳으로 여겨졌던 또 다른 이유는, 폰티노 습지를 가로지르는 도로 구간을 따라 나 있는 운하를 이곳에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자들은 노새가 끄는 배를 타고 밤에 이 운하를 통해 이동했다고 한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그 여행이 얼마나 불편한지 설명하면서 개구리와 벌레가 많은 것에 대해 불평했다. 또한 아피오 장터가 “뱃사공들과 인색한 여관 주인들이 가득한” 곳이라고 묘사했다. (「풍자시」[Satires], I, V, 1-6) 하지만 로마에서 온 형제들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로마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동행하기 위해 그러한 불편을 감수하면서 기꺼이 그들을 기다렸다. 오늘날 아피아 가도에는 포로 아피오 즉 아피오 광장이 있던 곳에 보르고파이티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부록 나13 참조.

나는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는 디모데가 로마에서 빌립보까지 육로로 갈 예정이었는지 배편으로 갈 예정이었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당시 사람들은 그러한 여행을 할 때 로마의 광대한 도로망에 속해 있는 간선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거나 배편을 이용했다. 어떤 방법으로 가든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디모데가 살던 당시에는 배편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배를 타고 간다 해도 날씨에 상관없이 승객들은 갑판 위에서 지내며 잠을 자야 했다. 파도가 거세게 일면 승객들은 멀미에 시달렸으며 배가 파선되기도 했다. 육로를 이용할 경우 빌립보까지 가는 데는 약 40일이 걸렸을 것이다. 아마도 먼저 아피아 가도를 따라가다가 짧은 경로로 아드리아 바다를 건넌 다음 다시 육로로 갔을 것이다. 아마도 에그나티아 가도로 여행하여 빌립보에 도착했을 것이다. (부록 나13 참조) 도보로 여행하다 보면 햇빛이 내리쬐기도 하고 비가 오기도 했으며 더위나 추위를 견뎌야 했을 것이다. 또한 강도를 만나게 될 위험도 있었다. 저술가들에 따르면 당시의 여관은 지저분하고 사람들로 넘쳐 나고 습기가 많고 벼룩이 들끓었으며 질이 낮은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행 28:15 연구 노트 비교) 하지만 바울은 디모데가 그러한 어려움을 감수하고 빌립보로 갈 것이며 다시 로마로 돌아오는 여행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해서 바울은 디모데를 통해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상태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될 것이었다.

우울해하고 있기: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는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스러워하신 일에 관한 기록에서 “몹시 괴로워하다”로 번역되었다. (마 26:37; 막 14:33) 한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염려하다; 근심하다; 괴로워하다”로 정의한다. 에바브로디도가 몹시 괴로워한 이유는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빌립보 회중 사람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바울을 돕지 못하고 오히려 그에게 짐이 되었다는 인상을 그들에게 주었을까 봐 염려가 되었을 것이다. 에바브로디도가 회복되고 얼마 후에 바울은 그를 빌립보로 돌려보내면서 빌립보 회중에 보내는 편지를 전달하게 했다. 그 편지에서 (빌 2:25-29)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일찍 돌아가는 이유를 설명함으로 그가 충실하고 소중한 사람임을 빌립보 회중 사람들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분명 에바브로디도도 그 편지의 내용을 통해 자신이 그러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을 알고 안심이 되었을 것이다.—빌 2:25, 30 연구 노트 참조.

자기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했으며: 또는 “자기 영혼을 위험에 처하게 했으며”. 에바브로디도가 로마로 가서 그곳에 수감되어 있던 바울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려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1세기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그는 여행을 하다가 비위생적인 환경에 노출되었거나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숙소에 머물렀을 수 있다. 그가 “병들어 거의 죽을 뻔”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수 있다. (빌 2:26, 27)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그리스도의 일로 인해 죽을 뻔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바울에게는 에바브로디도를 칭찬하고 빌립보 회중 사람들에게 “주 안에서 그를 관례대로 환영”하고 “그와 같은 사람들을 계속 소중히 여기라”고 권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빌 2:29. 빌 2:25, 26 연구 노트 및 용어 설명 “영혼” 참조.

브리스가와 아굴라: 기원 49년이나 50년 초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들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명령했을 때, 이 충실한 부부도 추방되었다. 클라우디우스는 기원 54년에 사망했으며,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쓴 때인 기원 56년경에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이미 로마에 돌아와 있었다. (행 18: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그들을 자신의 동료 일꾼들로 언급한다. “동료 일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시네르고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12번 나오며, 대부분 바울의 편지들에 나온다. (롬 16:9, 21; 빌 2:25; 4:3; 골 4:11; 몬 1, 24) 유의할 만하게도 고전 3:9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동료 일꾼입니다.”

하느님의 동료 일꾼: “동료 일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시네르고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10번 이상 나오며, 대부분 바울의 편지들에 나온다. 이 표현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롬 16:9, 21; 고후 1:24; 8:23; 빌 2:25; 4:3; 골 4:11; 몬 1, 24)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봉사자들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동료 일꾼”으로 일하는 큰 특권으로 주의를 이끈다. (고전 3:6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고후 6:1에서도 “그분[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다.—고후 5:20. 롬 16:3 연구 노트 참조.

에바브로디도: 빌립보 회중에 있던 신뢰할 만한 그리스도인으로, 이 편지에서만 언급된다. 빌립보 회중 사람들은 당시 로마에 수감되어 있던 바울에게 선물을 가져가도록 그를 보냈다. 에바브로디도는 로마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바울에게 도움을 더 베풀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으며 그로 인해 예상보다 일찍 빌립보로 돌아가게 되었다.—빌 2:27, 28. 빌 2:26, 30 연구 노트 참조.

동료 일꾼: 롬 16:3; 고전 3:9 연구 노트 참조.

사절: 또는 “사도”. 바울은 “사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아포스톨로스)를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이 단어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나 “사절”이나 “사자”를 의미할 수 있다. 에바브로디도는 당시 로마에 수감되어 있던 바울에게 선물을 전달하기 위해 빌립보 회중의 대표자로 파견된 사람이었다.

에바브로디도: 빌립보 회중에 있던 신뢰할 만한 그리스도인으로, 이 편지에서만 언급된다. 빌립보 회중 사람들은 당시 로마에 수감되어 있던 바울에게 선물을 가져가도록 그를 보냈다. 에바브로디도는 로마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바울에게 도움을 더 베풀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으며 그로 인해 예상보다 일찍 빌립보로 돌아가게 되었다.—빌 2:27, 28. 빌 2:26, 30 연구 노트 참조.

자기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했으며: 또는 “자기 영혼을 위험에 처하게 했으며”. 에바브로디도가 로마로 가서 그곳에 수감되어 있던 바울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려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1세기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그는 여행을 하다가 비위생적인 환경에 노출되었거나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숙소에 머물렀을 수 있다. 그가 “병들어 거의 죽을 뻔”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수 있다. (빌 2:26, 27)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그리스도의 일로 인해 죽을 뻔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바울에게는 에바브로디도를 칭찬하고 빌립보 회중 사람들에게 “주 안에서 그를 관례대로 환영”하고 “그와 같은 사람들을 계속 소중히 여기라”고 권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빌 2:29. 빌 2:25, 26 연구 노트 및 용어 설명 “영혼” 참조.

여러분 모두를 간절히 보고 싶어 하며: 일부 고대 사본들에는 “보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빠져 있으며, 그러한 사본들에 근거하여 “여러분 모두를 사모하며”로 번역한 성경 번역판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사본상의 증거를 볼 때 현재 본문의 표현을 사용할 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다. 어떤 사본의 표현을 사용하든, 바울이 한 말의 전반적인 취지는 동일하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부록 가3 참조.

우울해하고 있기: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는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스러워하신 일에 관한 기록에서 “몹시 괴로워하다”로 번역되었다. (마 26:37; 막 14:33) 한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염려하다; 근심하다; 괴로워하다”로 정의한다. 에바브로디도가 몹시 괴로워한 이유는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빌립보 회중 사람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바울을 돕지 못하고 오히려 그에게 짐이 되었다는 인상을 그들에게 주었을까 봐 염려가 되었을 것이다. 에바브로디도가 회복되고 얼마 후에 바울은 그를 빌립보로 돌려보내면서 빌립보 회중에 보내는 편지를 전달하게 했다. 그 편지에서 (빌 2:25-29)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일찍 돌아가는 이유를 설명함으로 그가 충실하고 소중한 사람임을 빌립보 회중 사람들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분명 에바브로디도도 그 편지의 내용을 통해 자신이 그러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을 알고 안심이 되었을 것이다.—빌 2:25, 30 연구 노트 참조.

에바브로디도: 빌립보 회중에 있던 신뢰할 만한 그리스도인으로, 이 편지에서만 언급된다. 빌립보 회중 사람들은 당시 로마에 수감되어 있던 바울에게 선물을 가져가도록 그를 보냈다. 에바브로디도는 로마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바울에게 도움을 더 베풀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으며 그로 인해 예상보다 일찍 빌립보로 돌아가게 되었다.—빌 2:27, 28. 빌 2:26, 30 연구 노트 참조.

우울해하고 있기: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는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스러워하신 일에 관한 기록에서 “몹시 괴로워하다”로 번역되었다. (마 26:37; 막 14:33) 한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염려하다; 근심하다; 괴로워하다”로 정의한다. 에바브로디도가 몹시 괴로워한 이유는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빌립보 회중 사람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바울을 돕지 못하고 오히려 그에게 짐이 되었다는 인상을 그들에게 주었을까 봐 염려가 되었을 것이다. 에바브로디도가 회복되고 얼마 후에 바울은 그를 빌립보로 돌려보내면서 빌립보 회중에 보내는 편지를 전달하게 했다. 그 편지에서 (빌 2:25-29)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일찍 돌아가는 이유를 설명함으로 그가 충실하고 소중한 사람임을 빌립보 회중 사람들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분명 에바브로디도도 그 편지의 내용을 통해 자신이 그러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을 알고 안심이 되었을 것이다.—빌 2:25, 30 연구 노트 참조.

자기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했으며: 또는 “자기 영혼을 위험에 처하게 했으며”. 에바브로디도가 로마로 가서 그곳에 수감되어 있던 바울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려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1세기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그는 여행을 하다가 비위생적인 환경에 노출되었거나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숙소에 머물렀을 수 있다. 그가 “병들어 거의 죽을 뻔”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수 있다. (빌 2:26, 27)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그리스도의 일로 인해 죽을 뻔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바울에게는 에바브로디도를 칭찬하고 빌립보 회중 사람들에게 “주 안에서 그를 관례대로 환영”하고 “그와 같은 사람들을 계속 소중히 여기라”고 권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빌 2:29. 빌 2:25, 26 연구 노트 및 용어 설명 “영혼” 참조.

그리스도의 일: 달리 번역하면 “주의 일”. 일부 고대 사본에는 “그리스도의”가 아니라 “주의”로 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 본문의 표현이 사본상으로 더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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