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 전서 6:1-21

6  종살이의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들은 계속 자기 주인을 온전히 존중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이름과 가르침이 비방을 받는 일이 결코 없을 것입니다.+ 2  더욱이 믿는 사람을 주인으로 둔 사람들은 그가 형제라고 해서 불경스럽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기들이 잘 섬겨서 유익을 얻는 사람이 동료 신자이며 사랑하는 사람이므로 더욱 기꺼이 섬겨야 합니다. 계속해서 이러한 것을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3  어떤 사람이 다른 교리를 가르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건전한 교훈이나+ 경건한 정성과 일치한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4  그는 교만으로 우쭐해져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논쟁과 말에 대한 토론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시기와 분쟁과 중상과 악한 의심을 일으키며, 5  정신이 부패하고+ 진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사소한 일들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을 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경건한 정성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6  물론, 만족할 줄 안다면 경건한 정성은 큰 이득이+ 됩니다. 7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8  그러므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9  그러나 부유해지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무분별하고 해로운 욕망에 빠집니다. 그것들은 사람을 멸망과 파멸에 빠뜨립니다.+ 10  돈을 사랑하는 것은 온갖 해로운 일의 뿌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랑을 추구하다가 믿음에서 벗어났으며 많은 고통으로 온통 자기를 찔렀습니다.+ 11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도리어 의와 경건한 정성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화를+ 추구하십시오. 12  믿음을 위해 훌륭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영원한 생명을 굳게 잡으십시오. 그대는 그 생명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공개적 선언을 했습니다. 13  만물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시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증인으로 훌륭하게 공개적 선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나는 그대에게 명령합니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잡힐 것도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15  정해진 때가 되면 행복하시고 유일한 권능자이신 그분이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분은 왕으로 통치하는 이들의 왕이시며, 주로 통치하는 이들의 주이시며,+ 16  홀로 불멸성을 가진 분이시며,+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속에 거하시고,+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본 적이 없고 볼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영예와 영원한 위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17  현 세상 제도에서 부유한 사람들에게 교훈하여, 거만해지지 말고 불확실한 재물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모든 것을 풍부히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18  선한 일을 하고, 훌륭한 일에 부유하고, 관대함을 나타내고, 기꺼이 나누어 주라고 하십시오.+ 19  그렇게 하여 자기를 위해서 미래를 위한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안전하게 쌓아+ 참생명을 굳게 잡게 하십시오.+ 20  디모데, 그대에게 맡겨진 것을 지키고+ 거룩한 것에 어긋나는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에서 나오는 모순된 이론들에서 떠나십시오.+ 21  어떤 사람들은 그런 지식을 과시하다가 믿음에서 벗어났습니다. 과분한 친절이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각주

달리 번역하면 “만물을 살게 하시는”.

연구 노트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은 무슨 일을 했소?”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으셨다. (요 18:35) 그분은 빌라도가 처음에 물었던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라는 질문에 계속 초점을 맞추셨다. (요 18:33) 예수께서는 이 구절에 나오는 짧은 대답 가운데서 자신이 왕으로 다스릴 왕국을 세 번 언급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고 말씀하심으로 그 왕국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셨다. 이 점은 이전에 언급된 “하늘 왕국”이나 “하느님의 왕국”이라는 표현과 조화를 이룬다. (마 3:2; 막 1:15) 또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 즉 하느님과 그분의 종들에게서 멀어진 불의한 인간 사회에 “속해 있지 않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요 17:14, 16) 예수께서는 빌라도와 이 대화를 나누기 전 밤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제자들이 인간 왕을 지지하는 사람들처럼 무력을 사용해 그분을 보호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려 주셨다.—마 26:51, 52; 요 18:11.

주인: 직역하면 “육체인 주인”. 여기서 바울은 종의 신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권고한다. 종의 신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주인들은 하늘에 더 높은 주인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다.—엡 6:9.

단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누가 보고 있을 때에만 그렇게 하지 말고: 직역하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인 종은 주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그가 있을 때만 순종적으로 행동하거나 열심히 일해서는 안 되었다. 그는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영혼을 다해” 일해야 했다.—엡 6:5-8; 골 3:22-25.

종살이의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들: 직역하면 “멍에 아래 있는 종들”. “멍에”라는 말은 주인의 권위 아래 노예나 종으로 예속된 상태를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딛 2:9, 10; 벧전 2:18. 용어 설명 “멍에” 참조) 로마 제국에는 노예가 많았으며 그중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노예 제도를 옹호하지도 비판하지도 않았다. (고전 7:20, 21) 예수께서는 사회 개혁을 하려고 하지 않으셨으며 제자들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요 17:14)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왕국에 관해 전파하셨는데, 이 왕국이 모든 형태의 압제와 불공정을 없앨 것이었다.—요 18:36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미디어 갤러리 “노예가 하던 일” 참조.

계속 자기 주인을 온전히 존중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여겨야 합니다: 바울은 종의 신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인을 존중하라고 권한다. 종이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지는 그의 행동 즉 그가 자기 일을 성실하게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주인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 가르침이 그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한 좋지 않은 태도는 하느님의 이름에 모독이 돌아가게 한다.—골 3:22, 23. 엡 6:5, 6 연구 노트 참조.

믿는 사람을 주인으로 둔 사람들: 여기서 바울은 종과 주인이 모두 그리스도인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로서 하느님 앞에서 동일한 신분을 갖고 있다. (롬 8:17)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종의 신분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형제이기도 한 주인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가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지 않는다면 주인을 이용하는 셈이 될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기 형제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와 더욱 충실하고 부지런하게 일해야 한다. 한편 주인인 그리스도인은 종을 공정하게 대해야 했다.—엡 6:9; 골 4:1.

건전한 말씀: “건전한 말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이 딤전 6:3에서는 “건전한 교훈”으로 번역되었다. 그 구절에서 바울은 이 교훈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참그리스도교 가르침을 가리킨다. (딤전 6:3 연구 노트 참조)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은 성경에 나오는 다른 모든 가르침과 조화를 이룬다. 따라서 “건전한[또는 “유익한”] 말씀”이라는 표현은 넓은 의미에서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경건한 정성: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유세베이아)는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함으로 나타내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숭상심과 경외심을 가리킨다. 의미 폭이 넓은 이 단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행동을 하도록 마음을 움직이는 하느님에 대한 충성스러운 사랑이나 개인적인 애착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한 사전에서는 이 단어의 의미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신 대로 생활하다”라는 말로 요약한다. 또한 바울의 말을 보면 경건한 정성이 타고나는 특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디모데에게 이 특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운동선수가 훈련하듯이 열심히 노력하라고 권고한다. 3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건한 정성을 나타내는 면에서 최고의 본을 남기셨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딤전 3:16 연구 노트 참조.

경건한 정성: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유세베이아)는 하느님에 대한 숭상심과 깊은 존경심을 가리킨다. (“경건한 정성”으로 번역된 그리스어에 대해 알아보려면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동일한 그리스어가 「칠십인역」에서도 때때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사 11:2; 33:6에 그 단어가 나온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그 부분이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표현 역시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리킨다. 기원 5세기에 만들어진 시리아어 「페시타」의 번역자들은 딤전 2:2에 나오는 이 그리스어를 번역할 때 “하느님”이라는 말을 넣어 “하느님에 대한 숭상심”이라고 명시적으로 표현했다. 그와 비슷하게, 후에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히브리어로 옮긴 일부 번역판에서는 이 구절을 비롯한 여러 구절에서 유세베이아를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번역했다. (딤전 3:16; 4:7, 8; 6:3, 6, 11) 하지만 신세계역 성서 번역 위원회는 이 구절의 본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할 만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다른 구절들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복원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부록 다 참조. 롬 10:12 연구 노트 비교.

건전한 교훈: 여기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수의 모든 가르침은 성경의 다른 부분과 일치하므로, 넓은 의미로 보면 “건전한[또는 “유익한”] 교훈”이라는 표현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가리킬 수 있다.—딤후 1:13 연구 노트 참조.

경건한 정성: “경건한 정성”이라는 표현에 대해 알아보려면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딤전 2:2 연구 노트 참조.

논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로잡혀 있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문자적으로 “병들어 있다”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표현은 “논쟁…에 불건전한 열정을 쏟습니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바울이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건전한 교훈”과 대비되는 표현이다.—딤전 6:3 연구 노트 참조.

말에 대한 토론: 직역하면 “말싸움”. ‘논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흔히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교리를 퍼뜨리기 위해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도 토론을 벌인다. 그러한 토론은 ‘시기와 분쟁을 일으키며’ 심지어 중상(그리스어 블라스페미아) 즉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모욕적인 말로 이어질 수 있다.—골 3:8 연구 노트 참조.

모욕적인 말: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그리스어는 블라스페미아인데, 이 단어는 하느님에게 하는 불경스러운 말을 가리킬 경우 “모독” 또는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계 13:5, 6) 하지만 원래 이 말은 하느님에게 하는 불경스러운 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 하는 악한 말이나 중상하는 말을 가리킬 수도 있으며, 문맥을 보면 여기서 바울이 그런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엡 4:31 참조) 다른 번역판들에서는 이 구절에 “중상”이나 “비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한 참고 자료에서는 이 단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 단어는 다른 사람을 깎아내려서 평판이 안 좋아지게 하거나 나쁜 평판을 갖게 만들려고 하는 것을 가리킨다.”

건전한 교훈: 여기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수의 모든 가르침은 성경의 다른 부분과 일치하므로, 넓은 의미로 보면 “건전한[또는 “유익한”] 교훈”이라는 표현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가리킬 수 있다.—딤후 1:13 연구 노트 참조.

경건한 정성: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유세베이아)는 하느님에 대한 숭상심과 깊은 존경심을 가리킨다. (“경건한 정성”으로 번역된 그리스어에 대해 알아보려면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동일한 그리스어가 「칠십인역」에서도 때때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사 11:2; 33:6에 그 단어가 나온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그 부분이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표현 역시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리킨다. 기원 5세기에 만들어진 시리아어 「페시타」의 번역자들은 딤전 2:2에 나오는 이 그리스어를 번역할 때 “하느님”이라는 말을 넣어 “하느님에 대한 숭상심”이라고 명시적으로 표현했다. 그와 비슷하게, 후에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히브리어로 옮긴 일부 번역판에서는 이 구절을 비롯한 여러 구절에서 유세베이아를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번역했다. (딤전 3:16; 4:7, 8; 6:3, 6, 11) 하지만 신세계역 성서 번역 위원회는 이 구절의 본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할 만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다른 구절들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복원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부록 다 참조. 롬 10:12 연구 노트 비교.

우리는 ··· 하느님의 말씀의 장사꾼이 아닙니다: 또는 “하느님의 소식으로 돈벌이를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소식으로 이득을 얻지 않습니다.” 거짓 선생들과는 달리, 바울과 사도들과 동료들은 좋은 동기로 하느님의 순수한 소식을 전파했다. “장사꾼이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카펠류오)는 원래 소매상이나 여관 주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속임수를 쓰거나 탐욕적인 동기를 갖고 장사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그리스어가 「칠십인역」사 1:22에서 “너의 포도주 상인들[“여관 주인들”]이 포도주를 물과 섞는다”라는 표현 가운데 사용되었다.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물과 섞어서 희석시켰다. 하지만 일부 상인들은 돈을 더 벌기 위해 포도주를 희석시킬 때 물을 더 많이 넣었다. 일부 학자들은 여기서 바울이 그러한 부정직한 포도주 상인들을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동일한 은유적 표현이 그리스 문헌에서는 여기저기를 다니며 자신들의 가르침으로 돈벌이를 하는 철학자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바울은 하느님의 말씀의 “장사꾼”처럼 행동한 많은 사람들에 관해 언급했을 때, 여호와의 말씀에 인간 철학, 전통, 거짓 교리를 더한 거짓 봉사자들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 비유적으로 말해 하느님의 말씀을 희석시켜, 그 말씀의 향기와 맛을 떨어뜨리고 그 말씀이 가진 기쁨을 주는 힘을 약화시켰다.—시 104:15. 고후 4:2 연구 노트 참조.

만족할 줄 안다면: 여기서 바울은 경건한 정성을 만족 즉 “자족”과 연관시킨다. 이 특성은 거짓 선생들이 갖고 있는 물질적 야망과 뚜렷이 대조된다. (딤전 6:8) 만족은 하느님의 종에게 기쁨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빌 4:11 연구 노트 참조.

경건한 정성: “경건한 정성”이라는 표현에 대해 알아보려면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딤전 2:2 연구 노트 참조.

경건한 정성은 큰 이득이 됩니다: 바울은 앞 문장에 이어 이 문장에서도 동일한 그리스어(“이득”과 “이득의 수단”으로 번역됨)를 사용한다. 5절에서 그는 경건한 정성을 “이득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회중을 이용하려고 하는 타락한 거짓 선생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에 대해 대가를 요구했을 수도 있고, 그 밖의 방법으로 회중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물질적 이득을 얻으려고 했을 수도 있다. (딤후 3:6; 딛 1:11. 고후 2:17 연구 노트 참조) 또는 경건한 정성을 나타내는 것이 물질적으로 부유해지는 방법이라고 가르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한 훨씬 더 큰 “이득”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경건한 정성을 통해 얻게 되는 영적 유익이다.

자족하는: “부족한 것이 없다”, (고후 9:8) “자족하다”, (빌 4:11) “만족하다”(딤전 6:6)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들은 가진 것으로 만족하거나 충분히 가지고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울은 여행 중에 온갖 상황을 경험하면서 그 모든 상황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여호와께서 어떤 임명을 주시든 그 임명을 수행하면서 행복해하고 만족했다. (빌 4:12, 13) 바울은 예수를 본받았는데, 그분은 물질적인 부를 많이 모으거나 한 곳에 정착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마 8:20) 바울은 예수를 본받아, 여호와의 뜻을 행하는 일에 몰두하고 그분이 기본적인 필요를 돌봐 주실 것임을 신뢰했다.—히 13:5.

경건한 정성: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유세베이아)는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함으로 나타내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숭상심과 경외심을 가리킨다. 의미 폭이 넓은 이 단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행동을 하도록 마음을 움직이는 하느님에 대한 충성스러운 사랑이나 개인적인 애착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한 사전에서는 이 단어의 의미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신 대로 생활하다”라는 말로 요약한다. 또한 바울의 말을 보면 경건한 정성이 타고나는 특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디모데에게 이 특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운동선수가 훈련하듯이 열심히 노력하라고 권고한다. 3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건한 정성을 나타내는 면에서 최고의 본을 남기셨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딤전 3:16 연구 노트 참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도 바울이 여기서 한 말과 의미가 비슷한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여러 세기 전에 솔로몬왕은 영감을 받아 이렇게 썼다. “사람은 어머니의 태에서 나올 때처럼 벌거벗은 채 사라져 가리니, 애써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전 5:15. 또한 욥 1:21; 시 49:17 참조) 예수께서도 부자에 관한 비유를 들면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눅 12:16-21) 바울은 이 엄중한 진리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탐욕과 물질주의를 피하고 그 대신 경건한 정성을 추구함으로 지속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 노력하라고 권한다.—딤전 6:6, 8-10.

입을 것: 달리 번역하면 “거처할 곳”.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가릴 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는 주로 옷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가릴 것이나 거처할 곳, 이를테면 집을 의미할 수도 있다.

부유해지기로 결심하는 사람들: 바울은 돈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일시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유해지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들은 탐욕으로 인해 비뚤어지고 잘못된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누구나 부유해지기로 결심하게 될 수 있다.

사람을 멸망과 파멸에 빠뜨립니다: 부를 열렬히 추구하는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감정적으로 해를 입게 될 것이다. “빠뜨리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바닥으로 끌어내리다” 또는 “가라앉게 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눅 5:7에서 문자적인 의미로 쓰였는데, 고기가 많이 잡혀 배 두 척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구절 즉 딤전 6:9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을 볼 때, “부유해지기로 결심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를 비참한 상태로 끌어내리는 “유혹과 … 해로운 욕망에 빠지게” 되며 여호와와의 우정이 손상되어 삶이 파멸에 이르게 된다.

불의한 재물: 직역하면 “불의의 맘몬”. 그리스어 마모나스(셈어에서 유래)는 “맘몬”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돈이나 재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마 6:24 연구 노트 참조) 예수께서 이러한 부 즉 재물을 불의하다고 하신 것은, 그러한 재물이 죄 많은 인간에 의해 사용되고, 일반적으로 이기적인 목적에 기여하며, 불의한 행동을 통해 그러한 재물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물질적 부를 소유하거나 갈망하면 불법적인 행동을 하게 될 수 있다. 문자적인 부는 가치를 잃게 될 수 있으므로, 그러한 부를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딤전 6:9, 10, 17-19) 그는 사람을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여 주실 수 있는 분들인 여호와와 예수를 친구로 사귀는 데 자신의 부를 사용해야 한다.

돈을 사랑하지 않고: 소유물을 모으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양 떼”를 돌보는 일에 합당한 주의를 기울일 수 없다. (벧전 5:2)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의 물질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하느님의 백성이 “오는 세상 제도”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노력하도록 제대로 도울 수 없다. (눅 18:30) 또한 그 자신이 “불확실한 재물”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설득력 있게 가르칠 수 없다. (딤전 6:17) 따라서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감독자로 섬길 자격이 없다. 감독자에 대한 이 자격 조건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영감받은 교훈과 조화를 이룬다.—마 6:24; 딤전 6:10; 히 13:5.

멸망의 아들: 이 문맥에서 이 표현은 가룟 유다를 가리킨다. 그는 하느님의 아들을 고의적으로 배반함으로 영원한 멸망을 당할 자, 부활되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가 되었다. 동일한 표현이 살후 2:3에서는 “불법의 사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성경 원어에서 “~의 아들(들)”은 특정한 행로를 따르는 사람이나 어떤 특징을 나타내는 사람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 “빛의 아들들이며 낮의 아들들”, “왕국의 아들들”, “악한 자의 아들들”, “마귀의 자식”, “불순종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눅 6:35; 살전 5:5; 마 13:38; 행 13:10; 엡 2:2) 또한 “~의 아들”은 특정한 행로를 따르거나 어떤 특징을 나타낼 때 닥치게 될 심판이나 결과를 가리키는 데 쓰이기도 한다. 삼하 12:5에서는 문자적으로 “죽음의 아들”을 의미하는 표현이 “죽어 마땅하다”로 번역되었다. 마 23:15에서는 문자적으로 “게헨나의 아들”을 의미하는 표현이 영원한 멸망을 받아 마땅한 사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의미로 가룟 유다를 “멸망의 아들”이라고 부르신 것 같다.—마 23:15 연구 노트 및 용어 설명 “게헨나” 참조.

돈을 사랑하는: 바울이 이러한 사랑이 “온갖 해로운 일의 뿌리”라고 말했을 때, 그는 당시 잘 알려져 있던 속담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일 수 있다. 그는 돈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돈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다. (전 7:12; 10:19) 위험한 것은 돈에 대한 사랑이다. 5절에서 바울은 일부 거짓 선생들이 돈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있다는 점을 밝힌다. 따라서 그가 앞서 감독자의 자격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말한 것도 당연하다. (딤전 3:1, 3연구 노트) 성경에서는 돈을 사랑하는 것에 또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 알려 준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전 5:10) 더 심각한 것으로, 돈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경쟁을 벌이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밀어내 버릴 수도 있다. (마 6:24. 눅 16:9 연구 노트 참조) 따라서 돈에 대한 사랑은 온갖 “해로운 일”의 뿌리 즉 원인이다. 그러한 사랑을 가지면 바울이 이 구절에서 언급한 “고통”을 겪게 된다.

많은 고통: “고통”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심한 감정적, 정신적, 영적 고통과 괴로움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한 고통을 겪는 원인 중 하나는 양심의 가책일 수 있다. 돈에 대한 사랑은 가룟 유다가 “많은 고통”을 겪게 된 원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그러한 사랑에 사로잡혀 도둑질을 하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기까지 했다. (마 26:14-16; 요 12:6) 유다는 한때 충실한 사도였지만 “멸망의 아들”이 되고 말았다.—요 17:12 연구 노트 참조.

온통 자기를 찔렀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그리스어 동사는 날카로운 무기로 반복적으로 찌르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완전히 꿰뚫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바울이 한 말의 취지는 그리스도인이 돈에 대한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간다면 심각한 해를 입게 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경건한 정성: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유세베이아)는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함으로 나타내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숭상심과 경외심을 가리킨다. 의미 폭이 넓은 이 단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행동을 하도록 마음을 움직이는 하느님에 대한 충성스러운 사랑이나 개인적인 애착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한 사전에서는 이 단어의 의미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신 대로 생활하다”라는 말로 요약한다. 또한 바울의 말을 보면 경건한 정성이 타고나는 특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디모데에게 이 특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운동선수가 훈련하듯이 열심히 노력하라고 권고한다. 3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건한 정성을 나타내는 면에서 최고의 본을 남기셨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딤전 3:16 연구 노트 참조.

성적 부도덕을 피하십시오!: 이 표현에 사용된 그리스어 퓨고는 “피하다; 도망하다”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이 단어를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하여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적 부도덕에서 도망하라고 강력히 권한다.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요셉에 관한 기록을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요셉은 문자 그대로 보디발의 아내에게서 단호하게 도망했다. 「칠십인역」에서는 창 39:12-18에 나오는 “도망치다”라는 표현을 번역할 때 이 구절에 사용된 그리스어와 동일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고전 6:18에 나오는 권고는 현재 시제로 되어 있으며 그 표현을 직역하면 “피하고 있으십시오”가 된다. 이것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왕국 행간역」(Kingdom Interlinear).

하느님의 사람이여: 바울은 디모데를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이 표현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과 딤후 3:17에만 두 번 나온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사람”(또는 “참하느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이 약 70회 나온다. 이 표현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비롯해 그분의 특별한 대표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는데, 예를 들면 모세(신 33:1), 사무엘(삼상 9:6, 10), 다윗(느 12:24), 엘리야(왕상 17:18, 24), 엘리사(왕하 4:7, 9)에게 사용되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디모데가 하느님으로부터 에베소 회중에서 거짓 선생들에 맞서 싸우라는 임명을 받았다는 점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을 수 있다. (딤전 1:3, 4; 6:2ㄴ-10) 또는 여호와께 온전히 헌신하고 그분의 영감받은 말씀에 따라 행동하면서 살아가는 남자나 여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딤후 3:17 연구 노트 참조.

의…를 추구하십시오: 바울은 디모데가 추구해야 할 특성들을 나열하면서 “의”를 가장 먼저 언급한다. (또한 딤후 2:22 참조) 디모데는 이미 헌신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롬 5:1)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하느님의 표준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 의로운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했다.—용어 설명 “” 참조. 또한 엡 6:14 연구 노트 참조.

경건한 정성: “경건한 정성”이라는 표현에 대해 알아보려면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딤전 2:2 연구 노트 참조.

추구하십시오: “추구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추적하다; 뒤쫓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될 경우 어떤 것을 이루거나 얻기 위해 애쓰는 것을 가리킨다. 디모데는 바울이 언급한 특성들을 이미 갖고 있었지만, 그 특성들을 계속 기르고 개선해야 했으며 평생에 걸쳐 그 일을 추구해야 했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물질주의의 덫과 같은 악한 것을 피하라고 즉 그러한 것으로부터 도망하라고 권고한다. (딤전 6:9, 10) 바울은 물질주의에 빠지면 해를 입고 경건한 특성들을 기르면 유익을 얻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물질주의를 피하고 경건한 특성들을 추구하라고 권한 것이다.—마 6:24; 고전 6:18연구 노트; 10:14; 딤후 2:22.

경건한 정성: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유세베이아)는 하느님에 대한 숭상심과 깊은 존경심을 가리킨다. (“경건한 정성”으로 번역된 그리스어에 대해 알아보려면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동일한 그리스어가 「칠십인역」에서도 때때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사 11:2; 33:6에 그 단어가 나온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그 부분이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표현 역시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리킨다. 기원 5세기에 만들어진 시리아어 「페시타」의 번역자들은 딤전 2:2에 나오는 이 그리스어를 번역할 때 “하느님”이라는 말을 넣어 “하느님에 대한 숭상심”이라고 명시적으로 표현했다. 그와 비슷하게, 후에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히브리어로 옮긴 일부 번역판에서는 이 구절을 비롯한 여러 구절에서 유세베이아를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번역했다. (딤전 3:16; 4:7, 8; 6:3, 6, 11) 하지만 신세계역 성서 번역 위원회는 이 구절의 본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할 만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다른 구절들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복원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부록 다 참조. 롬 10:12 연구 노트 비교.

의의 흉갑: 기원 1세기의 로마 군인들은 몸을 보호하는 여러 가지 장비를 사용했다. 그들이 사용한 흉갑의 한 가지 형태는 가로로 긴 철판들을 위아래가 조금씩 겹쳐지게 해서 가죽에 부착한 것이었다. 이 철판들은 고리와 끈과 고정 장치로 부착되어 있었다. 그러한 흉갑은 중요한 장기, 특히 심장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했다. 기원전 2세기의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이 흉갑을 “심장 보호 장비”라고 불렀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비유적인 심장인 마음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살전 5:8 비교) 금속으로 된 흉갑이 화살이나 칼로부터 군인의 심장을 보호해 주었듯이, 하느님의 의로운 원칙과 표준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비유적인 심장 즉 마음을 보호해 준다. (시 119:97, 105; 잠 4:23) 불완전한 인간은 죄로 향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항상 그러한 보호가 절실히 필요하다. (렘 17:9)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의를 갑옷처럼 입고 계시는 것으로 묘사한다.—사 59:15, 17.

하느님의 사람: 여기서 “사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안트로포스)는 남자와 여자 모두를 가리킬 수 있다. 바울은 감독자인 디모데에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 남자이든 여자이든 여호와 하느님께 온전히 헌신한 사람을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따라서 일부 번역판에서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나 “하느님께 헌신한 사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앞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사람”은 영감받은 성경을 정기적으로 연구하고 그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딤전 6:11 연구 노트 참조.

믿음을 위해 훌륭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여기서 “싸움”, “싸우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명사와 동사는 운동선수가 경기에서 이기려고 힘쓰거나 겨루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눅 13:24; 고전 9:25 연구 노트 참조)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밝혀져 있는 그리스도교 진리를 변호하면서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 싸움은 참으로 “훌륭한” 즉 고상한 싸움이다.—딤후 4:7 연구 노트 참조.

영원한 생명: 딤전 6:19 연구 노트 참조.

참생명: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표현은 딤전 6:12에 나오는 표현과 비슷한데, 그 구절에서 그는 디모데에게 “영원한 생명을 굳게 잡으라”고 권고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참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 같다. (요 14:6 연구 노트 참조) 바울과 디모데 모두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의 원래 목적이 사람이 땅에서 영원히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창 1:28; 2:15-17) 그러한 삶에 비할 때, 고통과 질병과 사별의 아픔으로 가득한 짧은 삶은 헛되고 좌절감만 가져다준다. (욥 14:1, 2; 시 103:15, 16; 전 1:2) 사람들이 겪는 그런 일들 때문에 삶과 재물은 불확실한 것이 되고 만다. 바울은 “현 세상 제도”에서 살아가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참생명” 즉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전망을 소중히 여기기를 바랐다.—딤전 6:17.

훌륭한 싸움: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의 삶과 봉사를 고상한 싸움 또는 고투에 비한다. (고전 9:25; 딤전 6:12 연구 노트 참조) 그는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여호와를 충실히 섬겼다. 그는 선교 여행을 하면서 육로와 해로로 먼 거리를 여행했다. 그는 폭도들에게 공격을 받고 채찍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등 온갖 박해를 인내했다. 또한 “거짓 형제들”의 반대에도 맞서야 했다. (고후 11:23-28) 여호와와 예수께서는 그가 그러한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충실을 유지하고 봉사의 직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필요한 능력을 주셨다.—빌 4:13; 딤후 4:17.

나는 … 싸웠고 … 달렸으며 … 지켰습니다: 바울은 세 가지 표현을 사용하여 동일한 사상을 거듭 강조한다. 자신이 주 예수께서 맡기신 모든 일을 완수하여, 그리스도인의 인생행로와 봉사의 직무를 충실하게 끝마쳤다는 것이다. (행 20:24) 바울은 곧 죽을 것이었지만 그가 한 일은 계속 열매를 맺을 것이었다.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 또는 “운동선수”.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 아고니조마이는 명사 아곤과 어근이 같은데, 아곤은 운동 경기를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다. 히 12:1에서 이 명사는 생명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경주”를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 “싸움”(빌 1:30; 딤전 6:12; 딤후 4:7)이나 “고투”(골 2:1)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구절(고전 9:25)에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의 변화형은 “기운을 다해 힘쓰다”(눅 13:24), “열심히 노력하다”(골 1:29), “힘쓰다”(골 4:12; 딤전 4:10), “싸우다”(딤전 6:12)로 번역된다.—눅 13:24 연구 노트 참조.

기운을 다해 힘쓰십시오: 또는 “계속 고투하십시오”. 예수의 이러한 권고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영혼을 다해 노력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양한 참고 문헌들에 따르면 이 그리스어 표현은 문맥상 “최대한의 노력을 쏟으십시오; 모든 노력을 기울이십시오”로도 번역할 수 있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 아고니조마이는 명사 아곤에서 나온 단어인데, 아곤은 운동 경기를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다. 히 12:1에서 이 명사는 생명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경주”를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 “싸움”(빌 1:30; 딤전 6:12; 딤후 4:7)이나 “고투”(골 2:1)를 가리키기도 한다. 눅 13:24에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의 변화형은 “경기에 참가하다”(고전 9:25), “열심히 노력하다”(골 1:29), “힘쓰다”(골 4:12; 딤전 4:10), “싸우다”(딤전 6:12)로 번역된다. 이 표현의 유래가 운동 경기에서 겨루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울이라고 말씀하신 노력이 운동선수가 상을 받기 위해 온몸의 신경을 집중시켜 힘과 기운을 쏟아붓는 것과 같은 노력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공개적으로 전하고: 그리스어 호몰로게오는 일부 성경에서 “고백하다”로 번역되었다. 많은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공개적으로 전하다(인정하다)”로 정의한다. 10절에서는 이 동사가 “공개적 선언을 하다”로 번역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마음으로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 믿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시 40:9, 10; 96:2, 3, 10; 150:6; 롬 15:9) 그리스도인들은 침례를 받을 때와 같은 경우에 단 한 번 그러한 공개적 선언을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공개적 선언을 한다. 그들은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모일 때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구원에 관한 좋은 소식을 선포할 때 계속 공개적 선언을 한다.—히 10:23-25; 13:15.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증인으로: 복음서 기록에서 알려 주듯이,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빌라도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에게 증거하셨다. (마 27:11; 요 18:33-38) 하지만 공개적 선언이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빌라도와 짧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에게 하신 말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롬 10:9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바울은 예수께서 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기까지 “증인으로” 인내하신 행로 전체를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분명 디모데는 예수께서 “증인으로” 남기신 뛰어난 본을 생각하면서 에베소에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 여기서 바울은 9절에 언급된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이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을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고 설명한다. 이 문맥에서 “예수의 나타나심”은 여호와께서 아들을 땅으로 보내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 이 나타나심은 요 1:14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그 구절에서는 “‘말씀’이 육체가 되어 [사람들] 가운데 사셨다”고 알려 준다. 마찬가지로 딤전 3:16(연구 노트 참조)에서도 예수께서 “육체로 나타나신” 일을 언급한다. 이 표현은 예수의 지상 생애와 봉사에 적용되는데, 그분이 요르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신 이후를 가리키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봉사를 수행하시는 내내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죄에서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분명히 가르쳐 주셨다.—마 1:21; 눅 2:11; 3: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나타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에피파네이아)는 성경에서 ‘어떤 것에 대한 분별할 수 있는 증거’ 또는 ‘권위나 능력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예수께서 땅에 계시던 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딤후 1:10연구 노트) 또한 그분이 왕권을 가지고 임재해 계시는 기간에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예를 들어 살후 2:8 연구 노트 참조) 이 문맥에서 “나타나실 때”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하늘에서 영광스럽고 강력한 지위에 계시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미래의 지정된 때를 가리킨다.—단 2:44; 7:13, 14; 딤전 6:15; 딤후 4:1.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심으로: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게 임재해 계시는 기간 전체가 아니라 그 임재 기간의 끝이 가까웠을 때 일어날 한 가지 사건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리스도께서 임재해 계신다는 것이 나타날 즉 모두에게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눅 21:25-28. 용어 설명 “임재” 참조) 여기서 바울이 한 말은 기원 1세기에 이미 활동하고 있던 “불법의 사람”이 그리스도의 임재 기간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것임을 보여 준다. 이 점을 볼 때 바울이 언급한 “불법의 사람”이 어느 한 개인이 아니라 한 집단을 집합적으로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살후 2:3 연구 노트 참조) “불법의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 집행되면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임재해 계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큰 환난”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질 것이다.—마 24:21. 용어 설명 “큰 환난” 참조.

행복하시고: 예수께서는 여호와 하느님의 축복과 은혜를 누린다는 면에서 권능자로서 더없이 “행복하신” 즉 축복받으신 분이다. (빌 2:9-11) 또한 예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으로서, “행복하신 하느님”이신 아버지의 기쁨을 완벽하게 반영하신다.—골 1:15; 딤전 1:11연구 노트. 잠 8:30, 31 비교.

행복하시고 유일한 권능자: 문맥과 여기에 사용된 표현을 볼 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이 분명하다. 앞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를 언급했다. (딤전 6:14) 여기서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불완전한 인간 통치자들과 대조한다. “권능자”로 번역된 그리스어(디나스테스)는 왕을 가리킬 수도 있고 방백과 같이 왕의 권위 아래 종속된 통치자를 가리킬 수도 있다. 이것은 아버지이신 여호와의 권위 아래 왕으로 통치하는 예수를 묘사하는 데 적합한 표현이다. 예수는 단 7:14의 성취로 하느님으로부터 “통치권과 영예와 왕국”을 직접 받은 유일한 통치자이다. 그러한 통치자는 예수뿐이므로 그분을 “유일한 권능자”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할 것이다. 그분은 고대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통치한 왕들을 포함해 이 땅의 어떤 왕이나 주보다도 우월한 분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들 모두의 왕이자 주이시다.—계 17:14; 19:16 비교.

행복하신 하느님: 여기서 바울은 행복이 여호와의 성품 가운데 두드러진 특성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존재하시며 늘 행복하신 분인데, 혼자 계실 때도 그러하셨다. (말 3:6) 그분은 맏아들을 창조하시고 그와 함께하시면서 더 큰 행복을 느끼셨다. (잠 8:30) 사탄의 반역과 중상으로 인해 슬픔과 고통이 초래되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행복하신 분이며 충성스러운 자들이 그분을 충실히 섬기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신다. (잠 27:11)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만났을 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했다. (행 20:35연구 노트) 그 말씀은 여호와께서 “행복하신 하느님”이신 한 가지 이유를 알려 준다. 그분이 주는 일을 하는 면에서 우주에서 으뜸가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시 145:16; 사 42:5) 여호와를 본받는 그분의 숭배자들도 행복할 수 있다. (엡 5:1) 시 1:1, 2에서는 여호와의 법을 매일 읽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알려 준다. 「칠십인역」의 이 구절에서는 바울이 딤전 1:11에서 사용한 것과 동일한 그리스어가 사용되었다. 산상 수훈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고난을 겪고 박해를 받을 때에도 행복할 수 있다는 점을 거듭 알려 주셨다.—마 5:3-11. 마 5:3; 롬 4:7 연구 노트 참조.

아멘: 또는 “그렇게 되소서”. 그리스어 아멘은 히브리어 아멘을 음역한 단어이다. 히브리어 아멘은 “충실하다, 신뢰할 만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어근 아만에서 나온 것이다. (용어 설명 참조) 사람들은 맹세나 기도 또는 다른 사람의 말에 동의할 때 “아멘”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필자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표현을 하면서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아멘”을 자주 사용했다. 바울도 여기서 “아멘”을 그렇게 사용한 것이다. (롬 16:27; 엡 3:21; 벧전 4:11) 또는 상대방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아멘”을 사용하기도 했다. (롬 15:33; 히 13:20, 21) “아멘”은 앞서 나온 표현에 필자가 진심으로 동의한다는 것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계 1:7; 22:20.

행복하시고 유일한 권능자: 문맥과 여기에 사용된 표현을 볼 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이 분명하다. 앞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를 언급했다. (딤전 6:14) 여기서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불완전한 인간 통치자들과 대조한다. “권능자”로 번역된 그리스어(디나스테스)는 왕을 가리킬 수도 있고 방백과 같이 왕의 권위 아래 종속된 통치자를 가리킬 수도 있다. 이것은 아버지이신 여호와의 권위 아래 왕으로 통치하는 예수를 묘사하는 데 적합한 표현이다. 예수는 단 7:14의 성취로 하느님으로부터 “통치권과 영예와 왕국”을 직접 받은 유일한 통치자이다. 그러한 통치자는 예수뿐이므로 그분을 “유일한 권능자”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할 것이다. 그분은 고대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통치한 왕들을 포함해 이 땅의 어떤 왕이나 주보다도 우월한 분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들 모두의 왕이자 주이시다.—계 17:14; 19:16 비교.

죽지 않을 것: “죽지 않을 것”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아타나시아)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고전 15:53, 54; 딤전 6:16에 세 번 나온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생명이 끝이 없고 멸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닌 것을 가리킨다. 죽을 수밖에 없는 몸으로 하느님을 충실히 섬긴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영적 피조물들보다 더 나은 몸으로 부활된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멸할 수 없는 생명”을 주심으로 그들을 얼마나 신뢰하는지를 놀라운 방법으로 보여 주신다.—히 7:16. 고전 15:42 연구 노트 참조.

홀로 불멸성을 가진 분: 여기서 바울은 예수께서 어떻게 다른 모든 권능자나 왕이나 주와 다르신지 더 설명한다. (딤전 6:15 연구 노트 참조) 여호와께서는 아들 예수를 불멸의 생명을 가진 영으로 부활시키셨다. (롬 6:9; 벧전 3:18) 예수 이전에는 그러한 선물을 받은 왕이나 주가 없었다. 예수께서만 홀로 그런 선물을 받으셨으며, 따라서 그분은 모든 불완전한 인간 통치자보다 우월하시다.—고전 15:53 연구 노트 참조.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속에 거하시고: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신 뒤에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 (히 10:12) 그분은 모든 빛과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함께 거하신다. (시 36:9) 또한 예수 자신도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보거나 가까이 갈 수 없는 영광을 가지고 계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분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일은 그들이 하늘에서 영적 피조물로 부활된 후에 있을 것이었다. 그때 그들은 예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영광을 누리고 계신 모습을 보게 될 것이었다.—요 13:36; 14:19; 17:24.

아멘: 롬 1:25 연구 노트 참조.

현 세상 제도: 또는 “현 시대”. 여기서 바울은 사탄이 통치하는 불의한 세상 제도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이다.—마 13:22; 고후 4:4; 갈 1:4 연구 노트 참조.

현 세상 제도에서 부유한 사람들: 사탄이 불의한 현 세상 제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물질을 추구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따라서 바울은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경고한다. (롬 12:2; 고후 4:4) 예수께서는 앞으로 이 세상 제도가 사라지고 하느님의 왕국이 통치하는 새로운 세상 제도가 들어설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막 10:30연구 노트; 눅 18:29, 30) 바울도 “오는” 세상 제도에 대해 가르쳤다. (엡 1:21; 2:7)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는 세상 제도에 초점을 맞추어 “미래를 위한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안전하게 쌓으라”고 권한다.—딤전 6:19.

교훈하여: 또는 “명령하여; 지시하여”.—딤전 1:5 연구 노트 참조.

거만해지지 말고: “거만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오만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바울은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 물질에 대해 균형 잡힌 견해를 가지라고 권한다. 부유한 사람은 자신이 부유하기 때문에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부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신다.—잠 22:2; 마 8:20; 약 2:5.

불확실한 재물이 아니라 …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부유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재물이 진정한 안정을 누리게 해 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재물이 사실 믿을 수 없고 불확실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재물은 유혹과 올무에 빠지게 할 수 있으며 (딤전 6:9) 예기치 않게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잠 18:11; 23:4, 5.

우리가 즐기는 모든 것을 풍부히 주시는: 이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울은 어근이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여 요점을 강조한다. 먼저 그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불확실한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께 희망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다음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께서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시며 그들의 즐거움을 위해 그러한 것들을 “풍부히” 즉 관대하게 주신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물론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들 가운데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과 만족과 안정을 주는 것은 그분이 베푸시는 영적인 것들이다. (마 6:19-21, 33) 끝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훌륭한 일에 부유하여” “참생명을 굳게 잡으라”고 권한다.—딤전 6:18, 19.

지시: 또는 “명령”.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앞서 디모데에게 했던 말 즉 회중 내에서 “일부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다른 교리를 가르치거나 거짓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하라는 지시를 언급한 것이다. (딤전 1:3, 4) 한 사전에 따르면 여기서 “지시”에 해당하는 단어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울은 그 단어와 그와 어근이 같은 표현들을 이 편지에서 여러 번 사용한다.—딤전 1:18; 4:11; 5:7; 6:13, 17.

오는 세상 제도: 또는 “오는 시대”. 그리스어 아이온의 기본 의미는 “시대”이다. 이 단어는 특정한 기간이나 시대를 구분 짓는 상태나 특징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앞으로 하느님의 왕국의 통치 아래 사람들이 약속된 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때에 관해 말씀하신 것이다.—눅 18:29, 30. 용어 설명 “세상 제도(들)” 참조.

세상 제도: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이온의 기본 의미는 “시대”이다. 이 단어는 특정한 기간이나 시대를 구분 짓는 상태나 특징을 가리킬 수 있다. (딤후 4:10. 용어 설명 “세상 제도(들)” 참조)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현 악한 세상 제도”가 시작된 때는 대홍수 후 어느 시점인 것 같다. 그때 사람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죄와 반역으로 특징을 이루는 불의한 방식으로 살기 시작했다. 그 “악한 세상 제도”가 기원 1세기에도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그 제도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을 통해 그 세상 제도에서 구출되었기 때문이다.—고후 4:4 연구 노트 참조.

이 세상 제도: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이온의 기본 의미는 “시대”이다. 이 단어는 특정한 기간이나 시대를 구분 짓는 상태나 특징을 가리킬 수도 있다. (용어 설명 “세상 제도(들)” 참조) 사탄은 자신의 지배 아래 있는 “이 세상 제도”가 독특한 특징과 영을 갖도록 틀 잡아 왔다.—엡 2:1, 2.

이 세상 제도의 신: 여기 언급된 “신”은 사탄을 가리킨다. 이 구절의 이어지는 부분에 나오는 이 신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정신을 눈멀게 한다”는 표현을 볼 때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탄을 “이 세상의 통치자”라고 부르셨으며 그가 “쫓겨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 12:31) 예수께서 하신 그 말씀과 그가 “이 세상 제도[또는 “이 시대”]의 신”이라는 표현을 볼 때 그의 위치가 일시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계 12:12 비교.

세상 제도: 그리스어 원어 아이온의 기본 의미는 “시대”이다. 이 단어는 특정한 기간이나 시대를 구분 짓는 상태나 특징을 가리킬 수 있다. 이 구절에서는 현 세상 제도에서 살면서 겪게 되는 염려나 문제와 관련해서 사용되었다.—용어 설명 “세상 제도(들)” 참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께서 이신 이유는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기도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길”이시기도 하다. (요 16:23; 롬 5:8) 예수께서 진리이신 이유는 그분이 진리를 말씀하셨고 진리와 일치하게 생활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많은 예언을 성취시키셨는데, 그러한 예언들은 하느님의 목적을 이루는 일에서 그분이 수행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보여 준다. (요 1:14; 계 19:10) 그 예언들은 “그분에 의해 ‘예’가 되었다[또는 “성취되었다”].” (고후 1:20) 예수께서 생명이신 이유는 그분이 대속을 통해 인류가 “참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딤전 6:12, 19; 엡 1:7; 요1 1:7) 또한 그분은 낙원에서 부활되어 영원히 살 전망을 갖게 될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생명”이 되실 것이다.—요 5:28, 29.

참생명: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표현은 딤전 6:12에 나오는 표현과 비슷한데, 그 구절에서 그는 디모데에게 “영원한 생명을 굳게 잡으라”고 권고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참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 같다. (요 14:6 연구 노트 참조) 바울과 디모데 모두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의 원래 목적이 사람이 땅에서 영원히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창 1:28; 2:15-17) 그러한 삶에 비할 때, 고통과 질병과 사별의 아픔으로 가득한 짧은 삶은 헛되고 좌절감만 가져다준다. (욥 14:1, 2; 시 103:15, 16; 전 1:2) 사람들이 겪는 그런 일들 때문에 삶과 재물은 불확실한 것이 되고 만다. 바울은 “현 세상 제도”에서 살아가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참생명” 즉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전망을 소중히 여기기를 바랐다.—딤전 6:17.

그대에게 맡겨진 것을 지키고: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맡겨진 것”에는 디모데에게 맡겨진 성경 진리가 포함된다. (살전 2:4; 딤후 1:14. 롬 3:2연구 노트 비교) “맡겨진 것”으로 번역된 단어는 은행에 보관된 귀중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누군가에게 관리하도록 맡기는 물건을 가리키는 데도 쓰였는데, 그리스어 「칠십인역」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레 6:2, 4 [5:21, 23, LXX]) 디모데는 신성한 소식을 다른 사람들이 접할 수 없게 숨겨 두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일을 할 때 그 소식을 주의 깊이 정확하게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지켜야 했다. (딤후 2:2) 그렇게 한다면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들에 의해 귀중한 진리가 변질되거나 더럽혀지지 않도록 지킬 즉 보호할 수 있을 것이었다.

헛된 말: 직역하면 “헛된 소리”.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 표현은 “가치 없는 이야기”를 의미한다. 일부 성경 번역판에서는 이 표현을 “헛된 잡담”, “무의미한 논쟁”으로 번역한다. 그러한 말은 하느님의 말씀에 나오는 확실한 진리가 아니라 추측에 근거해 있었다. 그것은 믿음을 키우는 데 있어서 아무 가치가 없다는 의미에서 헛된 것이었다. (딤전 1:6; 딤후 4:4; 딛 3:9) 더 심각한 문제로, 많은 경우 그러한 잡담이나 논쟁은 거룩한 것에 어긋나는 것 즉 속되거나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그러한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리를 제쳐 두고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는 것이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런 말을 멀리하라고 경고했다.—딤전 4:7연구 노트; 딤후 2:16.

거짓된 ‘지식’: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지식”은 지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러한 지식이 거짓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 지식은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해 있지 않다. 사실 그 지식에는 모순된 이론들 즉 서로 상충되는 사상이나 논증이 들어 있었다. 더 심각한 것으로, 영감받은 기록에 어긋나는 사상이 들어 있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디모데에게 거짓 선생들이 하는 분열시키는 헛된 말에 대해 거듭 경고했다. 그들은 자신의 학식을 뽐내고 회중에 영향을 주려고 했다. (딤전 1:4, 7; 4:1-3, 7; 6:3-6) “지식”(그리스어 그노시스)에 대한 거짓된 사상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2세기에, 배교한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일부 집단은 자신들을 그노시스파(영지주의자들) 즉 “지식을 가진 자들”이라고 불렀다.—요 1:14 연구 노트 참조.

그들이 ··· 맡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이란 유대인을 가리킨다. (용어 설명 “유대인” 참조) 모세는 신 29:29에서 “밝혀진 것은 영원토록 우리[이스라엘 사람들]와 우리 후손의 것입니다”라고 썼다. 시 147:19, 20에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알리셨으며 “다른 어떤 민족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부터 시작된다”고 말씀하심으로 하느님의 구원의 말씀과 참숭배가 유대인에게 맡겨졌다는 점을 언급하셨다. (요 4:22.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바울은 여호와께서 영감받은 성경 가운데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부분을 기록하는 일을 유대인에게 맡기셨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또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책들을 기록한 예수의 제자들도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성경 지식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으며 성경 정경을 이루는 모든 책들을 기록하는 책임을 맡았다고 할 수 있다.—누가복음 책명24:44 연구 노트 참조.

불경스러운 거짓 이야기들: 바울 시대에 사람들이 퍼뜨리던 “거짓 이야기들”(그리스어 미토스)은 “불경스러운” 즉 속된 것이었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표준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신성하고 건전한 진리와 상충되는 것이었다. (딤전 6:20; 딤후 1:13) 이 거짓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니라 지어낸 것이었으므로 무가치한 것이었다.—딤전 1:4 연구 노트 참조.

‘말씀’이 육체가 되어: 예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온전히 인간이셨다. 예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면 그분이 육체가 되신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나의 살[즉 “육체”]입니다.” (요 6:51) 또한 예수께서는 온전히 인간이셨기 때문에 살과 피를 가진 사람들이 겪는 일을 경험하실 수 있었고, 그리하여 동정심 많은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었다. (히 4:15) 예수께서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실 수 없었다. 그분이 “천사들보다 조금 낮추어지셨다”고 성경에서 알려 주기 때문이다. (히 2:9; 시 8:4, 5. 이 구절에 나오는 육체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예수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을 부정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그노시스파(영지주의자들)가 있다. 그들은 지식(그리스어 그노시스)을 신비로운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배교한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그리스 철학과 동양의 신비주의와 결합시켰다. 그들은 모든 물질이 악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 단지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가르쳤다. 기원 1세기 말에는 그노시스주의의 초기 형태가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한 것일 수 있다. 요한은 자신이 쓴 편지들에서 예수께서 “육체로” 오셨음을 부정하는 거짓 가르침에 대해 경고한다.—요1 4:2, 3; 요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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