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전서 2:1-20

2  형제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을 방문한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우리는 처음에 빌립보에서 고난을 겪고 모욕을 당했지만+ 우리 하느님에 의해 담대해져서 많은 반대에 직면해서도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우리의 권고는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의 승인을 받아 좋은 소식을 맡게 되었으므로,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우리는 결코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탐욕스러운 동기를 감추려고 가장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증인이십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물질적으로 짐을 지울 수도 있었지만,+ 사람들에게서 곧 여러분에게서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젖 먹이는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따뜻하게 돌보는 것처럼 여러분을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부드러운 애정을 가지고 하느님의 좋은 소식뿐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도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매우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형제 여러분, 분명히 여러분은 우리가 수고하고 애쓴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중 누구에게도 물질적으로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좋은 소식을 전파했습니다. 10  우리가 신자들인 여러분에게 얼마나 충성스럽고 의롭고 나무랄 데 없이 처신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증인이며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11  여러분도 잘 아는 것처럼, 우리는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여러분 각자에게 계속 권고하고 위로하고 증언했습니다.+ 12  여러분을 자신의 왕국과+ 영광으로 부르시는+ 하느님 앞에서 여러분이 계속 합당하게 걷도록+ 그렇게 한 것입니다. 13  이 때문에 우리는 또한 하느님께 끊임없이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우리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이 그러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신자들인 여러분 안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14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하는 유대에 있는 하느님의 회중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대인의 손에 당하는 것과 같은 고난을 여러분도 여러분의 동족의 손에+ 당했기 때문입니다. 15  유대인들은 주 예수와+ 예언자들까지 죽였고 우리도 박해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이익을 거스르는 자들로, 16  우리가 이방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여 구원받게 하려는 일을 방해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항상 자기들의 죄를 가득 채웁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분의 진노가 그들에게 닥쳤습니다.*+ 17  형제 여러분, 우리가 단지 잠시 동안 여러분과 떨어져 있었지만, 몸만 떨어져 있었고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간절한 열망 때문에 여러분을 직접* 보기 위해 무척 애를 썼습니다. 18  그래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나 바울은 한 번만이 아니라 두 번이나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의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19  우리 주 예수의 임재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환희의 면류관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러분이 아닙니까?+ 20  참으로 여러분은 우리의 영광이며 기쁨입니다.

각주

또는 “이방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우리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일을 계속 금합니다.”
달리 번역하면 “그러나 그분의 진노가 그들에게 온전히 닥쳤습니다.”
직역하면 “여러분의 얼굴을”.

연구 노트

거침없이 말하는 것: 또는 “담대함; 두려움이 없는 것”. 그리스어 파레시아는 “말의 자유; 확신”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행 28:31; 각주; 요1 5:14) 동사형인 파레시아조마이는 주로 “담대하게 말하다”로 번역된다. 파레시아파레시아조마이는 사도행전에 자주 나오는데, 이 단어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수행한 전파 활동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행 4:29, 31; 9:27, 28; 13:46; 14:3; 18:26; 19:8; 26:26.

아주 담대하게: 또는 “아무 두려움 없이; 말의 가장 큰 자유를 가지고”. 그리스어 파레시아는 “거침없이 말하는 것”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행 4:13) 동사형인 파레시아조마이는 주로 “담대하게 말하다”로 번역된다. 파레시아파레시아조마이는 사도행전에 자주 나온다. 사도행전 전체는 담대함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수행한 전파 활동의 특징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행 4:29, 31; 9:27, 28; 13:46; 14:3; 18:26; 19:8; 26:26.

많은 환난 중에서도: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준 지 얼마 안 되어 데살로니가 회중이 겪은 박해를 가리킨다. 광적인 유대인 반대자들은 좋은 소식이 널리 전파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바울이 머물고 있는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바울을 그곳에서 찾아내지 못하자 집주인 야손과 몇몇 형제들을 도시 당국자들에게 끌고 가 그들이 소란을 일으켰다고 고발했다. 형제들은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도시를 떠나 베레아로 가게 했다. (행 17:1-10) 놀랍게도 성령은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박해를 겪으면서도 기쁨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빌립보에서 … 모욕을 당했지만: 여기서 바울은 행 16:12, 16-24에 기록된 일들을 언급한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장터로 끌려갔으며 행정관들은 제대로 절차도 밟지 않고 판결을 내려 그들의 옷을 벗기고 매로 치고 감옥에 집어넣고 차꼬를 채우게 했다. 바울이 그 모든 일을 가리켜 “모욕을 당했다”고 한 것은 적절하다. 그가 사용한 단어는 강한 뜻이 담긴 단어로, 한 참고 문헌에 따르면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로 가해지는 행위”를 가리킬 수 있다. 바울과 실라가 얼마나 모욕적인 취급을 당했는지 생각해 볼 때 그들이 담대한 태도를 나타낸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담대해져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모욕적인 취급을 당하면서도 움츠러들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담대해져서” 또는 용기를 얻어 계속 전파했다. (행 17:2-10) 바울은 그처럼 담대해진 것이 그들의 내적인 힘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한 것임을 겸손하게 인정한다. 그와 비슷하게 시편 필자 다윗도 여호와께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 나를 담대하고 강하게 하셨습니다.” (시 138:3. 또한 라 7:28 참조) “담대해지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바울이 수행한 봉사와 관련해 여러 차례 사용되었으며, 많은 경우 “담대하게 말하다”를 의미한다.—행 13:46; 14:3; 19:8. 행 4:13; 28:31 연구 노트 참조.

많은 반대에 직면해서도: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심한 반대를 받았다. (행 17:1-14. 살전 1:6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바울은 봉사의 직무를 사랑했기 때문에 반대를 인내하고 계속 담대하게 좋은 소식을 전했다. (롬 1:14, 15; 딤후 4:2)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 표현은 “몹시 고투하면서”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한 표현은 바울과 실라가 담대하게 전파하기 위해 반대에 굴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힘써 노력했음을 시사한다. 이 표현은 올림픽 경기에서 상대를 이기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하는 운동선수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더러움: 또는 “불결함; 타락; 음란”. 이 구절에서 “육체의 일”로 가장 먼저 언급된 세 가지 가운데 “더러움”(그리스어 아카타르시아)이 가장 의미 폭이 넓다. 그리스어 아카타르시아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10번 나온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더럽거나 불결한 것을 가리킨다. (마 23:27)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면 온갖 종류의 불결함을 포괄하는 단어로 쓰이는데, 그 가운데는 성 문제, 말과 행동, 그리고 거짓 신을 숭배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문제 등에서의 불결함이 포함된다. (롬 1:24; 6:19; 고후 6:17; 12:21; 엡 4:19; 5:3; 골 3:5; 살전 2:3; 4:7) 따라서 “더러움”에는 여러 종류의 잘못된 행동이 포함되며, 그러한 행동들은 더러움의 정도가 각기 다를 수 있다. (엡 4:19 연구 노트 참조) “더러움”은 잘못된 행동이나 상태가 갖는, 도덕적으로 불쾌감을 주는 측면을 강조하는 표현이다.—용어 설명 “부정함; 더러움” 참조.

불순한 동기: 직역하면 “더러움”. “더러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아카타르시아)가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면 온갖 종류의 불결함을 포괄하는 단어로 쓰이는데, 그 가운데는 성 문제, 말과 행동, 영적인 문제 등에서의 불결함이 포함된다. (롬 1:24; 고전 7:14; 고후 6:17; 엡 4:19; 살전 4:7 비교) 이 문맥에서는 좋지 않은 동기나 불순한 동기를 가리킬 수 있다.—갈 5:19 연구 노트 참조.

선하신 선생님: 이 사람은 “선하신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아첨하기 위한 형식적인 칭호로 사용한 것 같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대개 그런 영예로운 칭호로 자신을 높여 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선생님”이나 “주”라는 합당한 칭호로 부르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으셨다. (요 13:13) 하지만 그분은 모든 영예를 아버지께 돌리셨다.

아첨하는 말: 아첨은 진실하지 않게 거짓으로 혹은 과도하게 칭찬하는 것을 가리킨다. 많은 경우 그렇게 하는 의도는 환심을 사거나 물질적인 이득을 얻으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처럼 위선적인 말을 하는 것을 정죄한다. (시 5:9; 12:2, 3) 한 사전에서는 여기서 “아첨”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콜라키아를 “다른 사람의 허영심을 채워 주기 위해 하는 칭찬”으로 정의한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전파할 때 “결코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증인”이시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이 부면에서 가장 뛰어난 본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한 유대인 지도자가 분명 아첨하려는 의도로 그분을 “선하신 선생님”이라는 칭호로 불렀을 때 즉시 바로잡으셨다.—막 10:17연구 노트, 18. 욥 32:21, 22 비교.

가장하지도: “가장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가식적으로 행동하다; 은폐하다”를 의미한다. 한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이 표현은 “사람들에게 실제 모습을 감추기 위해 꾸며 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바울과 동료들은 결코 탐욕스러운 동기로 행동하지 않았다. 또한 이기적인 동기가 없었기 때문에 아첨하는 말이나 가식적인 행동으로 숨길 필요가 없었다.

천막을 만드는 것: 이 구절에서 바울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직업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그리스어는 스케노포이오스이다. 이 단어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지(천막 만드는 사람인지, 장식용 직물을 짜는 사람인지, 밧줄을 만드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많은 학자들은 아마도 “천막 만드는 사람”을 가리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길리기아의 타르수스 출신이었는데, 길리기아는 천막을 만드는 재료인 킬리키움이라는 염소 털 천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행 21:39) 기원 1세기에 유대인 사회에서는 소년이 나중에 고등 교육을 받을 예정이라 해도 직업 교육을 받는 것이 영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따라서 바울은 어릴 때에 천막 만드는 기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천막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킬리키움은 흔히 거칠고 뻣뻣해서 자르거나 바느질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짐을 지울 수도 있었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봉사에 더 많은 시간을 바칠 수 있도록 물질적으로 지원해 달라고 전혀 요청하지 않았다. 그는 고린도에 있을 때에도 그렇게 했다. 후에 그가 설명한 것처럼 그러한 지원을 요청할 만한 성경적 근거가 있는데도 그렇게 한 것이다. (고전 9:11-15, 18) 살전 2:9에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밤낮으로” 일했다고 알려 주는데, 아마도 고린도에서처럼 천막 만드는 일을 했을 것이다. (행 18:3 연구 노트 참조) 그는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본을 보이려고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살후 3:7-12.

사람들에게서 … 영광을 구하지: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애쓰는 겸손한 봉사자였다. 그는 이 말을 할 때 예수께서 하신 이러한 비슷한 취지의 말씀을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습니다.” (요 5:41; 7:18; 고전 11:1) 바울은 회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존중심을 나타내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으로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롬 12:10; 딤전 5:17 비교) 바울의 말은 그가 사람들에게서 영예나 명성이나 칭송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여기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관련된 자신의 역할을 자녀에게 사랑으로 권고하고 위로하고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는 아버지의 역할에 비한다. (신 6:6, 7; 시 78:5, 6 비교) 이 비유는 살전 2:7에서 바울이 사용한 젖 먹이는 어머니의 비유를 보충해 준다. (연구 노트 참조) 두 가지 비유 모두 바울과 동료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진 목자들이었지만 회중 내에 서로 사랑하고 지원하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음을 강조한다.—딤전 5:1, 2 비교.

젖 먹이는 어머니: 이 구절과 이어지는 몇몇 구절에서 바울은 가족 관계에 바탕을 둔 두 가지 생생한 비유를 사용하여, 자신과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따뜻한 애정을 표현한다. (살전 3:6)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이 데살로니가 회중과 누리는 관계를 “젖 먹이는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에 비한다. 어머니는 자녀를 깊이 사랑하여 자신의 유익보다 자녀의 유익을 앞자리에 둔다. 이어지는 살전 2:11에서 바울은 아버지의 비유를 든다. (연구 노트 참조) “젖 먹이는 어머니”로 번역된 그리스어 표현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하지만 이 단어는 「칠십인역」사 49:23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구절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자신의 백성을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돌아오게 하실 때 왕비들이 “유모”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따뜻하게 돌보는: 또는 “소중히 여기는”.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따뜻하게 하다”를 의미한다. 이 문맥에서 이 표현을 읽는 사람들은 어머니가 자녀가 따뜻하고 편안함을 느끼도록 돌보는 것을 떠올렸을 수 있다. 「칠십인역」에서 이 단어는 신 22:6(“품고 있으면”)과 욥 39:14(“온기를 유지하게”)에서 어미 새가 새끼나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여러분을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바울과 동료들은 데살로니가의 형제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영적인 성장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부드럽게 대했다.” (살전 2:8) 하지만 일부 번역판에서는 이 표현을 “여러분에게 어린아이처럼 되었습니다”로 번역한다. 그런 차이가 있는 이유는 이 부분에 “부드럽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에피오이)가 사용된 사본들도 있고 “어린아이들; 어린 아기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네피오이)가 사용된 사본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로 이 두 단어는 철자 하나만 다르다. 일부 학자들은 필사자들이 앞 단어에 들어 있는 ‘ㄴ’ 발음에 해당하는 철자를 실수로 한 번 더 썼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문맥과 이 구절에 나오는 젖 먹이는 어머니에 대한 비유를 생각해 볼 때, “부드럽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많은 현대 번역판에서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부드러운 애정을 가지고: 바울이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그리스어 동사는 한 사전에 따르면 “애착으로 인해 더욱 강렬해진 감정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강렬한 열망을 갖다” 또는 “갈망하다”로 정의한다.

우리 자신까지도: 또는 “우리 생명까지도; 우리 영혼까지도”.—용어 설명 “영혼” 참조.

결심했습니다: 바울과 동료들은 좋은 소식을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감정 때문에 그들은 새로 그리스도인이 된 이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자 했다. 여기서 “결심했습니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직역하면 “크게 기뻐했습니다”)는 그들이 그렇게 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으며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한 참고 문헌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그리스어] 동사가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는 것은 개종자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려는 그의 의지가 지속적인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물질적으로 짐을 지울 수도 있었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봉사에 더 많은 시간을 바칠 수 있도록 물질적으로 지원해 달라고 전혀 요청하지 않았다. 그는 고린도에 있을 때에도 그렇게 했다. 후에 그가 설명한 것처럼 그러한 지원을 요청할 만한 성경적 근거가 있는데도 그렇게 한 것이다. (고전 9:11-15, 18) 살전 2:9에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밤낮으로” 일했다고 알려 주는데, 아마도 고린도에서처럼 천막 만드는 일을 했을 것이다. (행 18:3 연구 노트 참조) 그는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본을 보이려고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살후 3:7-12.

물질적으로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살전 2:6 연구 노트 참조.

젖 먹이는 어머니: 이 구절과 이어지는 몇몇 구절에서 바울은 가족 관계에 바탕을 둔 두 가지 생생한 비유를 사용하여, 자신과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따뜻한 애정을 표현한다. (살전 3:6)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이 데살로니가 회중과 누리는 관계를 “젖 먹이는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에 비한다. 어머니는 자녀를 깊이 사랑하여 자신의 유익보다 자녀의 유익을 앞자리에 둔다. 이어지는 살전 2:11에서 바울은 아버지의 비유를 든다. (연구 노트 참조) “젖 먹이는 어머니”로 번역된 그리스어 표현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하지만 이 단어는 「칠십인역」사 49:23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구절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자신의 백성을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돌아오게 하실 때 왕비들이 “유모”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여기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관련된 자신의 역할을 자녀에게 사랑으로 권고하고 위로하고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는 아버지의 역할에 비한다. (신 6:6, 7; 시 78:5, 6 비교) 이 비유는 살전 2:7에서 바울이 사용한 젖 먹이는 어머니의 비유를 보충해 준다. (연구 노트 참조) 두 가지 비유 모두 바울과 동료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진 목자들이었지만 회중 내에 서로 사랑하고 지원하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음을 강조한다.—딤전 5:1, 2 비교.

여호와께 합당하게 걸어: 여기서 “걷다”라는 표현은 살아가는 것 또는 처신하는 것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들에서 “걷다”라는 표현을 비유적인 의미로 여러 차례 사용한다. (갈 5:16; 엡 5:2; 빌 3:17; 골 2:6; 3:7; 4:5; 살전 2:12; 4:1) 한 참고 문헌에서는 이 단어가 그러한 문맥에서 “생활 행로”를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이 단어를 그러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히브리어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 가지 예로, 왕하 20:3에서 히스기야왕은 이렇게 말했다. “오 여호와여, 제가 간청합니다. 부디, 제가 주 앞에서 충실하게 … 걸은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따라서 여호와께 합당하게 걷는다는 것은 그분의 이름을 돋보이게 하고 그분의 의로운 표준과 일치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살전 2:12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다.—이 구절에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 알아보려면 부록 다3 소개; 골 1:10 참조.

하느님 앞에서 여러분이 계속 합당하게 걷도록: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인생행로를 걷는 것에 비한다. 그는 골 1:10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다.—연구 노트 참조.

여러분에게 힘을 주시고: 또는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고”. 그리스어 에네르게오는 이 구절에 2번 나오는데, “힘을 주시고”와 “행할 능력을 주시는”으로 번역되었다. 하느님의 성령 즉 활동력은 우주에서 우리에게 능력 즉 힘을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근원이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사용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 1:2; 시 104:30; 사 40:26)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종들이 힘이 빠질 때 성령을 사용해 필요한 힘 즉 “행할 능력”을 주신다. (사 40:31) 또한 여호와의 영은 필요에 따라 어떤 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을 향상시켜 줄 수 있다. (눅 11:13; 고후 4:7) 사도 바울은 자신이 열심히 노력할 때 하느님께서 지원해 주시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빌 4:13; 골 1:29.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 즉 소식을 바울과 실라의 전파 활동을 통해 듣게 되었지만 (행 17:1-4) 그것이 사람에게서 나온 소식이 아님을 이해했다. 그 소식은 여호와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었으며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 시대부터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에 예수를 통한 구원에 관한 좋은 소식도 포함되었다. (엡 1:12, 13; 골 4:3)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이룰 책들이 모아질 때, 데살로니가 전서는 바울이 쓴 편지 가운데서 가장 먼저 하느님의 영감받은 말씀의 일부로 포함된 편지일 것이다. 후에 사도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들이 “성경”의 일부라고 밝혔다.—벧후 3:15, 16. 용어 설명 “정경(성경 정경)” 참조.

신자들인 여러분 안에서 작용하고 : 여기서 “작용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에네르게오의 한 형태이며 “힘을 주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빌 2:13 연구 노트 참조) 바울과 동료들이 전파한 소식은 단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진실한 신자들 안에서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히 4:12에서는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힘을 발휘하다”로 번역되었다.) 바울은 봉사를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의 힘 덕분에 많은 사람이 놀라운 변화를 하는 것을 목격했다. (고전 6:9-11; 엡 2:3; 딛 3:3) 바울 자신도 “하느님의 말씀”에 사람의 성품과 생활 방식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증거였다.—갈 1:13, 22, 23; 딤전 1:12-14.

많은 환난 중에서도: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준 지 얼마 안 되어 데살로니가 회중이 겪은 박해를 가리킨다. 광적인 유대인 반대자들은 좋은 소식이 널리 전파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바울이 머물고 있는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바울을 그곳에서 찾아내지 못하자 집주인 야손과 몇몇 형제들을 도시 당국자들에게 끌고 가 그들이 소란을 일으켰다고 고발했다. 형제들은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도시를 떠나 베레아로 가게 했다. (행 17:1-10) 놀랍게도 성령은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박해를 겪으면서도 기쁨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동족의 손에 당했기 때문입니다: 살전 1:6 연구 노트 참조.

우리를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으며: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화해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첫 인간 아담이 불순종하여 모든 후손에게 죄와 불완전성을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롬 5:12) 그 결과 인류는 하느님과 멀어진 상태에 있게 되었다. 하느님의 표준으로는 범죄를 묵인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그들은 하느님과 적대 관계에 있게 되었다. (롬 8:7, 8) “화해하다”와 “화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들은 기본적으로 “바꾸다; 교환하다”를 의미하는데, 이 문맥에서는 하느님과의 적대적인 관계가 조화를 이루는 우호적인 관계로 바뀌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여기서 하느님께서 먼저 그리스도를 통해 즉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을 통해 “우리”(바울과 동료들을 비롯한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를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화해의 직무를 주셨습니다”라고 말한다.—롬 5:10 연구 노트 참조.

화해의 직무: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돕는 봉사의 직무를 가리킨다. (롬 5:10) 이 봉사의 직무는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들이 그분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그분의 친구가 되도록 돕는 긴급한 소식과 관련이 있다.—고후 5:18-20. 여기서 “직무”로 번역된 그리스어 디아코니아에 대해 알아보려면 행 11:29; 롬 11:13 연구 노트 참조.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첫 인간 아담이 불순종하여 모든 후손에게 죄와 불완전성을 물려주었기 때문에 인류는 하느님과 화해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고후 5:18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즉 예수의 속죄 희생을 통해 이 화해하는 일을 이루고 계신다. (롬 5:10; 고후 5:21; 골 1:21, 22) 여호와께서는 그리스도와 결합해 있는 사람들을 적대적인 세상에서 “대사들”로 일하도록 임명하시면서 “화해의 직무”를 맡기셨다.—고후 5:18, 20.

그들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이 표현은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과 화해하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얻지 못하도록 막으려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살전 2:16)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그랬던 것처럼 그러한 박해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께 신성한 봉사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요 16:2; 갈 1:13; 딤전 1:13)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사실 여호와도 그분의 아들도 모르는 것이다.—요 16:3.

모든 사람의 이익을 거스르는: 참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모든 인류의 이익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전파 활동은 여호와께서 죄 많은 인류를 자신과 화해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이기 때문이다.—고후 5:18, 19 연구 노트 참조.

당신들의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끝내십시오: 또는 “당신들의 조상들의 분량을 마저 채우십시오”. 이 관용적인 표현은 문자적으로 “다른 사람이 채우기 시작한 분량을 마저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실제로 그들의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끝내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반어법을 사용하여, 과거에 그들의 조상들이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죽인 것처럼 그들도 자신을 죽일 것임을 예언하신 것이다.

그들은 항상 자기들의 죄를 가득 채웁니다: 바울은 ‘주 예수를 죽이고’ 그분의 제자들을 심하게 박해한 1세기 유대인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살전 2:15) 그 반대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도 방해했다. “죄를 가득 채우다”라는 표현은 그들이 극에 달할 정도로 죄를 지었음을 보여 준다. 바울은 유대인 박해자들이 항상 그렇게 한다고 말함으로, 그들이 자신의 조상들이 여러 세기 동안 걸어온 행로를 계속해서 따르고 있음을 지적한다.—마 23:32 연구 노트 참조.

그분의 진노가 그들에게 닥쳤습니다: 직역하면 “진노가 그들에게 닥쳤습니다”. “닥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의 시제는 하느님의 진노가 유대인들에게 반드시 닥칠 것임을 강조한다. 그분의 진노는 예루살렘과 성전이 기원 70년에 로마인들에 의해 멸망되었을 때 절정에 달했다. 일부 고대 사본에는 “그분의 진노”라는 표현이 “하느님의 진노”로 되어 있다.

젖 먹이는 어머니: 이 구절과 이어지는 몇몇 구절에서 바울은 가족 관계에 바탕을 둔 두 가지 생생한 비유를 사용하여, 자신과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따뜻한 애정을 표현한다. (살전 3:6)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이 데살로니가 회중과 누리는 관계를 “젖 먹이는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에 비한다. 어머니는 자녀를 깊이 사랑하여 자신의 유익보다 자녀의 유익을 앞자리에 둔다. 이어지는 살전 2:11에서 바울은 아버지의 비유를 든다. (연구 노트 참조) “젖 먹이는 어머니”로 번역된 그리스어 표현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하지만 이 단어는 「칠십인역」사 49:23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구절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자신의 백성을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돌아오게 하실 때 왕비들이 “유모”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여기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관련된 자신의 역할을 자녀에게 사랑으로 권고하고 위로하고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는 아버지의 역할에 비한다. (신 6:6, 7; 시 78:5, 6 비교) 이 비유는 살전 2:7에서 바울이 사용한 젖 먹이는 어머니의 비유를 보충해 준다. (연구 노트 참조) 두 가지 비유 모두 바울과 동료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진 목자들이었지만 회중 내에 서로 사랑하고 지원하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음을 강조한다.—딤전 5:1, 2 비교.

단지 잠시 동안: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관용구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이 관용구를 직역에 가깝게 번역하면 “한 시간의 기간 동안; 한 시간의 정해진 때 동안”이 된다. 바울의 말은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과 헤어진 지 아마도 몇 달밖에 안 되었지만 그들을 다시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취지인 것 같다. 그는 그들과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었지만 그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는 점을 확신시켜 준다. 바울은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디모데를 보냈다.—살전 3:1, 2.

여러분과 떨어져 있었지만: 또는 “여러분을 여의었지만; 여러분과 사별했지만”.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그리스어 동사(아포르파니조)는 약 1:27에서 “고아”로 번역된 그리스어(오르파노스의 복수형)와 어근이 같으며 “고아가 되다”로 직역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동사는 일반적인 사별을 가리키는 데도 쓰였으며 여기에는 부모가 자녀를 잃는 것도 포함되었다. 이 장의 7절11절에서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을 젖 먹이는 어머니와 아버지에 비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이 데살로니가의 가족과도 같은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할 수 없어서 느끼는 상실감이 자녀를 잃은 부모의 상실감만큼이나 크다고 표현하기 위해 아포르파니조를 사용한 것일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과 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 가족과 관련된 단어를 사용한 또 다른 예이다.—살전 2:7, 11 연구 노트 참조.

이 세상의 통치자: 이와 비슷한 표현이 요 14:30; 16:11에도 나오는데 사탄 마귀를 가리킨다. 이 문맥에서 “세상”(그리스어 코스모스)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고 그분의 뜻과 어긋나게 행동하는 인간 사회를 가리킨다. 이 불의한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며 “악한 자의 지배 아래 있다.” (요1 5:19) 사탄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의 세력들”은 보이지 않게 활동하는 “이 어둠의 세상 통치자들[그리스어 코스모크라토르의 한 형태]”이다.—엡 6:11, 12.

이 세상 제도의 신: 여기 언급된 “신”은 사탄을 가리킨다. 이 구절의 이어지는 부분에 나오는 이 신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정신을 눈멀게 한다”는 표현을 볼 때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탄을 “이 세상의 통치자”라고 부르셨으며 그가 “쫓겨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 12:31) 예수께서 하신 그 말씀과 그가 “이 세상 제도[또는 “이 시대”]의 신”이라는 표현을 볼 때 그의 위치가 일시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계 12:12 비교.

사탄이 우리의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우리의 길을 가로막았습니다”로 번역된 표현은 “우리의 길을 막았습니다” 또는 “우리를 방해했습니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바울은 롬 15:22에서도 동일한 동사를 사용한다. 이 동사는 길을 파괴하여 사람들이 지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나 적진을 뚫고 나아가는 전술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반대자들이 자신이 그곳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사용한 수단을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사용했을 수 있다. 반대자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했든, 바울은 영감을 받아 사탄이 그를 가로막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탄이 “이 세상 제도의 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요 12:31; 고후 4:4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의 임재 중에: 임재라는 표현은 예수의 몇몇 제자가 ‘그분의 임재의 표징’에 관해 질문하는 내용이 나오는 마 24:3에서 처음 사용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란 그분이 현 세상 제도의 마지막 날이 시작될 때 메시아 왕으로 보이지 않게 즉위하셔서 왕으로서 와 계시는 상태를 가리킨다. “임재”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파루시아이다. 많은 번역판에서는 “오다”라는 동사를 사용해서 이 단어를 번역하지만,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곁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분의 임재는 단지 그분이 오시거나 도착하시는 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계속되는 일이었다. 마 24:37-39에서 “노아의 날 ··· 홍수 이전 시대”를 “‘사람의 아들’의 임재”에 비한 것을 보면 파루시아에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빌 2:12에서 “함께 있을 때”로 번역된 표현에도 파루시아가 사용되었는데, 바울은 이 단어를 “떨어져 있을 때”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고전 16:17 연구 노트 참조) 따라서 여기서 바울은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의 형제들이자 공동 상속자들 즉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하늘 생명으로 부활되는 일이 예수께서 하늘에서 하느님의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시고 얼마 후에 있을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여호와 안에서 자랑하십시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자랑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카우카오마이는 “자랑스럽게 여기다; 기뻐하다; 크게 기뻐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고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예를 들어 바울은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에 근거하여 기뻐할[또는 “자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롬 5:2) “여호와 안에서 자랑한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분의 명예와 명성에 대해 크게 기뻐한다는 의미이다.—렘 9:23, 24.

임재: 이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언급한 여섯 번의 경우 중 첫 번째이다. (용어 설명 “임재” 참조. 또한 “데살로니가 전서 소개” 참조) 바울은 주 예수의 임재를 고대하며 그때 사랑하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기뻐한다. 그는 이 편지의 뒷부분에서 “주 예수께서 자신의 모든 거룩한 자들과 함께 임재하실 때에” 그들이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 나무랄 데 없이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한다.—살전 3:13. 고전 15:23 연구 노트 참조.

환희의 면류관: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을 “환희의 면류관”이라고 부른다. 그는 귀빈이나 고위 관리나 운동선수에게 영예를 돌리거나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면류관이나 화관을 씌워 주는 관습을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사용했을 수 있다. “환희”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기뻐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자랑하는 것; 자부심을 갖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데살로니가에 그리스도인 회중이 생기도록 돕는 영예를 누린 것에 대해 기뻐하고 합당한 자부심을 갖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살후 1:4. 빌 4:1 비교. 고후 10:17 연구 노트 비교.

미디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봉사할 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하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봉사할 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하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바울의 영감받은 편지들 가운데 가장 먼저 쓰여진 것이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중이던 기원 50년경에 데살로니가를 방문했으며 그곳에는 회중이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그 회중은 반대에 직면했으며, 그로 인해 바울과 실라는 그 도시를 떠나야 했다. (행 17:1-10, 13)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에 있던 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과 동료들이 데살로니가의 형제들에게 “물질적으로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살전 2:5-9) 바울은 천막 만드는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봉사할 때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 일을 했을 수 있다. (행 18:2, 3) 틀림없이 바울은 일하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