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1-31

3  그러면 유대인이 나은 점은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모든 면에서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하느님의 신성한 선언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이 믿음이 없다고 해서 하느님의 충실성이 무효가 되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 해도,+ 하느님은 참되시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당신의 말씀으로 당신의 의로움이 증명되고 재판에서 당신이 이기실 것입니다”라고+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의가 하느님의 의를 두드러지게 한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진노를 내리신다고 해서 그분이 불공정하신 것입니까? (나는 사람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불공정하시다면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겠습니까?+  나의 거짓말 때문에 하느님의 참되심이 더욱 두드러져 그분에게 영광이 되었다면, 왜 내가 죄인이라는 판결을 받는 것입니까?  그리고 왜 우리가 “선한 일이 나타나도록 악한 일을 하자” 하고 말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고 거짓으로 비방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공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더 나은 입장에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모두 죄 아래 있습니다.+ 10  이렇게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없으니, 단 한 사람도 없다.+ 11  통찰력을 가진 사람도 없으며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든 사람이 빗나가 하나같이 쓸모없게 되었다. 친절을 보이는 사람이 없으니 단 하나도 없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그들의 혀는 사람을 속인다.”+ “그들의 입술 뒤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14  “그들의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하다.”+ 15  “그들의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다.”+ 16  “그들의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고 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18  “그들의 눈앞에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19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입이 잠잠해지게 하고 온 세상이 하느님께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사람도 그분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게 될 뿐입니다.+ 21  그러나 율법과 예언서에서 증언하는 대로,+ 이제는 하느님의 의가 율법과 상관없이 나타났습니다.+ 22  그 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의로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24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불하신 대속물에 의해 석방되어+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로+ 의롭다고 인정받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해+ 자신과 화해하도록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내주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의를 보여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관용을 나타내시어 과거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26  이것은 이 시대에 자신의 의를 보여 주셔서,+ 예수를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실 때 자신이 의롭게 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7  그렇다면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을 통해 그렇게 됩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법을 통해서입니다. 28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에 의해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29  하느님은 유대인만의 하느님이십니까?+ 이방 사람들의 하느님은 아니십니까?+ 그분은 이방 사람들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30  하느님은 한 분이시므로+ 그분은 할례받은 사람들도 믿음의 결과로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도 그들의 믿음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31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폐지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각주

연구 노트

구원이 유대인에게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또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는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말씀과 순결한 숭배와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맡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롬 3:1, 2) 또한 유대인들에게서 메시아가 나와 아브라함의 “자손”에 관한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창 22:18; 갈 3:16)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씀하셨을 당시에는, 유대인들을 통해서만 하느님에 관한 진리와,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과, 메시아에 관한 세부적인 점들을 알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는 통로였으며, 여호와를 섬기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이 선택하신 민족과 연합하여 그분을 섬겨야 했다.

누가: “누가”는 그리스어 이름이다. 이 이름은 라틴어 루카스(Lucas)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리스어 형태로 표기하면 루카스(Λουκᾶς)이다. 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의사였으며 사도 바울의 충실한 동료였다. (골 4:14. “누가복음 소개” 참조) 누가라는 그리스어 이름과 그의 문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누가가 유대인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또 다른 근거는 골 4:10-14에서 바울이 “할례받은 사람들”을 먼저 언급하고 그다음에 누가를 언급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롬 3:1, 2에서 알려 주는 바와 상충된다. 그 구절에서는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신성한 선언을 맡았다”고 알려 준다. 따라서 누가는 그리스어 이름을 가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고 그들이 사용하던 방법대로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 전체를 분류하신 것 같다. “율법”(히브리어 토라)은 창세기부터 신명기에 이르는 성경 책들을 가리킨다. “예언서”(히브리어 네비임)는 “전기 예언서”라 불리는 책들(여호수아부터 열왕기까지)을 포함한, 히브리어 성경의 예언서들을 가리킨다. “시편”은 셋째 부분을 지칭하는 말로서, 히브리어 성경의 나머지 책들을 가리키며 “성문서”(히브리어 케투빔)라고 불린다. 이 부분을 “시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시편이 이 셋째 부분의 첫 번째 책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히브리어 성경을 부르는 이름인 “타나크”는 각 부분을 지칭하는 이름의 맨 앞 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 이름을 사용하신 것을 보면, 그분이 지상에 계실 때 히브리어 성경의 정경이 이미 확립되어 있었으며, 그분이 정경을 인정하셨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들이 ··· 맡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이란 유대인을 가리킨다. (용어 설명 “유대인” 참조) 모세는 신 29:29에서 “밝혀진 것은 영원토록 우리[이스라엘 사람들]와 우리 후손의 것입니다”라고 썼다. 시 147:19, 20에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알리셨으며 “다른 어떤 민족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부터 시작된다”고 말씀하심으로 하느님의 구원의 말씀과 참숭배가 유대인에게 맡겨졌다는 점을 언급하셨다. (요 4:22.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바울은 여호와께서 영감받은 성경 가운데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부분을 기록하는 일을 유대인에게 맡기셨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또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책들을 기록한 예수의 제자들도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성경 지식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으며 성경 정경을 이루는 모든 책들을 기록하는 책임을 맡았다고 할 수 있다.—누가복음 책명24:44 연구 노트 참조.

신성한 선언: 이 표현은 그리스어 로고스(말씀)의 지소형인 로기온(“말씀 한마디”라는 의미)의 복수형을 번역한 것으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네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원래 로기온은 간략한 신성한 말씀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느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은 무엇이든 가리키게 되었다. 여기서 바울은 히브리어 성경 전체, 그리고 아마도 그때까지 기록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책들까지 가리켜 “신성한 선언”이라고 한 것 같다. 영감받은 성경의 그 책들을 기록하는 일은 유대인들이 맡았는데, 그들은 “성령에 감동되어” 그 책들을 기록했다. (벧후 1:20, 21) 「칠십인역」에서 로기온은 하느님의 선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들을 번역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시 12:6(11:6, LXX)에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라는 표현을 번역할 때도 사용되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로마서에 열 번 나온다. (롬 3:4, 6, 31; 6:2, 15; 7:7, 13; 9:14; 11:1, 11) 좀 더 직역에 가깝게 번역하면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가 된다. 이것은 어떤 질문에 대해 강하게 부정할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 수사적인 질문에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마치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듯이, 특정한 견해에 대해 강한 반감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느님은 참되시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바울은 앞 구절에서 “그들이 믿음이 없다고 해서 하느님의 충실성이 무효가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한 뒤, 이 구절의 처음 부분에서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드러냈는데, 특히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알려 주는 히브리어 성경의 예언들을 배척함으로 그렇게 했다. (롬 3:21) 그들은 하느님의 “신성한 선언”을 맡은 사람들이었는데도 (롬 3:2) 그러한 입장을 취함으로 여호와께서 자신의 약속에 대해 참되시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러한 선언들을 충실하게 이행하셨다. 바울은 하느님께서 신뢰할 만한 분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윗왕이 한 말의 「칠십인역」 표현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당신[하느님]의 말씀으로 당신의 의로움이 증명될 것입니다.” (시 51:4[50:6, LXX]) 그 구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하느님께서 참되고 의로운 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하느님이 신뢰할 만한 분이라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바울은 누가 그 점을 부정하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점을 부정하든, 하느님께서 언제나 충성스럽고 참된 분이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다윗의 말을 인용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바울은 롬 3:9, 12; 5:12에서도 비슷한 사상을 언급한다. 이르지 못합니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도달하지 못하다”, “미치지 못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다시 말해, 사람에게 그분의 성품과 특성을 본받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창 1:26, 27) 하지만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불순종했을 때 (창 2:15-17; 3:1-6)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특성들을 비롯한 그분의 영광을 반영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담의 후손 모두가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을 물려받았으므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고귀한 특성들을 올바로 반영하지 못한다.

죄: 성경에서 “죄”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주로 하마르티아이다. 이 단어는 로마서에서 이 구절에 처음 나온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동사인 하마르타노는 문자적으로 “빗나가다”를 의미하며, 과녁에서 빗나가거나 목표에 달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 저술가들은 창 던지는 사람이 과녁을 맞추지 못하는 것을 묘사할 때 하마르타노를 사용했다.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핫타트와 “죄를 짓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도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삿 20:16에서는 베냐민 사람들이 “무릿매로 돌을 던져 머리카락 하나만큼도 빗나가지 않게 맞힐 수 있다”고 말할 때 하타를 부정어와 함께 사용했다. 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단어 모두 문자적인 목표뿐 아니라 도덕적인 목표나 지적인 목표에서 빗나가거나 그러한 목표에 달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어들은 성경에서 주로 인간의 죄 즉 창조주께서 정하신 도덕 표준과 일치하게 행동하거나 생활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창 39:9; 삼상 7:6; 시 51:4; 단 9:8; 눅 15:18; 롬 2:12; 5:12) 「칠십인역」에서는 히브리어 동사 하타를 번역할 때 주로 그리스어 동사 하마르타노를 사용한다.—롬 3:23 연구 노트 참조.

죄 아래: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을 가리킨다. “아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전치사 히포는 여기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통제 아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경에서는 죄를 의인화하여,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종으로 부리는 주인에 비한다. (요 8:34; 롬 6:16-20; 7:14) 바울도 죄가 “왕으로” 다스린다고 표현한다.—롬 5:21.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인용할 때 이 표현(그리스어 카토스 게그랍타이. 게그랍타이는 “쓰다”를 의미하는 그라포의 한 형태)을 자주 사용했다. (롬 2:24; 3:10; 4:17; 8:36; 9:13, 33; 10:15; 11:26; 15:3, 9, 21; 고전 1:31; 2:9; 고후 8:15) 로마서에서 바울은 히브리어 성경을 50회 이상 인용했으며 그 밖에도 여러 차례 히브리어 성경을 직접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언급했다.

이렇게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10절부터 18절에서 바울은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모두 죄 아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히브리어 성경의 여러 구절을 인용한다. (롬 3:9) 10절부터 12절시 14:1-3과 시 53:1-3에서 인용한 것이고, 롬 3:13시 5:9과 시 140:3에서, 롬 3:14시 10:7에서, 롬 3:15-17잠 1:16과 사 59:7, 8에서, 롬 3:18시 36:1에서 인용한 것이다.—롬 1:17 연구 노트 참조.

율법 아래서 ··· 율법에 의해: 로마서에서 “법”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노모스)가 나오는 곳은 이 구절이 처음인데 이 단어는 이 구절에 두 번 나온다. 율법 없이에 해당하는 표현은 그리스어 아노모스이다. 이 문맥에서 노모스는 모세 율법을 가리키며, 로마서에서 대부분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노모스는 (1) 하나의 법 규정, (2)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 (3)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의 전체나 일부, (4) 법과 같이 지침이 되는 원칙을 가리킬 수 있다.—마 5:17; 요 10:34; 롬 8:2 연구 노트 참조.

율법: 롬 2:12 연구 노트 참조.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여기서 “육”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사르크스)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지닌 살아 있는 존재를 가리킨다.—요 17:2 연구 노트 참조.

모든 육체: 또는 “모든 인류; 모든 사람”. 이 표현은 눅 3:6에도 나오는데, 그 구절은 사 40:5을 인용한 것이다. 사 40:5에는 동일한 의미의 히브리어 표현이 사용되었다.—요 1:14 연구 노트 비교.

사람: 직역하면 “육체”. 여기서 그리스어 사르크스는 인간 즉 살과 피를 가진 존재를 가리킨다.—요 3:6; 17:2 연구 노트 참조.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바울은 롬 3:9, 12; 5:12에서도 비슷한 사상을 언급한다. 이르지 못합니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도달하지 못하다”, “미치지 못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다시 말해, 사람에게 그분의 성품과 특성을 본받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창 1:26, 27) 하지만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불순종했을 때 (창 2:15-17; 3:1-6)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특성들을 비롯한 그분의 영광을 반영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담의 후손 모두가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을 물려받았으므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고귀한 특성들을 올바로 반영하지 못한다.

대속물: 성경 외의 그리스 문헌에서 그리스어 리트론(“풀어 주다; 석방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리오에서 파생)은 속박되어 있거나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풀어 줄 때 또는 전쟁 포로를 석방할 때 지불되는 값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는 이 단어가 이 구절과 막 10:45에 두 번 나온다. 딤전 2:6에는 이 단어와 같은 어근에서 나온 안틸리트론이 나오는데, “상응하는 대속물”로 번역되었다. 그 밖에 어근이 같은 단어들로는 “해방시키다; 대속하다”를 의미하는 리트로오마이(딛 2:14; 벧전 1:18 및 각 구절의 각주 참조)와 흔히 “대속물에 의한 석방”으로 번역되는 아폴리트로시스(엡 1:7; 골 1:14; 롬 3:24; 8:23; 히 9:15; 11:35)가 있다.—용어 설명 참조.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불하신 대속물에 의해 석방되어: 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인해;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구속으로 인해”.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 아폴리트로시스는 대속과 관련이 있는 여러 단어들과 어근이 같은 단어이다.—마 20:28 연구 노트 참조.

의롭다고 인정받습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그리스어 동사 디카이오오와 그와 어근이 같은 명사들인 디카이오마디카이오시스는 일반적으로 “의롭다고 인정하다”, “의로운 행위”로 번역된다. 이 단어들은 기본적으로 어떤 혐의든 없애 주는 것, 무죄로 간주하는 것, 따라서 의롭다고 선언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죽은 사람은 “자기의 죄에서 해방된[디카이오오의 한 형태]” 것이라고 썼다. 죽음으로 죄의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이다. (롬 6:7, 23) 또한 이 그리스어 단어들은 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어, 하느님께서 믿음을 나타내는 불완전한 사람을 무죄로 여기시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행 13:38, 39; 롬 8:33.

관용: 또는 “넓은 아량”.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그리스어 명사 아노케는 이 구절과 롬 3:25에만 나온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어떤 것을 하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는 것”을 의미하며 “억제하는 것”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여러 구절에 사용되었는데, 어려운 상황을 “참다” 또는 “참을성 있게 인내하다”로 번역되었다. (마 17:17; 고전 4:12; 엡 4:2) 이 동사는 그리스어 「칠십인역」에서 여호와께서 참으시는 것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사 42:14; 64:12; LXX) 인류 역사 전체에 걸쳐 하느님께서는 놀라운 친절과 관용과 참을성을 나타내셨다. 자신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 자신의 아들이 잔인하게 고문당하고 처형되는 것, 자신을 충성스럽게 숭배하는 자들이 박해를 받는 것을 참아 오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러한 특성들을 나타내시는 이유는 사람들을 “회개로 인도하려 하시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도 이 점에 대해 언급했다.—벧후 3:9.

화목 제물: 또는 “속죄 제물; 화해 제물”. 여기서 “화목 제물”로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 힐라스테리온이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단어인 힐라스모스요1 2:24:10에서 “화목 희생”으로 번역되었다. 두 단어는 달래는 수단을 의미할 수 있다. 성경에서 이 단어들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아담은 땅에 있는 “하느님의 아들”로 창조되었을 때 창조주이신 그분과 평화로운 관계를 누렸다. (눅 3:38) 하지만 아담은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지음으로 그분과의 평화로운 관계와 완전한 인간 생명을 잃었다. 또한 그로 인해 그의 후손들은 죄와 죽음의 노예로 팔리게 되었다. (롬 5:12) 인류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려면 하느님의 완벽한 공의에 따라 동일한 가치를 지닌 것이 지불되어야 했다. (출 21:23-25; 신 19:21) 예수께서 완전한 인간 생명을 바치셨을 때, 그 희생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함으로 공의에 대한 여호와의 표준을 달래 주었다. 다시 말해 만족시켜 주었다. 그로 인해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믿는 [죄를 타고난]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실 때 자신이 의롭게 되실” 수 있었다. (롬 3:26) 예수의 희생 덕분에 사람들이 여호와와의 평화로운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추구하고 달성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엡 1:7) 히 9:4, 5에서는 그리스어 힐라스테리온이 “계약의 궤”의 덮개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는데, “화목 덮개” 또는 각주에 나와 있는 것처럼 “속죄하는 곳”으로 번역되었다.

관용: 또는 “넓은 아량”.—롬 2:4 연구 노트 참조.

과거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여호와께서는 예수께서 아담의 후손들을 불완전성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속하기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바치기 전부터 죄를 용서하기 시작하셨다. 그 일은 여호와께서 믿음을 나타내는 인류를 구원할 “자손”을 마련할 목적을 밝히기 시작하신 시점부터 가능해졌다. (창 3:15; 22:18; 사 53:5, 6, 10-12; 마 20:28; 갈 3:19) 전능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대속의 값이 이미 지불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분에게는 아들이 자신을 기꺼이 희생으로 바칠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 40:6-8; 히 10:7-10) 그 무엇도 하느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민 23:19; 사 46:10; 딛 1:2)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공의를 타협하지 않으시면서도 회개하는 죄인들을 용서하실 수 있었다. (신 32:4; 시 32:1, 2, 5; 사 1:18) 또한 그분은 의에 관한 자신의 표준을 타협하지 않으시면서도 충실한 사람들을 상대적인 의미로 의롭다고 선언하실 수 있었다. (창 15:1, 6; 겔 14:14; 마 23:35; 약 2:23-25)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대표자로 지상에 계실 때 대속이 바쳐지기 전에도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고 계셨다. 그분은 앞으로 있을 대속 희생의 가치를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들에게 미리 적용하실 수 있었다.—마 9:2-6; 눅 7:36-50; 히 2:9. 용어 설명 “대속물”,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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