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1:1-16
각주
연구 노트
디도서: 이 편지의 원문에는 이러한 제목이 없었던 것 같다. 고대 사본들을 보면 이러한 제목이 나중에 붙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성경의 책들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기원 4세기에 만들어진 잘 알려진 사본인 시나이 책자본에는 이 편지의 끝에 “디도에게”라는 제목이 들어 있다. 다른 초기 사본들에도 이와 비슷한 형태의 제목이 들어 있다.
하느님의 종: 종은 사회에서 신분이 가장 낮은 계층이지만 “하느님의 종”이라는 말은 사람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표현이 아니다. (살전 1:9 연구 노트 참조) 사실, 충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바울은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의 비천한 종이 되는 것을 영예로 여겼다. (롬 1:1 연구 노트 참조) 그와 비슷하게 예수의 이부동생 야고보도 자신이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했다. (약 1:1. 벧전 2:16; 계 7:3 비교) 마리아도 여호와의 천사를 통해 임무를 받았을 때 “저는 여호와의 여종입니다!”라고 말했다.—눅 1:38 연구 노트 참조.
사도: 롬 1:1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이 편지합니다: 원문에는 “~이 편지합니다”에 해당하는 표현이 없다. 4절까지 이어지는 이 편지의 서두는 고대의 일반적인 편지 형식을 따르고 있다. 대개 편지를 쓰는 사람이 언급되고 그다음에는 편지를 받는 사람이 언급되며 이어서 인사말이 나온다. (딛 1:4) 디도서의 서두는 상당히 긴 편이다. (그리스어로는 1절부터 4절까지가 한 문장이다.) 바울은 자신의 이름을 밝힐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도라는 점과 자신이 수행하는 전파 활동에 대해 설명한다. 이 편지가 동료인 디도에게 개인적으로 보내는 편지인데도 바울이 서두를 일반적인 편지보다 더 길게 격식을 갖추어 쓴 것은 다른 사람들도 이 편지를 읽기를 바랐기 때문일 수 있다.—딛 3:15 연구 노트 참조. 롬 1:1 연구 노트 비교.
진리의 정확한 지식: 여기서 바울은 정확한 지식을 경건한 정성과 희망과 연관 짓는다.—딛 1:2; 2:11, 12. 이 구절에서 “정확한 지식”으로 번역된 그리스어에 대해 알아보려면 엡 4:13 연구 노트 참조.
경건한 정성: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느님: 거짓말하는 것은 “진리의 하느님 여호와”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시 31:5) 여호와께서는 모든 일을 성령을 통해 하시는데, 예수께서는 성령을 가리켜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다. (요 15:26; 16:13) 이 면에서 여호와께서는 불완전한 인간과 완전히 다르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고 성경에서는 알려 준다. (민 23:19) 또한 여호와께서는 사탄과도 완전히 다르시다. 그는 “거짓말쟁이이고 거짓의 아버지”이다. (요 8:44)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결코 거짓말하실 수 없으므로 그분의 약속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히 6:18.
오래전에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희망: 여기서 바울은 하느님께서 이 희망을 “오래전에” 약속하셨다고 말한다. (딤후 1:9 연구 노트 비교) 바울은 여호와께서 사람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목적을 처음으로 세우신 때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일 수 있다. 또는 여호와께서 사람에 대한 목적을 처음으로 밝히신 때를 가리켜 말한 것일 수도 있다. (창 1:27, 28; 2:17) 하느님께서 에덴에서 반역한 자들에게 선고를 내리실 때에도 그분의 원래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 (시 37:29) 하지만 그때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자손”이 사탄을 짓밟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 나중에 기록된 성경의 내용을 보면 그 “자손”에는 하늘에서 영원히 살 사람들이 포함될 것이었다. (창 3:15. 단 7:13, 14, 27; 눅 22:28-30 비교) 바울을 비롯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갖고 있었다.—엡 3:11 연구 노트 참조.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 딤전 1:1 연구 노트 참조.
진실한 아들: 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들에서 디도와 디모데에게만 이러한 애정이 담긴 표현을 사용했다. (딤전 1:2[“진정한 아들”] 및 연구 노트) 어쩌면 바울이 디도에게 처음으로 좋은 소식을 직접 알려 주었을 수 있다.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한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 그는 디도를 영적 아들로 여겼다. 두 사람 사이의 특별한 관계는 회중들을 위해 봉사의 직무를 함께 수행하면서 형성되었다. (고후 8:23) 바울이 이 편지를 쓴 시점은 두 사람이 적어도 12년간 알고 지낸 때였다.
디도: 사도 바울과 협력하여 함께 일한 그리스인 그리스도인. 기원 49년경에 바울은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할례 문제에 대한 결정이 내려졌다. (행 15:1, 2; 갈 2:3 및 연구 노트) 몇 년 뒤 (기원 55년경) 바울은 디도를 고린도로 보내 유대의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구호 기금을 모으는 일을 하게 했다. 바울이 디도를 보낸 데에는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보낸 첫 번째 편지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아보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디도의 좋은 보고를 듣고 안심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를 썼으며, 디도가 그 편지를 전달한 것 같다. (고후 2:13 및 연구 노트; 고후 7:6, 7, 13-16; 8:1-6, 16, 17, 23; 12:17, 18) 아마도 기원 61년에서 64년 사이에, 바울은 디도를 크레타에 남겨 두어 “결함이 있는 것들을 바로잡고 … 장로들을 임명하게” 했다. (딛 1:5) 나중에 바울은 디도에게 자신을 만나러 니코폴리스로 오라고 말했다. (딛 3:12) 바울이 로마에 두 번째로 투옥되어 있을 때 (기원 65년경) 디도는 달마티아로 갔다. (딤후 4:10 연구 노트 참조) 그는 바울의 승인을 받아 그렇게 했을 것이며, 어쩌면 바울이 그렇게 하도록 지시했을 수도 있다. 분명 디도는 충실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자신이 섬긴 회중들에 큰 도움을 주었고 바울을 훌륭하게 지원했다.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 앞 구절에서 바울은 하느님을 “우리 구원자”라고 했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은 예수와 하느님이 동일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따로 언급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해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때문에 예수도 “우리 구원자”라고 할 수 있다. 히 2:10에서 바울은 예수를 “구원의 수석 대표자”라고 부른다. 성경 필자인 유다는 여호와를 “유일하신 우리의 구원자 하느님”으로 언급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함으로,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서 협력하여 일하신다는 점을 보여 준다. (유 25) 따라서 바울이 한 말은 “그리스도 예수”와 “하느님 아버지”가 동일한 분이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다.—딤전 1:1 연구 노트 참조.
과분한 친절과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롬 1:7 연구 노트 참조.
크레타: 지중해에서 비교적 큰 편에 속하는 섬인 크레타는 에게해의 남쪽 끝에 있으며 그리스 본토에서 남동쪽으로 10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다. 이 섬은 길이가 약 250킬로미터이고 폭은 최대 56킬로미터이다. 사도 바울은 첫 번째 재판을 받으러 로마로 가는 길에 이 섬을 지나갔다. (행 27:7-9, 12, 13, 21) 바울은 로마에서 첫 번째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뒤에 크레타에 다시 간 것 같은데,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바울은 크레타를 떠나면서 디도를 그곳에 남겨 두어 봉사의 직무를 계속 수행하게 했다.—부록 나13; 미디어 갤러리 “사도행전—로마로 가는 바울의 여정과 첫 번째 투옥”; “기원 61년경 이후에 바울이 한 여행” 참조.
바로잡고: 바울은 크레타를 떠나면서 디도에게 어려운 임무를 맡겼다. 디도는 크레타의 회중들에서 결함이 있는 즉 부족함이 있는 것들을 바로잡아야 했다. 이 편지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그 회중들에는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 많았다. 바울은 편지 가운데서 협조하려고 하지 않거나 디도가 사랑으로 행사하는 권위를 약화시키려고 하거나 심지어 분파를 조장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교훈했다.—딛 1:9; 2:15; 3:10, 11.
도시마다: 고대에 크레타는 도시가 많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바울이 활동하기 여러 세기 전에 그리스의 작가인 호메로스는 자신이 쓴 시에서 “백 개의 도시가 있는 크레타”를 언급했다. (「일리아드」, II, 649) 기원 1세기 당시에 이 섬에 도시가 정확히 몇 개나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바울이 “도시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데는 디도가 섬 전체를 두루 다니면서, 회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치고 돌볼 장로들을 임명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딛 1:6-9.
장로들을 임명하게: 이 표현을 볼 때 바울이 디도에게 각 회중에서 인도하는 일을 할 남자들을 임명하라고 지시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히 13:7, 17) 그리스도인 남자가 장로로 임명되려면 바울이 여호와의 영감을 받아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언급한 자격 조건에 달해야 했다. (딛 1:6-9. 또한 딤전 3:1-7 참조) 디도뿐만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 같은 다른 여행하는 감독자들도 여러 회중에서 장로를 임명할 권한이 있었다. 디모데도 그러한 일을 했던 것 같다.—행 14:23 연구 노트 참조.
비난받을 일이 없고: 디모데 전서에도 비슷한 표현들이 나온다.—딤전 3:10. 딤전 3:2 연구 노트 참조.
한 아내의 남편이고: 딤전 3:2 연구 노트 참조.
방탕하다거나: “방탕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제멋대로 행동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 단어는 대개 사치와 낭비를 일삼으며 부도덕하게 살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벧전 4:4) 이 그리스어와 어근이 같은 단어가 탕자에 관한 예수의 비유 가운데 나온다. 그는 집을 떠나 자기 재산을 매춘부에게 탕진하면서 “방탕하게” 살았다.—눅 15:13 및 연구 노트, 30.
반항적이라는: 한 사전에서는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반항적이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를 “권위에 복종하려 하지 않는, 버릇없는, 순종하지 않는”으로 정의한다. 자녀가 반항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는 그리스도인 남자는 감독자가 될 자격이 없을 것이다.
믿는 자녀를 둔: 그리스도인 남자가 장로로 섬기려면 가정을 올바로 인도하고 있어야 한다. 바울은 딤전 3:4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다.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이 구절에서 그는 장로의 자녀가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을 덧붙인다.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인 아버지가 자녀에게 믿는 사람이 되도록 강요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각자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성경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신 30:15, 16, 19) 바울의 말의 취지는 그리스도인 아버지가 장로로 자격을 갖추려면, 자녀가 믿는 사람이 되도록 돕기 위해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녀 양육에 관해 여호와께서 아버지들에게 주신 지침을 주의 깊이 따르는 사람이어야 한다.—신 6:6, 7. 엡 6:4; 골 3:21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여기서 바울은 회중의 “감독자”를 “관리인” 즉 집안 관리인으로 언급한다. “관리인”이라는 말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집안에 속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은 디모데 전서에서도 감독자의 자격 조건을 언급했는데, 그 부분에서 그리스도인 회중을 “하느님의 집안”이라고 불렀다. (딤전 3:15) 바울은 감독자를 가리켜 “하느님의 관리인”이라고 함으로, 장로의 역할이 그 집안에 속한 사람들을 섬기는 것임을 강조한다. 장로가 하는 일에는 회중 안팎에서 행해지는 가르치는 일을 인도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런 관리인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책임을 이행하는 방식에 대해 주인이신 하느님께 답변해야 한다.—눅 12:42; 고전 4:1 연구 노트 참조.
비난받을 일이 없고: 딤전 3:2 연구 노트 참조.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고: 또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거만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하는 사람은 자기 방식만을 내세운다. 그런 사람은 자기 생각을 좀처럼 바꾸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생각을 고려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협조적이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무감각해질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장로로 임명되면 회중에 많은 해를 입힐 수 있다.—딤전 3:3 연구 노트 비교.
쉽게 화를 내지 않고: 또는 “짜증을 잘 내지 않고”.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은 작은 일에도 불쾌감을 드러낸다. 그런 사람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자주 화를 내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고 많은 해를 가져온다. (잠 15:18; 22:24; 25:28; 29:22) 반면에 장로로 섬길 자격을 갖춘 사람은 “합리적이고, 다투지 않는다.” (딤전 3:3) 그는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여호와를 본받는다.—출 34:6; 시 86:15.
폭력적이지 않고: 딤전 3:3 연구 노트 참조.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바울이 동일한 그리스어를 사용한 딤전 3:8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딤전 3:3 연구 노트 참조.
후대를 잘하고: 그리스어 원문을 보면 이 표현 앞에는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상반될 때 쓰는 접속사가 들어 있다. 바울은 지금까지는 감독자가 되기 원하는 사람이 나타내서는 안 되는 부정적인 특성들을 언급했지만 여기서부터는 감독자가 나타내야 하는 긍정적인 특성들을 언급한다. 바울의 말을 볼 때 감독자가 될 자격을 갖추려면 좋지 않은 특성들을 피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후대를 잘하는 것과 같은 좋은 특성을 길러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딤전 3:2 연구 노트 참조.
선한 것을 사랑하고: 선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여호와께서 선하다고 여기시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좋은 점을 보고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며 칭찬한다.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선한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며, 요구되는 것 이상의 일을 하기까지 한다.—마 20:4, 13-15; 행 9:36; 딤전 6:18. 갈 5:22 연구 노트 참조.
정신이 건전하고: 딤전 3:2 연구 노트 참조.
충성스럽고: 충성스러운 감독자는 여호와께 꺾을 수 없는 정성을 나타내며 하느님의 말씀에 나오는 원칙들에 충실히 고착한다. 그는 동료 숭배자들이 시련이나 박해를 겪을 때 변함없이 그들 곁을 지킨다.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는 (일부 번역판의 표현처럼) “거룩하다”, “경건하다”라는 의미도 담고 있지만, “충성스럽다”로 번역할 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다. 예를 들어, 이 그리스어는 「칠십인역」에서 “충성스럽다”나 “충성스러운 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를 번역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 (삼하 22:26; 시 18:25; 97:10) 한 참고 자료에서는 이 그리스어가 “하느님께 충성스러운 사람”을 묘사하는 말이라고 설명한다.—딤전 2:8 연구 노트 참조.
자제력이 있고: 갈 5:23 연구 노트 참조.
가르치는 기술: 딤후 4:2 연구 노트 참조.
신실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장로가 가르치는 방식과 살아가는 방식에는 그가 하느님의 말씀에 고착한다는 것이 나타나야 한다. 그는 회중에서 가르칠 때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이나 연설 능력이 아니라 성경에 들어 있는 “신실한 말씀” 즉 “믿을 만한 말씀”에 의지한다. (고전 4:6 및 연구 노트) 그렇게 하여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여호와를 사랑하고 섬기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한다. (히 4:12) 또한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성경 원칙에 따라 살아감으로 위선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표준을 따르는 장로는 회중의 연합에 기여하며 그렇게 해서 회중이 “진리의 기둥과 버팀대” 역할을 하게 한다.—딤전 3:2, 15 연구 노트 참조.
격려하고: 또는 “권고하고”.—롬 12:8 연구 노트 참조.
반역적인 사람: 여기서 “반역적인 사람”은 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크레타의 일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따를 필요가 없는 할례에 관한 유대인의 전통과 법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들은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으며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베푼 지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익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 한 참고 자료에 따르면 이 표현은 그들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확실한 진리가 거의 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은 말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회중에 있는 약한 사람들이나 남의 말을 잘 믿는 사람들을 속이는 사람이었다.
할례에 고착하는 사람들: 크레타의 일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늦어도 기원전 1세기부터는 크레타에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 또한 기원 33년 오순절에 “하느님의 장엄한 일들”에 관해 들은 사람들 중에는 크레타에서 온 유대인들도 있었다. (행 2:11)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크레타의 일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약 12-15년 전(기원 49년경)에 예루살렘의 중앙장로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렸는데도 그렇게 한 것이다. (갈 2:1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역사적인 모임에 참석했을 때 디도도 그와 함께 갔다.—행 10:45; 15:1, 2, 7, 22-29; 갈 2:1, 3.
입을 다물게: 한 사전에 따르면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그리스어 동사는 “부리망이나 재갈 등을 ‘입에 씌우거나 물려서’ 제어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중의 일부 사람들은 거짓 교리를 퍼뜨려 “여러 집안을 온통 망치고” 있었다. 임명받은 장로들은 그런 사람들로부터 여호와의 양 떼를 보호해야 했으며, 그들의 반역적인 말이 회중에 퍼져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함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그들이 입을 다물게” 해야 했다. 장로들은 그들을 엄하게 책망하고 필요할 경우, 반복적인 조언을 무시하고 계속 거짓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추방함으로 그들을 잠잠하게 할 수 있었다.—딛 1:9, 10, 13; 3:10, 11.
그들의 예언자: 바울은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크레타의 시인 에피메니데스의 말을 인용한 것 같다. 여기서 “예언자”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의미 폭이 넓어서, 대변해 주거나 해설해 주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실제로 일부 고대 그리스의 저술가들도 에피메니데스를 예언자로 언급했으며, 시인 호메로스나 철학자 디오게네스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 저술가들도 있다. 분명 바울의 말은 에피메니데스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예언자라는 뜻이 아니다. (벧후 1:21) 바울은 크레타 사람들이 존경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여길 만한 인물의 말을 인용한 것뿐이다.
“크레타 사람은 언제나 거짓말쟁이이고 사나운 짐승이고 게으른 탐식가이다”: 고대에 크레타 사람들은 부정직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문자적으로 “크레타 사람처럼 행동하다[또는 “말하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가 거짓말을 하거나 속인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바울은 크레타의 충실한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행동한다는 뜻으로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다. (행 2:5, 11, 33) 바울은 크레타의 회중들에 해를 끼치는 일부 크레타 사람들을 가리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앞에서 그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여러 집안을 망치고 있는 “반역적인 사람, 무익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 속이는 사람”들을 언급했다. (딛 1:10 연구 노트 참조) 따라서 바울이 이 유명한 말을 인용한 것은 일부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그 말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게으른 탐식가: “탐식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식욕을 채우는 것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크레타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롬 16:18; 빌 3:19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이 표현을 인용할 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계속 식욕만을 채우려고 하는, 게으르고 움직이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이 증언은 참됩니다: 앞 구절에서 바울은 크레타의 예언자 에피메니데스가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대해 한 말을 인용한 것 같다. 바울은 모든 크레타 사람들이 그 말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회중들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던 일부 사람들에 대해 디도에게 주의를 준 것인데, 그들은 에피메니데스의 말처럼 행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딛 1:12 연구 노트 참조.
그들을 계속 엄하게 책망하여: 크레타 회중들의 일부 사람들은 건전한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거슬러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가르쳐 “여러 집안을 온통 망치고” 있었다. (딛 1:9-11) 따라서 바울은 디도에게 그러한 거짓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좋지 않은 특성들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계속 책망하라’고 권고한다. 바울이 “엄하게”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해서 디도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게 혹은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사람들을 대해도 된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딤후 2:24 비교) 디도는 문제를 다룰 때 두려움 없이 결단력 있는 태도를 나타내고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는지 분명히 밝혀야 했다. (딛 2:15) 그러면서도 자신의 목표를 염두에 두면서 “그들이 믿음에서 건전해지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었다. 그는 회중을 보호하고 배교가 퍼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딤전 5:20; 딤후 3:16 연구 노트 참조.
설화: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미토스는 “전설, 설화 … 꾸민 이야기, 신화”로 정의할 수 있으며, 여기서는 유대인들 사이에 퍼져 있는 이야기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에는 풍부한 유산과도 같은 많은 실제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리를 저버렸으며” 거짓 이야기를 지어내 퍼뜨렸다.—딤전 1:4; 4:7 연구 노트 참조.
진리: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진리”는 그때까지 밝혀진 그리스도교 가르침 전체를 가리킨다.—갈 2:5 연구 노트 참조.
사람들의 명령: 이 표현은 사 29:13에 나오는 표현과 비슷하다. 예수께서는 이사야가 한 이 말을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적용하여 “그들이 사람의 명령을 교리로 가르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마 15:9; 막 7:7) 바울은 유대교에서 흔히 지키던, 사람이 만든 일부 제한 규정을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사용했을 수 있다. 거짓 선생들은 사람들이 경건한 삶을 사는 데 그러한 규정이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그 규정들을 지키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사실 그러한 규정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에서 건전해지는” 데 도움이 되는 “건전한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이었다.—딛 1:9, 13. 골 2:20-22; 딤전 4:3-5 비교.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늘 하느님의 표준과 일치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깨끗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무엇을 도덕적·영적으로 깨끗하다고 여기시는지, 그분의 영감받은 말씀에서 무엇을 정죄하는지 알고 있다. (막 7:21-23; 갈 5:19-21)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깨끗한 마음”과 “깨끗한 양심”을 유지할 수 있다. (딤전 1:5; 3:9; 딤후 1:3; 막 7:15) 바울이 언급한 “모든 것”이란 하느님께서 정죄하시지 않는 것들이다. 바울은 “깨끗한 사람들”을 양심이 더럽혀진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대조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깨끗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공언하지만: 크레타에 있는 회중들의 거짓 선생들은 하느님을 알고 숭배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하느님을 아는 것에는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분의 길로 걷는 것이 포함된다. (시 25:4, 5; 요1 2:3, 4)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 즉 행실과 생활 방식을 통해 실제로는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그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런 위선적인 태도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이었다.—잠 17:15 비교.
어떤 선한 일에도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적합하지 않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승인받지 못하다; 자격이 없다”를 의미한다. (롬 1:28; 딤후 3:8)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다”를 의미한다. 이어지는 구절들(딛 2:1–3:8)에서 바울은 하느님께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들이 어떤 선한 일들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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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는 바울이 지시한 대로 크레타섬에서 도시들을 여행하며 “장로들을 임명”했다. (딛 1:5) 바울은 디도를 크레타에 남겨 두어 그곳의 그리스도인 회중들에서 “결함이 있는 것들을 바로잡게”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바울은 디도에게 영감받은 편지를 썼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것은 디도에게 영적인 지침을 베풀고, 디도가 크레타의 회중들을 위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사도로서 지지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특히 이 편지는 디도가 장로를 임명할 때 고려해야 할 특성들을 알려 준다. (딛 1:6-9) 또한 이 편지는 “건전한 말”을 하고 “훌륭한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회중에서 “반역적인 사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베푼다.—딛 1:10, 11, 13, 14; 2:8; 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