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1-71
연구 노트
갈릴리 바다 곧 티베리아스 바다: 갈릴리 바다 서쪽 해안에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티베리아스라는 도시가 있었다. (요 6:23) 갈릴리 바다는 이 도시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아스 바다라고 불리기도 했다. 티베리아스 바다라는 이름은 이 구절과 요 21:1에 나온다.—마 4:18 연구 노트 참조.
유월절: 기원 32년의 유월절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것은 예수께서 땅에서 봉사하시는 동안 있었던 세 번째 유월절이었을 것이다.—요 2:13; 5:1; 11:55 연구 노트 및 부록 가7 참조.
우리가 어디서 이 사람들이 먹을 빵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 중에 복음서 필자 네 명 모두가 기록한 기적은 이것뿐이다.—마 14:15-21; 막 6:35-44; 눅 9:10-17; 요 6:1-13.
사람들을 앉게 하십시오: 또는 “사람들을 기대앉게 하십시오”. 여기서 “사람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안트로포스로서 남자와 여자를 모두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이 구절에서 “남자”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아네르인데, 마 14:21과 비교해 보면 이 문맥에서는 성인 남자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 14:21 연구 노트 참조.
사람들이 거기에 앉았는데, 남자의 수가 5000명쯤 되었다: 이 기적에 대해 기록한 복음서 필자들 중에 마태만이 “여자와 어린아이 외에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마 14:21) 예수께서 기적으로 먹이신 사람의 수는 1만 5000명이 넘었을 수 있다.
‘예언자’: 기원 1세기에 많은 유대인들은 신 18:15, 18에 언급된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메시아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이 문맥에서 세상에 오다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던 메시아가 출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요한만이 이 구절에 나오는 내용을 기록했다.—요 1:9 연구 노트 참조.
자기를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을: 복음서 필자 가운데 요한만이 이 일을 기록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는 나라의 정치에 관여하기를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하느님께서 정하신 방법으로만 왕이 되고자 하셨다. 후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도 그와 동일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다.—요 15:19; 17:14, 16; 18:36.
바다: 갈릴리 바다를 가리킨다.—마 4:18; 요 6:1 연구 노트 참조.
5~6킬로미터쯤: 직역하면 “25~30스타디온쯤”. 그리스어 스타디온은 1로마마일의 8분의 1 즉 185미터에 해당하는 길이 단위이다. 갈릴리 바다는 폭이 12킬로미터쯤 되는 호수였다. 따라서 당시 제자들이 탄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을 것이다.—막 6:47. 마 4:18 연구 노트 및 부록 가7 및 나14 참조.
티베리아스: 갈릴리 바다 서쪽 해안에 있던 도시로, 가버나움에서 남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이 도시 바로 남쪽에는 고대에 유명했던 온천들이 있다. 티베리아스는 기원 18년에서 26년 사이에 헤롯 안티파스가 새로운 수도로 삼기 위해 건설한 도시이며, 그는 그곳에 자신의 왕궁도 지었다. 그는 당시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 카이사르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 도시의 이름을 티베리아스라고 지었는데, 이 도시는 지금도 티베리아스(히브리어: 테베리아)라고 불린다. 이 도시는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지만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언급된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티베리아스를 방문하셨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곳이 외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도시였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곳에 가지 않으셨던 것 같다. (마 10:5-7 비교) 요세푸스에 따르면, 티베리아스는 묘지가 있는 곳에 세워졌다. 따라서 많은 유대인은 그곳으로 이주하기를 꺼렸다. (민 19:11-14) 기원 2세기에 유대인들의 반란이 있은 뒤에, 티베리아스는 정결한 곳으로 선언되었으며 유대인들의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산헤드린도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미슈나와 팔레스타인(예루살렘) 탈무드는 그곳에서 집대성되었으며, 후에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하는 데 사용된 마소라 본문도 그곳에서 완성되었다.—부록 나10 참조.
썩어 없어지는 양식 ··· 계속 남아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 예수께서는 일부 사람들이 단순히 물질적인 도움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자신과 제자들을 따른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실제 양식은 사람이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지만, 하느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양식”은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게 해 준다.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계속 남아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라고, 다시 말해 영적 필요를 채우고 배운 것에 대해 믿음을 나타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라고 권고하신다.—마 4:4; 5:3; 요 6:28-39.
우리 조상들은 ··· 만나를 먹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문자적인 양식을 줄 수 있는 메시아 왕을 원했다. 그들은 그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뒷받침하려고, 하느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시나이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일을 언급했다. 그들은 시 78:24을 인용하여, 하느님께서 기적으로 주신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 주신 빵[또는 “곡식”]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바로 전날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여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생선 두 마리로 많은 사람을 먹이신 일을 염두에 두고 (요 6:9-12) 그분에게 “표징”을 행할 것을 요구했을 수 있다.—요 6:30.
세상: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그리스어 코스모스는 일반적으로 인류 전체나 그 일부를 가리킨다. (요 1:10 연구 노트 참조) 요 1:29에서는 예수를 “세상의 죄”를 없애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언급한다. 요 6:33에서는 예수가 하느님의 빵 즉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생명과 축복을 주기 위해 사용하시는 통로라고 알려 준다.
생명의 빵: 이 표현은 성경에 두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요 6:35, 48) 문맥을 보면 이 구절에 나오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 6:40, 47, 54) 예수께서는 이 대화 가운데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 준 참된 빵’(요 6:32), “하느님의 빵”(요 6:33), “생명의 빵”(요 6:51)으로 언급하신다. 그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공급해 주셨지만 (느 9:20) 만나가 그들이 영원히 살게 해 주지는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신다. (요 6:49) 그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들에게는 하늘에서 온 만나 즉 “생명의 빵”이 있으며 (요 6:48-51, 58) 이것은 그들이 영원히 살게 해 줄 수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희생으로 바치신 살과 피가 가진 구속하는 힘에 대해 믿음을 나타냄으로 “이 빵을 먹는다.”
마지막 날에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부활시킬 것이라는 말씀을 네 번 하셨다. (요 6:40, 44, 54) 요 11:24을 보면 마르다도 “마지막 날 부활”을 언급했다. (단 12:13 비교. 요 11:24 연구 노트 참조) 요 12:48에서는 이 “마지막 날”을 심판 때와 연관 짓는데, 심판 때는 그리스도께서 부활되는 모든 사람을 비롯해 인류를 심판하실 천년 통치 기간을 가리키는 것 같다.—계 20:4-6.
영원한 생명: 이 대화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표현을 네 번 사용하시며 (요 6:27, 40, 47, 54) 그분의 제자 한 명도 그 표현을 한 번 사용한다. (요 6:68) “영원한 생명”이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 총 17회 나오는데, 이것은 다른 세 복음서에 나오는 횟수를 합한 것(8회)보다 많은 수이다.
이끌지: “이끌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그물에 잡힌 물고기를 끌어 올리는 것을 가리킬 수 있는 표현이지만 (요 21:6, 11) 이 구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억지로 이끄신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이 동사는 “(마음을) 끌다”를 의미할 수도 있는데, 예수께서는 렘 31:3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을 수 있다. 그 구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고대 백성에게 “[내가] 충성스러운 사랑으로 너를 내게로 이끌었다”라고 말씀하신다. (「칠십인역」에서는 그 구절을 번역할 때 동일한 그리스어 동사를 사용했다.) 요 12:32(연구 노트 참조)에서는 예수께서도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모든 부류의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끄신다고 알려 준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고 말한다. 따라서 누구나 그분을 섬길지 섬기지 않을지를 선택할 수 있다. (신 30:19, 20) 여호와께서는 합당한 마음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부드럽게 이끄신다. (시 11:5; 잠 21:2; 행 13:48) 그분은 성경에 담긴 소식과 자신의 성령을 통해 그렇게 하신다. 요 6:45에는 사 54:13의 예언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 예언은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요 6:65 비교.
여호와: 이 구절에서 인용한 사 54:13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네 개의 히브리어 자음으로 표기된 하느님의 이름(יהוה, 로마자로 음역하면 YHWH)이 나온다. 요한복음의 현존하는 그리스어 사본들에는 이 부분이 테오스로 되어 있다. (「칠십인역」의 사본들에서 사 54:13에 사용한 표현을 따른 것일 수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번역판에서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사 54:13의 히브리어 원문을 고려하여, 「신세계역」 본문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부록 다 참조.
여러분 안에 생명이: 요 5:26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 안에 생명을” 갖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갖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요 5:26 연구 노트 참조) 이제 약 1년 뒤에 예수께서는 동일한 표현을 제자들에게 사용하신다. 그러면서 “[그들] 안에 생명이” 있는 것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 같은 것으로 언급하신다. (요 6:54) 이 문맥에서 ‘자신 안에 생명이’ 있다는 표현은 생명을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생명의 온전함에 들어가는 것, 다시 말해 온전한 의미에서 살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로 부활되어 불멸의 생명을 누리게 될 때 온전한 의미에서 살게 된다. 땅의 희망을 가진 충실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가 끝난 후 곧바로 있게 될 최종 시험을 통과하고 나서야 온전한 의미에서 살게 될 것이다.—고전 15:52, 53; 계 20:5, 7-10.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문맥을 볼 때,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나타낸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요 6:35, 40)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는 기원 32년이었으므로, 그분은 주의 만찬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었다. 주의 만찬은 예수께서 그로부터 1년 뒤에 제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유대인의 축제인 유월절”이 있기 얼마 전이었다. (요 6:4) 따라서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다가오는 축제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던 날 밤 어린양의 피가 어떻게 생명을 구하는 역할을 했는지 떠올렸을 수 있다. (출 12:24-27) 예수께서는 그 어린양의 피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피가 제자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을 강조하신 것이었다.
내 안에: 또는 “나와 함께하여”. 이 표현은 친밀하고, 조화를 이루고, 연합되어 있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회당: 달리 번역하면 “공개 집회”.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명사 시나고게의 문자적 의미는 “함께 모음; 회중”이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대부분의 성구에서 이 단어는 유대인들이 성경 낭독, 교훈, 설교, 기도 등을 위해 모인 건물이나 장소를 가리킨다. (용어 설명 “회당” 참조) 이 문맥에서 이 단어는 일반 사람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모임을 가리키는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지만, 예수께서 모세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을 가르치셨던 “회당”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여러분을 걸려 넘어지게 합니까?: 또는 “이 말이 여러분의 귀에 거슬립니까?; 이것 때문에 여러분이 반감을 품습니까?; 이것이 여러분이 믿음을 잃게 만듭니까?”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그리스어 단어 스칸달리조는 비유적인 의미에서 걸려 넘어지거나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죄를 짓거나 죄를 짓게 한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문맥에 따라 이 단어는 도덕에 관한 하느님의 법을 범하거나 믿음을 잃거나 거짓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할 수 있으며, 반감을 품거나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다.—마 5:29; 18:7 연구 노트 참조.
영: 하느님의 성령을 가리키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영을 통해 주시는 능력과 지혜와는 달리 육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인간의 저술물과 철학과 가르침에 나타나 있는 인간의 능력과 지혜가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육: 이 표현은 폭넓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인간이 가진 한계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인간은 원하는 것을 모두 이해할 수도 없으며 원하는 것을 모두 성취할 수도 없다. 인간이 가진 경험과 지혜, 모든 저술물과 철학과 가르침을 다 합한다 해도 그러한 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
영이며 생명입니다: 여기서 “~이며”와 “~입니다”로 번역된 그리스어(에스틴)는 이 구절에서 “의미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그럴 경우 이 표현은 “영을 의미하고 생명을 의미합니다”로 번역할 수 있다. (마 12:7; 26:26 연구 노트 참조)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이 성령의 영감을 받은 것이며 생명을 가져다준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
예수께서는 ··· 자신을 배반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 알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배반할 사람이 가룟 유다임을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선택하기 전에 밤새도록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눅 6:12-16) 따라서 유다는 처음에는 하느님께 충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예언들을 통해 자신이 가까운 동료에게 배반당할 것임을 알고 계셨다. (시 41:9; 109:8; 요 13:18, 19) 그리고 유다가 악해지기 시작하자, 마음과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예수께서는 그러한 변화를 알아차리셨다. (마 9:4) 하느님께서는 예지력을 사용하여 예수가 신뢰하던 동료 중 하나가 배반자가 될 것임을 내다보셨다. 하지만 유다가 그 배반자가 될 것임이 미리 예정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특성과 그분이 과거에 일을 처리하신 방식과 조화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이 표현은 유다가 태어난 시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가 사도로 선택된 시점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예수께서 밤새 기도하신 다음 그를 사도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눅 6:12-16) 여기서 “처음”이란 유다가 배반적인 태도를 나타내기 시작한 때를 가리키며, 예수께서는 즉시 그 점을 알아차리셨다. (요 2:24, 25; 계 1:1; 2:23. 요 6:70; 13:11 연구 노트 참조) 또한 이 표현은 유다가 배신한 것이 갑작스런 심경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미리 생각하고 계획한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처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르케의 의미는 문맥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벧후 3:4에서 이 단어(“시작”)는 창조의 시작을 가리킨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단어는 좀 더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일례로 베드로는 성령이 “처음에 우리에게 내렸던 것처럼” 이방인들에게도 내렸다고 말했다. (행 11:15) 여기서 베드로가 말한 “처음”은 그가 태어난 시점이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시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기원 33년 오순절 즉 성령이 특별한 목적으로 “처음” 부어진 때를 언급한 것이었다. (행 2:1-4) “처음”이라는 단어가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된 예는 눅 1:2; 요 15:27; 요1 2:7에서도 볼 수 있다.
중상자: 또는 “마귀”. 그리스어 디아볼로스는 “중상자”를 의미하며,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탄 마귀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딤전 3:11; 딤후 3:3; 딛 2:3에서는 이 단어가 사탄 마귀를 가리키지 않으며, “중상하다”로 번역되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이 단어가 사탄 마귀를 가리키는 경우에는 거의 언제나 이 단어 앞에 정관사가 사용된다. (마 4:1 연구 노트 및 용어 설명 “정관사” 참조) 이 구절(요 6:70)에서 이 단어는 악한 특성을 발전시킨 가룟 유다를 가리키는 데 쓰였다. 아마 이 무렵에 예수께서는 유다가 잘못된 길에 들어섰음을 알아차리셨을 것이다. 그로 인해 유다는 후에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게 되었다.—요 13:2, 11.
미디어
성경에는 다양한 형태의 바구니를 묘사하는 몇 가지 단어가 나온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기적으로 약 5000명의 남자를 먹이셨을 때 남은 음식을 담은 12개의 바구니는, 그리스어 원문에 나오는 단어를 볼 때 잔가지를 엮어 만든 비교적 작은 손바구니였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약 4000명의 남자를 먹이셨을 때 남은 음식을 담은 7개의 바구니를 가리키는 데는 다른 그리스어 단어가 사용되었다. (막 8:8, 9) 이 단어는 큰 바구니 또는 양식 바구니를 가리킨다. 다마스쿠스의 성벽 구멍을 통해 바울을 내려보낼 때 쓰인 광주리를 가리키는 데도 동일한 그리스어 단어가 사용되었다.—행 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