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 후서 3:1-17

3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마지막 날에+ 대처하기 어려운 위급한 때가 올 것입니다.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자랑하고, 거만하고, 신성을 모독하고,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감사하지 않고, 충성스럽지 않고, 3  비정하고, 합의하려 하지 않고, 중상하고, 자제하지 않고, 사납고, 선을 사랑하지 않고, 4  배반하고, 자기 고집대로 하고, 교만으로 우쭐대고, 하느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을 사랑하고, 5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6  그들 가운데서, 남의 집안에 슬그머니 들어가 죄에 빠져 있는 약한 여자들을 사로잡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여자들은 여러 가지 욕망에 이끌려, 7  항상 배우기는 하지만 결코 진리의 정확한 지식에 이르지 못합니다. 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반대한 것과 같이, 그들도 진리를 계속 반대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정신이 심하게 부패해 있으며 믿음에 있어서 승인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9  그렇지만 그들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의 어리석음처럼 그들의 어리석음도 모든 사람에게 명백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생활 방식과+ 목적과 믿음과 참을성과 사랑과 인내를 밀접히 따랐으며, 11  내가 안티오크와+ 이코니온과+ 리스트라에서+ 겪은 박해와 고난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박해를 인내했고 주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나를 구출하셨습니다.+ 12  사실,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경건한 정성으로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13  그런데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사람들은 더욱더 악해져서, 잘못 인도하기도 하고 잘못 인도되기도 할 것입니다.+ 14  그러나 그대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에 머무르십시오.+ 그대는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알고 있으며, 15  유아기부터+ 거룩한 기록들을 알았습니다.+ 그 기록들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 그대를 지혜롭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해 줄 수 있습니다.+ 16  모든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가르치고+ 책망하고 바로잡고+ 의로 징계하는 데+ 유익합니다. 17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전히 유능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를 완전히 갖추게 해 줍니다.

각주

연구 노트

먼저 배교가 일어나고: 데살로니가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여호와의 날”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두 가지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고 상기시켜 준다. (1) 배교가 일어나고 (이 구절에 나오는 배교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2)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것이었다. (살후 2:1-3) 배교가 널리 퍼져 그리스도인 회중에 해를 끼칠 것이라는 바울의 말은 밀과 가라지에 대한 예수의 비유와 조화를 이룬다. (마 13:24-30, 36-43) 바울은 다른 구절들에서도 배교가 회중에 침투할 것이라는 예언적인 경고를 했다. 후에 사도 베드로도 그러한 경고를 했다.—행 20:29, 30; 딤전 4:1-3; 딤후 4:3, 4; 벧후 2:1-3.

마지막 날에: 이 구절에서 바울은 미래 시제를 사용하여 “마지막 날에 … 위급한 때가 올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또한 딤후 3:2, 13 참조) 따라서 그는 미래에 있을 일 즉 예수의 보이지 않는 임재 기간에 있을 세상 제도의 “마지막 날”에 있을 일을 묘사한 것이다. (용어 설명 “마지막 날” 참조) 이 “마지막 날”은 살후 2:3-12의 예언대로 배교가 일어나고 “불법의 사람”이 나타난 후에야 올 것이었다. (살후 2:3; 딤전 4:1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이어서 그때 인간 사회에 만연할 불경건한 특성들을 열거한다. (딤후 3:1-5. 딤후 3:5 연구 노트 참조) 대배교가 사람들 사이에 그러한 바람직하지 않은 특성들이 퍼지는 한 가지 요인이 될 것이었다.

대처하기 어려운 위급한 때: 이 표현은 바울이 “마지막 날”이라는 힘든 시기를 묘사하는 데 사용한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그리스어 카이로스는 특정한 기간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되며 “정해진 때”로 번역할 수도 있다. (행 1:7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그 단어와 함께 그리스어 칼레포스를 사용했는데, 칼레포스는 여기에서 “대처하기 어려운”으로 번역되었다. 여러 사전들에서는 이 단어를 “어려운”, “위험한”, “스트레스가 많은”으로 정의한다. 마 8:28에서는 동일한 단어가 악귀에 들린 두 사람을 매우 “사납다”고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바울은 사람들이 나타내는 나쁜 특성들 때문에 (딤후 3:2-5, 13) “마지막 날”이, 여러 참고 문헌의 표현에 따르면 “스트레스가 많은 때” 또는 “견디기 힘든, 살아가기 힘든, 대처하기 힘든” 때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바울은 지금까지 “마지막 날에” 세상 상태가 어떻게 나빠질 것인지 예언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당시에도 자신이 언급한 특성들을 어느 정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딤후 3:1, 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단어는 공포에 질려 피하는 것을 뜻할 수도 있는, 의미가 강한 동사이다. 그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자신이 언급한 특성들을 나타내는 사람들과 불필요하게 어울리지 말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하지만 그들과 가깝게 지내서는 안 된다.—딤후 2:24 연구 노트 참조.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일부 사람들이 성경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참숭배를 떠날 것이라고 예언한다. 여기서 “떠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문자적으로 “떨어져 서 있다”를 의미하며 “물러나다; 버리다; 떠나가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행 22:29; 딤후 2:19; 히 3:12) 이 단어는 “배교”로 번역되는 명사와 어근이 같다.—살후 2:3 연구 노트 참조.

때나 시기: 이 구절에서는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가지 단어가 사용되었다. 여기서 로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 크로노스의 복수형이다. 이 단어는 길든 짧든 길이가 정해져 있지 않은 기간을 가리킬 수 있다. 시기로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 카이로스의 복수형이다. (카이로스는 “정해진 때”로 번역되기도 한다.) 많은 경우 이 단어는 하느님의 마련이나 시간표 안에서 미래의 기간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며, 특히 그리스도의 임재와 그의 왕국과 관련하여 사용된다.—행 3:19; 살전 5:1. 막 1:15; 눅 21:24 연구 노트 참조.

돈을 사랑하는: 바울이 이러한 사랑이 “온갖 해로운 일의 뿌리”라고 말했을 때, 그는 당시 잘 알려져 있던 속담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일 수 있다. 그는 돈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돈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다. (전 7:12; 10:19) 위험한 것은 돈에 대한 사랑이다. 5절에서 바울은 일부 거짓 선생들이 돈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있다는 점을 밝힌다. 따라서 그가 앞서 감독자의 자격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말한 것도 당연하다. (딤전 3:1, 3연구 노트) 성경에서는 돈을 사랑하는 것에 또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 알려 준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전 5:10) 더 심각한 것으로, 돈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경쟁을 벌이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밀어내 버릴 수도 있다. (마 6:24. 눅 16:9 연구 노트 참조) 따라서 돈에 대한 사랑은 온갖 “해로운 일”의 뿌리 즉 원인이다. 그러한 사랑을 가지면 바울이 이 구절에서 언급한 “고통”을 겪게 된다.

사람들은: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남자들”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않고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다. 바울은 그의 시대로부터 먼 미래에 있을 때인 “마지막 날에” 사람들이 나타낼 약 20가지의 특성을 언급한다. (딤후 3:1연구 노트) 하지만 바울은 그 당시 사람들은 그러한 나쁜 특성들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가 디모데에게 그런 사람들을 “멀리하라”고 권고한 것을 볼 때, 당시에도 사람들이 나타내는 그런 특성들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딤후 3:5 연구 노트 참조. 막 7:21, 22 비교)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인류 전반에 그러한 악한 특성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미래의 때에 관해 예언한 것이다.

돈을 사랑하고: 딤전 6:10 연구 노트 참조.

자랑하고, 거만하고: 자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특성과 부를 뽐내며 많은 경우 그러한 것들에 대해 과장해서 말한다. 거만한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이 특성들은 서로 비슷하지만, “자랑하는” 것은 주로 말로 교만을 드러내는 것을 가리키고, “거만한” 것은 주로 생각과 감정에 교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신성을 모독하고: 또는 “모욕적으로 말하고”.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블라스페모스)는 “신성을 모독하는, 중상하는, 명예를 훼손하는, 모욕하는” 말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마지막 날”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이나 사람들에 대해 그런 말을 할 것이었다.—딤후 3:1.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그리스도교 시대가 되기 오래전부터 모세 율법에는 자녀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출 20:12; 마 15:4) 그리스도인 회중에서도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침받았다. (엡 6:1, 2) 여호와를 숭배하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도 자녀가 부모에게 반역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는 잘못된 일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했다. (롬 2:14, 15)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들이 부모를 때리면 시민으로서 누리는 모든 권리를 잃었다. 또한 로마법에서는 아버지를 때리는 것이 살인과 동일한 중죄로 여겨졌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태도가 널리 퍼질 때를 예언한 것이다. 한 참고 문헌에서 알려 주듯이, 그것은 “극도로 쇠퇴하는 문명의 표징”이 될 것이었다.

감사하지 않고: 일부 사람들은 부모나 다른 사람 심지어 하느님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길지 모른다. (눅 6:35) 그런 태도는 기본적으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충성스럽지 않고: 또는 “충성스러운 사랑이 없고”. (또한 딤전 1:9, 각주 참조)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는 사람들과 하느님에 대해 충성스럽지 않다는 뜻을 담고 있을 수 있다. 이 단어는 의미 폭이 넓으며 “거룩하지 않다; 불경스럽다”라는 뜻을 포함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거룩한 것에 대한 존중심이 없는 것, 또는 한 사전의 표현에 따르면 “아무것도 신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은 충실하게 행동하려는 마음이 없으며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 심지어 하느님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바울은 지금까지 “마지막 날에” 세상 상태가 어떻게 나빠질 것인지 예언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당시에도 자신이 언급한 특성들을 어느 정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딤후 3:1, 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단어는 공포에 질려 피하는 것을 뜻할 수도 있는, 의미가 강한 동사이다. 그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자신이 언급한 특성들을 나타내는 사람들과 불필요하게 어울리지 말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하지만 그들과 가깝게 지내서는 안 된다.—딤후 2:24 연구 노트 참조.

마지막 날에: 이 구절에서 바울은 미래 시제를 사용하여 “마지막 날에 … 위급한 때가 올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또한 딤후 3:2, 13 참조) 따라서 그는 미래에 있을 일 즉 예수의 보이지 않는 임재 기간에 있을 세상 제도의 “마지막 날”에 있을 일을 묘사한 것이다. (용어 설명 “마지막 날” 참조) 이 “마지막 날”은 살후 2:3-12의 예언대로 배교가 일어나고 “불법의 사람”이 나타난 후에야 올 것이었다. (살후 2:3; 딤전 4:1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이어서 그때 인간 사회에 만연할 불경건한 특성들을 열거한다. (딤후 3:1-5. 딤후 3:5 연구 노트 참조) 대배교가 사람들 사이에 그러한 바람직하지 않은 특성들이 퍼지는 한 가지 요인이 될 것이었다.

비정하고: 또는 “본연의 애정이 없고”. 이 표현은 그리스어 아스토르고스를 번역한 것이다. 아스토르고스는 “없다”를 의미하는 접두사 와 “본연의 애정”을 의미하는 스토르게가 결합된 단어이다. 이 단어는 가족 간의 본연의 애정이 없는 것, 특히 부모가 자녀에게 또는 자녀가 부모에게 본연의 애정이 없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가족에게 본연의 애정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울의 말과 일치하게,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역사가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거나, 자녀가 연로한 부모를 돌보지 않거나, 허약하거나 기형인 아이를 비롯해 원치 않는 아이를 부모가 죽게 한 사례들이 있었다. 바울은 이 구절 즉 롬 1:31에서 사람들이 원래의 완전성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딤후 3:3에서는 이 위급한 마지막 날에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묘사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마귀: 그리스어로는 디아볼로스. “중상자”를 의미한다. (요 6:70; 딤후 3:3) 관련된 동사 디아발로는 “고발하다; 혐의를 제기하다”를 의미하며 눅 16:1에서는 ‘고발이 있다’로 번역되었다.

중상자: 또는 “마귀”. 그리스어 디아볼로스는 “중상자”를 의미하며,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탄 마귀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딤전 3:11; 딤후 3:3; 딛 2:3에서는 이 단어가 사탄 마귀를 가리키지 않으며, “중상하다”로 번역되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이 단어가 사탄 마귀를 가리키는 경우에는 거의 언제나 이 단어 앞에 정관사가 사용된다. (마 4:1 연구 노트 및 용어 설명 “정관사” 참조) 이 구절(요 6:70)에서 이 단어는 악한 특성을 발전시킨 가룟 유다를 가리키는 데 쓰였다. 아마 이 무렵에 예수께서는 유다가 잘못된 길에 들어섰음을 알아차리셨을 것이다. 그로 인해 유다는 후에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게 되었다.—요 13:2, 11.

자제: 여기서 “자제”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네 번 나온다. (행 24:25; 벧후 1:6) 이 특성은 “자신의 감정이나 충동이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고전 9:25에 나오는데 (연구 노트 참조) 그 구절에서 바울은 운동 경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일에서 자제를 나타냅니다.” 이 그리스어 동사는 「칠십인역」창 43:31에서 요셉이 “자신을 진정시켰다”는 표현에도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이 표현에 사용된 동사는 사 42:14에도 나오는데, 그 구절에서 여호와께서는 “내가 … 참고 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즉각적인 조처를 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악한 행로에서 돌아서서 그분의 은혜를 누릴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시간을 허용하신다.—렘 18:7-10; 벧후 3:9.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심으로 여호와께서 선함의 절대적인 표준이시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결정할 최고의 권리를 가진 분이심을 인정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반역적인 행동을 함으로 그러한 권리를 취하려고 했다. (창 2:17; 3:4-6) 그들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겸손하시게도 표준을 정하는 일은 아버지께서 하실 일이라고 생각하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에 나오는 법과 원칙을 통해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알려 주셨다.—막 10:19.

비정하고: 또는 “본연의 애정이 없고”.—롬 1:31 연구 노트 참조.

합의하려 하지 않고: 여기서 바울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협상이나 대화를 통해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거나 분쟁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을 때를 예언한 것이다. 이 그리스어를 직역에 가깝게 옮기면 “조약이 없는”이 된다. 이 단어는 나라들 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데 실패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되었다. 또한 개인들 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다른 번역판들에서는 이 단어를 “화해하지 않는”, “완강한”, “비협조적인”으로 번역한다. 한 참고 문헌에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이 단어는 서로에 대해 끊임없는 반감을 품고 등을 돌리게 만드는 가혹하고 완고한 태도를 가리킨다.”

중상하고: 이 표현은 그리스어 디아볼로스(“중상자”)를 번역한 것이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대부분 “마귀”로 번역되었으며, 하느님을 중상하는 악한 자인 사탄을 가리키는 칭호로 사용된다. (마 4:1 연구 노트 및 용어 설명 “마귀” 참조) 하지만 몇몇 경우에는 기본 의미대로 “중상자”나 “중상하다”로 번역되었다. (딤전 3:11; 딛 2:3) “마지막 날”(딤후 3:1)에 관해 묘사하는 이 내용에서 바울은 이 단어를 거짓 고발을 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다른 사람의 평판이나 하느님의 명성을 훼손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동일한 단어가 가룟 유다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요 6:70 연구 노트 참조.

자제하지 않고: 자제하지 않는 사람은 부도덕한 욕망이나 분노나 다른 이기적인 성향에 쉽게 굴복한다. 마지막 날에 사람들이 자제하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자기를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딤후 3:2, 4)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분을 불쾌하시게 하는 행동을 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 자신을 억제하게 해 주는 주된 동기가 없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자제를 기르고 강화하게 해 주는 하느님의 영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 “자제하지 않다”로 번역된 단어와 어근이 같은 그리스어 명사가 마 23:25에서는 “탐닉”으로 번역되었다.—“자제”라는 표현에 대한 설명을 보려면 갈 5:23 연구 노트 참조.

사납고: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인간적인 동정심과 감정이 결핍되어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잔혹한; 잔인한; 야만적인”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마 24:12 비교) 바울 시대에 이 단어는 사나운 기질을 가진 동물이나 사람을 묘사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다.

선을 사랑하지 않고: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이 단어는 의미 폭이 넓으며 선이나 선한 사람을 미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다. 또한 많은 사람에게 선이 되는 것 즉 공공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선하신 분인 여호와를 사랑할 수 없다.—막 10:18 연구 노트 참조.

배반하고: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명사가 눅 6:16에서 가룟 유다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배반자”로 번역되었다.—또한 행 7:52 참조.

자기 고집대로 하고: 바울이 사용한 이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앞으로 넘어지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좋지 않은 결과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신의 행동을 고집하려는 경향을 묘사한 것이다. 이 단어는 “무모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한 참고 문헌에 따르면 자기 고집대로 하는 사람들 또는 무모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다른 시민이 어떤 재난이나 처벌을 겪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조심성 없이 행동한다.” 또 다른 참고 문헌에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무모한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에도 개의치 않고 나아간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 외에 이 단어가 나오는 곳은 행 19:36뿐인데, 그 구절에서 에베소의 시 서기장은 성난 무리에게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교만으로 우쭐대고: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티포오마이)는 “연기”를 의미하는 단어와 어근이 같다. 이 단어는 연기에 휩싸여 있거나 연기 때문에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을 묘사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는 이 단어가 세 번 나오는데, 세 번 모두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교만으로 시야가 가려진 것을 묘사하는 것 같다. (딤전 3:6; 6:4; 딤후 3:4) 일부 번역판들은 이 표현을 “자만하고” 또는 “자만으로 부풀어 있고”로 번역한다. 한 참고 문헌에서는 이 단어가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유대인 저술가 요세푸스는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비방한 몇몇 그리스 작가들을 묘사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을 사랑하고: 여기서 바울이 한 말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쾌락을 사랑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쾌락을 사랑할 것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모든 쾌락이 다 나쁜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에는 하느님과의 우정을 키우는 것은 제쳐 두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경고가 들어 있다.—눅 12:19-21; 요1 2:15 비교.

마지막 날에: 이 구절에서 바울은 미래 시제를 사용하여 “마지막 날에 … 위급한 때가 올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또한 딤후 3:2, 13 참조) 따라서 그는 미래에 있을 일 즉 예수의 보이지 않는 임재 기간에 있을 세상 제도의 “마지막 날”에 있을 일을 묘사한 것이다. (용어 설명 “마지막 날” 참조) 이 “마지막 날”은 살후 2:3-12의 예언대로 배교가 일어나고 “불법의 사람”이 나타난 후에야 올 것이었다. (살후 2:3; 딤전 4:1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이어서 그때 인간 사회에 만연할 불경건한 특성들을 열거한다. (딤후 3:1-5. 딤후 3:5 연구 노트 참조) 대배교가 사람들 사이에 그러한 바람직하지 않은 특성들이 퍼지는 한 가지 요인이 될 것이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바울은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경건해 보일 것이라고, 다시 말해 그들이 나타내는 경건한 정성이 단지 겉모습이나 허울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한다. (딤후 3:1) 일부 성경 번역판은 이 표현을 “겉으로는 종교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는 “신앙심이 깊은 것처럼 보이지만”으로 번역한다. “마지막 날에” 사람들은 하느님을 숭배한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주장과는 달리 악한 행동을 일삼고 자기 자신이나 돈이나 쾌락을 과도하게 사랑한다.—딤후 3:2-4.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직역하면 “그 힘은 부인할 것입니다”. 참된 경건함은 사람들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엡 4:22-24; 골 3:10) 겉으로만 하느님을 섬기는 척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그 힘을 부인하는 즉 무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참된 경건한 정성에 따라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유 4 비교) 그들에게는 행동으로 뒷받침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믿음이 없다.—약 2:18-26.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바울은 지금까지 “마지막 날에” 세상 상태가 어떻게 나빠질 것인지 예언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당시에도 자신이 언급한 특성들을 어느 정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딤후 3:1, 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단어는 공포에 질려 피하는 것을 뜻할 수도 있는, 의미가 강한 동사이다. 그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자신이 언급한 특성들을 나타내는 사람들과 불필요하게 어울리지 말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하지만 그들과 가깝게 지내서는 안 된다.—딤후 2:24 연구 노트 참조.

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의 다투기 좋아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거짓 선생들과는 달리 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즉 친절하게 대하라고 권한다. (딤후 2:23) 이 그리스어 표현은 “모든 사람을 재치 있게 대하고”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바울 자신도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바울은 유대교 전통에 대한 열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부드러움이나 재치나 친절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모욕하고 거칠게 대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부드럽게 대하셨다. (행 8:3; 9:1-6; 갈 1:13, 14; 딤전 1:13) 바울은 부드러움이 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도 배웠다. 그는 잘못된 행동을 하지 말라고 단호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고전 15:34) 그는 가혹한 태도를 나타내지 않으려고 했으며,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대할 때 재치와 사랑을 나타냈다. (살전 2:8) 바울은 “젖 먹이는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대하듯 부드러운 태도를 나타내기 위해 노력했다. (살전 2:7 연구 노트 참조) 그는 디모데가 자신을 본받아, 회중 내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그리스도인과 회중 밖의 반대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기를 바랐다. 디모데는 싸움과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연합되고 사랑 넘친 곳이 되게 해야 했다.—딤후 2:23, 25.

사람들은: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남자들”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않고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다. 바울은 그의 시대로부터 먼 미래에 있을 때인 “마지막 날에” 사람들이 나타낼 약 20가지의 특성을 언급한다. (딤후 3:1연구 노트) 하지만 바울은 그 당시 사람들은 그러한 나쁜 특성들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가 디모데에게 그런 사람들을 “멀리하라”고 권고한 것을 볼 때, 당시에도 사람들이 나타내는 그런 특성들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딤후 3:5 연구 노트 참조. 막 7:21, 22 비교)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인류 전반에 그러한 악한 특성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미래의 때에 관해 예언한 것이다.

남의 집안에 슬그머니 들어가: 이 부패한 사람들은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었다. (딤후 3:5) “슬그머니 들어가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간교한 방법을 사용해 또는 자신을 위장해 들어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단어는 “몰래 들어가다; 침투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 교활한 사람들은 “약한 여자들”을 유혹하여 부도덕한 행동을 하게 했을 수 있다.

죄에 빠져 있는 약한 여자들: 여기서 바울은 회중 내에 있던 영적으로 약한 여자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들은 악한 것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그들은 여러 가지 욕망에 이끌렸는데, 이것은 죄로 향하는 욕망이 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일 수 있다. 악한 남자들은 그러한 여자들을 쉽게 사로잡고 그들의 생각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남자들은 그 여자들이 죄가 되는 행동을 해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간교한 방법으로 믿게 만들었을 것이다.—유 4.

정확한 지식: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지식”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그노시스에피그노시스이다. 여기 사용된 에피그노시스그노시스의 강조형(에피는 문자적으로 “위에”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부가적인”이라는 의미)이다. 에피그노시스는 문맥에 따라 흔히 “정확한, 참된, 온전한 지식”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롬 10: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아들 즉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온전한 지식을 얻는 면에서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일치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 준다.—고전 1:24, 30; 엡 3:18; 골 2:2, 3; 벧후 1:8; 2:20.

항상 배우기는 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여자들은 어느 정도 배우기는 했지만, “진리의 정확한 지식”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인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단지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엡 4:13 연구 노트 참조) 여호와처럼 생각하고 그분의 의로운 원칙과 온전히 일치하게 행동할 정도로 발전해야만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엡 3:17-19; 골 1:9, 10; 2:6, 7.

얀네와 얌브레: 모세 시대에 살았던 이 두 사람의 이름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바울은 영감을 받아 그들의 이름을 언급한다. (딤후 3:16) 그들은 고대 이집트에 있던 파라오의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으며 모세를 반대한 주술을 행하는 제사장들 가운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출 7:11, 22; 8:7, 18, 19; 9:11) 유대인 전승이 들어 있는 저술물들 가운데 그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 저술물들 중에는 기원전 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도 있다. 기원 1세기와 2세기에 살았던 일부 비유대인 저술가들도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나 두 사람 모두를 언급한다. 바울이 여기서 그들을 언급한 것은 에베소의 거짓 선생들도 결국 실패할 것이라는 점을 디모데에게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얀네와 얌브레: 모세 시대에 살았던 이 두 사람의 이름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바울은 영감을 받아 그들의 이름을 언급한다. (딤후 3:16) 그들은 고대 이집트에 있던 파라오의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으며 모세를 반대한 주술을 행하는 제사장들 가운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출 7:11, 22; 8:7, 18, 19; 9:11) 유대인 전승이 들어 있는 저술물들 가운데 그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 저술물들 중에는 기원전 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도 있다. 기원 1세기와 2세기에 살았던 일부 비유대인 저술가들도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나 두 사람 모두를 언급한다. 바울이 여기서 그들을 언급한 것은 에베소의 거짓 선생들도 결국 실패할 것이라는 점을 디모데에게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전에 바울은 에베소의 감독자들에게 거짓 선생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행 20:29, 30) 그 악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나아가는 것처럼, 다시 말해 회중을 더럽히고 분열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이 어느 정도 진전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면 분명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시켜 준다. 그는 그렇게 하기 위해 거짓 선생들을 얀네와 얌브레에 비한다. 그들은 모세를 반대했으며 이집트에서 주술을 행하는 제사장들 가운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수 있다. (딤후 3:8 연구 노트 참조) 출애굽기 기록에 따르면 그 제사장들은 모세의 기적 중 일부를 따라했지만 계속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세 번째 재앙부터는 여호와의 기적을 똑같이 행할 수 없었으며 그 재앙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지도 못했다.—출 8:16-19; 9:10, 11.

그들의 어리석음도 모든 사람에게 명백히 드러날: 바울은 디모데에게 회중의 거짓 선생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이라고 확신시켜 준다. 그들은 바울이 앞서 언급한 두 사람 즉 얀네와 얌브레와 같이 될 것이었다. 얀네와 얌브레의 경우 그들이 여호와를 반대한 것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는 것을 모두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대는 … 밀접히 따랐으며: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가 거짓 선생들과 어떻게 다른지 강조한다. 디모데는 약 14년 동안 바울에게 배우면서 여러 가지 면에서 그를 본받았다. 디모데는 그의 가르침, 생활 방식(또는 행실), 한 가지 목표에 전념하는 태도, 흔들림 없이 강한 믿음, 한결같은 참을성, 따뜻한 사랑, 굳건한 인내를 본받았다. 바울이 자신의 본을 언급한 것은 자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영감을 받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것뿐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따를 만한 본을 남겼다.—고전 11:1; 빌 3:17; 히 13:7 비교.

안티오크와 이코니온과 리스트라에서: 바울은 1차 선교 여행 중에 바나바와 함께 피시디아 안티오크에서 쫓겨났으며 이코니온에서는 돌에 맞을 뻔했다. 리스트라에서 바울은 실제로 돌에 맞았으며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내버려 두었다. (행 13:14, 50; 14:1-5, 8, 19) 후에 제자들이 그를 도와주었는데 그중에는 아마도 리스트라 출신이었을 디모데도 있었을 것이다. (행 14:20; 16:1) 디모데는 바울의 충실한 인내를 “밀접히 따랐기” 때문에 바울이 이 세 도시에서 겪은 “박해와 고난”에 대해 분명히 잘 알았을 것이다. (딤후 3:10) 바울이 그 일들을 언급한 것은 디모데가 앞으로 어떤 박해를 받더라도 인내하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였다.—딤후 3:12.

주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나를 구출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구출이 필요하다고 자주 말했으며 여호와 하느님(고후 1:8-10)과 예수 그리스도(살전 1:10)를 자신을 구출해 주시는 분으로 언급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주”는 여호와를 가리킬 수도 있고 예수를 가리킬 수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여기서 바울이 시 34:19을 간접적으로 인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건한 정성으로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 여기서 “~고자 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단지 일시적인 바람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다. 이 동사는 계속되는 의지를 나타내는 형태로 되어 있다. 참된 “경건한 정성”으로 살려고 할 때 어떤 결과를 겪게 되는지에 관해, 한 참고 문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과 다르다는 것, 다른 표준과 목표를 갖는다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다.”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경건한 정성을 나타내는 그러한 사람들은 반드시 박해자들의 적의의 대상이 될 것이었다. (창 3:15; 계 12:9, 17) 그리스도는 그러한 위험과 박해를 겪으셨다. 바울과 디모데도 그러한 일을 겪었으며, 따라서 모든 참그리스도인들도 반드시 그러할 것이었다.—요 15:20; 행 17:3; 빌 3:10; 딤후 2:3.

경건한 정성: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유세베이아)는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함으로 나타내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숭상심과 경외심을 가리킨다. 의미 폭이 넓은 이 단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행동을 하도록 마음을 움직이는 하느님에 대한 충성스러운 사랑이나 개인적인 애착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한 사전에서는 이 단어의 의미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신 대로 생활하다”라는 말로 요약한다. 또한 바울의 말을 보면 경건한 정성이 타고나는 특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디모데에게 이 특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운동선수가 훈련하듯이 열심히 노력하라고 권고한다. 3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건한 정성을 나타내는 면에서 최고의 본을 남기셨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딤전 3:16 연구 노트 참조.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사람들: 여기에 언급된 “악한 사람들” 중에는 딤후 3:2-5에 나오는 특성들을 드러내 놓고 나타내는 사람들이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속이는 사람들”은 겉으로 의로운 체하면서 몰래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속이는 사람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마술사나 강신술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마술사나 강신술사는 사기꾼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 단어는 이 구절에서처럼 갈취하거나 속이는 사람들을 가리키게 되었다. 일부 속이는 사람들은 “잘못 인도되기도 할” 것이었는데, 심지어 자신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기도 할 것이었다.

어머니 유니게: 유니게와 로이스는 바울이 리스트라에 처음 머물렀던 기원 47-48년경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을 것이다. (행 14:6) 여기서 바울은 두 사람 모두가 “위선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유니게는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을 하도록 디모데를 떠나보낼 때 그런 믿음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이전에 바울이 리스트라에 왔을 때 사람들이 그를 돌로 치고 죽은 줄로 생각하고 내버려 두었던 일을 알고 있었다. (행 14:19) 유니게와 로이스가 좋은 본을 보이고 디모데를 부지런히 가르친 것은 분명 디모데가 스스로 “위선 없는 믿음”을 기르고 영적으로 훌륭하게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행 16:2; 빌 2:19-22; 딤전 4:14) 그들이 나타낸 본이 더욱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인이었던 디모데의 아버지가 아내와 같은 믿음을 갖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행 16:1, 3 연구 노트 참조.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에 머무르십시오: 또는 “배우고 설득을 받아 믿게 된 것에 머무르십시오”. 디모데는 앞서 언급된 “악한 사람들”과는 달리 진리를 옹호해야 했다. (딤후 3:13) 바울은 디모데가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온전히 확신한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디모데는 어머니, 할머니, 바울, 그 밖의 사람들이 가르쳐 준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는 자신이 배운 것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고 정확하고 믿을 만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진리로 받아들인 것에 머물러야 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했다.—롬 12:1, 2.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알고 있으며: 디모데는 어머니 유니게와 할머니 로이스로부터 히브리어 성경에 대해 배웠다. (딤후 1:5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후로는 바울을 비롯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행 16:1, 2; 고전 4:17; 딤후 2:2. 딤후 1:13 연구 노트 참조.

건전한 말씀: “건전한 말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이 딤전 6:3에서는 “건전한 교훈”으로 번역되었다. 그 구절에서 바울은 이 교훈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참그리스도교 가르침을 가리킨다. (딤전 6:3 연구 노트 참조)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은 성경에 나오는 다른 모든 가르침과 조화를 이룬다. 따라서 “건전한[또는 “유익한”] 말씀”이라는 표현은 넓은 의미에서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 로이스는 디모데의 외할머니였을 것이다. 디모데의 가족은 리스트라에 살았던 것 같다. (행 16:1-3)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맘메는 어린아이가 할머니를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었으며, 좀 더 격식을 갖추어야 할 때는 테테를 사용했다. 바울은 디모데와 할머니가 매우 가깝고 친밀했기 때문에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일 수 있다. 로이스는 유니게가 디모데에게 히브리어 성경의 내용을 가르칠 때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딤후 3:15 연구 노트 참조.

유아기부터 거룩한 기록들을 알았습니다: 디모데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유니게와 아마도 할머니 로이스로부터 유대인의 “거룩한 기록들” 즉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에 대해 배웠다. (딤후 1:5; 3:14. 롬 1:2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유아기”로 번역된 그리스어 브레포스는 아주 어린 아이와 신생아,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까지 가리킬 수 있는 단어이다. (눅 1:41; 2:12; 행 7:19; 벧전 2:2. 눅 18:15 연구 노트 참조) 디모데가 어릴 때 받은 히브리어 성경에 관한 교육은 그가 믿음을 길러 나갈 수 있는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디모데는 청소년이었을 때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얻는 구원’에 대해 배웠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 후로 디모데는 계속 훌륭하게 발전했다.—행 16:1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빌 2:19-22 참조.

디모데: 디모데는 성경에서 이 구절에 처음으로 언급된다. 디모데라는 그리스어 이름은 “하느님을 공경하는 자”를 의미한다. 디모데가 언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디모데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의 유대인 어머니 유니게가 유대인의 “거룩한 기록들” 즉 히브리어 성경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아마 할머니 로이스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딤후 1:5; 3:15) 유니게와 로이스는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중에 리스트라를 방문했을 때 그리스도인이 된 것 같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그리스인으로 언급되는데, 이것은 그리스인의 후손이거나 비유대인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중이던 기원 49년 말이나 50년 초에 디모데의 고향이었을 리스트라를 방문했다. 당시 디모데는 그리스도인 제자로서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행 16:2) 그때 디모데의 나이는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그 점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그로부터 약 10년 또는 15년 뒤에 바울은 딤전 4:12에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그대의 젊음을 얕보지 못하게 하십시오.” (디모데 전서는 기원 61년에서 64년 사이에 기록된 것 같다.) 따라서 디모데는 바울이 이 말을 기록할 당시에도 비교적 젊은 나이였던 것 같다.

아기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브레포스는 아주 어린 아이와 아기,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까지 가리킬 수 있는 단어이다. (눅 1:41; 2:12; 행 7:19; 딤후 3:15, “유아기”; 벧전 2:2) 평행 기록인 마 19:13과 막 10:13에서는 그와는 다른 그리스어인 파이디온이 사용되었다. 파이디온은 갓난아이와 유아를 가리킬 때만이 아니라, (마 2:8; 눅 1:59) 야이로의 열두 살 된 딸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 (막 5:39-42) 복음서 필자들이 서로 다른 그리스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이 경우에 어린아이들은 연령대가 다양했을 수 있다. 누가는 그 자리에 있던 아기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 같다.

성경: 여기서는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을 가리킨다. 이 구절과 일치하게 「신세계역」의 제목에는 “성경”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이 “거룩한 기록들”로 언급되기도 한다. (딤후 3:15, 16) 때때로 “율법”(요 10:34; 12:34; 15:25; 고전 14:21)이나 “율법과 예언서”(마 7:12; 눅 16:16)라는 표현도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 히브리어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마 22:40. 마 5:17; 요 10:34 연구 노트 참조.

책망하여: “책망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성경에서 누군가에게 그가 잘못을 범했다는 것을 납득시킨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책망은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게 하려는 유익한 목적으로 베풀어지는 것이다. 한 사전에서는 그 단어에 “‘바르게 하다’ 즉 ‘죄에서 떠나 회개로 향하게 하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설명한다. 책망은 교육하려는 의도로 베푸는 징계이다. 요 16:8에서는 동일한 그리스어가 “납득할 만한 증거를 … 제시하다”로 번역되었다.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고 그들이 사용하던 방법대로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 전체를 분류하신 것 같다. “율법”(히브리어 토라)은 창세기부터 신명기에 이르는 성경 책들을 가리킨다. “예언서”(히브리어 네비임)는 “전기 예언서”라 불리는 책들(여호수아부터 열왕기까지)을 포함한, 히브리어 성경의 예언서들을 가리킨다. “시편”은 셋째 부분을 지칭하는 말로서, 히브리어 성경의 나머지 책들을 가리키며 “성문서”(히브리어 케투빔)라고 불린다. 이 부분을 “시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시편이 이 셋째 부분의 첫 번째 책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히브리어 성경을 부르는 이름인 “타나크”는 각 부분을 지칭하는 이름의 맨 앞 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 이름을 사용하신 것을 보면, 그분이 지상에 계실 때 히브리어 성경의 정경이 이미 확립되어 있었으며, 그분이 정경을 인정하셨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유아기부터 거룩한 기록들을 알았습니다: 디모데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유니게와 아마도 할머니 로이스로부터 유대인의 “거룩한 기록들” 즉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에 대해 배웠다. (딤후 1:5; 3:14. 롬 1:2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유아기”로 번역된 그리스어 브레포스는 아주 어린 아이와 신생아,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까지 가리킬 수 있는 단어이다. (눅 1:41; 2:12; 행 7:19; 벧전 2:2. 눅 18:15 연구 노트 참조) 디모데가 어릴 때 받은 히브리어 성경에 관한 교육은 그가 믿음을 길러 나갈 수 있는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디모데는 청소년이었을 때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얻는 구원’에 대해 배웠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 후로 디모데는 계속 훌륭하게 발전했다.—행 16:1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빌 2:19-22 참조.

영감받은 표현을 분별하는 능력: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영들을 분별하는 것”을 의미하며, 기적을 통해 영감받은 표현을 이해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 선물에는 어떤 표현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근원에서 나온 것인지 분별하는 능력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 능력은 회중을 거짓 예언자들로부터 보호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고후 11:3, 4; 요1 4:1) 또한 이 능력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율법의 어느 부분이 여전히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꼭 필요한 것들’인지 결정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행 15:19, 20, 28, 29) 그에 더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편지와 기록이 회중들에 전달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것들이 성경 정경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지 분별하기 위해 인도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어 사도 베드로는 “무지하고 불안정한 사람들이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곡해하듯이 [바울의 편지들]도 곡해한다”고 썼는데, 이 말을 볼 때 바울의 기록 중 일부가 영감받은 성경에 포함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벧후 3:16) 우리는 성경 정경에 포함되는 책들을 결정하는 과정에 하느님의 영의 인도가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분명 그러한 과정에는 이 선물을 받은 형제들이 사용되었을 것이다.—딤후 3:16. 용어 설명 “정경”; “” 참조.

성경에서도: 바울은 앞 구절에서 자신이 한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두 구절을 인용한다. (롬 9:17연구 노트; 10:11 비교) 그가 처음으로 인용한 구절은 신 25:4이다. (또한 고전 9:9 연구 노트 참조) 두 번째는 레 19:13의 내용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복음서에 나오는 말을 인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가 사용한 표현은 눅 10:7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과 거의 같다.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기원 56-58년경이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쓴 것은 기원 61년에서 64년 사이인 것 같다. (바울이 사용한 표현은 마 10:10에 나오는 말과도 비슷한데, 마태복음은 기원 41년경에 쓰여졌다.) 따라서 이것은 성경 필자가 복음서의 내용을 인용한 초기의 사례로서, 그 복음서가 영감받은 성경의 일부임을 확증해 주는 것일 수 있다.—바울이 주 예수의 명령을 언급한 고전 9:14 비교. 또한 고전 12:10 연구 노트 참조.

모든 성경: 이 표현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으며, 여기서는 히브리어 성경 전체를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눅 24:44연구 노트) 디모데는 그 “거룩한 기록들”을 잘 알고 있었다. (딤후 3:15연구 노트) 또한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가운데 그때까지 기록된 책들을 영감받은 성경의 일부로 여긴 것 같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바울이 디모데 후서를 쓰기 얼마 전이었을) 기원 64년경에 두 번째 편지를 쓰면서 바울의 편지들을 “성경”의 일부로 언급했다. (벧후 3:16. 또한 고전 12:10; 딤전 5:18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함으로 디모데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의 영감받은 말씀에 담긴 지혜를 신뢰하고 무엇을 하든 그 지혜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이 표현은 그리스어 복합어인 테오프뉴스토스를 번역한 것이다. 테오프뉴스토스테오스(하느님)와 프네오(호흡하다; 불다)가 결합된 단어이며, 문자적으로 “하느님이 불어넣으신”을 의미한다. 그리스어 동사 프네오는 “영”으로 자주 번역되는 단어인 프뉴마와 어근이 같다. (용어 설명 “” 참조)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영 즉 활동력이 충실한 사람들에게 작용하게 하여 그분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시편을 인용하시면서 다윗이 “영감을 받아[직역하면 “영 안에서”]” 그 내용을 기록했다고 말씀하심으로 성령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셨다. (마 22:43, 44; 시 110:1) 평행 성구인 막 12:36에는 “영감을 받아”에 해당하는 부분이 “성령에 이끌려”로 되어 있다. 베드로도 사람들이 “성령에 감동되어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말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벧후 1:21) 그와 비슷하게 히브리어 성경에서 다윗왕도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해 말했다”라고 기록했다. (삼하 23:2) 유의할 만한 점으로 19세기에 만들어진 한 히브리어 번역판(부록 다4에 J17로 표기됨)은 딤후 3:16의 앞부분을 이렇게 번역한다. “모든 성경은 하느님의 영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용어 설명 “정경(성경 정경)” 참조.

가르치고: 참된 신앙과 올바른 행실에 관한 교훈을 베푼다는 의미이다.—딛 1:9.

책망하고: 그리스도인 감독자들에게는 “죄를 거듭 짓는 사람들”을 책망할 책임이 있다. (딤전 5:20연구 노트; 딛 1:13) 감독자들은 참을성 있게 성경을 사용하여 그들이 경건한 원칙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일깨워 주고 행실을 바로잡게 해 준다. (갈 6:1; 딤후 4:2)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시정하는 데도 성경을 사용할 수 있다.

바로잡고: 또는 “시정하고”.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올바른 상태로 되돌리거나 잘못된 것을 개선하는 것을 가리킨다.

의로 징계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하느님의 표준과 일치한 징계 또는 훈련을 베푼다.—히 12:11. 용어 설명 “” 참조.

유익합니다: 바울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말씀이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하다”(또는 “도움이 된다”, “유용하다”)고 말한다. 장로였던 디모데는 회중 안팎의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능숙하게 사용할 책임이 있었다. (딤후 2:15)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사용함으로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조정하여 하느님의 뜻과 일치시켜야 했다.

하느님의 사람: 여기서 “사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안트로포스)는 남자와 여자 모두를 가리킬 수 있다. 바울은 감독자인 디모데에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 남자이든 여자이든 여호와 하느님께 온전히 헌신한 사람을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따라서 일부 번역판에서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나 “하느님께 헌신한 사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앞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사람”은 영감받은 성경을 정기적으로 연구하고 그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딤전 6:11 연구 노트 참조.

준비를 완전히 갖추게: “준비를 완전히 갖추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적합한 상태에 있다”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고대에 이 단어는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어 항해하기에 적합한 상태에 있는 배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와 비슷하게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선한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주신다. 그 결과 그들은 그분의 일을 수행할 준비를 완전히 갖추게 된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바울은 디모데를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이 표현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과 딤후 3:17에만 두 번 나온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사람”(또는 “참하느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이 약 70회 나온다. 이 표현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비롯해 그분의 특별한 대표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는데, 예를 들면 모세(신 33:1), 사무엘(삼상 9:6, 10), 다윗(느 12:24), 엘리야(왕상 17:18, 24), 엘리사(왕하 4:7, 9)에게 사용되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디모데가 하느님으로부터 에베소 회중에서 거짓 선생들에 맞서 싸우라는 임명을 받았다는 점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을 수 있다. (딤전 1:3, 4; 6:2ㄴ-10) 또는 여호와께 온전히 헌신하고 그분의 영감받은 말씀에 따라 행동하면서 살아가는 남자나 여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딤후 3:17 연구 노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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