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 1:1-25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갇혀 있는+ 바울과 우리 형제 디모데가+ 우리의 사랑하는 동료 일꾼인 빌레몬에게, 2  그리고 우리 자매 압비아와 우리의 동료 군인 아르깁보와+ 그대의 집에 모이는 회중에+ 편지합니다.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과분한 친절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4  나는 기도 가운데서 그대를 언급할 때에 항상 나의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5  그대의 믿음과 그대가 주 예수와 모든 거룩한 자들에 대해 가진 사랑에 관해 계속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6  나는 그대가 믿음을 함께 나누는 일로 인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좋은 것을 받았음을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7  형제여, 나는 그대의 사랑에 대해 듣고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대를 통해 거룩한 자들의 마음이 새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8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와 관련해 아무 거리낌 없이 그대에게 합당한 일을 하도록 명령할 수도 있지만, 9  오히려 사랑 때문에 그대에게 호소합니다.+ 나 바울은 나이가 많고 또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10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낳은+ 내 아들 오네시모에+ 관해 그대에게 호소합니다. 11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2  나는 내 심장과도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13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이곳에 그를 계속 머물게 하여, 내가 좋은 소식을 위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대를 대신해 나를 섬기게 하고 싶습니다. 14  그러나 그대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억지로가 아니라 자유 의지로 선행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15  그가 잠시 동안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대가 그를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6  더 이상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서 말입니다.+ 그가 나에게 참으로 그러한 사람이라면, 그대에게는 육적으로나 주 안에서나 훨씬 더 그러할 것입니다. 17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벗으로 여긴다면, 나를 맞이하듯이 그를 친절하게 맞이하십시오. 18  만일 그가 그대에게 어떤 그릇된 일을 했거나 빚진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나에게 청구하십시오. 19  나 바울이 내 손으로 직접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갚겠습니다. 그대도 나에게 그대 자신을 빚지고 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겠습니다. 20  형제여, 나는 주와 관련해 그대에게서 도움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와 관련해 나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십시오. 21  나는 그대가 내 말을 따를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그대가 할 것임을 나는 압니다.+ 22  그리고 내가 묵을 곳도 준비해 주십시오. 나는 여러분의 기도로 내가 여러분에게 가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2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혀 있는 에바브라가+ 그대에게 안부를 전하며, 24  나의 동료 일꾼들인 마가,+ 아리스다르고,+ 데마, 누가도+ 안부를 전합니다.+ 25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과분한 친절이 여러분이 나타내는 영과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각주

직역하면 “결박되어 있는”.

연구 노트

빌레몬서: 이 편지의 원문에는 이러한 제목이 없었던 것 같다. 고대 사본들을 보면 이러한 제목이 나중에 붙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성경의 책들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기원 4세기에 만들어진 잘 알려진 사본인 시나이 책자본에는 이 편지의 끝에 “빌레몬에게”라는 제목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갇혀 있는: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갇힌 자인”. 바울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유로 로마에 수감되어 있었다.—몬 9. 딤후 1:8 연구 노트 참조.

갇혀 있는: 또는 “갇힌 자인”. 바울은 자신이 쓴 많은 편지에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언급한다. (예를 들어 고전 1:1; 엡 1:1; 골 1:1; 딤전 1:1; 딛 1:1 참조)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러한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직책 때문에 빌레몬이 자신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압력을 받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 바울은 적절하게도 자신을 “갇힌 자”로 언급한다. 한 참고 문헌에서는 이것이 “친구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빌레몬은 이 표현을 보고 바울이 얼마나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지 떠올렸을 것이며, 바울에게 동정심을 느껴 편지의 뒷부분에 나오는 그의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수 있다.—몬 9-12, 17.

바울과 … 디모데가 … 편지합니다: 원문에는 “~가 … 편지합니다”에 해당하는 표현이 없다. 빌레몬서의 필자는 바울이지만 그는 다른 몇몇 편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사말 가운데 디모데도 함께 언급한다. (고후 1:1; 골 1:1; 살전 1:1; 살후 1:1) 바울이 로마에서 첫 번째로 수감되어 있으면서 이 편지를 썼을 때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있었다. (빌 1:1 연구 노트 참조) 빌레몬은 디모데를 알고 있었을 수 있다. 골로새를 비롯해 에베소 주변 지역의 도시들에 좋은 소식이 전해졌을 때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 있었기 때문이다.—행 19:22; 고전 4:17; 16:8-10. 부록 나13 참조. 또한 고전 16:9 연구 노트 참조.

우리의 사랑하는 동료 일꾼인 빌레몬: 빌레몬은 아시아 속주의 도시 골로새에 있는 회중에서 섬기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골 4:9) 그는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알게 된 것 같다. (몬 19) 바울은 골로새에서 전파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동안 ‘아시아 속주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으며, 그때 빌레몬은 에베소에서 바울을 만났을 수 있다. (행 19:10) 빌레몬은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을 하지는 않았지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에 참여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동료 일꾼으로 여겼다.—롬 16:3; 고전 3:9 연구 노트 참조.

브리스가와 아굴라: 기원 49년이나 50년 초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들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명령했을 때, 이 충실한 부부도 추방되었다. 클라우디우스는 기원 54년에 사망했으며,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쓴 때인 기원 56년경에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이미 로마에 돌아와 있었다. (행 18: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그들을 자신의 동료 일꾼들로 언급한다. “동료 일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시네르고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12번 나오며, 대부분 바울의 편지들에 나온다. (롬 16:9, 21; 빌 2:25; 4:3; 골 4:11; 몬 1, 24) 유의할 만하게도 고전 3:9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동료 일꾼입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 편지합니다: 원문에는 “~가 … 편지합니다”에 해당하는 표현이 없다. 빌립보서의 필자는 바울이지만 그는 인사말 가운데 디모데도 함께 언급한다. 바울이 로마에서 첫 번째로 수감되어 있던 시기에 디모데도 바울과 함께 로마에 있었다. 바울이 그 시기에 로마에서 기록한 다른 두 편지인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도 디모데가 언급된다. (골 1:1, 2; 몬 1) 빌립보서가 기록된 시점과 히브리서가 기록된 시점 사이의 어느 때엔가 디모데도 로마에서 투옥되었던 것 같다.—빌 2:19; 히 13:23.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큰 문: 바울은 이 구절을 포함하여 세 구절에서 “문”이라는 표현을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고후 2:12; 골 4:3. 행 14:27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이 에베소에서 수행한 일은 그 지방 전역의 전파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에베소에 약 3년 동안 (기원 52-55년경) 머물렀는데, 그로 인한 결과 중 하나는 로마 속주 아시아 전역에 왕국의 좋은 소식이 전해진 것이었다. (행 19:10, 26. 용어 설명 “아시아” 참조) 에베소보다 내륙에 있는 도시인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폴리스에도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바울이 직접 그 도시들을 방문한 적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전파 활동을 시작하도록 에바브라를 보냈을 수 있다. (골 4:12, 13) 빌라델비아, 두아디라, 사데 같은 도시들에 좋은 소식이 전해진 것도 이 시기였을 수 있다.

그분을 위해 갇혀 있는: 직역하면 “그분의 갇힌 자인”. 바울은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자, 즉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좋은 소식을 선포한다는 이유로 결박된 자로 여긴다. 그는 로마에서 첫 번째로 수감되어 있을 때 쓴 편지들 중 일부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했다. (엡 3:1연구 노트; 4:1; 몬 1, 9) 디모데 후서는 바울이 로마에서 마지막으로 수감되어 있을 때 쓰여졌는데, 아마도 기원 65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딤후 4:6-8.

하느님의 동료 일꾼: “동료 일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시네르고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10번 이상 나오며, 대부분 바울의 편지들에 나온다. 이 표현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롬 16:9, 21; 고후 1:24; 8:23; 빌 2:25; 4:3; 골 4:11; 몬 1, 24)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봉사자들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동료 일꾼”으로 일하는 큰 특권으로 주의를 이끈다. (고전 3:6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고후 6:1에서도 “그분[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다.—고후 5:20. 롬 16:3 연구 노트 참조.

자기 집에 모이는 회중: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개인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롬 16:3, 5; 골 4:15; 몬 2) “회중”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엑클레시아)는 같은 목적을 위해 함께 모인 사람들의 집단을 가리킨다. (고전 12:28; 고후 1:1) 일부 성경에서는 이 구절과 다른 구절들에 나오는 그리스어 엑클레시아를 “교회”로 번역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교회라는 표현은 숭배를 위해 함께 모이는 사람들의 집단보다는 종교 건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회중”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압비아 … 아르깁보: 빌레몬의 집에서 모인 회중 사람들 가운데 빌레몬 외에 이 편지에서 이름이 언급되는 사람은 이 두 사람뿐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압비아가 빌레몬의 아내이고 아르깁보가 그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더해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그들의 이름을 언급한 이유가 오네시모가 그들의 집안에서 일한 종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그렇다면, 세 사람 모두 바울이 편지에서 다룬 문제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빌레몬의 가족이었든 그렇지 않든, 바울은 압비아와 아르깁보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바울은 압비아를 우리 자매라고 부름으로 그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나타냈다. 아르깁보는 골로새서에 나오는 아르깁보와 동일한 사람인 것 같다. (골 4:17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아르깁보를 우리의 동료 군인이라고 부름으로 그가 자신과 가까운 관계이며 그리스도를 충성스럽고 용감하게 섬기는 사람임을 강조한다.—빌 2:25 비교.

그대의 집에 모이는 회중: 이 편지의 내용은 바울이 주로 빌레몬에게 쓴 것이지만, 바울은 편지를 받는 대상에 압비아와 아르깁보와 회중 전체를 포함시킨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개인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골 4:15. 고전 16:19 연구 노트 참조) 이 편지 내용의 대부분은 바울이 직접적으로 빌레몬에게 하는 말이지만, 3, 22, 25절에 “여러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복수 대명사들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유의할 만하다. 따라서 바울은 이 편지가 회중 전체에 낭독되기를 바랐을 수 있다. 회중 사람들은 이 편지에 담긴 중요한 교훈과 원칙을 통해 분명 유익을 얻었을 것이다.

아르깁보: 바울이 빌레몬서에서 “우리의 동료 군인”이라고 부른 아르깁보와 동일한 사람인 것 같다. 바울은 그 짧은 편지의 서두에서 “빌레몬에게, 그리고 우리 자매 압비아와 … 아르깁보”와 빌레몬의 집에 모이는 회중에 편지한다고 밝힌다. (몬 1, 2) 많은 성경 학자들은 그 세 그리스도인이 같은 집에 사는 가족이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 가능성이 높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성경에서 아르깁보에 관해 알려 주는 사실은 그가 봉사의 직무를 받았다는 것뿐이다. 바울이 아르깁보에게 ‘봉사의 직무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를 시정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봉사의 직무를 소중히 여기고 완수하기를 바랐다.—고후 4:7 연구 노트 비교.

과분한 친절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롬 1:7 연구 노트 참조.

과분한 친절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들 가운데 11통의 편지에서 이러한 인사말을 사용한다.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딛 1:4; 몬 3) 그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들에서도 매우 비슷한 인사말을 사용했지만 그 인사말에는 “자비”라는 특성이 함께 언급되어 있다. (딤전 1:2; 딤후 1:2) 학자들은 바울이 일반적으로 인사말로 사용되는 단어(“안부를 전합니다!”, 카이레인)가 아니라 그와 발음이 비슷한 다른 그리스어 단어(카리스)를 자주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들은 바울이 그렇게 함으로 회중들이 “과분한 친절”을 온전히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 15:23 연구 노트 참조) “평화”를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이 인사할 때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샬롬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막 5:34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과분한 친절과 평화”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대속을 통해 여호와 하느님과 누리게 된 관계를 강조한 것 같다. 바울은 관대한 친절과 평화의 근원으로 하느님 우리 아버지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분하여 언급한다.

나는 기도 가운데서 그대를 언급할 때에: 이 내용을 보면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었던 바울이 어떻게 기도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빌레몬을 위해 자주(“항상”) 기도했다. 또한 그의 기도에는 감사(“나의 하느님께 감사합니다”)와 개인적인 내용(“그대를 언급할 때에”)이 포함되었다. 바울이 “그대”에 해당하는 단수형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가 친구인 빌레몬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롬 1:9; 고전 1:4; 엡 1:16; 빌 1:3-5; 살전 1:2 비교.

그대의 믿음과 그대가 … 가진 사랑: 믿음과 사랑이라는 특성은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이 개인적인 편지의 중요한 주제이다. 바울은 다른 편지들에서도 이 두 가지 특성을 자주 연관 짓는다. (엡 1:15; 골 1:4) 여기서 그는 빌레몬(“사랑하는”이라는 의미)이 그 두 가지 특성을 나타내는 면에서 본이 된다고 칭찬한다. 빌레몬은 거룩한 자들 즉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대하는 방식을 통해 예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나타냈다.

형제여: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불렀다. (롬 16:1; 고전 7:15; 몬 1, 2) 그들은 친밀감이 느껴지는 이 표현들을 사용함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연합되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한 아버지 여호와의 영적 가족으로서 가까운 관계를 누린다는 것을 나타냈다. (마 6:9; 23:9; 엡 2:19연구 노트; 벧전 3:8)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바울이 이 구절과 20절에서 빌레몬을 가리켜 사용한 “형제”라는 단어는 두 사람 사이의 따뜻한 우정을 나타내는 호격(어떤 대상을 부르는 말) 형태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일부 번역판에서는 이 단어를 “나의 형제여” 또는 “사랑하는 형제여”로 번역한다.

마음: 또는 “부드러운 애정”.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 스플랑크논은 문자적으로 몸속에 있는 장기들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마음”으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가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강렬한 감정 또는 그러한 감정이 생기는 곳을 가리킨다. (또한 고후 6:1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12절20절에서도 동일한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한다. 한 참고 자료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바울이 이 짧은 편지에서 그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한 것을 보면 그가 이 문제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드러운 애정: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스플랑크논은 문자적으로 몸속에 있는 장기들을 가리킨다. 행 1:18에서는 “내장”으로 번역되었다. 이 구절(고후 6:12)에서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강렬한 감정을 가리킨다. 이것은 동정심을 매우 강하게 표현하는 그리스어 단어 중 하나이다.

하느님의 집안 식구들: 바울은 “집안 식구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 회중에 속한 기름부음받은 자들이 한 가족으로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딤전 3:15) 하느님을 섬기는 가정에서는 가족 구성원들이 가장에게 존중심을 나타낼 뿐 아니라 그가 가족을 위해 정한 마련과 표준도 존중한다. 그와 비슷하게 1세기 회중에 속한 사람들은 서로를 영적인 가족이라고 느꼈으며, 회중과 관련하여 여호와께서 하신 마련을 존중했다.—갈 6:10 연구 노트 참조.

아무 거리낌 없이: 또는 “말의 큰 자유를 가지고; 매우 담대하게”. 그리스어 파레시아는 기본적으로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관련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가 예수에게 받은 사도로서의 권위를 언급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다음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바울은 그 권위를 사용해 빌레몬에게 명령하려 하지 않았으며, 동료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빌레몬이 원치 않는 일을 억지로 하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몬 9, 14) 따라서 이 문맥에서 바울은 “아무 거리낌 없이”라는 표현을 친구 사이에 서로 솔직한 대화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대사들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을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일하는 대사들”로 언급한다. 성경 시대에는 대사들을 비롯한 사자들을 여러 가지 이유로 파견했다. 예를 들어, 두 나라가 적대 관계에 있을 때 대사를 파견했는데 그들이 맡은 임무는 전쟁을 막을 수 있는지 알아보거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 협정을 맺는 것이었다. (사 30:1-4; 33:7) 바울 시대에 로마 제국의 여러 민족이나 도시나 속주들은 우호 관계를 강화하거나 지원을 받거나 어떤 문제에 대해 탄원할 목적으로 로마에 대사를 보내곤 했다. “대사이다; 대사로 일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 프레스뷰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과 엡 6:19, 20에 두 번 나오는데, 엡 6:19, 20에서 바울은 자신이 좋은 소식을 위해 대사로 일하고 있다고 말한다. 눅 14:3219:14에서는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명사 프레스베이아가 “사절단”으로 번역되었다. 프레스뷰오프레스베이아는 “연로자; 장로”를 의미하는 프레스비테로스와 어근이 같다.—마 16:21; 행 11:30.

나는 좋은 소식을 위해 쇠사슬에 매인 대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쓸 당시 로마에 감금되어 있었다. (엡 3:1; 4:1) 그래서 그는 자신을 “쇠사슬에 매인 대사”라고 한 것이다. 성경에서 대사란 통치자에 의해 특별한 때에 특정한 목적을 위해 파견되는 공식 대표자를 가리킨다. 바울은 하느님의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대사의 한 사람으로서, 당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에 관한 소식을 전했다.—고후 5:20 연구 노트 참조.

갇혀 있는: 또는 “갇힌 자인”. 바울은 자신이 쓴 많은 편지에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언급한다. (예를 들어 고전 1:1; 엡 1:1; 골 1:1; 딤전 1:1; 딛 1:1 참조)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러한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직책 때문에 빌레몬이 자신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압력을 받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 바울은 적절하게도 자신을 “갇힌 자”로 언급한다. 한 참고 문헌에서는 이것이 “친구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빌레몬은 이 표현을 보고 바울이 얼마나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지 떠올렸을 것이며, 바울에게 동정심을 느껴 편지의 뒷부분에 나오는 그의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수 있다.—몬 9-12, 17.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갇혀 있는: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갇힌 자인”. 바울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유로 로마에 수감되어 있었다.—몬 9. 딤후 1:8 연구 노트 참조.

오히려 사랑 때문에 그대에게 호소합니다: 앞서 바울은 빌레몬이 그리스도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 언급했다. (몬 5, 7) 바울은 빌레몬이 그러한 사랑에서 우러나와 최선을 다해 친절을 나타낼 것이라고 확신했다. (몬 21) 하지만 그는 빌레몬에게 사랑을 나타내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구절에 관해 한 참고 자료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사랑을 나타내라고 권할 수는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나이가 많고: 바울은 이 편지를 쓸 당시 50대나 60대였을 수 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단어는 “50-56세의 남자”를 가리키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하지만 그리스어 「칠십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나이가 훨씬 많은 아브라함과 엘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창 25:8; 삼상 2:22; LXX) 따라서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만으로는 빌레몬에게 편지할 당시 그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바울의 삶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의 나이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기원 34년경에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약 25년 뒤인 기원 60-61년에 빌레몬에게 이 편지를 썼다. 개종할 무렵 대제사장이 바울을 알고 신임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그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는 예수께서 태어나신 때와 비슷한 시기에 혹은 그로부터 얼마 뒤에 태어났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를 일부 성경 번역판에서는 “대사이고”로 번역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단어를 “나이가 많고”와 같은 표현으로 번역하는 쪽을 선호하며, 눅 1:18과 딛 2:2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번역되었다.—고후 5:20연구 노트; 엡 6:20연구 노트 비교.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갇혀 있기: 몬 1 연구 노트 참조.

오네시모: 오네시모는 로마로 도망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인 그의 주인 빌레몬의 소유물을 훔쳤을 수 있다. 그 후 그는 로마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몬 18. 골 4:9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이 쓴 이 짧은 편지는 주로 오네시모에 관한 것이지만 그의 이름은 이 구절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갇혀 있는 동안 비유적으로 말해 오네시모를 낳았다고 말한다. 그는 오네시모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이 표현을 볼 때 오네시모가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바울이 큰 역할을 했을 수 있다.—고전 4:15; 갈 4:19 비교.

오네시모: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오네시모와 동일 인물이다. 오네시모는 골로새의 그리스도인인 빌레몬의 종이었지만 그에게서 도망한 사람이었다. 그가 로마로 도망하기 전에 주인의 소유물을 훔쳤을 가능성도 있다. (몬 18) 그는 로마에 있는 동안 그리스도인이 되어, 사도 바울에게 사랑을 받는 영적 아들이 되었다. (몬 10)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두기고가 바울의 편지들을 에베소와 골로새로 전달하러 갈 때 그와 함께 골로새의 주인에게 돌아가라고 권했다. (엡 6:21, 22; 골 4:7, 8) 바울이 빌레몬에게 쓴 편지는 오네시모가 전달했을 수 있다. 오네시모가 두기고와 함께 골로새로 가는 긴 여행을 한 이유는 도망친 종들을 찾으려고 하는 로마 당국에 붙잡히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수 있다. 바울은 골로새 회중에게 오네시모를 “충실하고 사랑하는 형제”로 소개하면서 그를 잘 맞아들여 줄 것을 요청한다.

그것을 나에게 청구하십시오: 기원 1세기의 다른 문헌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표현은 빚을 갚겠다는 의사를 표현할 때 흔히 사용되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일부 주석가들은 오네시모가 도망치기 전에 주인의 소유물을 훔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동안 도망자로 지내려면 음식을 사고 뱃삯을 낼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바울은 두 사람이 관계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 자신이 빚을 대신 갚아 주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가 전에는 …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오네시모의 삶이 어떻게 크게 달라졌는지 묘사한다. 오네시모는 ‘전에는 쓸모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인에게서 도망쳤으며 그 전에도 신뢰하기 어려운 일꾼이었을 수 있다. (몬 18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므로 바울과 빌레몬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

쓸모없는 ··· 쓸모 있는: 오네시모라는 이름은 “이익이 되는; 쓸모 있는”을 의미한다. 몇몇 참고 자료에 따르면 이것은 기원 1세기에 흔한 이름이었다. 특히 종들 가운데는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라는 이름과 의미가 비슷한 “쓸모 있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재미있게 표현한 것 같다. 또한 그는 재치 있게도 “쓸모없는”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아크레스토스)와 “쓸모 있는”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유크레스토스)를 함께 사용했다. “쓸모 있는”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오랫동안 “쓸모없는” 사람이었다가 이제는 진정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 셈이다.—또한 골 4:9; 몬 10 연구 노트 참조.

오네시모: 오네시모는 로마로 도망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인 그의 주인 빌레몬의 소유물을 훔쳤을 수 있다. 그 후 그는 로마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몬 18. 골 4:9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이 쓴 이 짧은 편지는 주로 오네시모에 관한 것이지만 그의 이름은 이 구절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갇혀 있는 동안 비유적으로 말해 오네시모를 낳았다고 말한다. 그는 오네시모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이 표현을 볼 때 오네시모가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바울이 큰 역할을 했을 수 있다.—고전 4:15; 갈 4:19 비교.

오네시모: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오네시모와 동일 인물이다. 오네시모는 골로새의 그리스도인인 빌레몬의 종이었지만 그에게서 도망한 사람이었다. 그가 로마로 도망하기 전에 주인의 소유물을 훔쳤을 가능성도 있다. (몬 18) 그는 로마에 있는 동안 그리스도인이 되어, 사도 바울에게 사랑을 받는 영적 아들이 되었다. (몬 10)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두기고가 바울의 편지들을 에베소와 골로새로 전달하러 갈 때 그와 함께 골로새의 주인에게 돌아가라고 권했다. (엡 6:21, 22; 골 4:7, 8) 바울이 빌레몬에게 쓴 편지는 오네시모가 전달했을 수 있다. 오네시모가 두기고와 함께 골로새로 가는 긴 여행을 한 이유는 도망친 종들을 찾으려고 하는 로마 당국에 붙잡히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수 있다. 바울은 골로새 회중에게 오네시모를 “충실하고 사랑하는 형제”로 소개하면서 그를 잘 맞아들여 줄 것을 요청한다.

마음: 또는 “부드러운 애정”.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 스플랑크논은 문자적으로 몸속에 있는 장기들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마음”으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가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강렬한 감정 또는 그러한 감정이 생기는 곳을 가리킨다. (또한 고후 6:1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12절20절에서도 동일한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한다. 한 참고 자료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바울이 이 짧은 편지에서 그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한 것을 보면 그가 이 문제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 심장과도 같은: 또는 “내가 부드러운 애정을 품고 있는”.—몬 7 연구 노트 참조.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냄으로 정부의 권위에 합당한 복종을 나타냈다. (롬 13:1) 바울이 종의 신분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법적으로 자유롭게 될 수 있다면 “그 기회를 이용하라”고 권한 것은 사실이다. (고전 7:21)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노예 제도에 반대하여 정부의 법을 거스르는 것은 허용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요 17:15, 16; 18:36연구 노트. 또한 딤전 6:1 연구 노트 참조.

종살이의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들: 직역하면 “멍에 아래 있는 종들”. “멍에”라는 말은 주인의 권위 아래 노예나 종으로 예속된 상태를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딛 2:9, 10; 벧전 2:18. 용어 설명 “멍에” 참조) 로마 제국에는 노예가 많았으며 그중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노예 제도를 옹호하지도 비판하지도 않았다. (고전 7:20, 21) 예수께서는 사회 개혁을 하려고 하지 않으셨으며 제자들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요 17:14)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왕국에 관해 전파하셨는데, 이 왕국이 모든 형태의 압제와 불공정을 없앨 것이었다.—요 18:36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미디어 갤러리 “노예가 하던 일” 참조.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은 무슨 일을 했소?”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으셨다. (요 18:35) 그분은 빌라도가 처음에 물었던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라는 질문에 계속 초점을 맞추셨다. (요 18:33) 예수께서는 이 구절에 나오는 짧은 대답 가운데서 자신이 왕으로 다스릴 왕국을 세 번 언급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고 말씀하심으로 그 왕국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셨다. 이 점은 이전에 언급된 “하늘 왕국”이나 “하느님의 왕국”이라는 표현과 조화를 이룬다. (마 3:2; 막 1:15) 또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 즉 하느님과 그분의 종들에게서 멀어진 불의한 인간 사회에 “속해 있지 않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요 17:14, 16) 예수께서는 빌라도와 이 대화를 나누기 전 밤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제자들이 인간 왕을 지지하는 사람들처럼 무력을 사용해 그분을 보호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려 주셨다.—마 26:51, 52; 요 18:11.

나를 섬기게: 바울은 오네시모가 자신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했을 수 있다. 그리스어 디아코네오(“섬기다”; “봉사하다”)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겸손하게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맥에서는 바울을 위해 식품을 구하거나 음식을 만들어 주거나 그 밖의 실제적인 방법으로 그를 돕는 일을 하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오네시모가 바울을 도운 것은 결국 “좋은 소식을 위해” 겸손하게 일한 것이었다.—눅 8:3; 22:26 연구 노트 참조.

섬기는: 또는 “봉사하는”.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 디아코네오의 명사형인 디아코노스(봉사자; 종)는 다른 사람을 위해 쉬지 않고 겸손하게 봉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롬 15:8),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리스도의 봉사자나 종(롬 16:1; 고전 3:5-7; 골 1:23), 봉사의 종(빌 1:1; 딤전 3:8)뿐만 아니라, 집안 하인(요 2:5, 9), 정부 관리(롬 13:4)를 가리키는 데도 사용된다.

그들을 섬기고 있었다: 또는 “그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고 있었다”. 여기서 사용된 그리스어 디아코네오는 음식을 구해 주거나 요리를 하거나 음식을 차려 주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물질적 필요를 돌보아 주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눅 10:40(“일하다”), 눅 12:37(“섬기다”), 눅 17:8(“시중을 들다”), 행 6:2(“음식을 나누어 주다”)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그와 비슷하게 개인적 성격을 띠는 다른 모든 종류의 봉사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구절에서는 2, 3절에 언급된 여자들이 어떻게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을 지원하여 하느님이 주신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게 도왔는지 묘사하는 데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 여자들은 그렇게 함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보인 자비와 관대함에 관한 기록을 후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성경에 포함시키심으로, 그들의 행동을 고맙게 여긴다는 점을 나타내셨다. (잠 19:17; 히 6:10) 마 27:55과 막 15:41에서 여자들이 했던 일을 묘사할 때에도 동일한 그리스어 표현이 사용되었다.—디아코네오와 어근이 같은 명사 디아코노스에 관해 설명하는 눅 22:26 연구 노트 참조.

자유 의지로: 또는 “기꺼이; 자원해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오네시모와 관련된 문제를 처리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자유 의지를 잘 사용하여 사랑에 기초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후 9:7) 자유 의지를 사용하는 것 즉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신 30:19, 20; 수 24:15; 갈 5:13; 벧전 2:16) 이 구절에서 “자유 의지”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칠십인역」에서 자원 제물을 언급하는 데 여러 번 사용되었다. (레 7:16; 23:38; 민 15:3; 29:39) 여호와께서는 자신에게 자원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하지도 않으셨고 자원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고 처벌하지도 않으셨다. 그러한 제물은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바쳐야 했으며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동안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주인에게서 도망한 후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여호와의 손길이 있었다는 점을 암시적으로 언급한 것 같다. 빌레몬은 이제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영적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다. 또한 바울은 오네시모가 없어서 빌레몬이 어려움을 겪은 기간은 상대적으로 “잠시”(직역하면 “한 시간”) 동안이었다고 말한다. 반면 두 사람 사이의 영적인 관계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었다. 이제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유 21; 계 22:5.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냄으로 정부의 권위에 합당한 복종을 나타냈다. (롬 13:1) 바울이 종의 신분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법적으로 자유롭게 될 수 있다면 “그 기회를 이용하라”고 권한 것은 사실이다. (고전 7:21)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노예 제도에 반대하여 정부의 법을 거스르는 것은 허용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요 17:15, 16; 18:36연구 노트. 또한 딤전 6:1 연구 노트 참조.

믿는 사람을 주인으로 둔 사람들: 여기서 바울은 종과 주인이 모두 그리스도인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로서 하느님 앞에서 동일한 신분을 갖고 있다. (롬 8:17)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종의 신분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형제이기도 한 주인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가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지 않는다면 주인을 이용하는 셈이 될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기 형제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와 더욱 충실하고 부지런하게 일해야 한다. 한편 주인인 그리스도인은 종을 공정하게 대해야 했다.—엡 6:9; 골 4:1.

종 이상으로, 곧 … 형제로서: 여기서 바울은 이제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주인과 종의 관계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 형제이자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는 동료 일꾼의 관계라는 점을 지적한다. (마 23:8; 28:19, 20)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안에서 계속 종으로 일했을 수도 있지만, 일부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빌레몬이 그를 종의 신분에서 자유롭게 해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몬 12 연구 노트 참조) 오네시모가 계속 종으로 일했다 하더라도 그는 그리스도인 믿음 덕분에 더 나은 일꾼이 되었을 것이다. 경건한 원칙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엡 6:5-8; 골 3:22, 23; 딛 2:9, 10. 딤전 6:2 연구 노트 참조.

벗: 여기서 “벗”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함께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한 번도 자신을 사도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동료”로 번역될 수도 있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자신과 빌레몬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여긴다는 점을 나타냈다. 이 단어는 동료 관계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사업을 함께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눅 5:10; 고후 8:23; 벧전 5:1)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더 따뜻한 느낌을 전달한다. 한 참고 자료에서는 바울과 빌레몬의 친밀한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의 ‘동료 관계’는 … 한 분의 주께 속해 있다는 점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러한 깊은 유대는 그들이 믿음과 사랑으로 같은 일을 수행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유의할 만한 점으로 고대 그리스의 저술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벗 관계를 이렇게 정의했다. “벗이란 함께하는 사람이다.”

그를 친절하게 맞이하십시오: 바울은 빌레몬에 대해 강한 확신을 나타냈다. 당시에 일부 주인들은 종이 말을 듣지 않으면 매질을 하고 낙인을 찍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는데, 다른 종들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로 그렇게 했다.

그것을 나에게 청구하십시오: 기원 1세기의 다른 문헌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표현은 빚을 갚겠다는 의사를 표현할 때 흔히 사용되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일부 주석가들은 오네시모가 도망치기 전에 주인의 소유물을 훔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동안 도망자로 지내려면 음식을 사고 뱃삯을 낼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바울은 두 사람이 관계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 자신이 빚을 대신 갚아 주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눈이라도 빼서 나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지 강조하기 위해 당시에 흔히 쓰이던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그들은 바울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심지어 눈과 같이 소중한 것이라도 기꺼이 희생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가 앞서 언급했던 “병”이 만성적인 눈병이었다면,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더더욱 적절한 것이었다.—갈 4:13, 14. 또한 행 23:2-5; 고후 12:7-9; 갈 6:11 참조.

내 손으로 …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 보통 다른 사람을 시켜 자신의 말을 받아 적게 했다. 하지만 이 편지는 그가 직접 쓴 것 같다.—롬 16:22연구 노트 참조.

우리의 사랑하는 동료 일꾼인 빌레몬: 빌레몬은 아시아 속주의 도시 골로새에 있는 회중에서 섬기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골 4:9) 그는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알게 된 것 같다. (몬 19) 바울은 골로새에서 전파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동안 ‘아시아 속주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으며, 그때 빌레몬은 에베소에서 바울을 만났을 수 있다. (행 19:10) 빌레몬은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을 하지는 않았지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에 참여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동료 일꾼으로 여겼다.—롬 16:3; 고전 3:9 연구 노트 참조.

나 바울이 내 손으로 직접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보통 때와는 달리 바울은 이 짧은 편지를 자신이 직접 쓴 것 같다. 바울이 시력이 좋지 않았다면 편지를 직접 쓰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갈 4:15; 6:11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바울이 아마도 편지의 이 부분에서 단지 몇 단어만 직접 써서 일종의 서명을 했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바울이 직접 썼다는 사실은 바울의 부탁에 힘을 실어 주었을 것이며 오네시모가 갚아야 할 빚이 있다면 대신 갚겠다는 약속을 보증하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그대도 나에게 그대 자신을 빚지고 있다는: 이 표현을 볼 때 빌레몬이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바울이 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몬 1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가 얼마나 물질적 손해를 입었든 그가 얻은 모든 것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몬 18. 엡 1:18; 2:12 비교.

나의 마음: 또는 “나의 부드러운 애정”.—몬 7 연구 노트 참조.

마음: 또는 “부드러운 애정”.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 스플랑크논은 문자적으로 몸속에 있는 장기들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마음”으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가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강렬한 감정 또는 그러한 감정이 생기는 곳을 가리킨다. (또한 고후 6:1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12절20절에서도 동일한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한다. 한 참고 자료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바울이 이 짧은 편지에서 그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한 것을 보면 그가 이 문제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 확신하기 때문에: 바울이 빌레몬에게 가지고 있었던 확신은 단순한 바람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는 강한 확신이나 신뢰를 의미하며, 그가 쓴 다른 편지들에서도 자주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관련된 목적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할 때 (빌 1:6) 그리고 예수께서 하느님을 신뢰하신다는 점을 언급할 때 (히 2:13) 이 단어를 사용했다. 롬 8:38에서도 동일한 단어가 “나는 확신합니다”로 번역되었다. 바울은 빌레몬이 단지 마지못해 자신의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내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그대가 할 것임을 나는 압니다라고 말한다. 빌레몬은 바울이 자신에게 보여 준 확신 때문에 그의 말을 기꺼이 따르려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바울이 부탁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러분의 기도로 …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어 복수형 대명사(“여러분의”)를 사용한 것을 볼 때, 그는 빌레몬의 집에서 모이는 회중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몬 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로마에 수감되어 있는 자신이 풀려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데 그러한 기도가 큰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기도가 여호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여 그분이 조처를 취하시는 시기를 앞당길 수도 있고, 그분이 하지 않으셨을 일을 하시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히 13:19.

내가 여러분에게 가게 되기를: 또는 “내가 여러분을 위해 자유롭게 되기를”.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표현은 문자적으로 “내가 여러분에게 은혜로 주어지게 되기를”을 의미한다. 그는 골로새 회중 사람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자신이 풀려나게 된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한 참고 자료에 따르면, 여기서 바울이 수동형 동사를 사용한 것은 “하느님만이 바울이 풀려나게 하실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대의 집에 모이는 회중: 이 편지의 내용은 바울이 주로 빌레몬에게 쓴 것이지만, 바울은 편지를 받는 대상에 압비아와 아르깁보와 회중 전체를 포함시킨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개인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골 4:15. 고전 16:19 연구 노트 참조) 이 편지 내용의 대부분은 바울이 직접적으로 빌레몬에게 하는 말이지만, 3, 22, 25절에 “여러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복수 대명사들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유의할 만하다. 따라서 바울은 이 편지가 회중 전체에 낭독되기를 바랐을 수 있다. 회중 사람들은 이 편지에 담긴 중요한 교훈과 원칙을 통해 분명 유익을 얻었을 것이다.

항상 여러분을 위해 힘써: 여기서 “힘쓰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아고니조마이는 명사 아곤에서 나온 단어인데, 아곤은 운동 경기를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다. (눅 13:24; 고전 9:25 연구 노트 참조) 고대의 운동선수들이 목표나 결승선에 도달하기 위해 힘쓴 것처럼, 에바브라도 골로새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 간절히 그리고 열렬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에 회중이 설립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것 같으며, 따라서 그곳의 형제 자매들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골 1:7; 4:13) 바울과 에바브라는 그들이 온전하게 되고 즉 영적으로 성숙하고 장성한 상태에 있고, 희망을 굳게 유지하기를 바랐다.—골 1:5; 2:6-10.

에바브라: 골로새의 충실한 봉사자로,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첫 번째로 수감되어 있을 때 그를 방문했다. 바울은 골로새서를 쓸 당시 골로새를 방문한 적이 없었던 것 같으며 (골 2:1) 에바브라가 그곳에 회중을 설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골 1:6-8; 4:12, 13) 에바브라라는 이름은 에바브로디도의 축약형이다. 하지만 여기에 언급된 에바브라는 빌립보의 에바브로디도와는 다른 사람이다. (빌 2:25) 골로새의 에바브라는 몬 23에도 언급된다.

나와 함께 갇혀 있는: 바울은 이 그리스어를 에바브라를 가리키는 데만이 아니라 다른 편지에서 아리스다르고, 안드로니고, 유니아를 가리키는 데도 사용했다. (롬 16:7; 골 4:10) 그 사람들은 바울과 함께 실제로 수감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이 표현은 그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수감되어 있는 바울을 용기 있게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에바브라: 골로새 출신의 그리스도인. 그곳에 회중을 설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골 1:7; 4:12 연구 노트 참조) 에바브라는 바울이 첫 번째로 수감되어 있을 때 로마에 왔다. 그는 로마에 한동안 머물렀던 것 같은데, 바울이 인사를 전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혀 있는 에바브라”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할례받은 사람들: 할례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에게 도움을 준 형제들의 이름을 언급한다. (이 구절에 나오는 큰 위로의 원천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그들은 거리낌 없이 비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했을 것이며, 분명 바울을 도와 비유대인들에게 기꺼이 전파했을 것이다.—롬 11:13; 갈 1:16; 2:11-14.

에바브라: 골로새 출신의 그리스도인. 그곳에 회중을 설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골 1:7; 4:12 연구 노트 참조) 에바브라는 바울이 첫 번째로 수감되어 있을 때 로마에 왔다. 그는 로마에 한동안 머물렀던 것 같은데, 바울이 인사를 전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혀 있는 에바브라”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데마: 바울은 빌레몬서에서도 데마를 언급한다. (몬 24) 이 편지를 쓰고 불과 몇 년 뒤에 로마에 두 번째로 수감되어 있을 때 바울은 이렇게 썼다. “데마는 현 세상 제도를 사랑해서 나를 버렸습니다.” 데마는 데살로니가로 갔는데, 그곳은 그의 고향이었던 것 같다.—딤후 4:10.

마가: 행 12:12, 25; 13:5, 13에서는 요한이라고도 불린다. (마가복음 책명; 행 12:12 연구 노트 참조) 이전에 바울과 바나바는 바울의 2차 선교 여행(기원 49-52년경)에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감정이 격해져서” 서로 헤어지는 일이 있었다. (행 15:37-39) 하지만 바울이 고전 9:6에서 바나바를 긍정적인 관점으로 언급한 것을 볼 때, 바울이 골로새서를 쓸 시점에는 두 사람이 이미 화해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이 로마에 첫 번째로 수감되어 있던 이 기간에 마가가 그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마가에 대한 바울의 생각이 전과는 달라졌다는 점을 보여 준다. 바울은 마가가 자신에게 “큰 위로의 원천”이 되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골 4:11 연구 노트 참조) 마가는 로마에 있는 바울을 방문한 기간에 마가복음을 기록했을 것이다.—또한 “마가복음 소개” 참조.

나와 함께 갇혀 있는: 바울은 이 그리스어를 에바브라를 가리키는 데만이 아니라 다른 편지에서 아리스다르고, 안드로니고, 유니아를 가리키는 데도 사용했다. (롬 16:7; 골 4:10) 그 사람들은 바울과 함께 실제로 수감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이 표현은 그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수감되어 있는 바울을 용기 있게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형제 한 사람: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이 형제를 가리킬 때 바울은 “여행 동반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을 사용한다. (고후 8:19)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과 행 19:29에만 나오는데, 행 19:29에서는 이 단어의 복수형(“동행들”)이 사용되었다. 그 구절에서는 바울의 동행 중 하나로 아리스다르고가 언급된다. 아리스다르고는 바울의 친밀한 동료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이 구절에 언급된 “형제 한 사람”이 아리스다르고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기고나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행 20:2-4; 27:2; 골 4:7, 10.

데마는 … 나를 버리고: “버리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위험에 처한 사람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데마는 바울의 가까운 동료 중 한 사람이었다. 바울이 로마에 첫 번째로 수감되어 있을 때 쓴 편지들을 보면 데마는 당시 바울과 함께 있었다. (몬 24. 골 4:14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이번에는 바울의 상황이 더 안 좋았다. 이미 많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떠났다. (딤후 1:15) 바울은 데마가 반대자나 배교자가 되었다는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데마는 이 충실한 사도에게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에 그를 위로할 소중한 기회를 잃었다.

누가: 누가의 이름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세 번 나오는데, 세 번 모두 사도 바울에 의해 언급된다. (딤후 4:11; 몬 24) 누가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었을 것이며 기원 33년 오순절 이후 어느 시점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 같다. 그는 누가복음을 기록했으며, 그 후에 사도행전을 기록했다. (누가복음 책명 연구 노트 참조) 그는 바울의 2차 선교 여행과 3차 선교 여행에 함께했다. 또한 그는 바울이 카이사레아에 2년 동안 수감되었을 때 그곳에 있었다. 그는 바울이 로마로 이송될 때 함께 갔으며 바울은 그곳에서 첫 번째로 투옥되었다. 바울은 로마에 첫 번째로 투옥되어 있는 기간에 골로새서를 썼다. 누가는 바울이 두 번째로 수감되어 있을 때에도 그와 함께 있었으며, 바울은 그 후에 순교한 것 같다.—딤후 4:11.

마가: 골 4:10 연구 노트 참조.

아리스다르고: 바울과 함께 여행한 데살로니가 출신의 마케도니아 사람. 아마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골 4:11 연구 노트 참조) 아리스다르고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바울 곁에 머물렀다. 그는 에베소에서 폭도들의 공격이 있었을 때 그리고 그리스에서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몄을 때도 바울과 함께 있었다. (행 19:29; 20:2-4) 나중에 바울이 죄수로 로마에 호송될 때 이 충성스러운 친구는 그와 함께 갔다. 도중에 그들은 파선을 당하기도 했다. (행 27:1, 2, 41) 아리스다르고는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 연금되어 있을 때에도 계속 곁에서 그를 도와준 것 같다. (행 28:16, 30) 그는 한동안 바울과 함께 감옥에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를 “큰 위로의 원천”이라고 부르며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골 4:10, 11. 또한 몬 23; 고후 8:18 연구 노트 참조.

데마: 골 4:14; 딤후 4:10 연구 노트 참조.

누가: 골 4:14 연구 노트 참조.

여러분이 나타내는 영: 직역하면 “여러분의 영”. 여기서 “영”은 특정한 방법으로 말하거나 행동하게 하는 강력한 내적 힘 또는 지배적인 정신적 성향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는 “조용하고 온화한 영”(벧전 3:4)이나 “온화한 영”(갈 6:1)을 언급한다.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1:7)에서 바울은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정신의 영”을 “비겁함의 영”과 대조한다. 그는 그 편지를 이러한 말로 끝맺는다. “주께서 그대가 나타내는 영과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딤후 4:22) 개인이 특정한 영을 나타낼 수 있는 것처럼 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도 특정한 영을 나타낼 수 있다. 갈라디아서의 끝부분인 이 구절과 빌립보서의 끝부분에서 바울은 그리스어 복수형 대명사(“여러분”)를 사용했다. 그는 그렇게 하여 갈라디아와 빌립보의 회중들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본과 일치한 영을 나타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다.—빌 4:23.

그대의 집에 모이는 회중: 이 편지의 내용은 바울이 주로 빌레몬에게 쓴 것이지만, 바울은 편지를 받는 대상에 압비아와 아르깁보와 회중 전체를 포함시킨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개인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골 4:15. 고전 16:19 연구 노트 참조) 이 편지 내용의 대부분은 바울이 직접적으로 빌레몬에게 하는 말이지만, 3, 22, 25절에 “여러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복수 대명사들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유의할 만하다. 따라서 바울은 이 편지가 회중 전체에 낭독되기를 바랐을 수 있다. 회중 사람들은 이 편지에 담긴 중요한 교훈과 원칙을 통해 분명 유익을 얻었을 것이다.

여러분이 나타내는 영: 바울은 편지를 끝맺으면서 그리스어 복수형 대명사(“여러분”)를 사용한다. 그는 “[빌레몬]의 집에 모이는 회중”을 비롯해 1, 2절에 언급된 모든 사람에게 이 말을 한 것 같다. (몬 2연구 노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과분한 친절이 그들의 “영”과 함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다. 여기서 “영”은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거나 행동하게 하는 강력한 내적 힘 또는 지배적인 정신적 성향을 가리킨다. (용어 설명 “” 참조) 그리스도의 축복이 있으면 그들은 계속 하느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모범과 일치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이었다.—갈 6:18연구 노트; 빌 4:23.

미디어

빌레몬서 소개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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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네시모가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아오다
오네시모가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아오다

오네시모가 로마에 가택 연금되어 있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갖고 골로새에 있는 주인 빌레몬의 집에 도착한다. 오네시모는 로마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오네시모의 상황을 알고 있던 바울은 빌레몬에게 돌아가도록 격려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돌아가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되었을 수 있다. 빌레몬에게 자신을 엄하게 처벌할 법적 권리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네시모를 단지 종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형제로서 친절하게 맞이하라고 호소한다. (몬 15-17) 또한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이 부탁하는 대로 할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한다. (몬 21) 빌레몬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서로를 경제 상황이나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형제로 대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롬 12:10; 고전 16:20; 골 4:15; 살전 4:9, 10.

노예가 하던 일
노예가 하던 일

노예 제도는 로마 제국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 로마에는 노예와 주인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법이 있었다. 노예들은 로마 제국 영토에 사는 부유한 사람들의 집에서 많은 일을 수행했다. 그들은 요리와 청소를 하고 주인의 자녀들을 돌보았다. 공장이나 광산이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도 있었다. 교육을 많이 받은 노예들은 의사나 교사나 비서로 일했다. 사실 노예는 군대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일했다.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는 일도 있었다. (용어 설명 “자유인; 자유를 얻은 사람” 참조)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노예 제도와 관련해서 정부의 권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도 않았고 노예 반란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고전 7:21)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노예를 소유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존중해 주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러한 권리를 존중하여 노예인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냈다. 오네시모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동료 그리스도인인 주인에게 기꺼이 돌아가 그에게 복종했다. (몬 10-17) 바울은 노예 신분인 사람들에게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라고 교훈했다.—딛 2: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