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47
연구 노트
오순절: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나오는 펜테코스테(“50번째 [날]”이라는 의미)라는 그리스어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수확절”(출 23:16) 또는 “칠칠절”(출 34:22)이라고 불리는 축제를 가리킨다. 오순절은 처음 보리를 수확하는 때부터 밀을 수확하는 때까지 이어지는 7주간의 수확 기간이 끝난 후에 열렸다. 그날은 보리 수확의 첫 열매인 곡식 단을 바치는 니산월 16일부터 계산해 50번째 되는 날이었다. (레 23:15, 16) 히브리 달력으로 오순절은 시완월 6일이었다. (부록 나15 참조) 이 축제에 관한 규정은 레 23:15-21; 민 28:26-31; 신 16:9-12에 들어 있다. 오순절에는 먼 곳에 사는 수많은 유대인과 개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이 축제는 지위와 배경에 관계없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후대와 친절을 나타내야 하는 때였다. 자유인, 종,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레위 사람, 외국인 거주자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그렇게 해야 했다. (신 16:10, 11) 따라서 “하느님의 장엄한 일들에 관해” 모든 사람에게 증거할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인 회중이 기원 33년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탄생한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 (행 1:8; 2:11)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오순절이 이스라엘이 시나이산에서 율법을 받아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으로 구별된 때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나이산에 모여 율법을 받은 때는 셋째 달(시완월) 초였다. (출 19:1) 이스라엘이 모세를 중개자로 율법 계약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이제 새로운 나라인 영적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개자로 새 계약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언어: 또는 “방언”. 성경에서 그리스어 글로사는 발성 기관의 하나인 “혀”를 가리킬 수 있다. (막 7:33; 눅 1:64; 16:24) 하지만 이 단어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언어를 가리키거나 특정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계 5:9; 7:9; 13:7) 이 그리스어는 행 2:3에 나오는 “불처럼 보이는 혀들”이라는 표현에도 사용되었다. 그 “혀들”이 나타나 각 제자 위에 내려앉았으며 제자들은 여러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언어: 또는 “방언”. 성경에서 그리스어 글로사는 발성 기관의 하나인 “혀”를 가리킬 수 있다. (막 7:33; 눅 1:64; 16:24) 하지만 이 단어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언어를 가리키거나 특정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계 5:9; 7:9; 13:7) 이 그리스어는 행 2:3에 나오는 “불처럼 보이는 혀들”이라는 표현에도 사용되었다. 그 “혀들”이 나타나 각 제자 위에 내려앉았으며 제자들은 여러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자기 모국어: 직역하면 “우리가 태어난 곳의 말”. 여기서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디알렉토스이다. (행 2:4 연구 노트 참조) 제자들의 말을 듣던 많은 사람들은 당시 국제어였을 그리스어를 할 줄 알았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독실한 유대인들”이었으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의식을 행할 때 사용되던 히브리어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행 2:5)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사용하던 언어로 좋은 소식을 듣자 주의를 집중하게 되었다.
아시아 속주: 용어 설명 “아시아” 참조.
개종자: 그리스어 원어 프로셀리토스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을 가리킨다. 남자라면 할례도 받아야 했다.
개종자들: 마 23:15 연구 노트 참조.
단 포도주: 또는 “새 포도주”. 그리스어 글류코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이 단어는 발효가 진행 중인, 단맛이 나는 새 포도주를 가리킨다.
낮 제3시: 오전 9시경. 기원 1세기에 유대인들은 해 뜨는 시간인 오전 6시경부터 시작해서 낮을 12시간으로 나누었다. (요 11:9) 따라서 제3시는 오전 9시경, 제6시는 낮 12시경, 제9시는 오후 3시경이었을 것이다. 정확한 시계가 없었으므로, 많은 경우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대략적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요 1:39; 4:6; 19:14; 행 10:3, 9.
모든 육체: 또는 “모든 인류; 모든 사람”. 이 표현은 눅 3:6에도 나오는데, 그 구절은 사 40:5을 인용한 것이다. 사 40:5에는 동일한 의미의 히브리어 표현이 사용되었다.—요 1:14 연구 노트 비교.
모든 부류의 사람: 예수께서는 국적, 인종, 경제적 형편에 관계없이 온갖 배경의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끌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행 10:34, 35; 계 7:9, 10. 요 6:44 연구 노트 참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얼마 전에 ‘그리스인 몇 명’이 예수를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점은 유의할 만하다. (요 12:20 연구 노트 참조) 많은 번역판에서는 그리스어 파스를 “모든 사람; 모든 이”로 번역한다. 그럴 경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분이 결국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끄실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그것은 영감받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조화되지 않는다. (시 145:20; 마 7:13; 눅 2:34; 살후 1:9) 그리스어 파스의 문자적인 의미가 “모두; 모든 사람”이기는 하지만 (롬 5:12) 마 5:11과 행 10:12을 보면 이 단어가 “온갖; 온갖 종류의; 모든 부류의”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많은 번역판이 그 구절들에서 “온갖; 각종” 같은 번역 표현을 사용한다.—요 12:32과 비슷한 경우를 보려면 요 1:7; 딤전 2:4 비교.
알아맞혀 보아라. 누가 너를 쳤느냐?: 여기서 “알아맞히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예언하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앞으로 있을 일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누가 그분을 쳤는지 알아맞히는 것을 뜻한다. 막 14:65과 눅 22:64의 평행 기록에서는 예수를 박해하는 자들이 그분의 얼굴을 가렸다고 알려 준다. 그들은 그렇게 한 다음, 누가 그분을 쳤는지 맞혀 보라고 조롱조로 말한 것 같다.
알아맞혀 보아라!: “알아맞히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예언하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앞으로 있을 일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알아맞히는 것을 뜻한다. 문맥을 보면 예수를 박해하는 자들이 그분의 얼굴을 가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평행 기록인 마 26:68에서는 그들이 예수를 조롱하면서 한 말을 다음과 같이 더 자세히 알려 준다. “그리스도야, 알아맞혀 보아라. 누가 너를 쳤느냐?” 그들은 예수의 눈을 가린 다음 누가 그를 쳤는지 맞혀 보라고 말했던 것이다.—마 26:68; 눅 22:64 연구 노트 참조.
알아맞혀 보아라!: “알아맞히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예언하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앞으로 있을 일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알아맞히는 것을 뜻한다. 문맥을 보면 예수를 박해하는 자들이 그분의 얼굴을 가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예수의 눈을 가린 다음 누가 그를 쳤는지 맞혀 보라고 말했다.—마 26:68 연구 노트 참조.
장로들: 직역하면 “연로자들”. 성경에서 그리스어 프레스비테로스는 지역 사회나 나라에서 권위와 책임을 가진 지위에 있는 사람을 주로 가리킨다. 이 단어가 눅 15:25에 나오는 “큰아들”과 행 2:17에 나오는 “노인”의 경우처럼 나이와 관련이 있을 때도 있지만, 반드시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구절에서는 유대 민족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흔히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함께 언급된다. 산헤드린은 이 세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마 21:23; 26:3, 47, 57; 27:1, 41; 28:12. 용어 설명 “장로; 연로자” 참조.
마지막 날에: 이 구절에서 베드로는 욜 2:28에 나오는 요엘의 예언을 인용한다. 베드로는 영감을 받아, 히브리어 원문과 「칠십인역」(3:1, LXX)에 사용된 “그 후에”라는 표현 대신 “마지막 날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요엘의 예언은 오순절에 성령이 부어졌을 때 성취되었다. 따라서 베드로가 한 말은 “마지막 날”이라는 특별한 기간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 후에 “여호와의 크고 찬란한 날”이 올 것임을 알려 준다. “마지막 날”은 “여호와의 크고 찬란한 날”로 끝나게 되는 것 같다. (행 2:20) 베드로가 말한 대상은 유대인들과 유대교 개종자들이었으므로, 그의 영감받은 말은 일차적으로 그들에게 성취되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말은 당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숭배의 중심지로 하는 세상 제도의 “마지막 날”에 살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 같다. 이전에 예수께서도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에 관해 예언하신 적이 있다. (눅 19:41-44; 21:5, 6) 그 일은 기원 70년에 실제로 일어났다.
모든 부류의 육체: 또는 “모든 부류의 사람”. 직역하면 “모든 육체”. 여기서 그리스어 사르크스(흔히 “육체”로 번역됨)는 살아 있는 인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많은 경우 “모든 육체”라는 표현은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요 17:2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모든 육체”라는 그리스어 표현이 좀 더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땅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 주지는 않으셨다. 또한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신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모든 부류의 사람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아들딸, 젊은이, 노인, 남종, 여종’ 즉 모든 부류의 사람에게 부어 주셨다. (행 2:17, 18) “모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파스)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 예를 딤전 2:3, 4에서도 볼 수 있다. 그 구절에서는 하느님의 뜻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알려 준다.—요 12:32 연구 노트 참조.
나의 영: 여기서 그리스어 프뉴마는 하느님의 성령 즉 활동력을 가리킨다. 이 구절에 인용된 욜 2:28에서는 프뉴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가 사용되었다. 기본적으로 두 단어 모두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힘이 작용한다는 증거가 있는 무언가를 가리킨다.—용어 설명 “영” 참조.
예언을 하고: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 프로페튜오는 문자적으로 “말하다”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에게서 온 소식을 알린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미래를 예언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이 기본 의미는 아니다. 이 단어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어떤 일을 알아내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마 26:68; 막 14:65; 눅 22:64 연구 노트 참조) 이 문맥에서 일부 사람들은 성령을 받아 예언을 했다. 여호와께서 과거에 하셨고 앞으로 하실 “장엄한 일들”에 관해 선포함으로 가장 높으신 분의 대변자 역할을 한 것이다. (행 2:11) “예언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에도 비슷한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출 7:1에서는 아론을 모세의 “예언자”로 언급한다. 이것은 아론이 미래의 일을 예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세의 대변자라는 의미였다.
노인: 또는 “연로자; 장로”. 여기서 그리스어 프레스비테로스는 같은 구절에 나오는 “젊은이”와 대비되는 표현으로 사용되어 나이가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다. 다른 문맥에서는 이 단어가 지역 사회나 나라에서 권위와 책임을 가진 지위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행 4:5; 11:30; 14:23; 15:2; 20:17. 마 16:21 연구 노트 참조.
놀라운 일: 또는 “전조”.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그리스어 테라스는 항상 세메이온(“표징”)과 함께 사용되며, 그 경우 두 단어 모두 복수형으로 사용된다. (마 24:24; 요 4:48; 행 7:36; 14:3; 15:12; 고후 12:12) 테라스는 기본적으로 외경심이나 경탄을 자아내는 것을 가리킨다. 이 단어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전조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경우에는 연구 노트에 “전조”라는 대체 표현이 나온다.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고 나중에는 그분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별칭. (행 24:5) 유대인들 중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그 이름에 다른 사람과 구별시켜 주는 표현을 덧붙여 사용했다. 그처럼 구별시켜 주는 표현으로 출신지를 언급하는 것은 성경 시대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삼하 3:2, 3; 17:27; 23:25-39; 나 1:1; 행 13:1; 21:29) 예수께서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보내셨으므로, 그분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여러 상황에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셨다. (막 1:23, 24; 10:46, 47; 14:66-69; 16:5, 6; 눅 24:13-19; 요 18:1-7) 예수 자신도 그 이름을 받아들이고 사용하셨다. (요 18:5-8; 행 22:6-8) 빌라도가 형주 위에 붙인 명패에는 히브리어와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쓰여 있었다. (요 19:19, 20) 기원 33년 오순절 이후에도 사도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자주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렀다.—행 2:22; 3:6; 4:10; 6:14; 10:38; 26:9. 또한 마 2:23 연구 노트 참조.
놀라운 일: 또는 “전조”.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그리스어 테라스는 항상 세메이온(“표징”)과 함께 사용되며, 그 경우 두 단어 모두 복수형으로 사용된다. (마 24:24; 요 4:48; 행 7:36; 14:3; 15:12; 고후 12:12) 테라스는 기본적으로 외경심이나 경탄을 자아내는 것을 가리킨다. 이 단어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전조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경우에는 연구 노트에 “전조”라는 대체 표현이 나온다.
나사렛 사람: 막 10:47 연구 노트 참조.
놀라운 일: 또는 “전조”.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예수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증거였다. 예수께서 그처럼 기적으로 사람들을 고쳐 주고 부활시키신 일은 그분이 미래에 더 큰 규모로 하실 일을 보여 주는 전조이기도 했다.—행 2:19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의 모든 뜻: 또는 “하느님의 모든 목적”. 여기서 이 표현은 하느님께서 왕국을 통해 이루려고 하시는 모든 것을 가리키며, 그분이 구원에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신 모든 것을 포함한다. (행 20:25) 그리스어 불레는 눅 7:30에서는 “뜻[또는 “지시; 조언; 인도”, 각주]”으로 번역되었고 히 6:17에서는 “목적”으로 번역되었다.
뜻: 그리스어 불레는 눅 7:30(각주)에서는 “지시; 조언; 인도”로 번역되었고 히 6:17에서는 “목적”으로 번역되었다.—행 20:27 연구 노트 참조.
진통: 그리스어 원어는 문자적으로 출산할 때 겪는 극심한 통증을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는 이 단어가 일반적인 고난, 고통, 괴로움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였다. 하지만 이 표현에는 예수께서 예언하신 문제들과 고난이 마 24:21에 나오는 큰 환난이 닥치기 전에 마치 출산의 고통처럼 갈수록 더 자주, 더 심하게, 더 지속적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을 수 있다.
죽음의 고통: 성경에서는 죽으면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분명히 알려 주지만, (시 146:4; 전 9:5, 10) 이 구절에서는 “죽음”이 “고통”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이유는 죽음 자체가 비통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삼상 15:32, 각주; 시 55:4; 전 7:26) 사람은 대개 죽기 전에 고통을 느끼며 (시 73:4, 5) 죽음은 사람을 꼼짝 못 하게 속박하여 모든 활동과 자유를 앗아 가기 때문이다. (시 6:5; 88:10) 예수께서는 부활되실 때 바로 그와 같은 “죽음의 고통”에서 풀려나셨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은 고통스러운 죽음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지셨다. 여기서 “고통”으로 번역된 그리스어(오딘)는 다른 구절에서 출산의 고통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하지만 (살전 5:3) 일반적인 의미의 고통, 재앙, 고난을 가리킬 수도 있다. (마 24:8 연구 노트 참조) “죽음의 고통”이라는 표현은 「칠십인역」의 삼하 22:6과 시 18:4(17:5, LXX)에 나오는데,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는 그 표현이 “무덤의 밧줄”과 “죽음의 밧줄”로 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모음 없이 기록된 고대 히브리어 사본들에서는 “밧줄”에 해당하는 단어(헤벨)와 “고통”에 해당하는 단어의 자음 표기가 같다. 「칠십인역」에서 “밧줄”에 해당하는 단어를 “고통”으로 번역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일 수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죽음의 고통”이라는 표현과 “죽음의 밧줄”이라는 표현 모두 죽음이 비통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이라는 동일한 사상을 전달한다.
내가: 직역하면 “내 육신이; 내 육체가”. 베드로는 “다윗은 예수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라고 한 뒤에 시 16의 내용을 인용한다. (행 2:25) 이 구절(행 2:26)의 그리스어 본문과 시 16:9의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육신; 육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사람의 몸이나 사람 자체를 가리킬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대속 희생으로 죽임을 당할 것임을 알고 계셨지만 희망 속에 거하셨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자신을 부활시키실 것이며, 자신의 희생을 통해 인류를 위한 대속이 이루어지고, 자신의 육신 즉 육체가 썩지 않을 것임을 알고 계셨다.—행 2:27, 31.
나: 또는 “내 영혼”. 시 16:10에서 인용한 이 표현에서 히브리어 네페시가 그리스어 프시케로 번역되었다. 두 단어 모두 종종 “영혼”이라고 번역된다. 시편 필자는 “영혼”이라는 단어를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했다. 오순절에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선포하면서, 다윗이 기록한 시편의 이 내용을 예수에게 적용했다.—행 2:24, 25. 용어 설명 “영혼” 및 부록 가2 참조.
무덤: 또는 “하데스”. 그리스어 하데스는 “보이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인 것 같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10번 나온다. (마 11:23; 16:18; 눅 10:15; 16:23; 행 2:27, 31; 계 1:18; 6:8; 20:13, 14 참조) 이 구절에서 인용한 시 16:10에서는 “하데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스올”이 사용되었는데 그 단어 역시 “무덤”으로 번역되었다. 「칠십인역」은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스올”을 그리스어 “하데스”로 번역한다. 두 단어 모두 성경에서 인류의 공통 무덤을 가리키며, 개개의 무덤을 가리킬 때는 다른 단어들이 사용된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히브리어로 옮긴 일부 번역판(부록 다4에 J7, 8, 11, 12, 14-18, 22로 표기됨)은 이 구절에서 “스올”을 사용한다.—부록 가2 참조.
당신 앞에서: 직역하면 “당신의 얼굴 앞에서”. 이 구절은 시 16:11을 인용한 것이다. 이 구절의 그리스어 원문에는 히브리어를 직역한 표현이 사용되었다. “~의 얼굴 앞에서”라는 히브리어 표현은 “~ 앞에서; ~가 있는 곳에서”를 의미하는 관용구이다.
그의 자손 가운데 하나: 다윗은 그의 후손 중 하나가 창 3:15에 약속된 “자손” 즉 메시아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삼하 7:12, 13; 시 89:3, 4; 132:11) 이 약속은 예수께서 다윗왕의 후손인 어머니와 양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심으로 성취되었다. “자손”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그의 허리의 열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관용구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의 몸에서 허리에 해당하는 부위에는 생식 기관이 포함되어 있다. (창 35:11, 각주; 왕상 8:19, 각주) 자손을 가리킬 때 “태[또는 “몸”]의 열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 밖의 다른 표현들에서도 “열매”가 인간의 생식 작용의 산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창 30:2, 각주; 신 7:13, 각주; 시 127:3; 애 2:20, 각주; 눅 1:42.
하느님: 현존하는 그리스어 사본들에는 이 부분이 “하느님”을 의미하는 테오스로 되어 있다. 유의할 만하게도,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히브리어로 옮긴 일부 번역판(부록 다4에 J7, 8, 10으로 표기됨)은 이 부분에 테트라그람마톤을 사용한다.
무덤: 또는 “하데스”. 그리스어 하데스는 “보이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인 것 같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10번 나온다. (마 11:23; 16:18; 눅 10:15; 16:23; 행 2:27, 31; 계 1:18; 6:8; 20:13, 14 참조) 이 구절에서 인용한 시 16:10에서는 “하데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스올”이 사용되었는데 그 단어 역시 “무덤”으로 번역되었다. 「칠십인역」은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스올”을 그리스어 “하데스”로 번역한다. 두 단어 모두 성경에서 인류의 공통 무덤을 가리키며, 개개의 무덤을 가리킬 때는 다른 단어들이 사용된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히브리어로 옮긴 일부 번역판(부록 다4에 J7, 8, 11, 12, 14-18, 22로 표기됨)은 이 구절에서 “스올”을 사용한다.—부록 가2 참조.
무덤: 또는 “하데스”. 인류의 공통 무덤을 가리킨다.—행 2:27 연구 노트 및 용어 설명 “무덤” 참조.
그 육체가 썩지도 않는다고: 그리스도를 예표한 사람들인 모세와 다윗의 몸은 썩어 없어졌지만 예수의 경우는 달랐다. 여호와께서는 예수의 육체가 썩어 흙이 되게 하지 않으셨다. (신 34:5, 6; 행 2:27; 13:35, 36) 예수께서 “마지막 아담”이자 (고전 15:45) 모든 인류를 위한 “상응하는 대속물”이 되시려면 (딤전 2:5, 6; 마 20:28) 그분의 몸은 실제 인간의 몸이어야 했다. 또한 그분의 몸은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도로 사는 값으로 여호와 하느님께 바쳐져야 했기 때문에 완전한 몸이어야 했다. (히 9:14; 벧전 1:18, 19) 아담의 불완전한 후손은 아무도 대속에 필요한 값을 지불할 수 없었다. (시 49:7-9) 따라서 예수께서 잉태되신 방법은 일반적인 방법과는 달랐다. 예수께서는 아마도 침례를 받으실 때, 아버지께 “당신[여호와]은 ··· 저를 위해 몸을 예비하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희생으로 바쳐질 예수의 완전한 인간 몸을 여호와께서 예비하셨던 것이다. (히 10:5) 제자들이 예수의 무덤에 갔을 때 예수의 시신은 없고 시신을 쌌던 아마포 천만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의 육체가 부패하기 전에 처리하신 것 같다.—눅 24:3-6; 요 20:2-9.
여호와: 이 구절에서 인용한 시 110:1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네 개의 히브리어 자음으로 표기된 하느님의 이름(יהוה, 로마자로 음역하면 YHWH)이 나온다. 하지만 부록 가5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성경 번역판들은 흔히 신약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며, 심지어 히브리어 성경을 인용한 구절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한 가지 유의할 만한 점은, 17세기에 발행된 일부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시 110:1이 인용된 이 구절(행 2:34)과 다른 세 구절(마 22:44; 막 12:36; 눅 20:42)에 대문자와 작은 대문자로 된 “주(LORD)”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후에 발행된 판들에서도 계속 그렇게 했다. 그 성경의 번역자들이 히브리어 성경에서 히브리어 원문에 하느님의 이름이 나오는 곳을 표시하기 위해 “주(LORD)”를 사용하고,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도 “주(LORD)”를 사용했다는 점은, 그들이 이 표현이 여호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음을 시사한다. 또 한 가지 유의할 만한 점은, 1979년에 초판이 발행된 「뉴 킹 제임스 성경」(New King James Version)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을 인용한 구절에서 “주”라는 표현이 하느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모든 경우에 “주(LORD)”를 사용한다는 점이다.—부록 다 참조.
기둥에 달아 처형하게: 그리스어 동사 스타우로오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곳이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 성경에 40회 이상 나온다. 이 동사의 명사형은 스타우로스이며 “형주”로 번역된다. (마 10:38; 16:24; 27:32 연구 노트 및 용어 설명 “기둥(2)”; “형주” 참조) 「칠십인역」은 더 7:9에서 높이가 20미터가 넘는 기둥에 하만을 매달라고 왕이 명령하는 부분을 번역할 때 이 그리스어 동사를 사용했다. 고전 그리스어에서 이 동사는 “말뚝으로 울타리를 두르다”를 의미했다.
기둥에 달아 처형한: 마 20:19 연구 노트 및 용어 설명 “기둥(2)”; “형주” 참조.
회개의 상징인 침례: 직역하면 “회개의 침례”. 침례를 받는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요한에게 침례를 받는 것은 율법을 어긴 죄에 대해 공개적으로 회개함으로, 행실을 변화시키겠다는 결심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처럼 회개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갈 3:24) 이와 같이 요한은 한 백성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을 볼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었다.—눅 3:3-6. 마 3:2, 8, 11 연구 노트 및 용어 설명 “침례”; “회개” 참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십시오: 요한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태도가 바뀌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그 점을 행동으로 나타내야 한다는 의미이다.—눅 3:8; 행 26:20; 마 3:2, 11 연구 노트 및 용어 설명 “회개” 참조.
회개하십시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메타노에오는 문자적으로 “생각을 바꾸다”로 번역될 수 있으며, 견해나 태도나 목적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 침례자 요한은 “죄의 용서에 필요한 회개의 상징인 침례를 전파했다.” (막 1:4 연구 노트 참조) 그 침례는 모세 율법을 심각하게 범한 것을 회개한다는 의미였다. 그러한 회개는 앞으로 있을 일을 위해 하느님의 백성을 준비시켜 주었다. (막 1:2-4) 그런데 이 구절에서 베드로는 마 28:19에 나오는 예수의 명령과 일치하게, 하느님의 백성이 회개해야 하며 죄를 용서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회개하고 그분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기 위해 꼭 필요한 새로운 요구 조건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에 잠김으로 그러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나타낼 수 있었다. 그러한 침례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개인적으로 헌신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마 3:8, 11 연구 노트 및 용어 설명 “회개” 참조.
여호와: 현존하는 그리스어 사본들에는 이 부분이 “주”(그리스어 키리오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부록 다에서 설명하듯이, 이 구절의 원문에 하느님의 이름이 사용되었으며 후에 “주”라는 칭호로 대치되었다고 볼 수 있는 타당한 이유들이 있다. 따라서 「신세계역」 본문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행 2:33-38에서 알 수 있듯이, 베드로가 여기서 언급한 이 약속은 성령이 부어지는 것에 관한 욜 2:28-32의 내용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 하느님 여호와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은 욜 2:32의 끝부분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욜 2:32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세 번 나오며, 그처럼 사람들을 부르시는 분이 여호와라는 점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부록 다3 소개; 행 2:39 참조.
사람들이 더해졌다: 또는 “영혼들이 더해졌다”. 그리스어 프시케는 「신세계역」 이전 번역판에서 “영혼”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문맥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용어 설명 “영혼” 참조.
식사를 하려고: 또는 “빵을 떼려고”. 직역하면 “빵을 부서뜨리려고”. 빵은 고대 중동 사람들의 주식이었다. 따라서 빵이라는 말은 어떤 종류의 식사이든 가리킬 수 있는 일반적인 표현이 되었다. 그 당시 빵은 주로 바삭하게 구운 납작한 빵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개 빵을 칼로 썰지 않고 부서뜨려 조각내어서 먹었으며, 예수께서도 종종 그렇게 하셨다. (마 14:19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마 15:36; 눅 24:30 참조) 예수께서는 주의 만찬을 제정하실 때 빵을 들어 그것을 떼셨다. 다시 말해 빵을 부서뜨려 조각내셨다. 이것은 빵을 나누는 일반적인 방법이었으므로, 예수께서 빵을 떼신 것은 영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마 26:26 연구 노트 참조) 사도행전의 몇몇 구절에는 “빵을 부서뜨리다”에 해당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일부 학자들은 그 표현이 주의 만찬을 거행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행 2:42, 46; 20:7, 11) 하지만 주의 만찬에 관한 성경 기록들에는 빵을 떼는 일이 포도주를 마시는 일과 늘 함께 언급된다. (마 26:26-28; 막 14:22-25; 눅 22:19, 20; 고전 10:16-21; 11:23-26) 포도주를 마시는 일은 빵을 떼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포도주를 마시는 일에 관한 언급 없이 빵을 떼는 일만 언급되는 경우, 그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라 일반적인 식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주의 만찬이 1년에 한 번 지키는 유월절을 대치하는 행사였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유월절보다 더 자주 기념하기를 원하셨다는 내용은 성경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교제하는 일: 또는 “서로 나누는 일”. 그리스어 코이노니아의 기본 의미는 “나누는 일; 친교”이다. 바울의 편지에는 이 단어가 여러 번 나온다. (고전 1:9; 10:16; 고후 6:14; 13:14) 문맥을 볼 때 이 구절에 언급된 사람들이 단순히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식사하는 일: 직역하면 “빵을 부서뜨리는 일”.—행 20:7 연구 노트 참조.
놀라운 일: 또는 “전조”.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그리스어 테라스는 항상 세메이온(“표징”)과 함께 사용되며, 그 경우 두 단어 모두 복수형으로 사용된다. (마 24:24; 요 4:48; 행 7:36; 14:3; 15:12; 고후 12:12) 테라스는 기본적으로 외경심이나 경탄을 자아내는 것을 가리킨다. 이 단어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전조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경우에는 연구 노트에 “전조”라는 대체 표현이 나온다.
모든 사람: 또는 “모든 영혼”. 그리스어 프시케는 「신세계역」 이전 번역판에서 “영혼”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문맥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용어 설명 “영혼” 참조.
놀라운 일: 또는 “전조”.—행 2:19 연구 노트 참조.
집집에서: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카트 오이콘은 문자적으로 “집을 따라”를 의미한다. 여러 사전과 주석서들에 따르면, 그리스어 전치사 카타는 배분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사전에서는 카타가 “장소가 연속되는 것을 가리키는 배분적 용법”으로도 사용되며 카트 오이콘은 “집집에서”를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신약 및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 그리스어-영어 사전」[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제3판) 또 다른 사전에서는 전치사 카타가 “배분적” 용법으로 사용된 예로 행 2:46; 5:42을 제시하면서, 그 구절들에 나오는 카트 오이콘이 “집집으로” 또는 “[각] 집에서”라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신약 주석 사전」[Exeget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호르스트 발츠와 게르하르트 슈나이더 편) 성경 학자 R.C.H. 렌스키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사도들은 그들의 축복받은 일을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날마다’ 계속 그 일을 했는데, 산헤드린과 성전 경비대가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그렇게 했다. 또한 κατ’ οἴκον[카트 오이콘] 다시 말해 부사적 의미인 ‘집에서’가 아니라 배분적 의미인 ‘집집에서’도 그렇게 했다.” (「사도행전 해석」[The Interpretation of The Acts of the Apostles], 1961년) 이러한 자료들은 제자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전파 활동을 수행했다는 점을 뒷받침해 준다. 눅 8:1에서도 카타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그 구절에서는 예수께서 “도시에서 도시로, 마을에서 마을로” 전파하셨다고 알려 준다. 이처럼 집으로 직접 찾아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방식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행 6:7. 행 4:16, 17; 5:28 비교.
집집에서: 또는 “집들에서”. 문맥을 볼 때 바울이 이 집들을 방문한 목적은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오고 우리 주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행 20:21)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이미 신자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한 사교적인 방문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신자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회개하고 예수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A. T. 로버트슨 박사는 저서인 「신약 단어 해설」(Word Pictures in the New Testament)에서 행 20:20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매우 뛰어난 전파자였던 이 사람이 집집으로 전파했으며 단지 사교적인 목적으로 집들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930년, 3권, 349-350면) 애비얼 애벗 리버모어는 「사도행전 주해」(The Acts of the Apostles With a Commentary, 1844년)에서 행 20:20에 나오는 바울의 말에 대해 이렇게 해설했다. “그는 단지 공개 장소에 모인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집집으로 다니며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자신의 큰 일을 열심히 수행했으며, 하늘의 진리를 문자 그대로 집으로 가져가 에베소인들의 가정과 마음 깊숙이 이르게 했다.” (270면)—그리스어 카트 오이쿠스(직역하면 “집들을 따라”)의 번역에 대한 설명을 보려면 행 5:42 연구 노트 참조.
집집마다: 카트 오이콘(직역하면 “집을 따라”)이라는 그리스어 표현에서 사용된 전치사 카타는 여기서 “~마다”라는 배분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도움이 필요한 이 시기에 제자들은 예루살렘이나 그 인근에 있는 여러 동료 신자들의 집에 모여 함께 식사를 했던 것 같다.—행 5:42; 20:20 연구 노트 참조.
미디어

가로 72센티미터, 세로 42센티미터 크기의 석회암 판에 새겨진 이 비문은 테오도투스 비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문은 20세기 초에 예루살렘의 오벨(오펠) 언덕에서 발견되었다. 그리스어로 된 이 비문에서는 “율법을 낭독하고 계명을 가르칠 회당을 만든” 제사장인 테오도투스를 언급한다. 이 비문은 기원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되기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문을 보면 기원 1세기에 예루살렘에 그리스어를 하는 유대인들이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행 6:1) 일부 학자들은 이 비문에 언급된 회당이 성경에 언급된 “해방민의 회당”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 6:9) 또한 이 비문에서는 테오도투스와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아르키시나고고스(“회당 책임자”)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고 언급한다. 그 단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여러 번 나온다. (막 5:35; 눅 8:49; 행 13:15; 18:8, 17) 이 비문에서는 테오도투스가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묵을 숙소를 만들었다는 점도 알려 준다. 그 숙소는 예루살렘을 방문한 유대인들 특히 연례 축제를 지키러 온 사람들을 위한 숙소였을 것이다.—행 2:5.

기원 33년 오순절, ‘예루살렘에는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나라에서 온 유대인들이 머물고 있었다.’ (행 2:5) 성령이 부어지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방문한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여러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행 2:4, 8) 사람들은 자기들의 언어로 좋은 소식을 듣게 되자 몹시 놀랐다. 행 2:9-11에 따르면 그 사람들은 15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신자가 되었다. (행 2:41, 44, 47) 분명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들이 알게 된 좋은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들이 온 지역이 행 2:9-11에 언급된 순서대로 지도에 번호순으로 표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