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1-36
연구 노트
자손: 또는 “후손”. 직역하면 “씨”.—부록 가2 참조.
여호와: 바울은 여기서 왕상 19:10, 14을 인용한다. 그 구절들은 예언자 엘리야가 여호와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내용이다. 그 구절들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네 개의 히브리어 자음으로 표기된 하느님의 이름(יהוה, 로마자로 음역하면 YHWH)이 나온다. 바울은 그 구절들의 내용을 줄이고 일부 문장의 순서를 바꾸어 인용한다. 또한 그는 그 내용이 하느님께 직접 말씀드리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도록 인용문의 처음에 “여호와여”라는 말을 덧붙인다. 현존하는 그리스어 사본들에는 이 부분에 키리오스(주)의 한 형태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신세계역」에서는 “여호와”를 사용했는데, 바울이 인용한 구절의 문맥과 다른 구절들에서 엘리야가 계속해서 하느님을 그분의 고유한 이름 여호와로 부르기 때문이다. (왕상 17:20, 21; 18:36, 37; 19:4) 이러한 히브리어 성경과의 연관성은 여기서 키리오스가 하느님의 이름을 대치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또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히브리어로 옮긴 여러 번역판은 이 구절에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한다.
제 목숨: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 프시케는 사람의 생명을 가리킨다. 일부 성경 번역판에서는 이 단어를 “영혼”으로 번역한다. 제 목숨마저 빼앗으려(직역하면 “제 영혼을 찾으려”)라는 표현은 “저를 죽이려”로 번역할 수 있다. 이 그리스어 표현은 바울이 인용한 왕상 19:10, 14을 비롯한 히브리어 성경의 구절들에 나오는 표현과 유사하다.—출 4:19, 각주; 삼상 20:1, 각주. 용어 설명 “영혼” 참조.
하느님의 지시를 받았는데: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 크레마티조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9번 나온다. (마 2:12, 22; 눅 2:26; 행 10:22; 11:26; 롬 7:3; 히 8:5; 11:7; 12:25) 대부분의 경우 이 단어는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한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이 동사는 이 구절에서 “거룩한 천사에게서”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었다. 마 2:12, 22에서는 하느님께서 꾸게 하신 꿈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롬 11:4에는 이 단어의 명사형인 크레마티스모스가 나오는데, 대부분의 사전과 번역판에서는 “하느님의 선언; 하느님의 대답; 하느님의 응답” 같은 표현으로 번역한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히브리어로 옮긴 한 번역판(부록 다4에 J18로 표기됨)은 이 구절(행 10:22)의 이 부분을 “여호와의 명령을 받았는데”로 번역한다.—행 11:26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 불리게 되었다: 대부분의 성경 번역판에서는 이 부분이 단지 “불리게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 구절에는 일반적으로 “불리다”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단어들과는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다. (마 2:23; 막 11:17; 눅 1:32; 행 1:19) 이 구절에 나오는 단어는 크레마티조이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9번 나오는데, 대부분의 경우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한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마 2:12, 22; 눅 2:26; 행 10:22; 11:26; 롬 7:3; 히 8:5; 11:7; 12:25) 예를 들어 행 10:22에서는 이 단어가 “거룩한 천사에게서”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었다. 마 2:12, 22에서는 하느님께서 꾸게 하신 꿈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롬 11:4에는 이 단어의 명사형인 크레마티스모스가 나오는데, 대부분의 사전과 번역판에서는 “하느님의 선언; 하느님의 대답; 하느님의 응답” 같은 표현으로 번역한다. 여호와께서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도록 사울과 바나바를 통해 인도하셨을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안티오크의 이방인들이 비웃거나 조롱하는 말로 예수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스어 크레마티조의 용법을 볼 때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일에 하느님께서 관여하셨음이 분명하다. 또한 유대인들이 예수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인”(그리스어에서 나온 표현)이나 “메시아 신봉자”(히브리어에서 나온 표현)로 불렀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 예수를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이 그분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면 예수가 기름부음받은 자 즉 그리스도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셈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또는 “하느님의 선언은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크레마티스모스(“하느님의 선언”)에는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말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구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왕상 19:18에서 예언자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을 가리킨다. 대부분의 사전과 번역판에서는 이 단어를 “하느님의 선언; 하느님의 대답; 하느님의 응답” 같은 표현으로 번역한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동사 크레마티조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여러 번 나온다. 예를 들어, 행 11:26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알려 준다.—행 10:22; 11:26 연구 노트 참조.
바알: 가나안의 신. 하늘의 주인이자 비와 다산의 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바알은 이 구절에만 언급된다. 바울은 여기서 왕상 19:18을 인용한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이 신을 가리킬 때 히브리어 합바알(정관사와 바알이 합쳐진 형태. 직역하면 “바알”)을 사용한다. (삿 2:13; 왕상 16:31; 18:25) 또한 이 단어의 복수형(바알들)도 사용되는데, 특정 지역을 소유하거나 그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다양한 지역 신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삿 2:11; 8:33; 10:6) 히브리어 바알(정관사가 없는 형태)은 “주인”을 의미한다.—출 21:28; 22:8.
하느님: 이 구절에서 인용한 신 18:15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네 개의 히브리어 자음으로 표기된 하느님의 이름(יהוה, 로마자로 음역하면 YHWH)이 나오며 “당신의 하느님 여호와”로 되어 있다. 스데반은 그 내용을 인용하면서 “당신의 하느님 여호와”라고 하지 않고 “하느님”이라고만 했다. 베드로는 행 3:22에서 동일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여러분의 하느님 여호와”라는 온전한 표현을 사용했다. (행 3:22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히브리어로 옮긴 일부 번역판은 이 구절에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당신의 하느님 여호와”(J7, 8, 10-17)나 “여호와 하느님”(J28)으로 번역한다. (부록 다4 참조) 몇몇 그리스어 사본들도 이 구절에서 “주 하느님”에 해당하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부록 다에 설명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이유로 “여호와 하느님”에 해당하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그리스어 사본들과 그리스어를 다른 언어로 옮긴 고대 번역본들에는 “하느님”이라고만 되어 있다.
하느님: 이 구절에서 바울은 신 29:4과 사 29:10의 표현을 인용한다. 이 구절들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하느님”이 나오지 않지만 바울은 「칠십인역」의 표현을 인용한 것일 수 있다. 「칠십인역」의 대부분의 사본에는 신 29:4(29:3, LXX)이 “주 하느님께서는 ··· 주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부록 다1의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바울 시대에 존재했던 「칠십인역」의 사본들에는 이 부분이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 주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되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신 29:4이 들어 있는 한 단편(파피루스 푸아드 목록 266)에는 그리스어 본문 안에 테트라그람마톤이 나오고 그 뒤에 “하느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가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따라서 바울은 현존하는 그리스어 사본들의 롬 11:8의 내용과 일치하게, 「칠십인역」의 표현을 조금 줄여 인용하면서 “여호와 하느님” 대신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일 수 있다. (히브리어 성경의 내용을 그와 비슷하게 줄여서 인용한 행 7:37 비교. 연구 노트 참조) 신 29:4과 사 29:10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나오며, 롬 11:8을 히브리어로 옮긴 일부 번역판(부록 다4에 J7, 8, 10, 14, 15, 20으로 표기됨)에서도 그 구절에 테트라그람마톤을 사용한다.
식탁: 희생 제물을 놓는 식탁이나 잔치를 가리키는 표현일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시 69:22을 인용한 것인데, 이 구절에서 “식탁”은 “번영”과 대구를 이루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며 축복을 의미하는 것 같다. 바울은 시편의 이 내용을 유대인들에게 적용하는데, 그들 대다수는 예수를 배척하고 걸려 넘어질 것이었다. 그들이 걸려 넘어지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육적 혈통이므로 당연히 하느님으로부터 계속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마 3:9; 요 8:39) 그들은 이러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결국 “보응”을 받게 될 것이었다.
세상: 이 문맥에서 그리스어 코스모스는 하느님의 종들을 제외한 인류 세상, 즉 하느님과 멀어진 불의한 인간 사회를 가리킨다. 복음서 필자 가운데 제자들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한 사람은 요한뿐이다. 예수께서 충실한 사도들과 함께 하신 마지막 기도에 동일한 내용이 두 번 더 나온다.—요 17:14, 16.
세상: 이 문맥에서 바울은 그리스어 코스모스를 이방 사람들 즉 비유대인들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여기서 “세상”은 하느님께서 계약을 맺으신 이스라엘 사람들과 구분된다. 또한 그리스도인 성경 필자들은 코스모스를 그리스도의 참제자들을 제외한 인류 세상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했다. “세상”으로 번역된 그리스어가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예는 성경에만 나온다.—요 15:19 연구 노트 참조.
맛디아: 이 그리스어 이름은 맛다디아의 축약형인 것 같다. 맛다디아는 “여호와의 선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이름 “맛디디야”에서 유래했다. (대상 15:18) 베드로의 말에 따르면, (행 1:21, 22) 맛디아는 예수께서 3년 반 동안 봉사하시던 내내 그분의 제자였으며 사도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는 예수께서 전파하도록 보내신 70명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눅 10:1) 맛디아는 사도로 선택된 후에 “열한 사도와 함께 계수되었다.” (행 1:26) 그 이후로 사도행전에 언급되는 “사도들” 또는 “열두 사도”라는 표현에는 맛디아도 포함된다.—행 2:37, 43; 4:33, 36; 5:12, 29; 6:2, 6; 8:1, 14.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진 사도: 비유대인들에게 보내진 사도라는 의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때는 아마도 기원 34년경이었던 것 같은데, 부활되신 예수께서는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에게 그리고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그릇이다.” (행 9:15) 이처럼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진 사도[“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선택되었다. (행 26:14-18; 롬 1:5; 갈 1:15, 16; 딤전 2:7)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선택되었다고 강하게 확신했으며 그에 대한 증거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가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을 대치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은 없으며, 그는 한 번도 자신을 “열두 제자” 가운데 포함시키지 않았다.—고전 15:5-8. 행 1:23 연구 노트 참조.
나의 봉사의 직무: 예수께서는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의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라는 사명을 주셨다. (마 28:19, 20) 바울은 그 일을 “화해의 직무”라고 불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하느님과 멀어진 세상에게 “하느님과 화해하라”고 “부탁한다.” (고후 5:18-20) 바울은 이방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했지만, 한편으로는 유대인들 중 얼마의 사람들이라도 마음이 움직여 구원을 위해 필요한 단계들을 밟기를 간절히 바랐다. (롬 11:14) 그리스어 디아코니아는 기본적으로 “봉사”를 의미하며,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동사는 성경에서 때때로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것과 같은 개인적인 성격의 봉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눅 4:39; 17:8; 요 2:5) 이 구절에서는 디아코니아가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를 가리킨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영적인 필요를 위해 섬기는 더 숭고한 봉사이다.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또는 “드높입니다”.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독사조(영광스럽게 하다; 영광을 돌리다)이다. 이 단어는 독사(영광; 영예)와 어근이 같은 단어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된다. (마 5:16; 9:8; 막 2:12; 눅 2:20; 5:25, 26; 행 4:21; 11:18; 롬 15:6, 9) 이 문맥에서 독사조는 “자랑스럽게 여기다; 중요하게 여기다; 최선을 다해 수행하다”를 의미할 수 있다. 바울의 말을 보면 그가 “봉사의 직무”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으며 최고의 영예로운 일로 여겼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내 동족: 직역하면 “내 살”. 바울이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켜 한 말이다.—창 37:27 비교.
뿌리 ··· 가지: 여기서 바울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과 관련된 그분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올리브나무에 비한다. 여호와께서는 그 나무의 뿌리로서, 영적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주신다. (사 10:20) 예수께서는 그 나무의 줄기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의 주된 부분이시다. (갈 3:16) 가지들 전체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이차적인 부분을 구성하는 “온전한 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롬 11:25; 갈 3:29.
뿌리 ··· 가지: 여기서 바울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과 관련된 그분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올리브나무에 비한다. 여호와께서는 그 나무의 뿌리로서, 영적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주신다. (사 10:20) 예수께서는 그 나무의 줄기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의 주된 부분이시다. (갈 3:16) 가지들 전체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이차적인 부분을 구성하는 “온전한 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롬 11:25; 갈 3:29.
본성과는 반대로, 재배하는 올리브나무에 접붙여졌다면: 일반적으로 농부들은 재배하는 올리브나무의 가지를 야생 올리브나무에 접붙였다. 그러면 야생 올리브나무는 재배되는 그 올리브나무처럼 좋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와는 반대로 야생 올리브나무의 가지를 재배되는 올리브나무에 접붙이는 것은 일반적인 접붙이기 방법이 아니었으며, 대개 좋은 열매를 맺을 것으로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1세기에 일부 농부들은 야생 올리브나무의 가지를 재배되는 올리브나무에 접붙이기도 했다. (미디어 갤러리 “올리브나무 가지 접붙이기” 참조) 바울은 그처럼 본성과는 반대되는 방법 즉 일반적이지 않고 심지어 부자연스럽기까지 한 방법을 비유로 사용함으로 요점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는 재배되는 올리브나무를 사용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과 관련된 그분의 목적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설명한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일부가 되는 사람들을 이 상징적인 올리브나무의 가지들에 비한다. (롬 11:21) 또한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야생 올리브나무의 가지들에 비한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이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의 상속자인 하느님의 백성 즉 이스라엘로부터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엡 2:12) 하지만 본래의 가지들 즉 유대인들 중 일부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배척하셨으며 그들은 “잘려 나갔다.” (롬 11:20) 여호와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 가지들 대신에 이방인들이 접붙여지게 하셨다. (갈 3:28, 29) 야생 올리브나무의 가지가 재배되는 올리브나무에 접붙여져 잘 자라듯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재배되는 올리브나무 뿌리의 “풍부한 양분[직역하면 “기름진 것”]”을 공급받아 큰 유익을 얻게 된다. 이러한 마련은 하느님께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푸신 과분한 친절을 강조할 뿐 아니라 그들이 우쭐댈 근거가 전혀 없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롬 11:17. 마 3:10; 요 15:1-10 비교.
가지들 중 얼마가 잘려 나가고: 예수를 배척한 육적 유대인들이 배척을 당한다는 의미이다.
야생 올리브인 당신이 ··· 접붙여져서: 바울은 계속해서 비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롬 11:13) 그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과 관련된 그분의 목적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 보여 주기 위해, 재배되는 올리브나무의 비유를 이어 나간다. (롬 11:16 연구 노트 참조) 처음에는 그 계약에 참여할 기회가 유대인들에게만 있었다. 비유대인들 즉 이방인들은 다른 나무 즉 야생 올리브나무의 가지들과 같았다. 여호와께서는 비유적으로 말해 그들을 재배되는 올리브나무에 접붙이셨다. 이방인들이 영적 유대인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로마 회중의 충실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유대인들도 있고 이방인들도 있었으며, 그들 모두가 영적 열매를 맺어야 했다.—롬 2:28, 29.
접붙여져서: 접붙인다는 것은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의 가지를 가져다가 좋지 않은 열매를 맺는 나무에 붙이는 것을 가리킨다. 가지가 잘 붙고 나면 원래의 나무에서 맺는 것과 비슷한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 바울은 좋지 않은 나무의 가지를 재배되는 나무에 접붙이는 것을 “본성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언급한다. 1세기에 농부들은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던 것 같다. (롬 11:24 연구 노트 참조) “접붙이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로마서 11장에만 나온다.
본성과는 반대로, 재배하는 올리브나무에 접붙여졌다면: 일반적으로 농부들은 재배하는 올리브나무의 가지를 야생 올리브나무에 접붙였다. 그러면 야생 올리브나무는 재배되는 그 올리브나무처럼 좋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와는 반대로 야생 올리브나무의 가지를 재배되는 올리브나무에 접붙이는 것은 일반적인 접붙이기 방법이 아니었으며, 대개 좋은 열매를 맺을 것으로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1세기에 일부 농부들은 야생 올리브나무의 가지를 재배되는 올리브나무에 접붙이기도 했다. (미디어 갤러리 “올리브나무 가지 접붙이기” 참조) 바울은 그처럼 본성과는 반대되는 방법 즉 일반적이지 않고 심지어 부자연스럽기까지 한 방법을 비유로 사용함으로 요점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는 재배되는 올리브나무를 사용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과 관련된 그분의 목적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설명한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일부가 되는 사람들을 이 상징적인 올리브나무의 가지들에 비한다. (롬 11:21) 또한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야생 올리브나무의 가지들에 비한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이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의 상속자인 하느님의 백성 즉 이스라엘로부터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엡 2:12) 하지만 본래의 가지들 즉 유대인들 중 일부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배척하셨으며 그들은 “잘려 나갔다.” (롬 11:20) 여호와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 가지들 대신에 이방인들이 접붙여지게 하셨다. (갈 3:28, 29) 야생 올리브나무의 가지가 재배되는 올리브나무에 접붙여져 잘 자라듯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재배되는 올리브나무 뿌리의 “풍부한 양분[직역하면 “기름진 것”]”을 공급받아 큰 유익을 얻게 된다. 이러한 마련은 하느님께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푸신 과분한 친절을 강조할 뿐 아니라 그들이 우쭐댈 근거가 전혀 없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롬 11:17. 마 3:10; 요 15:1-10 비교.
재배하는 올리브나무: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칼리엘라이오스는 “올리브나무”에 해당하는 단어와 칼로스에서 나온 접두사가 결합된 말이다. 칼로스는 “좋은; 훌륭한”을 의미하며, 열매를 많이 맺도록 재배되는 올리브나무처럼 목적에 잘 부합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재배되는 올리브나무를 재배되지 않는 야생인 올리브나무(아그리엘라이오스, 직역하면 “들 올리브나무”)와 대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 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 즉 “하느님의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킨다. (갈 6:16; 롬 2:29) 하느님의 목적은 영적 이스라엘을 이루는 14만 4000명이 구원을 받아 하늘에서 그분의 아들과 함께 통치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그리하여” 즉 비유적으로 말해 “야생 올리브” 나무의 가지들을 접붙이는 일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 가지들을 접붙임으로 “재배하는 올리브나무”를 열매 맺는 가지들로 가득하게 하려는 하느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것이다. (롬 11:17-25; 계 7:4; 14:1, 3) 그러려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이스라엘의 일부로 받아들여져야 했다. 일부 사람들은 이 구절의 처음에 나오는 그리스어 표현을 “그다음에는”이나 “결국에는”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사전과 성경 번역판들은 그 표현을 “그리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구출자: 또는 “구원자”. 바울은 여기서 사 59:20의 「칠십인역」 표현을 인용하면서, 그 예언을 “하느님의 이스라엘”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한다. (갈 6:16) 그는 영적 이스라엘의 온전한 수가 찰 때 그 예언이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점을 설명한 것이다.
여호와: 이 구절에서 인용한 사 40:13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네 개의 히브리어 자음으로 표기된 하느님의 이름(יהוה, 로마자로 음역하면 YHWH)이 나온다. “생각을 알게 되다”와 “조언자가 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표현은 사 40:13의 「칠십인역」 표현에서 가져온 것이다.
아멘: 또는 “그렇게 되소서”. 그리스어 아멘은 히브리어 아멘을 음역한 단어이다. 히브리어 아멘은 “충실하다, 신뢰할 만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어근 아만에서 나온 것이다. (용어 설명 참조) 사람들은 맹세나 기도 또는 다른 사람의 말에 동의할 때 “아멘”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필자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표현을 하면서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아멘”을 자주 사용했다. 바울도 여기서 “아멘”을 그렇게 사용한 것이다. (롬 16:27; 엡 3:21; 벧전 4:11) 또는 상대방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아멘”을 사용하기도 했다. (롬 15:33; 히 13:20, 21) “아멘”은 앞서 나온 표현에 필자가 진심으로 동의한다는 것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계 1:7; 22:20.
아멘: 롬 1:25 연구 노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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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대에는 나무의 가지를 접붙이는 일이 흔히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좋지 않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그 나무의 줄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것으로 알려진 나무의 눈이나 작은 가지를 결합시켰다. 사도 바울은 올리브나무의 비유에서 접붙이기에 대해 언급했다. (롬 11:17-24) 그는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재배하는 올리브나무”에 접붙여진 야생 올리브나무의 가지들에 비했다. (롬 11:24) 기원 1세기에 살았던 로마 군인이자 농부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모데라투스 콜루멜라는 농업에 관한 다양한 주제로 책을 저술했는데, 접붙이기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잘 자라긴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올리브나무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할 것을 권했다. “올리브나무에 송곳으로 구멍을 내고 야생 올리브나무에서 잘라 낸 푸른 가지를 그 구멍 속에 단단히 고정시키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그 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을 아이를 수태한 것처럼 되어 생산성이 높아진다.” 바울이 사용한 비유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생생하게 일깨워 주었다. (롬 2:28, 29; 11:17, 18) 1세기에 사용되었을 수 있는 몇 가지 접붙이기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줄기 옆에 구멍을 내어 다른 나무의 가지를 끼워 넣는다
2. 줄기 끝을 잘라 틈을 내어 여러 개의 가지를 끼워 넣은 다음 고정시킨다
3. 줄기의 껍질 일부를 잘라 낸 다음, 다른 나무에서 껍질째 잘라 낸 가지를 그 부분에 붙여 고정시킨다

삽화에 나오는 농부는 재배되는 올리브나무에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를 접붙이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을 재배되는 올리브나무 가지에 비하고, 이방인을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에 비한다. 육적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믿음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그들 대신 접붙여져 영적 이스라엘의 구성원이 되었다. (롬 11:13, 17) 바울은 로마 회중 성원들에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고 하느님께서 베푸신 친절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롬 10:4; 11:22) 그는 ‘하느님께서 편파적이지 않으시며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신다’는 로마서의 주제의 일부를 강조하기 위해 올리브나무의 비유를 사용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배경에 상관없이 모두 연합을 유지해야 한다.—롬 1:16, 17; 2:11; 10:12.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살던 지역에서는 올리브나무(Olea europaea)가 널리 재배되었다. 올리브나무는 척박한 땅이나 바위가 많은 땅에서도 잘 자란다. (신 8:8) 이 나무는 뿌리를 깊고 넓게 뻗어서 기후가 건조할 때에도 물을 흡수할 수 있다. 올리브나무는 성장 속도가 느리고 1000년 이상 살 수 있다. 올리브 열매는 익으면서 녹색에서 자주색이나 검은색으로 변하며, 다 익은 열매는 가지를 쳐서 떨어뜨려 수확한다. 성경 시대에는 올리브나무가 매우 가치 있게 여겨졌다. 주로 올리브나무에서 식용 기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올리브기름은 피부 미용이나 의료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등잔의 연료로 쓰이기도 했다.—레 24:2; 눅 1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