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8:1-31

28  우리는 육지에 무사히 오른 뒤에야 그곳이 몰타 섬이라는+ 것을 알았다.  원주민들은 우리에게 각별한 친절을 베풀었다. 비가 내리고 날씨가 추워서+ 그들은 불을 피우고 우리 모두를 친절히 맞아 주었다.  바울이 나뭇가지를 한 다발 모아다가 불 위에 놓자, 독사가 열기 때문에 나와서 그의 손에 달라붙었다.  원주민들은 독사가 바울의 손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말했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살인자다. 바다에서는 무사히 나왔지만, 공의가 그를 살려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독사를 불 속에 떨어 버렸고 아무 해도 입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몸이 부어오르거나 갑자기 쓰러져 죽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꾸어 그를 신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근처에 섬의 우두머리인 보블리오라는 사람의 땅이 있었다. 그는 우리를 맞아들여 3일 동안 후히 대접해 주었다.  마침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에 걸려 앓아누워 있었는데, 바울이 그에게 가서 기도하고 손을 얹어 낫게 해 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그 섬의 다른 병자들도 그에게 와서 고침을 받기 시작했다.+ 10  그들은 많은 선물로 우리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우리가 배를 타고 떠날 때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실어 주었다. 11  세 달 뒤에 우리는 ‘제우스의 아들들’ 뱃머리 장식이 달린 배를 타고 떠났다. 그 배는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의 배였다. 12  우리는 시라쿠사 항구에 들어가 3일을 머물렀다가 13  해안을 따라가서 레기움에 도착했다. 하루 뒤에 남풍이 불어 우리는 이틀째 되는 날에 푸테올리에 이르렀다. 14  우리는 거기서 형제들을 만났는데, 그들의 청을 받고 7일 동안 함께 머물렀다. 그런 뒤에 우리는 로마를 향해 갔다. 15  그곳의 형제들은 우리에 대한 소식을 듣고 ‘아피오 장터’와 ‘세 여관’까지 우리를 맞으러 왔다. 바울은 그들을 보자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용기를 얻었다.+ 16  마침내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에,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군인 한 사람과 함께 따로 지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17  3일 후에 그는 유대인의 유력 인사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모이자 그가 말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백성이나 우리 조상들의 관습을 거스르는 일은 아무것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되어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18  그들은 나를 심문하고 나서,+ 사형을 내릴 만한 근거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나를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19  하지만 유대인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나는 카이사르에게 상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 동족을 고발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20  나는 이런 이유로 여러분을 보고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21  그들이 바울에게 말했다. “우리는 유대로부터 당신에 관한 편지를 받은 일도 없고, 또 거기서 온 형제들 중에 누가 당신에 관해 나쁘게 보고하거나 말한 일도 없습니다. 22  그러나 우리는 이 분파가+ 어디서나 반대하는 말을 듣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당신의 생각을 직접 들어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23  그리고 그들은 바울과 만날 날을 정했다. 그날에 더 많은 사람이 그의 숙소로 왔다.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문제를 설명하면서, 하느님의 왕국에 관해 철저히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를+ 들어 예수에+ 관해 그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24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말한 것을 믿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25  그들이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떠날 때에, 바울이 이렇게 한마디 덧붙였다. “성령이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한 이러한 말이 적절합니다. 26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여라.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보기는 보아도 결코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27  이 백성은 마음이 무디어졌고,* 귀로 들어도 반응이 없으며,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이해하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28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느님의 이 구원이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그것을 잘 들을 것입니다.”+ 29  —— 30  그곳에서 바울은 만 2년 동안 자기의 셋집에 머물면서,+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친절하게 맞이했다. 31  그는 방해받는 일 없이 아주 담대하게+ 하느님의 왕국을 전파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쳤다.

각주

직역하면 “두꺼워졌고(살쪘고)”.

연구 노트

아드리아 바다: 바울 시대에 아드리아 바다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곳은 오늘날의 아드리아해보다 범위가 넓었다.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보는 이 이름이 아트리아라는 도시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트리아는 오늘날 베니스만이라고 알려진 곳에, 포강 하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리학」[Geography], 5, I, 8) 오늘날 이탈리아의 도시 아드리아는 해안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아드리아라는 이름은 고대 도시 아트리아 주변에 있는 수역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다가 범위가 점차 넓어져 오늘날의 아드리아해, 이오니아해, 시칠리아(그리고 몰타)와 크레타 사이의 지중해 수역까지 모두 포함한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 같다.—부록 나13 참조.

몰타: 그리스어 본문에는 멜리테로 되어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멜리테가 오늘날의 몰타섬에 해당한다고 생각해 왔다. 바울이 탄 배는 강풍 때문에 소아시아 남서쪽 끝에 있는 크니도스에서 남쪽으로 밀려가 크레타 아래까지 내려갔다. (행 27:7, 12, 13, 21) 행 27:27에서는 배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고 있었다”고 알려 준다. 바울이 살던 당시에 “아드리아 바다”가 가리키는 곳은 오늘날의 아드리아해보다 범위가 넓었다. 당시에 “아드리아 바다”는 이오니아해, 시칠리아와 크레타 사이의 수역을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오늘날의 몰타섬 인근의 바다 역시 “아드리아 바다”에 해당했다. (행 27:27 연구 노트 참조) 유라굴로라는 바람이 부는 방향을 생각해 볼 때 (행 27:14) 배는 서쪽으로 밀려가 시칠리아 남쪽의 몰타섬에서 파선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멜리테가 몰타섬이 아닌 다른 섬이라는 견해를 제시해 왔다. 한 가지 견해는 멜리테가 그리스 서해안의 코르푸 인근에 있는 한 섬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학자들은 멜리테라는 그리스어 이름에 근거하여 이 섬이 오늘날 믈레트로 알려진 멜리테 일리리카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믈레트는 오늘날의 아드리아해에서 크로아티아 연안에 있다. 하지만 바울이 탄 배가 이동한 경로에 대한 성경 기록을 볼 때, 배가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코르푸나 믈레트까지 올라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부록 나13 참조.

외국인: 또는 “비그리스인”. 일부 오래된 성경 번역판은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바르바로스를 “미개인; 야만인”을 뜻하는 단어로 번역한다. 이 그리스어에 들어 있는 “바르 바르”라는 표현은 말을 더듬거나 옹알거리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원래 그리스어 바르바로스는 그리스인들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던 말이었다. 이 단어에는 미개하거나 교양이 없거나 예의가 없다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았으며, 경멸하는 느낌도 담겨 있지 않았다. 바르바로스는 단지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요세푸스와 같은 일부 유대인 저술가들은 자신이 바르바로스로 불린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일 때까지 자신들을 바르바로스라고 불렀다. 따라서 바울이 모든 사람을 포괄하여 ‘그리스인과 외국인 모두에게’라고 말했을 때 그가 사용한 그리스어 바르바로스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 않았다.

원주민들: 또는 “외국어를 하는 사람들”. 일부 오래된 성경 번역판은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바르바로스를 “미개인; 야만인”을 뜻하는 단어로 번역한다. 이 그리스어에 들어 있는 “바르 바르”라는 표현은 말을 더듬거나 옹알거리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원래 그리스어 바르바로스는 그리스인들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던 말이었다. 이 단어에는 미개하거나 교양이 없거나 예의가 없다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았으며, 경멸하는 느낌도 담겨 있지 않았다. 바르바로스는 단지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요세푸스와 같은 일부 유대인 저술가들은 자신이 바르바로스로 불린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 XIV, 187 [x, 1]; 「아피온 반박문」[Against Apion], I, 58 [11])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일 때까지 자신들을 바르바로스라고 불렀다. 따라서 여기서 바르바로스는 그리스어와는 전혀 다른 고유한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몰타섬의 주민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사용한 언어는 아마도 푸닉어였을 것이다.—롬 1:14 연구 노트 참조.

친절: 또는 “인간적 친절”. 그리스어 필란트로피아는 문자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사랑)”을 의미한다. 그러한 친절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 그리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고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후대를 베푸는 것이 포함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 경건한 특성을 나타낼 수 있다. 행 27:3에도 비슷한 예가 나온다. 그 구절에서는 장교 율리오가 바울에게 친절을 베푼 일을 언급할 때 필란트로피아와 어근이 같은 단어인 필란트로포스를 사용했다. 딛 3:4에서는 여호와께서 가지신 감정을 묘사하는 데 그리스어 필란트로피아가 사용되었으며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번역되었다.

독사: 오늘날 몰타섬에서는 독사를 볼 수 없다. 하지만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1세기에 몰타섬에 살았던 주민들은 독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환경이 변하거나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몰타섬에서 독사가 사라졌을 수 있다.

공의: “공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디케이다. 이 단어는 복수를 통해 공의를 시행하는 여신을 가리킬 수도 있고 공의 또는 정의라는 개념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디케는 정의의 여신의 이름이다. 이 여신은 인간사를 관장하면서, 드러나지 않은 불공정한 일이 있으면 제우스에게 보고하여 그 죄에 대한 벌이 내려지게 했다고 한다. 몰타섬의 주민들은 바울이 파선될 때는 살아남았지만 이제 정의의 여신이 그에게 공의를 시행하여 독사를 통해 벌을 내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제우스의 아들들’: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의 아들들’(그리스어 디오스쿠로이)은 카스토르와 폴룩스(폴리데우케스)로서, 제우스(주피터) 신과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 아들들이었다. 이들은 특히 바다에서 위험에 처한 선원들을 구할 능력을 가진, 뱃사람들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이 구절에서 뱃머리 장식에 대해 이처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 내용이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에 의해 쓰여졌다는 한 가지 증거이다.

시라쿠사: 훌륭한 항구가 있는 이 도시는 시칠리아섬 남동쪽 해안에 있으며 오늘날에도 시라쿠사로 불린다.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이 도시는 기원전 734년에 고린도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 이 도시는 고대에 유명했던 몇몇 사람들의 출생지였다. 예를 들어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시라쿠사는 기원전 212년에 로마인들에게 정복되었다.—부록 나13 참조.

푸테올리: 로마의 남동부에 있던 주요 항구. 이 도시는 나폴리에서 서남서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으며 오늘날에는 포추올리라고 불린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넓게 펼쳐진 고대 방파제의 유적을 볼 수 있다. 요세푸스는 푸테올리를 그곳의 옛 이름인 디카이아르키아로 부르면서 그곳에 유대인이 모여 사는 곳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 XVII, 328 xii, 1) 카이사르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던 바울은 기원 59년경에 레기움(오늘날의 레조디칼라브리아)에서 출발하여 푸테올리에 도착했다. 레기움은 시칠리아 건너편 이탈리아 남쪽 끝에 있는 항구 도시로서 푸테올리에서 남남동쪽으로 약 32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푸테올리에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은 바울과 그 일행에게 일주일 동안 함께 머물러 달라고 부탁했다. (행 28:14) 이 점을 볼 때 바울은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어느 정도 자유를 누렸던 것 같다.—부록 나13 참조.

그런 뒤에 우리는 로마를 향해 갔다: 푸테올리에서 출발하여 245킬로미터 떨어진 로마까지 가는 데는 최대 1주일이 걸렸을 것이다. 바울과 그 일행은 푸테올리에서 카푸아로 간 다음, 거기서 아피아 가도(라틴어 비아아피아)를 통해 로마까지 212킬로미터를 여행했을 것이다. 비아아피아라는 이름은 기원전 312년에 이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한 로마의 정치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아피아 가도는 동쪽으로 향하는 관문이자 항구 도시인 브룬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과 로마를 연결해 주었다. 이 도로는 대부분 큰 화산암 덩어리들로 포장되어 있었다. 도로 폭은 일정하지 않았는데, 3미터가 안 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6미터가 넘는 곳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 도로는 마주 오는 두 대의 차량이 동시에 통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도로의 몇몇 지점에서는 지중해가 보였다. 이 도로의 일부 구간은 폰티노 습지를 가로질러 갔는데, 한 로마 저술가는 그 습지의 모기와 악취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다. 그 구간을 따라 운하가 나 있어서, 도로가 물에 잠기면 배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그 습지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아피오 장터’와 ‘세 여관’이라는 휴게소가 있었는데, ‘아피오 장터’는 로마에서 65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었고 ‘세 여관’은 5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었다.

‘아피오 장터’: 또는 “아피오 광장”. 라틴어 아피이 포룸.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약 6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장터였다. 이곳은 로마의 유명한 간선 도로인 아피아 가도에 있던 널리 알려진 역참이었다. 아피아 가도는 로마에서 카푸아를 거쳐 브룬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까지 뻗어 있었다. 아피아 가도와 아피오 장터라는 이름은 건설자인 기원전 4세기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이 역참은 로마에서 출발한 여행자들이 일반적으로 첫날 여행을 마칠 때 쉬어 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교역 중심지이자 장터 역할을 했다. 이곳이 중요한 곳으로 여겨졌던 또 다른 이유는, 폰티노 습지를 가로지르는 도로 구간을 따라 나 있는 운하를 이곳에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자들은 노새가 끄는 배를 타고 밤에 이 운하를 통해 이동했다고 한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그 여행이 얼마나 불편한지 설명하면서 개구리와 벌레가 많은 것에 대해 불평했다. 또한 아피오 장터가 “뱃사공들과 인색한 여관 주인들이 가득한” 곳이라고 묘사했다. (「풍자시」[Satires], I, V, 1-6) 하지만 로마에서 온 형제들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로마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동행하기 위해 그러한 불편을 감수하면서 기꺼이 그들을 기다렸다. 오늘날 아피아 가도에는 포로 아피오 즉 아피오 광장이 있던 곳에 보르고파이티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부록 나13 참조.

‘세 여관’: 또는 “트레스 타베르네”. 라틴어 트레스 타베르나스. 아피아 가도에 있던 이곳은 다른 고대 문헌에도 언급된다. 이곳은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으며 ‘아피오 장터’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오늘날 이곳에는 로마 시대의 유적이 일부 남아 있다.—부록 나13 참조.

카이사르: 또는 “황제”.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였다. 그의 통치는 기원 54년에 시작되어, 그가 31세의 나이로 자살한 때인 기원 68년에 끝났다. 행 25장에서 28장에 언급된 카이사르는 모두 네로를 가리킨다.—마 22:17; 행 17:7 연구 노트용어 설명 참조.

카이사르: 행 26:32 연구 노트 참조.

나사렛파: “분파” 또는 “파”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하이레시스(이 단어에서 “이단”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헤러시[heresy]가 유래함)는 원래 “선택”이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칠십인역」레 22:18에서도 이 단어가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모든 선택에 따라” 바치는 제물 즉 자원 제물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단어는 특정한 사상이나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의 집단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유대교의 대표적인 양대 파벌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행 5:17; 15:5; 26:5)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분파” 또는 “나사렛파”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유대교에서 떨어져 나온 집단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행 24:5, 14; 28:22) 그리스어 하이레시스는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 생겨난 분파들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되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으며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셨다. (요 17:21) 또한 사도들은 그리스도인 회중의 일치 연합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전 1:10; 유 17-19) 회중 성원들 사이에 분파나 파벌이 생기면 연합이 깨지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그리스어 하이레시스는 그러한 분열을 일으키는 집단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신앙의 불일치가 생기면 격렬한 논쟁과 분쟁이 벌어지고 심지어 서로 적대시하게 될 수 있었다. (행 23:7-10 비교) 따라서 분파는 반드시 피해야 하는 “육체의 일” 가운데 포함되었다.—갈 5:19-21; 고전 11:19; 벧후 2:1. 또한 나사렛이라는 표현에 대해 알아보려면 막 10:47 연구 노트 참조.

이 분파: 행 24:5 연구 노트 참조.

증인으로: 또는 “증언하러”. 요한복음에는 “증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명사(마르티리아)가 다른 세 복음서에 나오는 횟수를 합한 것보다 두 배 이상 나온다. 증언하여로 번역된 이 단어의 동사형(마르티레오)은 요한복음에 39번 나온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 전체에 이 동사가 2번밖에 나오지 않는 것과 대조가 된다. (마 23:31; 눅 4:22) 이 그리스어 동사가 침례자 요한과 관련하여 매우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그를 “증인 요한”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요 1:8, 15, 32, 34; 3:26; 5:33. 요 1:19 연구 노트 참조) 요한복음에서 이 동사는 예수께서 수행하신 봉사와 관련해서도 많이 사용된다. 그분이 ‘증언하셨다’(또는 ‘증거하셨다’)는 표현을 자주 찾아 볼 수 있다. (요 8:14, 17, 18)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하신 이러한 말씀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나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 (요 18:37) 요한 계시록에서는 예수를 “충실한 증인”, “충실하고 참된 증인”으로 언급한다.—계 1:5; 3:14.

나의 증인: 예수의 초기 제자들은 충실한 유대인으로서 이미 여호와의 증인이었으며 여호와만이 유일하신 참하느님이심을 증언한 사람들이었다. (사 43:10-12; 44:8) 하지만 이제 제자들은 여호와의 증인만 아니라 예수의 증인도 되어야 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목적의 새로운 부면, 즉 메시아 왕국을 통해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일에서 예수께서 수행하시는 중요한 역할을 알려야 했다. 사도행전에는 “증인”(마르티스), “증언하다; 증거하다”(마르티레오), “철저히 증거하다”(디아마르티로마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들과 그와 어근이 같은 단어들이 성경에서 요한복음 다음으로 많이 나온다. (요 1:7 연구 노트 참조) 여호와와 예수의 증인이 되어 하느님의 목적에 관해 철저히 증거한다는 사상은 사도행전 전반에 흐르는 주제이다. 제자들이 증거해야 했던 하느님의 목적에는 그분의 왕국과 예수의 중요한 역할이 포함되었다. (행 2:32, 40; 3:15; 4:33; 5:32; 8:25; 10:39; 13:31; 18:5; 20:21, 24; 22:20; 23:11; 26:16; 28:23) 1세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있었다는 점을 확증함으로 예수에 대해 증언했다. (행 1:21, 22; 10:40, 41) 나중에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선포함으로 예수에 대해 증언했다.—행 22:15. 요 18:37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의 왕국에 관해 철저히 증거하고: 사도행전에는 “증인”(마르티스), “증언하다; 증거하다”(마르티레오), “철저히 증거하다”(디아마르티로마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들과 그와 어근이 같은 단어들이 성경에서 요한복음 다음으로 많이 나온다. (요 1:7; 행 1:8 연구 노트 참조) 여호와와 예수의 증인이 되어 하느님의 목적에 관해 철저히 증거한다는 사상은 사도행전 전반에 흐르는 주제이다. 제자들이 증거해야 했던 하느님의 목적에는 그분의 왕국과 예수의 중요한 역할이 포함되었다.—행 2:32, 40; 3:15; 4:33; 5:32; 8:25; 10:39; 13:31; 18:5; 20:21, 24; 22:20; 23:11; 26:16.

하느님의 이 구원: 또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는 이 수단”. 그리스어 소테리온은 구원 자체만이 아니라 구원이나 구출을 가져오는 수단을 가리킬 수도 있다. (눅 2:30; 3:6 및 각 구절의 각주 참조) 넓은 의미로 보면 이 표현에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실 것인지 알려 주는 소식도 포함될 수 있다.

후기에 만들어진 일부 그리스어 사본들과 그리스어를 다른 언어로 옮긴 몇몇 고대 번역본들에는 이 구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그가 이 말을 마치자, 유대인들은 서로 많은 논쟁을 하면서 돌아갔다.” 그러나 이 내용은 가장 오래되고 신뢰할 만한 사본들에는 나오지 않으므로 사도행전의 원문의 일부가 아닌 것 같다.—부록 가3 참조.

바울은 2년 동안 ··· 머물면서: 바울은 이 2년 동안 에베소서(엡 4:1; 6:20), 빌립보서(빌 1:7, 12-14), 골로새서(골 4:18), 빌레몬서(몬 9)를 썼으며, 아마도 히브리서도 쓴 것 같다. 그는 기원 61년경에 재판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그때까지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네로 황제가 바울을 직접 재판했는지 아니면 권한을 위임받은 다른 누군가가 그를 재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은 무죄 판결을 받은 것 같다. 바울은 풀려난 뒤에도,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활동적으로 봉사했다. 그는 이전에 스페인으로 갈 계획을 세운 적이 있는데, 어쩌면 이 시기에 스페인으로 갔을 수도 있다. (롬 15:28) 로마의 클레멘스가 기원 95년경에 기술한 바에 따르면, 바울은 로마 제국의 “서쪽 경계 끝까지” 갔다. 바울이 풀려난 뒤에 쓴 세 통의 편지(디모데 전서, 디모데 후서, 디도서)를 보면 그는 니코폴리스, 마케도니아, 밀레투스, 에베소, 크레타, 트로아스를 방문했던 것 같다. (딤전 1:3; 딤후 4:13; 딛 1:5; 3:12)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그리스의 니코폴리스에서 다시 체포되었으며 기원 65년경에는 로마에 다시 투옥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네로가 자비를 보이지 않은 것 같다. 그 전해에 화재가 로마를 휩쓸었으며,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 번째이자 마지막 편지를 쓸 당시 자신이 곧 처형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디모데와 마가에게 신속히 와 달라고 부탁했다. 이 시기에 누가와 오네시보로는 큰 용기를 나타내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울을 찾아가 위로했다. (딤후 1:16, 17; 4:6-9, 11) 바울은 기원 65년경에 처형된 것 같다. 바울은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예수께서 행하고 가르치신 모든 일’을 증거한 탁월한 증인이었다.—행 1:1.

방해받는 일 없이: 또는 “자유롭게”. 사도행전은 이러한 긍정적인 말과 함께 끝을 맺는다. 바울은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는데도 계속 거리낌 없이 전파하고 가르쳤다. 그 무엇도 왕국 소식이 로마에 전파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어울리는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성령에 힘입어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파 활동을 시작하여, “땅의 가장 먼 곳까지”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해 나갔는지 알려 주기 때문이다.—행 1:8.

아주 담대하게: 또는 “아무 두려움 없이; 말의 가장 큰 자유를 가지고”. 그리스어 파레시아는 “거침없이 말하는 것”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행 4:13) 동사형인 파레시아조마이는 주로 “담대하게 말하다”로 번역된다. 파레시아파레시아조마이는 사도행전에 자주 나온다. 사도행전 전체는 담대함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수행한 전파 활동의 특징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행 4:29, 31; 9:27, 28; 13:46; 14:3; 18:26; 19:8; 26:26.

전파하고: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기본적으로 “공식 사자로서 소식을 선포하다”를 의미한다. 이 표현은 선포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공개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 전파 활동의 주제는 하느님의 왕국이었다. 사도행전에는 “하느님의 왕국”이라는 표현이 여섯 번 나온다. 그 표현이 처음 나오는 곳은 행 1:3인데, 그 구절에서는 예수께서 부활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까지 40일 동안 그 왕국에 관해 말씀하셨다고 알려 준다. 그 이후에도 하느님의 왕국은 사도들이 전파한 소식의 중심 주제였다.—행 8:12; 14:22; 19:8; 28:23.

미디어

로마의 도로 건설
로마의 도로 건설

로마의 광대한 도로망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소식을 제국 전역에 전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틀림없이, 사도 바울도 여행할 때 그런 도로를 많이 이용했을 것이다. (골 1:23) 이 삽화는 당시 로마에서 돌로 도로를 포장하던 일반적인 과정을 보여 준다. 먼저 도로를 만들 곳을 표시했다. 다음으로 그곳을 파고 돌을 깐 다음 시멘트를 깔고 그 위에 모래를 깔았다. 그런 다음 맨 위에 크고 넓적한 돌을 깔고 그 돌들이 움직이지 않도록 가장자리에 갓돌을 설치했다. 배수가 잘 되는 자재를 사용하고 도로 가운데를 약간 볼록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물이 잘 빠질 수 있었다. 도로 가장자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수구가 있어서 도로 양옆에 흐르는 도랑으로 물이 빠져나가게 되어 있었다. 매우 뛰어난 도로 건설 기술 덕분에 일부 도로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대부분의 도로는 삽화에 나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자갈만 깔아서 만든 도로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로마
로마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는 테베레강 가의 일곱 개의 언덕이 있는 지역에 세워졌다. 제국이 번영함에 따라 도시도 확장되었다. 기원 1세기 중반에 로마의 인구는 100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곳에는 규모가 큰 유대인 공동체도 있었던 것 같다.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과 개종자들 중 일부가 기원 33년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왔다가 사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전파하는 내용을 듣고 제자가 되었던 것 같다. 이 새로운 제자들이 로마로 돌아가면서, 로마에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있게 되었으며 좋은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다. (행 2:10) 사도 바울은 기원 56년경에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서 두루 이야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롬 1:7, 8) 이 영상은 바울 시대에 로마의 모습이 어떠했을지를 추정해서 만든 것이다.

1. 아피아 가도

2. 막시무스 대경기장

3. 팔라티누스 언덕과 카이사르의 궁전

4. 카이사르 신전

5. 극장

6. 판테온(만신전)

7. 테베레강

아피아 가도
아피아 가도

사진에 보이는 것은 오늘날 이탈리아에 남아 있는 아피아 가도 즉 비아아피아의 일부이다. 성경에 아피아 가도라는 이름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바울은 로마로 갈 때 이 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이 도로는 기원전 312년에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공사가 계속되어 기원전 244년경에는 로마에서 브룬디시움까지 길이 이어졌다. (지도 참조) 로마의 형제들은 바울을 만나기 위해 남쪽으로 여행하여 아피아 가도에 있는 ‘세 여관’과 ‘아피오 장터’까지 왔다. (행 28:15) ‘아피오 장터’는 로마에서 약 65킬로미터 떨어져 있었고 ‘세 여관’은 약 5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1. 로마

2. 세 여관

3. 아피오 장터

4. 아피아 가도

5. 브룬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

카이사르 네로
카이사르 네로

기원 56-57년경에 만들어진 이 금화에는 로마 황제 네로의 흉상이 새겨져 있다. 네로는 기원 54년부터 68년까지 통치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부당하게 체포되어 기원 56년경부터 58년경까지 카이사레아에서 수감되어 있다가 카이사르에게 상소했는데, 당시 카이사르가 네로였다. 바울은 기원 59년경에 로마에서 처음으로 투옥되고 기원 61년경에 무죄 판결을 받아 석방된 것 같다. 그런데 기원 64년에 로마에서 화재가 일어나 도시의 4분의 1이 파괴되는 일이 있었다. 네로는 자신이 화재를 일으켰다는 의심을 받게 되자 그러한 의심을 벗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로 인해 정부가 그리스도인들을 혹독하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바울은 아마도 이 무렵(기원 65년)에 로마에서 두 번째로 투옥되어 그 후에 처형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