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6:1-18

6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미처 알지 못하고 걸음을 잘못 내디딜지라도, 영적 자격을 가진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온화한 영으로+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계속 살피십시오.+  서로 남의 무거운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살피십시오.+ 그러면 남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만 기뻐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짐을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십시오.+  잘못 인도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조롱을 당하실 분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을 뿌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육체를 위해 뿌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어 없어질 것을 거두고,+ 영을 위해 뿌리는 사람은 영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훌륭한 일을 하다가 포기하지 맙시다.+ 우리가 지치지 않는다면, 때가 되어 거둘 것입니다.+ 10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으로 친족이 된 사람들에게 그렇게 합시다. 11  보십시오. 내 손으로 이렇게 큰 글씨로*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12  여러분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사람들은 모두 육적인 면으로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단지 그리스도의 형주 때문에 받는 박해를 피하려고 할례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13  심지어 할례를 받는 그들 자신도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육체를 두고 자랑하려고 여러분이 할례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14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주 외에는 결코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나에 대해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 죽었습니다. 15  할례나 무할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새로운 창조물만이 중요합니다.+ 16  이러한 행동 규범에 따라 사는* 모든 사람 곧 하느님의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 바랍니다. 17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의 종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18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과분한 친절이 여러분이 나타내는 영과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각주

달리 번역하면 “이렇게 긴 편지를”.
또는 “질서 있게 걷는”.
또는 “끝으로”.

연구 노트

바로잡는: 또는 “올바로 조정하는”. “바로잡는”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카타르티시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카타르티시스와 그와 어근이 같은 다른 단어들은 어떤 것을 올바른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예를 들어, 마 4:21에서는 카타르티조라는 동사가 그물을 “수선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갈 6:1에서는 이 동사가 걸음을 잘못 내디딘 동료 그리스도인을 영적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내용 가운데 사용되었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명사 카타르티스모스엡 4:12에서 “바로잡다”로 번역되었는데, 이 단어는 뼈나 팔다리나 관절을 맞추는 것을 가리키는 의학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바로잡고: 여기서 “바로잡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명사(카타르티스모스)는 어떤 것을 올바른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 올바로 조정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이 단어는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해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다. 이 단어는 뼈나 팔다리나 관절을 맞추는 것을 가리키는 의학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고후 13:9 연구 노트 참조) 예수께서는 “거룩한 자들”의 생각과 태도와 행실을 하느님의 생각과 뜻과 일치하게 조정하심으로 그들을 바로잡으셨다. 그러한 “바로잡는”(또는 “훈련하는”) 일은 예수께서 회중에 주신 “사람들로 된 선물” 즉 영으로 임명된 감독자들을 통해 이루어졌다.—엡 4:8, 11, 12; 고전 16:15-18; 딤후 2:2; 딛 1:5.

걸음을 잘못 내디딜지라도: “걸음을 잘못 내딛는 것”에 해당하는 그리스어(파랍토마, 직역하면 “옆으로 쓰러지는 것”)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한 잘못에는 판단을 잘못 내리는 것에서부터 하느님의 법을 심각하게 범하는 것까지 포함될 수 있다. (마 6:14; 롬 5:15, 17; 엡 1:7; 2:1, 5) 걸음을 잘못 내딛는 사람은 하느님의 의로운 요구 조건과 일치하게 걷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아직 심각한 죄를 범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걷고 있다.

영적 자격을 가진 여러분: 또는 “영적인(영적으로 장성한) 여러분”.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프뉴마티코스는 “하느님의 성령” 즉 활동력이라는 표현에 사용된 프뉴마(“영”)에서 나온 단어이다. (엡 4:30) 따라서 회중에서 장성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바로잡아 줄 자격을 갖추려면 지식과 지혜와 경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계속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갈 5:16, 18, 25.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리스어 동사 카타르티조는 어떤 것을 올바른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 올바로 조정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이 구절에서는 “걸음을 잘못 내디딘” 동료 그리스도인을 영적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내용 가운데 사용되었다. 이 구절에서 이 동사가 미완료 형태로 되어 있으므로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영적 자격을 가진”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바로잡힐 것인지는 그가 조언을 받아들이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마 4:21에서는 동일한 동사가 그물을 “수선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명사 카타르티스모스엡 4:12에서 “바로잡다”로 번역되었는데, 이 단어는 뼈나 팔다리나 관절을 맞추는 것을 가리키는 의학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고후 13:9; 엡 4:12 연구 노트 참조.

자신을 계속 살피십시오: 또는 “스스로 조심하십시오; 자신에게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리스어 원문을 보면 바울은 앞 문장에서는 “여러분”에 해당하는 복수형을 사용하다가 이 부분에서는 단수형을 사용한다. 따라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베푸는 그리스도인 각자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한 것이다. 그들 각자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교훈하는 대로 도덕적으로 그릇된 일을 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이 표현은 독선적이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기도 하다.—고전 10:12.

각자 자신의 짐을: 또는 “각자 자기 책임의 짐을”.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 포르티온은 운반하거나 져야 하는 물건을 가리키는 단어로 무게와 상관없이 사용될 수 있다. 이 짐은 2절에 언급된 “무거운 짐”과는 다르다. 그러한 무거운 짐을 지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연구 노트 참조) 이 구절에 언급된 짐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느님 앞에서 져야 하는 책임을 가리킨다. 한 참고 문헌에서는 이 단어가 “개인이 지는 짐 꾸러미나 군인이 지고 다니는 장비를 가리키는 군사 용어로 사용되었다”고 알려 준다.

서로 남의 무거운 짐을 져 주십시오: “무거운 짐”으로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 바로스의 복수형이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무거운 것”을 의미하며 “괴로움을 주는 것”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바울은 이 교훈을 하기 전에 앞 구절에서 영적으로 “걸음을 잘못 내디딘” 사람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했다. 그런 사람은 걸음을 잘못 내디딘 결과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지게 될 수 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동료를 돕는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것이다. (요 13:34, 35) 하지만 사도 바울이 3-5절에서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말은 다른 사람이 져야 하는 “짐”(그리스어 포르티온) 즉 하느님 앞에서 져야 하는 영적 책임의 짐까지 져 주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갈 6:5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의 법: 이 법에는 예수의 모든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기록한 내용이 포함된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처럼, 이 법은 모세 율법 계약을 대치하는 것이었다. (렘 31:31-34; 히 8:6-13)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법과 원칙을 독자적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위대한 입법자이신 여호와로부터 받으셨다. (요 14:10)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그리스도와 관련된 법’이라는 표현이 고전 9:21에 사용되었다. 이 법은 “자유에 속한 완전한 법”, (약 1:25) “자유민의 법”, (약 2:12) “믿음의 법”(롬 3:27)이라고도 불린다.

서로 남의 무거운 짐을 져 주십시오: “무거운 짐”으로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 바로스의 복수형이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무거운 것”을 의미하며 “괴로움을 주는 것”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바울은 이 교훈을 하기 전에 앞 구절에서 영적으로 “걸음을 잘못 내디딘” 사람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했다. 그런 사람은 걸음을 잘못 내디딘 결과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지게 될 수 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동료를 돕는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것이다. (요 13:34, 35) 하지만 사도 바울이 3-5절에서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말은 다른 사람이 져야 하는 “짐”(그리스어 포르티온) 즉 하느님 앞에서 져야 하는 영적 책임의 짐까지 져 주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갈 6:5 연구 노트 참조.

각자 자신의 짐을: 또는 “각자 자기 책임의 짐을”.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 포르티온은 운반하거나 져야 하는 물건을 가리키는 단어로 무게와 상관없이 사용될 수 있다. 이 짐은 2절에 언급된 “무거운 짐”과는 다르다. 그러한 무거운 짐을 지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연구 노트 참조) 이 구절에 언급된 짐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느님 앞에서 져야 하는 책임을 가리킨다. 한 참고 문헌에서는 이 단어가 “개인이 지는 짐 꾸러미나 군인이 지고 다니는 장비를 가리키는 군사 용어로 사용되었다”고 알려 준다.

가르치십시오: “가르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에는 교훈하고 설명하고 논증을 사용하고 증거를 제시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마 3:1; 4:23 연구 노트 참조) 예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계속되는 과정이며, 그렇게 하는 것에는 그들도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을 가르치고 그분의 가르침을 적용하고 그분의 본을 따르도록 돕는 것이 포함될 것이다.—요 13:17; 엡 4:21; 벧전 2:21.

가르침받은: 그리스어 동사 카테케오는 문자적으로 “소리가 아래로 울려 퍼지게 하다”를 의미하며, 말로 가르친다는 의미를 포함할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리를 배우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 속에 그 진리가 반복적으로 울려 퍼지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자격을 갖추게 된다.—동일한 그리스어가 두 번 사용된 갈 6:6과 비교.

그들은 ··· 빚진 사람들입니다: 또는 “그들은 ···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 의무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빚진 사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나 빚을 지는 것과 관련된 다른 표현들은 금전적인 빚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의무나 책임을 가리키는 폭넓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롬 1:14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바울이 한 말의 요지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영적으로 유익을 얻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가난한 유대인 형제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롬 15:26.

말씀을 배우는: 여기 언급된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리킨다. 바울은 자신이 쓴 여러 편지에서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 가르치는 일을 강조한다. 그는 그처럼 가르치는 일을 강조할 때 그리스어 디다스코를 자주 사용하는데, 그 단어는 교훈하고 설명하고 논증을 사용하고 증거를 제시하는 것을 가리킨다. (롬 2:21; 12:7; 고전 4:17; 골 3:16; 딤후 2:2. 마 28:20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이 구절에서 바울은 하느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더 구체적인 단어인 카테케오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소리가 아래로 울려 퍼지게 하다”를 의미하며, 말로 가르친다는 의미를 포함할 수 있다. (행 18:25 연구 노트 참조) “말씀”에 담긴 진리가 어떤 사람의 정신과 마음 속에 깊이 울려 퍼지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자격을 갖추게 된다.—딤후 2:2.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십시오: 이 구절에서는 말씀을 “배우는”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과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모두를 함께 나누라고 권한다. 이러한 원칙이 성경의 다른 부분들에도 언급된다. (마 10:9, 10; 롬 15:27연구 노트; 고전 9:11, 13, 14; 딤전 5:17, 18; 히 13:16) “나누다”라는 표현은 배우는 사람이 자신이 가르침받는 것을 잘 듣고 적용한다는 뜻도 담고 있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말로 믿음과 확신을 표현하며, 그렇게 하여 좋은 소식을 가르치는 사람이 된다. 자신이 가르침받은 것에 대해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좋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딤후 2:2.

육체를 위해 뿌리는 사람: 죄로 향하는 인간의 성향에서 비롯된 욕망에 따라 “육체의 일”을 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갈 5:19-21) 그처럼 육체를 위해 “뿌리는” 사람은 그 열매 즉 결과로 육체로부터 썩어 없어질 것을 거두게 된다. 첫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그와 그의 후손 모두는 썩어짐의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롬 5:12; 8:21연구 노트) 그 종살이로 인해 인간은 불완전해져서 질병과 노화와 죽음을 겪게 되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었다. 따라서 “육체를 위해 뿌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벧후 2:12, 18, 19 비교.

영을 위해 뿌리는 사람: 하느님의 성령이 생활에 자유롭게 작용하게 하여, 그 영의 도움으로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은 “영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두게” 된다.—마 19:29; 25:46; 요 3:14-16; 롬 2:6, 7; 엡 1:7.

조롱을 당하실: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경멸하는 동작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 동작은 코와 관련이 있다. 일부 언어에서는 무언가나 누군가를 향해 비웃는 표정을 하거나 코를 치켜드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처럼 조롱하는 것에는 업신여기거나 비웃는 말을 하는 것 심지어 대항하거나 도전하는 것까지 포함될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원칙들을 업신여겨도 된다고 생각하거나 그 원칙들을 어겨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점을 경고한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뿌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시대에 잘 알려져 있던 격언이었다. 이 격언은 고대의 농경 문화에서 유래한 것 같다. 이 격언은 땅에 무언가를 심으면 그것이 그대로 자라게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고대에는 이 격언이 대개 부정적인 상황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는데, 나쁜 행동을 하면 나쁜 결과를 거두게 된다는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올바른 행동을 하면 좋은 결과 즉 “영원한 생명”을 거두게 된다는 점도 강조한다. (갈 6:8) 이 변하지 않는 원칙은 성경의 다른 부분들에도 언급된다.—잠 11:18; 22:8; 호 8:7; 10:12; 고후 9:6. 갈 6:8 연구 노트 참조.

썩어짐의 종살이: “썩어짐”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부패; 약화; 멸망”을 의미한다. 이 “썩어짐의 종살이”는 죄의 결과로서, 신체적 불완전성, 노화, 질병, 죽음을 초래한다. 완전한 인간의 몸도 썩을 수 있다. 바울이 예수에 관해 한 말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시켜 다시는 썩지 않게 하셨다”고, 다시 말해 그분이 썩을 수 있는 인간의 몸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게 하셨다고 말했다. (행 13:34) 그와 마찬가지로 완전했던 아담도 썩을 수 있는 몸, 즉 죽을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하느님께 순종했다면 아담은 영원히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담이 썩어짐의 종살이를 하게 되고 그 나쁜 영향에 굴복하게 된 것은 그가 죄를 지었을 때였다. 그는 이 종살이를 그의 모든 자손 즉 인류에게 물려주었다. (롬 5:12) 하느님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은 그러한 종살이에서 풀려나 마침내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이다. (눅 3:38) 여호와께서는 “영을 위해 뿌리는 사람”에게 그러한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하지만 “육체를 위해 뿌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어 없어질 것을 거둘” 것이며 그러한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다.—갈 6:8.

육체를 위해 뿌리는 사람: 죄로 향하는 인간의 성향에서 비롯된 욕망에 따라 “육체의 일”을 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갈 5:19-21) 그처럼 육체를 위해 “뿌리는” 사람은 그 열매 즉 결과로 육체로부터 썩어 없어질 것을 거두게 된다. 첫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그와 그의 후손 모두는 썩어짐의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롬 5:12; 8:21연구 노트) 그 종살이로 인해 인간은 불완전해져서 질병과 노화와 죽음을 겪게 되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었다. 따라서 “육체를 위해 뿌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벧후 2:12, 18, 19 비교.

영을 위해 뿌리는 사람: 하느님의 성령이 생활에 자유롭게 작용하게 하여, 그 영의 도움으로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은 “영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두게” 된다.—마 19:29; 25:46; 요 3:14-16; 롬 2:6, 7; 엡 1:7.

포기하지 않습니다: 또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 표현이 사용된 것을 볼 때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지치거나 열정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포기하지 맙시다: 또는 “지치지 맙시다”.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 표현은 훌륭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거나 열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담고 있을 수 있다.—고후 4:1 연구 노트 참조.

시간을 잘 활용하십시오: 직역하면 “정해진 시간을 사십시오”. 이 표현은 골 4:5에도 나온다. 이 조언을 따르려면 희생이 필요하다. 시간을 사야, 다시 말해 다른 일들에 사용하던 시간을 줄여서 시간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을 하던 시간에 영적인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시간”은 일반적인 시간이 아니라 특정한 때 즉 시기를 가리킨다. 당시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순조로운 시기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봉사의 직무를 비교적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었다. 바울은 그러한 순조로운 시기를 낭비하지 말고 잘 활용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기회: 또는 “순조로운 때”. 그리스어 카이로스는 “정해진 때” 또는 “~기(철)”로 번역되기도 한다. 엡 5:16(연구 노트 참조)에서는 “시간을 잘 활용하십시오”라는 표현 가운데 사용되었다.

믿음으로 친족이 된 사람들: 또는 “믿음의 집안(가족)에 속한 사람들”. “친족이 된 사람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문자 그대로 한 가족 즉 집안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딤전 5:8)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동일한 신앙이나 견해나 목적을 가지고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집단의 사람들을 가리켜 집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따라서 이 표현은 1세기 회중들을 묘사하는 데 적합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1세기 회중에 속한 사람들은 대개 개인 집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롬 16:3-5) 그들은 서로를 영적인 가족이라고 느꼈다.—엡 2:19.

데르디오: 바울이 로마 사람들에게 쓴 편지를 기록했거나 필사한 사람. 바울의 서기로 일한 사람 가운데 이름이 언급된 사람은 데르디오뿐이다. 주 안에서라는 표현을 볼 때 데르디오는 충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고린도 회중의 성원이었을 것이다. 데르디오는 로마 사람들에게 보내는 이 편지에 자신의 개인적인 안부 인사도 포함시켰는데, 아마도 그곳에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손으로 …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 보통 다른 사람을 시켜 자신의 말을 받아 적게 했다. 하지만 이 편지는 그가 직접 쓴 것 같다.—롬 16:22연구 노트 참조.

육적인 면으로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 하는: 또는 “겉으로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여기서 “육적”인 것이란 문자적인 몸과 관련이 있는 것,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던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승인을 받으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의 다른 규정들도 엄격하게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그들의 동기는 유대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던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할례를 고집함으로 사실상 예수의 죽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라는 것을 부인한 것이었다.

형주: 또는 “고통의 기둥”.—용어 설명 참조.

그리스도의 형주: 여기서 “형주”(그리스어 스타우로스)는 예수께서 형주에 달려 죽으신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예수께서 형주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류는 죄의 종 상태에서 풀려나 하느님과 화해하고 좋은 관계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은 것은 형주에서 처형되신 예수의 죽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라는 점을 인정하고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죽었고: 또는 “기둥에 달려 처형되었고”. 바울은 형주에서 처형되신 예수의 죽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근거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세상은 바울을 미워하고 그를 ‘죽임을 당해야’ 할 범죄자로 여겼다. 또한 바울도 세상을 죽임을 당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하느님의 이스라엘: 이 표현은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이 표현은 나중에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야곱의 육적 후손들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창 32:22-28) 앞 구절(갈 6:15)에서는 “하느님의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자들에게 할례가 요구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려 준다. 예언자 호세아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 백성 가운데 이방인들도 포함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 ‘너는 내 백성이다’ 하겠다.” (호 2:23; 롬 9:22-25) 육적 유대인과 개종자들이 영적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자들 가운데 포함되기는 했지만 (행 1:13-15; 2:41; 4:4) 그들은 하느님께 배척당한 육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일 뿐이었다. (사 10:21, 22; 롬 9:27) 후에 바울은 로마 사람들에게 이렇게 썼다. “이스라엘의 후손이라고 해서 모두가 실제로 ‘이스라엘’인 것은 아닙니다.”—롬 9:6. 또한 행 15:14; 롬 2:29; 9:27; 11:26 연구 노트 참조.

그는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 각자는 새로운 창조물 즉 하늘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전망을 가진 영으로 출생한 하느님의 아들이다. (갈 4:6, 7) 여섯째 창조의 날이 끝난 이후로 새로운 물질적 창조물을 만드는 일은 없었지만 (창 2:2, 3) 새로운 영적 창조물을 만드는 일은 있어 왔다.

새로운 창조물: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 각자는 새로운 창조물 즉 하늘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전망을 가진 영으로 출생한 하느님의 아들이다. (갈 4:6, 7) 또한 기름부음받은 자들은 “하느님의 이스라엘” 즉 그리스도인 회중의 일부인데, (갈 6:16연구 노트) 그 회중 역시 새로운 영적 창조물이다. (고후 5:17 연구 노트 참조)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받았는지의 여부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한 백성: 이 표현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여호와께서 한 백성을 자신의 특별한 재산으로 선택하셨다고 알려 주는 내용을 언급한 것일 수 있다. (출 19:5; 신 7:6; 14:2; 26:18, 19) 여호와의 이름을 지닌 새로운 백성인 “하느님의 이스라엘” 즉 영적 이스라엘은 이제 비유대인 신자들도 포함하게 되었다. (갈 6:16; 롬 11:25, 26ㄱ; 계 14:1) 그들은 자신들이 대표하는 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에 공개적으로 영광을 돌려야 했다. (벧전 2:9, 10) 육적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영적 이스라엘의 성원들도 여호와께서 “내가 나를 위해, 나에 대한 찬양을 선포하도록 지은 백성”이라고 부르신 사람들이었다. (사 43:21) 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사람들이 숭배하던 모든 신이 거짓 신이라고 폭로하고 여호와께서 유일한 참하느님이심을 담대하게 선포했다.—살전 1:9.

유대인: 그리스어 이우다이오스는 히브리어 예후디에 해당한다. 예후디는 “유다의; 유다에 속한”을 의미하며 히브리어 성경에서 “유대인(들); 유대인의”로 번역된다. 특히 바빌론 유배 기간 이후로 이 단어는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용어 설명 “유대인” 참조) 창 29:35에서 유다라는 이름을 “찬양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와 연관 짓는 것을 볼 때 그 이름은 “찬양받는; 찬양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일부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여기서 바울은 “유대인; 유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의미를 활용하여 재미있게 표현한 것일 수 있다. 그는 진정한 “유대인”이란 마음의 할례를 받고 깨끗하고 순수한 동기로 하느님을 섬김으로 그분께 칭찬(“찬양”으로 번역할 수도 있음)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그렇게 했을 수 있다. (이 구절에 나오는 마음의 할례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의 말에 따르면,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인 하느님의 승인은 육적인 혈통에 관계없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처럼 하느님의 승인을 받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의 이스라엘”에 속한 영적 유대인이었다.—갈 6:16.

이사야는 이스라엘에 관해 외칩니다: 이 구절과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사 10:22, 23을 인용한다. 그 구절에서는 기원전 607년에 여호와께서 바빌론 제국을 사용해 이스라엘에 심판을 집행하실 때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 예언했다. 그때 예루살렘을 포함해 온 땅이 침략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70년을 보냈다. 그 후 “단지 남은 자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참숭배를 회복했다. 바울은 로마서의 이 부분에서 그 예언이 기원 1세기에 다시 한 번 성취되었다는 점을 알려 준다. 1세기에 비교적 적은 수의 유대인들 즉 “남은 자”가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영적인 의미에서 여호와께 돌아왔다. (롬 11:4, 5) 나중에 믿는 이방인들이 그들과 함께하여 영적인 나라인 “하느님의 이스라엘”을 구성하게 되었다.—갈 6:1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 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 즉 “하느님의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킨다. (갈 6:16; 롬 2:29) 하느님의 목적은 영적 이스라엘을 이루는 14만 4000명이 구원을 받아 하늘에서 그분의 아들과 함께 통치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그리하여” 즉 비유적으로 말해 “야생 올리브” 나무의 가지들을 접붙이는 일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 가지들을 접붙임으로 “재배하는 올리브나무”를 열매 맺는 가지들로 가득하게 하려는 하느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것이다. (롬 11:17-25; 계 7:4; 14:1, 3) 그러려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이스라엘의 일부로 받아들여져야 했다. 일부 사람들은 이 구절의 처음에 나오는 그리스어 표현을 “그다음에는”이나 “결국에는”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사전과 성경 번역판들은 그 표현을 “그리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행동 규범: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카논)는 “갈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카네)에서 나온 말인데, 과거에 갈대는 측량 도구로 사용되었다. (겔 40:5) 여기서는 이 단어가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하느님의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할 “행동 규범”을 가리킨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표현되는 과분한 친절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고 그에 합당하게 행동한다면, 죄 많은 인간이 이전에는 결코 누릴 수 없었던 “평화와 자비”를 누릴 수 있었다.—갈 3:24, 25. 용어 설명 “정경(성경 정경)” 비교.

하느님의 이스라엘: 이 표현은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이 표현은 나중에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야곱의 육적 후손들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창 32:22-28) 앞 구절(갈 6:15)에서는 “하느님의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자들에게 할례가 요구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려 준다. 예언자 호세아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 백성 가운데 이방인들도 포함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 ‘너는 내 백성이다’ 하겠다.” (호 2:23; 롬 9:22-25) 육적 유대인과 개종자들이 영적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자들 가운데 포함되기는 했지만 (행 1:13-15; 2:41; 4:4) 그들은 하느님께 배척당한 육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일 뿐이었다. (사 10:21, 22; 롬 9:27) 후에 바울은 로마 사람들에게 이렇게 썼다. “이스라엘의 후손이라고 해서 모두가 실제로 ‘이스라엘’인 것은 아닙니다.”—롬 9:6. 또한 행 15:14; 롬 2:29; 9:27; 11:26 연구 노트 참조.

이스라엘: “하느님과 겨루는 자 (하느님에게 끈질김을 나타내는 자)” 또는 “하느님이 겨루시다”라는 의미. 야곱이 축복을 받기 위해 천사와 씨름을 한 뒤에 받은 이름이다. 야곱은 에서와는 달리 신성한 것의 가치를 인식했으며 하느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기운을 다해 힘썼다. (창 32:22-28; 히 12:16) “하느님의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도 야곱을 본받아 그와 같은 믿음을 나타내며 하느님의 뜻에 고착한다.—이 구절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예수의 종이라는 낙인: “종이라는 낙인”으로 번역된 단어(그리스어 스티그마의 복수형)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온다. 세속 그리스어 문헌에서 이 단어는 다양한 기호나 글자로 된 낙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한 낙인은 노예임을 표시하는 데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 단어는 흉터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바울은 박해자들에게 신체적 학대를 받았을 때 몸에 생긴 흉터를 가리켜 이 단어를 사용했을 수 있다. 그러한 흉터는 그가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고후 4:10; 11:23-27; 빌 3:10) 바울은 문자적인 낙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고 하느님의 영의 열매를 나타내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임을 밝혀 주는 방식으로 생활한 것을 가리켜 이 단어를 사용했을 수 있다.

여러분이 나타내는 영: 직역하면 “여러분의 영”. 여기서 “영”은 특정한 방법으로 말하거나 행동하게 하는 강력한 내적 힘 또는 지배적인 정신적 성향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는 “조용하고 온화한 영”(벧전 3:4)이나 “온화한 영”(갈 6:1)을 언급한다.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1:7)에서 바울은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정신의 영”을 “비겁함의 영”과 대조한다. 그는 그 편지를 이러한 말로 끝맺는다. “주께서 그대가 나타내는 영과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딤후 4:22) 개인이 특정한 영을 나타낼 수 있는 것처럼 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도 특정한 영을 나타낼 수 있다. 갈라디아서의 끝부분인 이 구절과 빌립보서의 끝부분에서 바울은 그리스어 복수형 대명사(“여러분”)를 사용했다. 그는 그렇게 하여 갈라디아와 빌립보의 회중들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본과 일치한 영을 나타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다.—빌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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