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후서 5:1-21

5  우리는 땅에 있는 우리의 집 곧 이 천막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건물을 얻게 될 것임을 압니다. 그것은 손으로 짓지 않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이 집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하늘에서 오는 우리의 집을 입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그것을 입으면 벌거벗은 채로 발견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 천막에 있는 우리는 짓눌려 신음합니다. 이 천막을 벗어 버리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을 입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죽어 없어질 것이 생명에 삼켜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오게 될 것의 증표로 우리에게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확신에 차 있습니다. 우리가 몸 안에 거하는 동안에는 주로부터 떠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걷고 있습니다.+  우리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기를 더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과 함께 거하든지 그분을 떠나 있든지, 그분이 받아들이실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10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각 사람은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기 몸 안에 거하는 동안 한 일에 따라 보응을 받게 됩니다.+ 11  그러므로 주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을 계속 설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잘 알려져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양심에도 우리가 잘 알려져 있기를 바랍니다. 12  우리가 다시 우리 자신을 여러분에게 추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우리에 관해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주어,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13  우리가 정신이 나갔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었고, 정신이 온전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14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사랑이 우리에게 강권합니다.+ 우리가 확신하는 것처럼,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15  그분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 죽었다가 일으켜지신 분을 위해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육적인 관점으로 알지 않습니다.+ 한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육체에 따라 알았지만, 확실히 이제는 더 이상 그분을 그렇게 알지 않습니다.+ 17  따라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옛것은 사라졌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생겨났습니다. 18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으며,+ 우리에게 화해의 직무를 주셨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사람들에게 잘못을 묻지 않으셨으며,+ 우리에게 화해의 소식을 맡기셨습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일하는+ 대사들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호소하고 계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 부탁하는데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각주

또는 “나타나야; 드러나야”.

연구 노트

다른 것을 입기를 원하기: 바울과 다른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서 불멸의 영적 피조물로 부활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고후 5:2) 그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하늘 생명에 대한 강한 희망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죽고 싶어 한 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들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몸을 천막에 비하면서, 그들이 이 천막을 벗어 버리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후 5:1 연구 노트 참조) 다시 말해 그들은 육의 몸이 가진 약함을 더 이상 겪지 않고 봉사의 직무와 관련된 책임과 어려움을 면하려고 죽기를 간절히 바란 것이 아니었다. (고후 5:3 연구 노트 참조) “다른 것을 입기를 원한다”는 바울의 말은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 생명을 얼마나 고대하는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여호와를 영원히 섬기기를 간절히 바란다.—고전 15:42-44, 53, 54; 빌 1:20-24; 벧후 1:4; 요1 3:2, 3; 계 20:6.

땅에 있는 우리의 집 곧 이 천막: 여기서 바울은 사람이 만든 천막을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의 인간 몸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용한다. 접을 수 있는 천막이 망가지기 쉬운 임시 거처인 것처럼,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땅에서 가진 몸도 멸성이고 썩을 수 있으며 일시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건물” 즉 영원하고 썩지 않는 영적인 몸을 갖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전 15:50-53. 벧후 1:13, 14 비교. 고후 5:4 연구 노트 참조.

허물어지면: 또는 “해체되면”. 여기서 바울이 인간의 몸을 사람이 만든 천막에 비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리스어 카탈리오는 “무너지면; 해체되면”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집: 또는 “거처”. 그리스어 오이케테리온은 이 구절과 유 6에만 나오는데, 유 6에서는 “처소”로 번역되었다.

하늘에서 오는 우리의 집: 또는 “하늘에서 오는 우리의 거처; 하늘에 있는 우리의 거처”.—고후 5:1 연구 노트 참조.

땅에 있는 우리의 집 곧 이 천막: 여기서 바울은 사람이 만든 천막을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의 인간 몸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용한다. 접을 수 있는 천막이 망가지기 쉬운 임시 거처인 것처럼,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땅에서 가진 몸도 멸성이고 썩을 수 있으며 일시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건물” 즉 영원하고 썩지 않는 영적인 몸을 갖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전 15:50-53. 벧후 1:13, 14 비교. 고후 5:4 연구 노트 참조.

다른 것을 입기를 원하기: 바울과 다른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서 불멸의 영적 피조물로 부활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고후 5:2) 그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하늘 생명에 대한 강한 희망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죽고 싶어 한 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들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몸을 천막에 비하면서, 그들이 이 천막을 벗어 버리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후 5:1 연구 노트 참조) 다시 말해 그들은 육의 몸이 가진 약함을 더 이상 겪지 않고 봉사의 직무와 관련된 책임과 어려움을 면하려고 죽기를 간절히 바란 것이 아니었다. (고후 5:3 연구 노트 참조) “다른 것을 입기를 원한다”는 바울의 말은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 생명을 얼마나 고대하는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여호와를 영원히 섬기기를 간절히 바란다.—고전 15:42-44, 53, 54; 빌 1:20-24; 벧후 1:4; 요1 3:2, 3; 계 20:6.

벌거벗은 채로 발견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임재가 있기 전에 죽는 자신과 다른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한동안 죽은 상태로 “벌거벗은 채” 즉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육의 몸을 입지도 않고 영의 몸을 입지도 않은 채 무덤에 잠들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 충실을 유지했다면 계속 죽은 상태로 “벌거벗은 채”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미래에 부활되어 영의 몸을 “입고” “주와 함께 거하게” 될 것이라는 보증이 있었다.—고후 5:1-8. 고후 5:4 연구 노트 참조.

다른 것을 입기를 원하기: 바울과 다른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서 불멸의 영적 피조물로 부활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고후 5:2) 그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하늘 생명에 대한 강한 희망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죽고 싶어 한 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들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몸을 천막에 비하면서, 그들이 이 천막을 벗어 버리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후 5:1 연구 노트 참조) 다시 말해 그들은 육의 몸이 가진 약함을 더 이상 겪지 않고 봉사의 직무와 관련된 책임과 어려움을 면하려고 죽기를 간절히 바란 것이 아니었다. (고후 5:3 연구 노트 참조) “다른 것을 입기를 원한다”는 바울의 말은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 생명을 얼마나 고대하는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여호와를 영원히 섬기기를 간절히 바란다.—고전 15:42-44, 53, 54; 빌 1:20-24; 벧후 1:4; 요1 3:2, 3; 계 20:6.

벌거벗은 채로 발견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임재가 있기 전에 죽는 자신과 다른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한동안 죽은 상태로 “벌거벗은 채” 즉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육의 몸을 입지도 않고 영의 몸을 입지도 않은 채 무덤에 잠들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 충실을 유지했다면 계속 죽은 상태로 “벌거벗은 채”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미래에 부활되어 영의 몸을 “입고” “주와 함께 거하게” 될 것이라는 보증이 있었다.—고후 5:1-8. 고후 5:4 연구 노트 참조.

땅에 있는 우리의 집 곧 이 천막: 여기서 바울은 사람이 만든 천막을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의 인간 몸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용한다. 접을 수 있는 천막이 망가지기 쉬운 임시 거처인 것처럼,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땅에서 가진 몸도 멸성이고 썩을 수 있으며 일시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건물” 즉 영원하고 썩지 않는 영적인 몸을 갖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전 15:50-53. 벧후 1:13, 14 비교. 고후 5:4 연구 노트 참조.

오게 될 것의 증표: 또는 “계약금; 오게 될 것의 보증(담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는 그리스어 아라본이 세 번 나오는데, 모두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즉 하느님의 성령 또는 활동력으로 기름부으시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고후 5:5; 엡 1:13, 14) 성령의 이러한 특별한 작용은 오게 될 것의 계약금과도 같다.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증표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희망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 그들이 받을 온전한 값 즉 상에는 하늘에서 썩지 않을 몸을 입는 것이 포함된다. (고후 5:1-5) 또한 불멸성이라는 선물을 받는 것도 포함된다.—고전 15:48-54.

오게 될 것의 증표: 또는 “계약금; 오게 될 것의 보증(담보)”.—고후 1:22 연구 노트 참조.

우리는 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걷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걷다”라는 말은 “살다; 행동하다; 특정한 인생행로를 따르다”를 의미하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자주 사용된다. 따라서 “믿음으로 걷다”라는 표현은 하느님과 그분이 밝혀 주신 것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중심으로 하는 인생행로를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이 표현과 대조를 이루는 ‘보는 것으로 걷다’라는 표현은 보이는 것이나 겉모습에 좌우되는 인생행로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게 될 하늘의 상을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확고한 근거가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인생행로를 걸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롬 14:10에서 바울은 “하느님의 심판대”를 언급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자신의 아들을 통해 심판하시므로 (요 5:22, 27)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심판대 즉 재판석(그리스어 베마)은 대개 옥외에 있던 높은 단으로, 계단을 통해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자리에 앉은 관리들은 무리에게 연설하거나 자신들의 결정을 공표할 수 있었다. (마 27:19; 요 19:13; 행 12:21; 18:12; 25:6, 10)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사용한 이 표현을 보고 고린도에 있는 크고 위압감을 주는 재판석을 떠올렸을 수 있다.—용어 설명 “재판석; 심판대” 및 미디어 갤러리 “고린도의 재판석” 참조.

악한: 여기서 “악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파울로스이다. 일부 문맥에서 이 단어는 “도덕성이 없다는 의미에서 악하다”라는 뜻으로 쓰일 수 있다. 바울이 한 말은 사람이 선한 일을 하든 악한 일을 하든, 다시 말해 하느님의 표준에 따라 살든 그 표준을 무시하든 선택을 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주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이 문맥에서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 같다. 앞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고후 5:10 연구 노트 참조) 이사야는 예수께서 심판관으로서 하실 일에 대해 예언했다. (사 11:3, 4)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예수를 심판관으로 임명하신 여호와에 대한 강한 사랑과 깊은 존경심에서 나온다.—요 5:22, 27.

잘 알려져: 또는 “드러나”.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이 어떤 사람인지 하느님께서 아신다고 확신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의 동기와 행실이 받아들일 만한 것 즉 선한 것이라는 점을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도 알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롬 14:10에서 바울은 “하느님의 심판대”를 언급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자신의 아들을 통해 심판하시므로 (요 5:22, 27)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심판대 즉 재판석(그리스어 베마)은 대개 옥외에 있던 높은 단으로, 계단을 통해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자리에 앉은 관리들은 무리에게 연설하거나 자신들의 결정을 공표할 수 있었다. (마 27:19; 요 19:13; 행 12:21; 18:12; 25:6, 10)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사용한 이 표현을 보고 고린도에 있는 크고 위압감을 주는 재판석을 떠올렸을 수 있다.—용어 설명 “재판석; 심판대” 및 미디어 갤러리 “고린도의 재판석” 참조.

겉모습을 자랑하는 사람들: “자랑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카우카오마이)는 이기적인 의도로 자랑한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이 단어는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쓴 두 편지에 여러 차례 나온다. 성경은 아무도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이룬 일에 대해 자랑할 근거가 없다고 알려 준다. (렘 9:23, 24) 사도 바울은 고린도 회중에 강력한 교훈을 베풀면서 여호와 하느님과 그분이 그들을 위해 해 주신 일 외에는 자랑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알려 주었다.—고전 1:28, 29, 31; 4:6, 7; 고후 10:17.

우리가 정신이 나갔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었고: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 동사는 문자적으로 “자신 밖에 서 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 있다”를 의미한다. 바울은 이 편지의 뒷부분에서 자신이 쓴 자랑하는 말을 가리켜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일 수 있다. 그는 일부 사람들의 비난을 반박하기 위해 자신의 사도로서의 자격에 관해 자랑하는 말을 했다. (고후 11:16-18, 23) 바울은 온전히 자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자신을 자랑하는 말을 한 것에 대해 마음이 불편했다. 그가 자랑한 것은 교만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것” 즉, 진리를 변호하고 회중을 위험한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바울은 정신이 온전한 상태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 대해 균형 잡힌 견해를 가진 상태였다. (행 26:24, 25; 롬 12:3 비교) 그의 온전한 정신은 그에게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으므로 그는 그것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사랑: 또는 “그리스도의 사랑”. 이 그리스어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사랑”을 의미할 수도 있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타내는 사랑”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일부 사람들은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맥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사랑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후 5:15.

우리에게 강권합니다: 이 그리스어 동사는 문자적으로 “하나로 뭉쳐 있게 하다”를 의미하며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지속적인 힘을 행사하다”; “권고하다”; “강하게 촉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심으로 나타내신 사랑은 참으로 탁월하다. 그 사랑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된다. 그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은 바울의 모든 행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사랑은 바울의 마음을 움직여 이기적인 목표를 추구하지 않고 하느님과 회중 안팎의 사람들을 섬기는 일만을 목표로 살아가게 만들었다.—고전 9:16 연구 노트 비교.

반드시 해야 할 일: 또는 “필수적인 일”. 바울은 전파하라는 임무를 받았으며 그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행 9:15-17; 갈 1:15, 16) “반드시 해야 할 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마땅히 ~해야 한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롬 13:5) 이어서 바울은 내가 좋은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나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 임무를 수행하지 않을 경우 자신이 느낄 감정적 고통을 “화”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로 표현한다.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에 그의 생명이 달려 있었다. (겔 33:7-9, 18; 행 20:26 비교) 바울은 예레미야와 아모스가 한 말을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렘 20:9; 암 3:8) 하지만 그는 단지 의무감이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나와 사람들에게 전파했다.—고후 5:14, 20; 빌 1:16.

육적인 관점으로: 또는 “사람의 관점으로”. 직역하면 “육체에 따라”. 이 문맥에서는 “육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사르크스가 인간의 사고방식과 인간이 이루는 일을 포함하여 인간이 가진 한계와 관련이 있는 것들을 가리키는 폭넓은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롬 3:20; 8:4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이 한 말의 요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지위나 재산, 인종, 국적 같은 요인들을 근거로 서로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모두를 위해 생명을 바치셨으므로 그러한 육적인 구별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누리는 영적인 관계였다.—마 12:47-50.

확실히 이제는 더 이상 그분을 그렇게 알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한때 예수를 육적인 즉 인간의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그분이 오신 것이 지상에 유대인의 왕국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러한 생각을 버렸다. (요 6:15, 26)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육적인 몸을 대속물로 바치셨으며 이제는 생명을 주는 영이시라는 것을 깨달았다.—고전 15:45; 고후 5:15.

육체: 성경에서 “육체”(그리스어 사르크스)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죄나 불완전성과는 관계없이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요 1:14; 3:6; 17:2) 하지만 이 문맥에서와 같이 불완전하고 죄 많은 상태에 있는 인간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앞 장들에서 바울은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을 “[인간]의 몸에서 작용”하는 “죄의 욕망”과 연관 지었다. (롬 6:19; 7:5, 18, 25) 이어지는 구절들(롬 8:5-13)에서 그는 죄 많은 육체를 즉 하느님의 성령과 대조한다.—그리스어 사르크스가 다른 의미로 사용된 예를 보려면 롬 1:3 연구 노트; 롬 2:28 참조.

사람: 직역하면 “육체”. 여기서 그리스어 사르크스는 인간 즉 살과 피를 가진 존재를 가리킨다.—요 3:6; 17:2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 안에: 또는 “그리스도와 결합해”.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로 결합해 있다. (요 17:21; 고전 12:27) 이러한 특별한 관계는 여호와께서 그들 각자를 자신의 아들에게 이끄시고 성령으로 출생하게 하실 때 시작된다.—요 3:3-8; 6:44.

그는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 각자는 새로운 창조물 즉 하늘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전망을 가진 영으로 출생한 하느님의 아들이다. (갈 4:6, 7) 여섯째 창조의 날이 끝난 이후로 새로운 물질적 창조물을 만드는 일은 없었지만 (창 2:2, 3) 새로운 영적 창조물을 만드는 일은 있어 왔다.

새것이 생겨났습니다: 예수께서는 침례받으실 때 기름부음을 받아, 하늘 전망을 가진 영으로 출생한 하느님의 아들이 되심으로 하느님의 첫 번째 “새로운 창조물”이 되셨다. 또한 예수와 기름부음받은 공동 통치자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인 회중도 새로운 영적 창조물이다.—벧전 2:9.

우리를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으며: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화해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첫 인간 아담이 불순종하여 모든 후손에게 죄와 불완전성을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롬 5:12) 그 결과 인류는 하느님과 멀어진 상태에 있게 되었다. 하느님의 표준으로는 범죄를 묵인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그들은 하느님과 적대 관계에 있게 되었다. (롬 8:7, 8) “화해하다”와 “화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들은 기본적으로 “바꾸다; 교환하다”를 의미하는데, 이 문맥에서는 하느님과의 적대적인 관계가 조화를 이루는 우호적인 관계로 바뀌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여기서 하느님께서 먼저 그리스도를 통해 즉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을 통해 “우리”(바울과 동료들을 비롯한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를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화해의 직무를 주셨습니다”라고 말한다.—롬 5:10 연구 노트 참조.

화해의 직무: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돕는 봉사의 직무를 가리킨다. (롬 5:10) 이 봉사의 직무는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들이 그분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그분의 친구가 되도록 돕는 긴급한 소식과 관련이 있다.—고후 5:18-20. 여기서 “직무”로 번역된 그리스어 디아코니아에 대해 알아보려면 행 11:29; 롬 11:13 연구 노트 참조.

나의 봉사의 직무: 예수께서는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의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라는 사명을 주셨다. (마 28:19, 20) 바울은 그 일을 “화해의 직무”라고 불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하느님과 멀어진 세상에게 “하느님과 화해하라”고 “부탁한다.” (고후 5:18-20) 바울은 이방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했지만, 한편으로는 유대인들 중 얼마의 사람들이라도 마음이 움직여 구원을 위해 필요한 단계들을 밟기를 간절히 바랐다. (롬 11:14) 그리스어 디아코니아는 기본적으로 “봉사”를 의미하며,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동사는 성경에서 때때로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것과 같은 개인적인 성격의 봉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눅 4:39; 17:8; 요 2:5) 이 구절에서는 디아코니아가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를 가리킨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영적인 필요를 위해 섬기는 더 숭고한 봉사이다.

구호금: 또는 “구호 활동; 구호 봉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지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구호 활동을 한 것은 기록상 이 경우가 처음이다. 그리스어 디아코니아는 대개 “봉사의 직무”로 번역되는데, 행 12:25에서는 “구호 활동”, 고후 8:4에서는 “구호 봉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디아코니아가 사용된 용례들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봉사의 직무에 2가지 부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가지는 “화해의 직무[디아코니아의 한 형태]” 즉 전파하고 가르치는 활동이다. (고후 5:18-20; 딤전 2:3-6) 다른 한 가지는 이 구절에 언급된 것처럼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봉사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봉사의 직무[디아코니아의 복수형]는 여러 가지이지만 주는 같습니다.” (고전 12:4-6, 11) 바울의 말을 통해,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의 다양한 부면이 모두 “신성한 봉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롬 12:1, 6-8.

하느님과 화해하게: 그리스어 동사 카탈랏소는 이 구절에 두 번 나오고 고후 5:18, 19에도 두 번 나오는데 기본적으로 “바꾸다; 교환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적대적인 관계에서 우호적인 관계로 바뀌다”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 단어가 사람과 하느님의 관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면, 다시 조화를 이루거나 다시 우호적인 관계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남편과 헤어진 아내가 “남편과 화해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동사를 사용했다. (고전 7:11)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동사 디알랏소마이마 5:24에 나온다.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제단에 제물을 바치기 전에 “형제와 평화를 이루라”고 교훈하셨다. (마 5:24 연구 노트 참조) 인류가 하느님과 화해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첫 인간 아담이 불순종하여 모든 후손에게 죄와 불완전성을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류는 하느님과 멀어진 상태에 있게 되었다. 하느님의 표준으로는 범죄를 묵인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그들은 하느님과 적대 관계에 있게 되었다.—롬 5:12; 8:7, 8.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 화해하게 하시고: 일부 성경 번역판에서는 이 표현을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 화해하시고”로 번역한다.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 전치사 은 문자적으로 “안에서”를 의미하지만, 의미 폭이 넓어서 문맥을 보고 정확한 의미를 판단해야 한다. 앞 구절(고후 5:18)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그리스어 디아] 우리를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다”고 분명히 알려 준다. 그러한 문맥을 고려하여 이 구절에서는 이 “통해”로 번역되었다.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첫 인간 아담이 불순종하여 모든 후손에게 죄와 불완전성을 물려주었기 때문에 인류는 하느님과 화해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고후 5:18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즉 예수의 속죄 희생을 통해 이 화해하는 일을 이루고 계신다. (롬 5:10; 고후 5:21; 골 1:21, 22) 여호와께서는 그리스도와 결합해 있는 사람들을 적대적인 세상에서 “대사들”로 일하도록 임명하시면서 “화해의 직무”를 맡기셨다.—고후 5:18, 20.

화해의 소식: 또는 “화해의 말씀”.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전하시는 말씀 즉 소식을 묘사하는 여러 가지 표현들이 나온다. 그 표현들은 그 소식이 포괄하는 범위와 의미와 다양한 부면들을 보여 준다. 이 구절에서는 “화해의 소식”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 소식은 “왕국의 말씀[또는 “소식”]”, (마 13:19) “이 구원의 말씀”, (행 13:26) “진리의 말씀”, (엡 1:13) “의의 말씀”(히 5:13)으로 불리기도 한다. 여기서 바울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즉 바울을 비롯하여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화해의 소식을 맡기셨다”고 말함으로 그 소식을 전하는 특권을 받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현한다.

우리를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으며: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화해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첫 인간 아담이 불순종하여 모든 후손에게 죄와 불완전성을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롬 5:12) 그 결과 인류는 하느님과 멀어진 상태에 있게 되었다. 하느님의 표준으로는 범죄를 묵인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그들은 하느님과 적대 관계에 있게 되었다. (롬 8:7, 8) “화해하다”와 “화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들은 기본적으로 “바꾸다; 교환하다”를 의미하는데, 이 문맥에서는 하느님과의 적대적인 관계가 조화를 이루는 우호적인 관계로 바뀌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여기서 하느님께서 먼저 그리스도를 통해 즉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을 통해 “우리”(바울과 동료들을 비롯한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를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화해의 직무를 주셨습니다”라고 말한다.—롬 5:10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일하는: 또는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부활되신 후에, 그분의 충실한 제자들은 그분의 대리인 즉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일하는 대사들”로 임명되었다. 그들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후에는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졌는데, 유대인들과 이방 사람들 모두 최고 주권자이신 여호와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이었다. 이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과 적대 관계에 있는 세상에서 대사들로 일한다. (요 14:30; 15:18, 19; 약 4:4) 바울은 로마에 첫 번째로 투옥되어 있을 때 (기원 59-61년경) 에베소 사람들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을 “쇠사슬에 매인 대사”로 언급했다.—엡 6:20.

대사들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을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일하는 대사들”로 언급한다. 성경 시대에는 대사들을 비롯한 사자들을 여러 가지 이유로 파견했다. 예를 들어, 두 나라가 적대 관계에 있을 때 대사를 파견했는데 그들이 맡은 임무는 전쟁을 막을 수 있는지 알아보거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 협정을 맺는 것이었다. (사 30:1-4; 33:7) 바울 시대에 로마 제국의 여러 민족이나 도시나 속주들은 우호 관계를 강화하거나 지원을 받거나 어떤 문제에 대해 탄원할 목적으로 로마에 대사를 보내곤 했다. “대사이다; 대사로 일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 프레스뷰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과 엡 6:19, 20에 두 번 나오는데, 엡 6:19, 20에서 바울은 자신이 좋은 소식을 위해 대사로 일하고 있다고 말한다. 눅 14:3219:14에서는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명사 프레스베이아가 “사절단”으로 번역되었다. 프레스뷰오프레스베이아는 “연로자; 장로”를 의미하는 프레스비테로스와 어근이 같다.—마 16:21; 행 11:30.

죄를 모르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를 지으신 적이 없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죄가 되게 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예수가 속죄 제물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인류의 죄에 대한 값을 치르게 하셨다. (레 16:21; 사 53:12; 갈 3:13; 히 9:28 비교) “우리를 위해 죄가 되게 하다”라는 표현은 “우리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되게 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사도 요한은 예수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희생[또는 “속죄 희생; 달래는 수단”]이시니, 우리의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 희생이십니다.” (요1 2:2)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물 희생이라는 제한적인 수단을 통해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훨씬 더 나은 근거를 통해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요 14:6; 벧전 3:18.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통해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즉 승인받은 신분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여호와의 종 메시아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했을 수 있는데, 그 예언에서는 메시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의로운 신분을 얻게 해” 줄 것이라고 알려 준다.—사 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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