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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여호와

정의: 유일하신 참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 그분이 친히 정하신 이름이다. 여호와께서는 창조주이시므로, 합당하게도 우주의 최고 통치자이시다. “여호와”는 “그분은 되게 하신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테트라그람마톤 즉 יהוה에서 번역되었다. 이 히브리어 네 글자는 많은 언어에서 JHVH 또는 YHWH에 해당하는 글자로 표시된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성서 번역판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나오는 곳은 어디인가?

「신 영어 성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탈출기 3:15; 6:3에 나온다. 또한 창세기 22:14; 탈출기 17:15; 사사기 6:24; 에스겔 48:35을 참조하라. (그러나 만일 이 번역판 및 다른 번역판들이 여러 곳에서 “여호와”를 사용하고 있다면, 히브리어 테트라그람마톤이 나오는 곳마다 일관성 있게 “여호와”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개역 표준역」: 탈출기 3:15의 각주는 이렇게 말한다. “대문자로 쓰여진 주(LORD)란 말은 하느님의 이름인 YHWH를 뜻한다.”

「오늘의 영어 성서」: 탈출기 6:3의 각주는 이렇게 말한다. “주(THE LORD): ·⁠·⁠· 히브리어 원문에 나오는 야훼는 전통적으로는 여호와로 음역되며, 이 번역판에서는 영어 역본들의 일반적인 관례에 따라 대문자로 된 주(LORD)를 사용한다.”

「제임스 왕역」: 여호와라는 이름이 탈출기 6:3; 시편 83:18; 이사야 12:2; 26:4에 나온다. 또한 창세기 22:14; 탈출기 17:15; 사사기 6:24을 참조하라.

「미국 표준역」: 이 번역판은 여호와란 이름을 창세기 2:4을 비롯하여 히브리어 성경에서 일관성있게 사용한다.

「두에 역」: 탈출기 6:3의 각주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이름 아도나이. 히브리어 본문에 나오는 그 이름은 영원한 자존자를 의미하며, 가장 적절한 하느님의 이름이다. (탈출 3, 14,) 유대인들은 외경심에서 결코 그 이름을 발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 성서에 그 이름이 나올 때마다 아도나이라고 읽는다. 그 말은 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입에 올리기에도 황송한 이름의 네 글자인 요드, 헤, 와우, 헤에 아도나이란 이름에 속해 있는 부호 혹은 모음들을 표시해 두었다. 따라서 일부 현대 번역판들은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모든 고대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히브리어 본문에 나오는 그 이름의 정확한 발음이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 이제는 완전히 잊혀졌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가톨릭 백과사전」[1913년판, 8권 329면]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 구약에 나오는 하느님의 적절한 이름. 따라서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탁월성을 나타내는 위대한 이름, 유일한 이름이란 뜻으로 그 이름이라 일컬었다.”)

로널드 A. 녹스의 「성서」: 야훼라는 이름이 탈출기 3:14 및 6:3의 각주에 나온다.

「신 미국 성서」: 탈출기 3:14의 각주에서 야훼라는 형태를 지지한다. 그러나 그 이름이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성 요셉판 성서의 부록인 성서 사전에서 “주” 및 “야훼” 제하 참조.

「예루살렘 성서」: 테트라그람마톤이 야훼로 번역되어 있다. 창세기 2:4에 처음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신세계역 성경」: 이 번역판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히브리어 성경 및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전체에 사용되어 있으며, 7210번 나온다.

「미국역」: 탈출기 3:15과 6:3에서 야훼라는 이름이 사용되어 있으며, 뒤이어 괄호 속에 “주”란 말이 나온다.

S. T. 바잉턴의 「현용 영어 성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히브리어 성경 전체에 사용되어 있다.

J. N. 다비 역 「성경」: 여호와라는 이름이 히브리어 성경 전체에 나오며 마태 1:20을 비롯하여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많은 각주에도 나온다.

벤저민 윌슨의 「임패틱 다이어글롯」: 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번역판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마태 21:9과 그 밖의 17군데에 나온다.

「마소라 본문에 따른 성경—새번역」, 미국 유대인 출판 협회, 편집장 맥스 마골리스: 영문 번역판의 탈출기 6:3에 히브리어 테트라그람마톤이 나온다.

로버트 영이 번역한 「성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직역판인 이 히브리어 성경 전체에 나온다.

많은 성서 번역판에서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을 사용하지 않거나 단지 몇 번만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개역 표준역」의 서문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본 위원회는 제임스 왕역의 더욱 친숙한 관례로 돌아갔다. (1) ‘여호와’라는 말은 이제까지 히브리어로 사용된 그 이름의 어떤 형태도 정확히 나타내지 못한다. 그리고 (2) 마치 다른 여러 신들이 있어서 그분이 구별되어야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 분이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 시대 이전에 중단되었으며 그리스도교 교회의 보편화된 믿음에는 전적으로 부적당하다.” (그와 같이 그들이 임의로 적절하다고 생각한 것에 의거해서 원 히브리어 성경에 다른 어떤 이름이나 칭호보다 더 자주 나오는, 신성한 저자의 이름을 성서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들은 명백히 예수께서 “당신들의 전통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무효케 하였”다고 말씀하신 유대교 신봉자들의 본을 따른다.—마태 15:6.)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을 본문에 적어도 한 번 또는 몇 번 포함시켜야 된다고 느낀 번역자들은, 비록 그 이름이 히브리어로 나오는 곳마다 매번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윌리엄 틴들의 본을 따른 것이 분명하다. 틴들은 1530년에 자신이 발행한 모세 오경의 번역판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포함시킴으로, 그 이름을 완전히 빼는 습관을 깨뜨렸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영감받은 필자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는가?

제롬은 4세기에 이와 같이 기술하였다. “레위이기도 하며 세금 징수원 출신으로 사도가 된 마태는 우선 신자가 된 할례받은 자들을 위하여 유다에서 히브리어 및 그 문자로 그리스도의 복음서를 작성하였다.” (교회 필자들의 목록[De viris inlustribus], 3장) 이 복음서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테트라그람마톤이 나오는 부분을 11회 직접 인용한다. 마태가 인용한 히브리어 본문의 구절들을 있는 그대로 인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일부를 기록한 영감받은 다른 필자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칠십인역」으로부터 수백 개의 구절을 인용하였다. 그 중 많은 구절에는 「칠십인역」의 초기 사본의 그리스어 본문에 있는 바로 그 히브리어 글자인 테트라그람마톤이 들어 있다. 아버지의 이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나타내신 태도와 일치하게, 예수의 제자들은 그 인용문들에서 그 이름을 보존하였을 것이다.—비교 요한 17:6, 26.

조지아 대학교의 조지 하워드는 「성서 문헌지」(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에서 이처럼 기술하였다. “우리는 그리스어를 말하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그리스어 성경 내에 계속 יהוה를 기록한 사실을 알고 있다. 더구나, 그리스어를 말하는 보수적인 초기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관행을 변화시켰다는 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비록 그들이 부차적인 참조 문헌에서 하느님을 언급할 때 아마 [하느님] 또는 [주]라는 말을 사용했다 할지라도, 성서 본문 자체에서 테트라그람마톤을 빼버리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 ·⁠·⁠· 초기 교회의 성경을 구성한 그리스어 성서의 사본들 가운데에 테트라그람마톤이 여전히 쓰여져 있었기 때문에, 신약 필자들이 성경을 인용할 때 성서 본문 가운데 테트라그람마톤을 보존하였다고 믿는 것이 합리적이다. ·⁠·⁠· 그러나 테트라그람마톤이 그리스어로 된 구약에서 제거되었을 때 또한 신약 내의 구약 인용문에서도 그것이 제거되었다. 그러므로 2세기 초엽 언젠가,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대용어 [대치 용어] 사용이 테트라그람마톤을 밀어내버렸다.”—1977년 3월, 96권, 1호, 76, 77면.

여호와 혹은 야훼, 이 중 어느 형태가 하느님의 이름으로서 정확한가?

하느님의 이름이 본래 히브리어로 어떻게 발음되었는지에 관하여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 그런가? 성서의 히브리어는 본래 모음이 없이 자음으로만 기록되었다. 그 언어가 매일 사용되었을 때에는, 독자들이 쉽게 적절한 모음들을 붙일 수 있었다. 그러나 때가 되자,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을 소리내어 말하는 것은 그릇되다는 미신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치 용어들을 사용하였다. 수세기 후에 유대 학자들은 고대 히브리어를 읽을 때 어떤 모음들을 사용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 주는 부호 체계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네 자음에는 대치 용어의 모음들을 표시하였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이름의 원 발음이 잊혀졌다.

많은 학자들은 “야훼”라는 표기를 선호한다. 그러나 그 표기는 확실한 것이 아니며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반면에 “여호와”라는 이름은 매우 쉽게 받아들여지는 형태이다. 그 형태가 수세기 동안 영어로 사용되어 왔으며, 다른 형태들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어의 네 자음인 테트라그람마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J. B. 로더럼은 「강조된 성서」에서 히브리어 성경 전체에 걸쳐 야훼라는 형태를 사용했다. 그러나 후기 저서인 「시편 연구」(Studies in the Psalms)에서는 여호와라는 형태를 사용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여호와—금번 시편의 번역에서 그 기념 이름 ·⁠·⁠· 의 이 영어 형태를 사용한 것은 더 정확한 발음이 야훼라는 점에 대한 어떤 의혹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이름의 용이한 식별이 주가 되는 이러한 종류의 문제에 있어서, 대중의 눈 및 귀와의 연결을 유지시키려는 염원의 부름에 응하여 개인적으로 선택한 실제적인 증거들에 전적으로 기인한 것이다.”—(런던, 1911년판), 29면.

독일의 구스타프 프리드리히 욀러 교수는 여러 가지 발음들을 논한 다음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지금부터 나는 여호와라는 말을 사용할 것이다. 사실상 이 이름은 현재 우리 어휘 가운데 토착화하였으며,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구약 신학」(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슈투트가르트, 1882년), 제2판, 143면.

예수회 학자인 폴 주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번역판들에서, 우리는 야훼(Yahweh)라는 (가설상의) 형태 대신에 프랑스어에서 관례적으로 사용된 문어적인 형태인 ·⁠·⁠· 제오바(Jéhovah)라는 형태를 사용해 왔다.”—「성서 히브리어 문법」(Grammaire de l’hébreu biblique), (로마, 1923년판), 49면의 각주.

대부분의 이름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어느 정도 변한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셨으며 히브리어로 그분의 이름은 아마 예슈아로 발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성경의 영감받은 필자들은 그 이름의 그리스어 형태인 이에수스를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 발음은 대부분의 다른 언어로도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거리낌없이 우리 말로 일반적인 형태를 사용한다. 성서의 다른 이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어느 이름보다도 가장 중요한 이름을 가지신 분께 어떻게 합당한 존경을 나타낼 수 있는가? 우리가 그 이름이 본래 어떻게 발음되었는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전혀 말하지도 쓰지도 않아야 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우리의 언어로 일반적인 발음과 철자를 사용하여, 그분께 영예를 돌리는 방법으로 그 이름을 지니신 분을 찬양하며, 그분의 숭배자로서 처신하는 것이 옳은가?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을 알고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느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어, 하느님은 흔히 실제 인격체가 아니라 비인격적인 힘에 불과하며, 그들이 알고 사랑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로 말씀드릴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들이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기도는 단순한 의식 곧 암기한 표현들의 형식적인 반복에 불과하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나라의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라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 참 하느님이 그 나라들의 거짓 신들과는 다른 분임을 확증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성서 자체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그분의 고유한 이름을 사용함으로써만 가능하다.—마태 28:19, 20; 고린도 첫째 8:5, 6.

탈출 3:15: “하느님이 ·⁠·⁠·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말해야 하니, 즉 “여러분의 조상들의 하느님, ·⁠·⁠· 여호와께서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셨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이것은 한정 없는 때까지 나의 이름이며, 또 이것은 대대로 나의 기념이다.’”

이사야 12:4: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를 드려라! 그분의 이름을 불러라. 그분이 행하신 일을 뭇 백성들 중에 알려라. 그분의 이름이 높이 있음을 말하여라.”

에스겔 38:17, 23: “주권자인 주 여호와가 이렇게 말한다. ‘·⁠·⁠· 이렇게 내가 틀림없이 나 자신을 드높이고 거룩하게 하여 많은 나라들의 눈앞에 나를 알릴 것이니, 그들은 반드시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말라기 3:16: “그때에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동무와 더불어 서로 말하니, 여호와께서 주의를 기울여 들으셨다. 그래서 기념 책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그분의 이름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분 앞에서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요한 17:26: “[예수께서 그분의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다.] 저는 그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겠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저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제가 그들과 결합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 15:14: “하느님께서 어떻게 처음으로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이름을 위한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에게 주의를 돌리셨는지 시므온이 자세히 이야기하였습니다.”

“구약”의 여호와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인가?

마태 4:1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의 하느님 여호와[“주”, 왕역이나 그 밖의 번역판들]를 숭배해야 하고, 오직 그분에게만 신성한 봉사를 드려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그분 자신이 숭배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요한 8:54: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내 영광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나의 아버지, 곧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유대인들이 숭배한다고 공언하는 하느님이 여호와임을 분명히 밝혀 준다. 예수께서는 그 자신이 여호와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자기 아버지이시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자기와 자기 아버지는 별개의 개체임을 매우 명백히 밝히셨다.)

시 110:1: “내[다윗의] 주에게 하신 여호와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내가 네 적들을 네 발판으로 놓을 때까지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마태 22:41-45에서, 예수께서는 그 자신이 시편에 언급된 다윗의 “주”라고 설명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여호와가 아니라, 여기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하달되는 분이시다.)

빌립보 2:9-11: “바로 이 때문에, 또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탁월한 위치로 높이시어, 친절하시게도 그분에게 다른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의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심을 드러내어 인정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두에」에는 이처럼 되어 있다. “·⁠·⁠· 모든 입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 중에 계심을 고백하게 하셨다.” 「녹스」 및 「콘프라」도 이와 비슷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녹스」의 각주는 이와 같이 인정한다. “·⁠·⁠· 그 그리스어를 ‘영광을 위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신미성」과 「예루살렘」에서는 그와 같이 번역한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아버지와 다르며 그분께 복종한다고 알려 주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여호와를 두려워해야 한다면 어떻게 동시에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가?

성서는, 우리가 여호와를 사랑해야 하며 (누가 10:27) 그분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베드로 첫째 2:17; 잠언 1:7; 2:1-5; 16:6) 하느님에 대한 건전한 두려움을 갖는다면 우리는 그분을 불쾌하시게 하는 일을 매우 주의 깊이 피하고자 할 것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사랑한다면 기꺼이 우리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하며 그분께서 사랑과 과분한 친절을 헤아릴 수 없이 베푸신 데 대해 감사함을 나타내고자 할 것이다.

예: 자녀라면 당연히 자기 아버지를 불쾌하게 해드리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를 위해서 한 모든 일을 깊이 인식할 때 그는 아버지께 순수한 사랑을 나타내야겠다는 동기도 갖게 된다. 스쿠버 잠수부가 자기는 바다를 사랑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다에 대한 건전한 두려움을 갖는다면 그는 피해야 할 어떤 일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그분을 불쾌하시게 하는 어떠한 일을 할까 봐 생기는 건전한 두려움과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