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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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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푸근한 심장부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기후가 온화하고 우정적인 사람들이 사는 말라위는 실로 대단히 매력적인 푸근한 나라입니다. 4만 명이 넘는 여호와 하느님의 증인이 전파하고 있는,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성서 진리의 소식은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만 해도 하느님의 이 겸손한 종들이 많은 환난을 겪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웃 사람들에게서 푸근하고 우정 어린 대우를 받은 것이 아니라 격렬한 박해를 받았는데, 그것은 유대인 대학살과 중세의 종교 재판을 연상케 하는 소름끼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으며 어떻게 인내하였는지에 관한 기록은, 역경 아래서 충절을 고수한 두드러진 실례가 됩니다.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 나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말라위를 살펴봄

말라위는 매우 작은 나라이지만, 이 나라에는 자랑할 만한 다양한 아름다운 산과 강과 호수들이 있습니다. 이 나라 남쪽에 있는 물라녜 산은 특히 숨막힐 듯한 절경입니다. 이 산은 푸른 차 농원으로 둘러싸인 저지대로부터 해발 3002미터 높이까지 웅장하게 솟아 있어, 아프리카의 이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마 가장 잘 알려진 명소라면 길이가 약 580킬로미터인 말라위 호수일 것입니다. 유명한 탐험가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햇빛이 호수 표면에서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이 호수를 가리켜 “별들의 호수”라고 하였습니다. 이 호수에는 수많은 종류의 물고기들이 있는데, 세계의 어느 담수호보다도 더 많은 어류가 있다고 합니다.

약 1100만 명의 말라위 주민들은 우정적이어서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그들은 따뜻한 밝은 미소를 싱긋 지으며 돕고 싶어하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좋아하는 마음 역시 역력히 보입니다. 성서는 약 100년 전부터 말라위에서 사용하는 주요 언어인 치체와어, 야오어, 툼부카어로 구할 수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가정이 성서를 적어도 한 권씩 갖고 있으며, 성서를 정기적으로 읽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말라위 사람들은 대부분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도움을 받아들임으로 성서의 지면 안에서 크나큰 영적 부를 발견하였습니다.

말라위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거슬러올라가 보면 금세기 초엽에 이르게 됩니다. 증인의 활동은 이 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극적인 방법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요원의 불길처럼’

우리의 이야기는, 호감이 가지만 논쟁을 좋아하는 인물인 조셉 부스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워치 타워 협회의 몇몇 출판물을 읽은 뒤 열정이 타올라 1906년에 C. T. 러셀을 만났습니다. 그는 러셀 형제에게 남부 아프리카에 워치 타워 협회의 대표자를 파견할 필요성을 납득시켰습니다. 조셉 부스는 말라위 또는 이 나라의 이전 명칭인 니아살랜드에서 전에 활동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치 있는 봉사를 할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러셀 형제에게는 이 지역 사회에서 그 사람이 지닌 나쁜 평판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부스는 어떤 필자가 후에 묘사한 대로 “종교적 히치하이커”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리스도교국의 종파를 연이어 이용하여 자신의 목표를 추구해 왔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부스는 지방 당국자들에게 평판이 매우 좋지 않았으며 말라위에서 더는 환영받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경험 있는 “히치하이커”는 다시금 또 하나의 종교를 성공적으로 이용하였습니다!

부스는 자신이 직접 말라위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먼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말라위 출신인 엘리오트 캄와나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얼마 후에 부스는 이 젊은 남자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엘리오트 캄와나는 1908년에 본국에 도착하자마자, 공개 전파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워치 타워 협회의 출판물 몇 가지를 대충 이용하여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 매코피 응굴루는 그 당시에 진리를 처음으로 접했었는데, 그는 충실한 장로로서 활동하다가 몇 년 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캄와나의 전파 활동을 가리켜 “요원의 불길”과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캄와나는 극적으로 야외에서 침례를 베풀면서 전파 활동을 하였는데 그 효과는 참으로 벌판의 불길처럼 말라위 전역에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호응하였으며, 얼마 안 있어 많은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부스나 캄와나 모두 “큰 바빌론”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계시 17:5; 18:4) 그들의 목표에는 실은 정치적인 동기가 있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엘리오트 캄와나의 미심쩍은 전파 방식은 불리한 면으로 말라위 정부 당국의 주의를 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내 세이셸로 추방되었습니다. 1910년 무렵에는, 조셉 부스 역시 워치 타워 협회와 관련을 맺고 계속 활동하다가 더는 관련을 갖지 않았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두 사람은 유익보다는 해를 더 끼쳤습니다. 하지만 손상을 상쇄하는 한 가지 부면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서 진리가 담긴 많은 출판물이 전국에 배포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후 몇 해 동안, 매코피 응굴루와 같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읽은 내용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워치 타워 운동”이 혼란을 일으키다

말라위에서 이처럼 탐탁지 않은 출발이 있은 뒤, 협회는 자격을 잘 갖춘 형제인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출신의 윌리엄 존스턴을 보내어 상황을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존스턴은 소위 많은 회중들이 세워져 있지만 성서 진리를 이해하는 정도는 빈약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존스턴 형제는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서 몇몇 현지 남자들을 훈련시켜 인도하게 한 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옮겼습니다. 그 후 시간이 상당히 지난 뒤 말라위에서의 활동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의 여호와의 증인인 성경 연구생들이 역경에 처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충절이 시험받게 되었습니다.

카리스마적인 엘리오트 캄와나를 본받아, 거짓 교리와 비성경적인 관행을 일부 성서 진리와 뒤섞는 여러 운동 단체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한 운동 단체들은 워치 타워 출판물을 어느 정도 사용한다는 이유로, 흔히 그들의 단체명에 워치 타워라는 표현을 포함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이 나라에 있는 소수의 진실한 형제들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진실한 형제들에게 적절한 감독과 필요한 영적 양식이 없었는데도, 그들의 활동이 전혀 수그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계속 함께 모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자 노력하였습니다.—베드로 첫째 2:21.

지방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 상황을 이용하여, 부정직하게 워치 타워라는 이름을 채택한 운동 단체들과 성경 연구생을 그릇되게 동일시함으로 성경 연구생을 비방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에 이 지방 분파들과 우리 형제들 사이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의 우려할 만한 보고에 자극을 받아, 경찰청장이 1920년대 초에 조사에 나섰습니다. 그는 변장을 하고 직접 성경 연구생의 집회에 여러 번 참석하였습니다. 그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성경 연구생 주변에 나돌고 있던 악의적인 거짓말에 반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거짓 “워치 타워 운동”이 일으킨 혼란은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활동을 조직함

1925년에 협회는 다시금 말라위에 주의를 돌리게 되었습니다. 존 허드슨은 이 나라에서 15개월을 보내면서, 여러 회중에서 연설하였습니다. 그는 “충실하고 분별 있는 종”이 사용하는 워치 타워 협회와 계속 접촉하면서 종 반열의 인도와 지침을 받아들이는 일의 중요성을 우리의 형제들이 인식하도록 도우려고 노력하였습니다.—마태 24:45-47.

허드슨 형제의 말라위 방문을 통해 유익을 얻은 사람들 가운데 그레셤 콰지지라가 있었습니다. 허드슨 형제가 말라위로 간 바로 그 해에 콰지지라가 침례를 받았습니다. 콰지지라는 즉시 심각한 시험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다니던 교회의 교직자들의 선동으로, 그는 불온한 가르침을 퍼뜨린다는 혐의로 고발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할 것이었습니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믿음을 포기할 것입니까? 한 달 후에 지방 당국의 조사가 있은 뒤, 콰지지라 형제는 혐의가 풀려 석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은, 그가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에 충성을 지키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영을 분명히 나타낸 사람들을 사용하실 수 있었습니다. 콰지지라 형제는 모잠비크에서 한동안 활동한 후에, 말라위에서 왕국 소식을 널리 전하고 회중들을 강화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여러가지 특권을 누렸습니다. (참조 「파수대」[영] 1972년 11월 1일호)

허드슨 형제의 방문은 또한 매코피 응굴루와 주니어 피리에게 실제적인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이 두 형제는 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두 사람은 여러 해 동안 충실하게 봉사하였습니다. 리처드 칼린데 역시 존 허드슨과 교제함으로 유익을 얻었습니다. 허드슨 형제는 이 나라를 떠나기 전에, 추후에 도움이 있을 때까지 리처드 칼린데가 좋은 소식의 전파 활동을 감독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하지만 허드슨 형제의 방문을 모두가 다 기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응굴루 형제는 그러한 사람들의 반응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케이프타운의 사람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할 것이다”라고 그들은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협회의 지침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 “워치 타워 운동”을 조직하였습니다. 한편,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해 온 사람들은 더 겸손한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협회 사무실과 계속 접촉하였으며, 이 통로를 통해 베풀어지는 교훈과 지침에 대해 인식 깊은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얼마 안 있어, 그곳의 지부는 이 작은 핵심체인 진실로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 나라의 영구 대표자

말라위의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상 고무적인 일이 1933년에 있었습니다. 이 나라에 영구 대표자를 두기 위한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신청서가 제출되었습니다. 총독은 “그러한 신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다음, 그 요청을 수락하였습니다. 마침내 말라위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좀더 일관성 있게 수행할 마련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의 감독 아래 서적 보관소와 사무실이 1934년 5월에 개설되었으며, 버트 매클러키가 그 일을 감독하게 되었습니다.

매클러키 형제는 1930년에 침례받았기 때문에 아직 진리 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전의 임지인 마다가스카르와 모리셔스에서 매우 유능한 파이오니아임을 증명해 왔습니다. 말라위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이 나라 남부에 있는 수도 좀바에 방이 두 개 있는 작은 건물을 얻었습니다. 방 하나는 서적 보관소와 사무실로 사용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숙소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독신이었던 매클러키 형제는 이 새로운 임무를 가리켜, “이전 어느 때보다 더 큰 책임을 부여하는” 외로운 임무라고 말하였습니다.

절친한 동료가 된 리처드 칼린데는 그에게 매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선 주된 임무는 거짓 “워치 타워 운동”이 현존하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혼란 상태를 말끔히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상했던 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한 가지 이유는, 현지의 분파들이 진짜 워치 타워 협회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대부분의 관리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부 사무실은 버트 매클러키에게 그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지침을 제공해 왔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지침을 철저히 따르면서 말라위 전역에 있는 집단을 연이어 방문하였으며, 칼린데 형제는 통역자로 일하였습니다. 그러한 방문은 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워치 타워 운동”과 그 지도자들을 더는 지원하지 않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축복하신다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견고한 신권 조직이 마침내 확립되고 있었습니다. 야외 봉사 보고 역시 처음으로 집계되었습니다. 1934년 보고에 의하면 평균 전도인 수는 28명이었습니다.

좀바 보관소의 새로운 임무

말라위에서 약 1년 동안 일하고 나서, 버트 매클러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다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 후 그는 1995년에 사망할 때까지 60년 이상 남부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충성스럽게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매클러키 가족의 일원인 동생 빌이 말라위에서 그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기 앞서, 빌 매클러키는 아직 침례를 받지 않았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의 종인 조지 필립스는 빌에게 말라위에서의 임무를 맡기 원하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빌이 그 제의를 받아들이자, 그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형제는 먼저 침례를 받아야 할 겁니다.” 빌은 침례를 받았으며 1935년 3월에 좀바 보관소에 도착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26세였습니다. 이 충실한 형제는 말라위에서 많은 역경 가운데서 충절을 지키다가 1972년에 추방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초창기의 상황은 어떠하였습니까? 1998년 당시 89세인 빌 매클러키는 현재 가족과 함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살고 있는데, 좀바에 있던 그 보관소의 비좁은 환경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침실은 폭이 벽난로[1.4미터]보다 넓지 않았지요. 방안이 좀 갑갑해서 밤에 창문을 늘 열어 두고 지냈는데, 어느 날 밤 한 경찰관이 창문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고서는 ‘브와나[선생], 이 창문들을 닫는 편이 좋겠습니다. 표범들이 밤중에 이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창문을 닫았지요.”

그러한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보관소를 수도에 두는 것이 매우 유리하였습니다. 관청과 경찰서가 인근에 있어, 매클러키 형제는 여호와의 증인과 거짓 “워치 타워 운동”을 혼동하는 일이 계속되면서 생기는 협회에 대한 어떠한 고발에도 신속히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빌 매클러키는 앞서 친형이 했던 대로, 참을성 있게 관리들을 상대하여 어떠한 오해도 풀어 나갔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호의적인 평판을 얻게 되었습니다.

조직을 깨끗이 함

빌 매클러키는 형제들에게 성서에 나와 있는 여호와의 표준에 대한 인식을 강화시켜 주려고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형제들로 하여금 성적 부도덕, 영매술, 알코올 남용과 같은 비성경적인 행위가 여호와의 증인의 생활에 들어설 여지가 없다는 점을 이해하도록 돕는 일이 포함되었습니다. (고린도 첫째 6:9, 10; 계시 22:15) 그레셤 콰지지라는 이 일에 대단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행하는 활동에서 광범위하게 봉사하였는데, 특히 이 나라의 북쪽 지역에서 그러하였습니다. 매클러키 형제는 그를 가리켜 “장성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콰지지라 형제는 언제나 성서의 의로운 표준을 충성스럽게 옹호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섬긴다고 공언하면서도 부도덕한 행실에 빠져 있는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콰지지라 형제는 그러한 사람들과 담대하게 맞서곤 하였습니다. 그들이 비그리스도인 행실을 시인하면, 그는 소지한 출판물을 회수하였으며, 그러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참다운 여호와의 증인이 아님을 말해 주곤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그들이 더는 야외 봉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한 확고한 조처가 취해지자, 생활을 깨끗하게 한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리처드 칼린데가 그리스도인 생활 방식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기 시작하였다고 콰지지라 형제는 보고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전에 열심이던 그 형제는 더는 여호와의 깨끗한 조직을 대표하는 데 사용될 수 없었습니다.

성서의 높은 도덕 표준에 대해 이처럼 확고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은 충직한 사람들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흔히 그들에게 보호책이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깨끗한 조직을 축복하고 계시다는 점이, 여호와를 활동적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분명해졌습니다. 1943년에는 매월 평균 전도인 수가 2464명이었고 이들이 144개 회중과 연합해 있었는데, 10년 전의 28명에 불과했던 전도인 수에 비하면 훌륭한 증가였습니다!

말라위 사람들을 일깨워 줌

워치 타워 출판물에 자주 사용된 “신세계”라는 표현은 1944년에 말라위 사람들에게 매우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출판물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신세계는 여호와의 새로운 사물의 제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수중에 있는 하느님의 하늘 왕국의 통치를 받는 새로운 인간 사회를 의미하였습니다. (다니엘 7:13, 14; 베드로 둘째 3:13) 성서에 근거를 둔 그러한 출판물은, 신세계에서 땅이 낙원이 될 것이고, 인간이 동물과 평화롭게 살 것이며, 전쟁이 더는 없을 것이고, 모든 사람이 땅의 풍요로움을 누릴 것이며, 병과 죽음이 더는 없을 것이고, 심지어 사망한 사람들도 부활되어 영원히 살 기회를 받을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시 67:5, 6; 이사야 2:4; 11:6-9; 누가 23:43; 요한 5:28, 29; 계시 21:3, 4.

한 형제는 이 제목에 관한 연설을 하면서 지방적인 정취를 살려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그 동산에는 아담에게서 태어난 자녀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덤불’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벗들이여, 우리는 아직도 그 ‘덤불’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그 동산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이 마테케냐(피부를 파먹는 곤충인 모래벼룩) 세계를 떠나 여호와께서 온전히 설립하시는 신세계로 들어갈 때가 가까웠습니다.”

하느님의 신세계에 관한 연설은 매우 감동적이라서 이 나라의 어느 지방에서는 한 무리의 관심자들이 형제들을 이곳저곳으로 따라다니면서 낙원에 관한 성서의 약속의 물을 들이마셨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여러 명의 지방 교직자들이 신세계에 관한 연설을 듣고 나서, 배워 알게 된 내용에 매우 감동되어 모두 한 유럽인 선교인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우리에게 숨겨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즈음 우리는 어린 소년·소녀들이 사람들을 방문하여 이전에 들어 본 적이 없는 가장 훌륭한 점들을 알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에게 전파하라고 가르쳐 준 교리들은 이제 거짓임이 밝혀졌습니다!”

1946년에 말라위 왕국 전도인의 수는 3000명 선을 넘었으며, 형제들은 참으로 이 나라 사람들을 일깨우고 있었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신세계에 관한 소식을 듣고 모두가 다 기뻐한 것은 아닙니다. 몇 년 전에 정부 당국은 신세계에 대해 알려 주는 워치 타워 출판물의 수입을 금지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조처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였는데, 이 나라에는 이미 출판물이 상당량 비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미치는 영향을 상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일부 교직자들은 증인들이 사용하는 표현들과 방법을 모방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신세계를 전파하고 있다”고 그들은 주장하였습니다. 심지어 신도들을 재방문하려고 시도한 교직자도 소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몇 주 만에 그들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또한 촌장들을 설득해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자기들의 구역에서 전파하지 못하게 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마을에서 연설을 하기 전에 촌장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촌장이 지방 종교 지도자들의 영향력 아래 있을 경우, 그러한 곳에서는 공개 집회를 전혀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촌장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따뜻하게 환영하였습니다. 형제들은 흔히, 와서 연설을 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한 촌장은 리줄루라는 작은 읍에서 그러한 연설을 듣고, 죽은 사람들의 실제 상태에 관해 알게 되었습니다. (전도 9:5; 에스겔 18:4) 얼마 후에 그는 몇몇 종교 지도자가 주관하는 장례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은 죽은 아이가 “지금은 천사가 되어 하늘에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연로한 촌장은 투덜투덜 하면서 꾸부정하게 일어서더니 추장에게 코담배를 한줌 청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힘껏 들이마신 뒤 장례식장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허, 리줄루에서 죽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들었지. 이건 거짓말투성이로군!”

특별한 방문

1948년 1월에 매우 특별한 행사가 있었는데,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협회 본부에서 N. H. 노어와 M. G. 헨첼이 말라위를 방문한 것입니다. 세계 본부의 형제들이 방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블랜타이어 시에 사는 유럽 사람과 인도 사람을 위해 시 공회당에서 집회가 마련되었습니다. 그 당시 블랜타이어에 사는 유럽 사람이 250명뿐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40명이 참석하여 공개 강연을 들었다는 것은 격려적인 일이었습니다. 이튿날, 방문 중인 형제들은 아프리카 형제들을 위해 옥외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무렵에 와서는 치체와어에 유창한 빌 매클러키가 통역을 하였습니다. 오후에 제공된 공개 강연에는 60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확성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프로를 맡은 형제들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음성으로 연설해야 하였습니다. 한때 비가 몹시 와서 연설에 방해가 되자, 일반 사람들은 근처의 나무나 집으로 흩어져 비를 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증인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노어 형제는 우산을 머리 위로 받쳐들고서 연설을 끝마쳤습니다. 이 음중구(백인)가 우중에 서서 아프리카 청중에게 끝까지 연설하였다는 바로 그 사실은, 일반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증인은 참으로 그들의 복지에 관심이 있다는 점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그곳의 유럽 사람들이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어 형제와 헨첼 형제의 방문은 전파 활동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 해 1948년에 전도인 수는 5600명 선을 넘었으며 새로운 사람들이 급속히 대열에 가담하였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증거할 충분한 구역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지부 운영이 시작되다

그동안에, 협회의 보관소가 좀바에서 블랜타이어로 이전되었는데, 블랜타이어는 이 나라의 상업 중심지로서 훨씬 남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말라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여러 해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의 감독 아래 있은 후, 1948년 9월 1일에 지부 사무실이 말라위에 개설되고, 빌 매클러키가 최초의 지부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직접 세계 본부의 감독을 받으면서 말라위 밭의 필요를 돌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에는 순회의 종으로 섬길 수 있는 장성한 경험 있는 형제들이 많이 있어, 형제들을 강화시키기 위해 회중들을 방문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순회 대회가 매년 두 차례 열렸으며, 그레셤 콰지지라가 전국을 돌보는 지역의 종으로 섬겼습니다. 빌 매클러키 역시 지부 사무실에서 언제나 아주 바빴으며, 새벽까지 타자기로 작업할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았으며 도움이 더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길르앗 선교인 학교 졸업생인 피터 브라이들과 프레드 스메들리가 1949년에 도착하였을 때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들을 비롯한 여러 길르앗 졸업생들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던 지부의 종에게 절실히 필요한 지원을 하였습니다. 이제는 회중과 대회가 운영되는 방식에 더욱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특히 그 당시에 말라위로 온다는 것은 유럽이나 북아메리카에 살던 사람에게는 놀라운 변화를 의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나라에는 그러한 사람이 이전에 늘 사용했을지도 모를 현대의 편리한 기기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오지에서는 전기 기구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현지 사람이 정상적인 일상 생활의 일부로 여길 수 있는 것이 외국인에게는 괴로운 일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선교인은 어떻게 적응할 것입니까?

피터 브라이들은 모잠비크의 베이라 항에서 열차를 타고 피곤한 여행을 한 뒤 말라위에 도착했을 때 받은 첫인상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침내 시레 강에 도착하였을 때 막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큰 날벌레들이 사방에서 날고 있었습니다. 날벌레들이 등불 주위로 몰려들어 등을 완전히 덮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사람의 목 주위에도 달라붙고 옷 안팎으로도 기어 다녔습니다. 나는 여호와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일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게는 너무 벅찹니다. 이런 일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 후 우리는 강을 건넌 다음, 역에 가서 열차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불빛이 너무나 어둠침침하였습니다. 금방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날벌레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식사가 제공되었는데 먼저 수프가 나왔습니다. 불빛이 너무나 어두워서, 식탁 맞은편에 앉은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프를 먹을 때 날벌레를 걸러 내려고 잇새로 빨아들이면서 여호와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이번에는 제게 너무 벅차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은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후에 같은 지역을 여행할 때, 브라이들 형제는 공개 강연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그의 설명은 이러합니다. “모기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많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연설할 때 바짓가랑이를 양말 속으로 집어넣었습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다음 셔츠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양 소매를 고무 밴드로 둘렀으므로 두 손과 얼굴만 보였습니다. 통역을 통해 연설하고 있었는데, 한 문장을 말하고 나서는 얼굴에서 모기들을 닦아 내곤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두 손과 얼굴을 닦았습니다. 통역이 말을 마치자마자 또 다른 문장을 말하고는 다시 그와 같이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피터 블라이들을 비롯하여 여러 형제들은 여호와의 도움으로 극복해 냈습니다. 말라위에 임명된 선교인 대다수는 여러 해 동안 충실하게 봉사하였습니다. 영혼을 다한 그들의 노력은 말라위 밭에 많은 축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장성한 지방 형제들이 많아지다

그러는 사이에 그리스도인 장성으로 진보해 가는 지방 형제들이 많아졌습니다. 이 형제들 역시 선교인들과 교제함으로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러한 형제 중에 알렉산더 마팜바나가 있었는데, 그를 흔히 알렉스라고 불렀습니다. 알렉스는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촌장의 아들로서 모잠비크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장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자리를 구하러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주한 뒤에, 알렉스는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게 되어 성서 진리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는 촌장에게 요구되는 일을 할 경우 그리스도인 원칙을 타협하는 일에 말려들게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피하기 위하여 말라위에 정착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마팜바나 형제는 파이오니아가 되었으며 1952년에는 블랜타이어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서 일을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언어에 대한 지식이 있어 특히 야외로부터 받는 편지를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58/59년에 그는 길르앗 선교인 학교에 참석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와 함께 졸업한 동기생 가운데는 야크 요한손과 린다 요한손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말라위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진리를 배운 또 다른 형제로 케네트 침바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1942년에 그곳에서 침례를 받고 나서 말라위로 돌아왔습니다. 얼마 안 있어 침바자 형제는 장성한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배양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얼마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 후에 여행하는 감독자로서 광범위하게 봉사하였습니다. 그 후에 도착한 선교인들 중 일부는 침바자 형제와 그의 아내 엘리시, 어린 아들 마임바와 함께 봉사하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선교인들은 이런 식으로 말라위의 생활 방식을 익히기 시작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러한 장성한 형제들은 귀중한 “사람들로 된 선물”이었습니다.—에베소 4:8.

선교인들이 증가에 박차를 가하다

말라위에서 충실하게 봉사한 선교인들은 특히 그 시절에 함께 봉사할 기회를 가졌던 오래 된 증인들의 즐거운 추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한 선교인들 중에는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려면 생활 방식을 크게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사랑의 동기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맬컴 비고는 독신으로 1957년에 도착하였습니다. 지부 사무실에서 첫날 저녁 식사를 한 뒤, 그는 자신이 어떤 임명을 받게 될 것인지 몹시 궁금해하였습니다. 그 전해에 말라위에 와서 당시 지부의 종으로 일하던 길르앗 졸업생인 로니 네일은 그에게 여행하는 봉사에 임명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언어 교습 과정이나 예비 교육 기간을 거치고 나서 말입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러한 마련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바로 그 다음날부터 시작해야 하였습니다!

여행하는 봉사에 임명된 선교인들은 이내, 회중들을 섬기는 일에 더하여 그들이 차를 운전하려면 차량을 정비하는 일도 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길이라고 해야 흔히 숲 속에 희미하게 나 있는 오솔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방 형제들은 선교인들의 노력에 대해 고마워하였으며, 선교인들의 생활이 좀더 수월해지도록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였습니다. 대개의 경우 선교인이 그리고 그가 기혼자라면 아내와 함께 사용하도록 지붕을 풀로 인 아담한 집과 화장실을 지어 주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남편과 함께 여행하는 자매들은 밤중에 들리는 섬뜩한 소리에 몹시 겁이 날 수 있었습니다! 하이에나의 오싹하게 하는 “웃음소리”와 수많은 다양한 곤충들의 소리인 “오케스트라”에 익숙해지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야크 요한손은 숲 속에 대회장을 세우는 일이 몹시 힘들었다고 회상합니다. 먼저 땅을 고르는 작업을 한 다음, 대부분의 경우 바로 숲 속에 있는 자재를 이용하여 모든 것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노유를 막론하고 형제 자매들은 기꺼이 지원하였습니다. 물라녜 근처에 있는 대회장 건축 현장에서, 행복한 얼굴을 한 연로한 형제가 요한손 형제에게 다가와서 “나도 이 일을 돕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특이한 요청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요한손 형제는 그 연로한 형제가 대회장 건축 현장까지 약 800킬로미터를 걸어오는 데 한 달 가량 걸렸으며,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대회장 시설들을 설치하는 것을 자원하여 도운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자진적인 영을 가진 형제 자매들은 숲을 6000석을 갖춘 “스타디움”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선교인들은 말라위의 회중들과 순회구들의 조직을 개선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핼 벤틀리, 에디 도바트, 키스 이튼, 해럴드 가이, 야크 요한손, 로드 샤프, 맬컴 비고와 같은 형제들은 지역 감독자로서 훌륭한 일을 하였습니다. 지방 증인들은 그들이 받은 사랑에 찬 교훈과 지침에 잘 호응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회중 집회와 왕국 소식을 전파하는 일이 더 잘 조직되었습니다. 한편, 형제 자매들은 앞으로 있게 될 역경에 대비하여 진리 안에서 굳건해지고 있었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증거를 받다

일부 선교인들은 얼마 후에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도록 임명받았는데, 그곳에서도 여전히 매우 부지런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 선교인 아내들 중 일부는 블랜타이어와 좀바에 있는 유럽 사람들의 구역에서 증거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필리스 브라이들, 린다 요한손, 린다 루이즈 비고, 앤 이튼 그리고 그 밖의 자매들은 이 구역에서 매우 훌륭하게 활동하였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우리의 활동에 대해 흔히 “워치 타워 운동”과 줄곧 혼동한 탓으로 편견을 나타내는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자매들은 기회를 잘 이용하여 문제를 바로잡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에 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말라위에 사는 유럽 사람들과 아시아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사업체를 소유하고 있거나 수입이 좋은 고용 계약을 맺고 있었습니다. 대개 그들은 자기들의 생활 여건에 만족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유럽 사람들과 영어를 사용하는 지방 사람들 가운데는 진리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벧엘의 욕조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격려를 주고받음’

선교인들이 지방 형제 자매들과 함께 시간을 보냄에 따라, 그들 사이에 진정한 인종의 조화가 발전하였습니다. 알렉스 마팜바나가 몇몇 선교인 벗들에게 쓴 편지에 그 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상에 ‘격차’가 있다면, 그것은 동·서양의 격차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고금을 통해 최상의 연합시키는 띠인 아가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여호와의 조직 밖에 있는 사람들의 태도와는 매우 달랐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들이 아프리카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들과 거의 관련을 맺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은 그렇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점이 해결되어야 하였습니다. 그것은 지방 형제들이 브와나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호칭은 흔히 선교인을 포함하여 유럽 사람들에게 인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 호칭에는 유럽 사람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의 주 또는 주인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방 형제가 브와나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선교인을 부를 때마다 선교인은 그에게 이 점을 생각나게 해 주곤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서로 형제이지, 브와나가 아닙니다!”

유익은 한쪽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선교인들도 아프리카 형제 자매들과 함께 활동함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확고한 벗 관계가 많이 맺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격려를 주고받는 일”이 있었습니다.—로마 1:12.

여호와를 노래로 찬양함

아프리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누구나 이내, 사람들이 노래 부르기를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반주도 없이 목소리만으로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면서 노래를 잘 부릅니다. 말라위도 예외가 아닙니다. 치체와어로 된 노래책을 구할 수 없었을 때에도, 형제들은 나름대로 노래를 지어냈습니다. 그리스도교국의 찬송가에 들어 있는 잘 알려진 곡조에다가, 왕국, 봉사의 직무, 아마겟돈과 같은 주제로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러한 노래에 악보도 없었지만, 모든 형제들은 그러한 노래를 알고 있었으며 아름답게 불렀습니다. 그들은 대회에서 열정이 고조되면 각 절의 끝에 나오는 후렴 부분을 흔히 한 번만이 아니라 두 번씩 부르곤 하였습니다! 노어 형제는 1953년에 방문하였을 때 특히 이 아름다운 화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노어 형제는 그의 보고 가운데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일은 이례적으로 즐거운 일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50년에 협회의 새로운 노래책인 「여호와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영문)가 지부에 도착하자, 노래책을 치체와어로도 발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에게 악보를 읽는 법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모두 노래를 부를 수는 있었지만 음표를 보고 노래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지부에서는 토닉 솔파 기보법 즉 음표를 가리키는 “도, 레, 미” 방식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형제들 가운데는 학교에서 이 방식을 배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계획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피터 브라이들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번역자들과 함께 앉아서 그 일에 착수하였습니다. 우리는 번역된 가사가 필히 악보와 잘 어울리게 해야 하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조금씩 노래책을 만들어 갔습니다.”

치체와어판 「여호와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 책은 형제들에게 매우 인기 있었습니다. 지부에서는 구할 수 있는 모든 종이를 사용하여, 오래 된 등사기로 인쇄하였습니다. 그 결과, 당시 최초로 만든 노래책은 특별히 튼튼하지는 않았으며, 흔히 대치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를 수 있는 노래를 갖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해하였습니다. 대회가 열릴 때마다 형제들은 이삼천 부씩 구하곤 하였습니다! 마침내 브루클린에서 이 노래책을 인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미 약 5만 부나 이 나라에서 만들어진 뒤였습니다!

새로운 지부 시설

여러 해에 걸쳐, 말라위의 왕국 활동을 감독해 온 곳은 여러 번 바뀌었으며, 대개 숙소가 비좁았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 중반에 특히 지부 사무실과 벧엘 봉사자들의 숙소가 들어설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설계된 건물을 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한 목적으로, 1956년에 블랜타이어에서 부지를 매입하였습니다. 건물은 1958년 5월에 완공되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몹시 감격해하였습니다!

몇 년 후에 지부 사무실 이웃에는 매우 잘 알려진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무디 하우스라는 이웃 건물은 말라위 수상인 헤이스팅스 카무주 반다 박사의 관저가 되었습니다.

지부 사무실과 벧엘 숙소를 건축하는 데 많은 수고를 들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훌륭한 시설은 오래지 않아 협회의 수중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격려적인 방문

1963년에 협회의 세계 본부에 있는 밀턴 헨첼이 말라위를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라이베리아에서 대회를 갖고 난 후 얼마 안 있어 도착하였는데, 그 대회 중에 그는 많은 지방 형제 자매들과 함께 군인들에게 구타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대규모 전국 대회가 블랜타이어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공항 근처에서 열렸습니다. 형제들이 [남쪽에 있는] 은사녜에서부터 [북쪽에 있는] 카롱가에 이르기까지 말라위 전역에서 참석하였다고, 한 오래 된 형제는 말하였습니다. 약 1만 명의 청중은 헨첼 형제와 다른 연사들이 한 훌륭한 연설에 참으로 감사를 나타냈습니다. 언론계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모임을 보도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이번에는 대회에 관한 기사가 전국에 배포되는 한 신문에까지 실렸습니다.

이 나라의 정치적인 상황은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대회에 참석하는 것은 특히 형제들에게 격려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세계 도처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성서 원칙을 옹호하기 위하여 어떻게 확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에 대해 들었습니다. 사회자인 마팜바나 형제는 이 대회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일부 대표자들은 자전거로 편도 6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달려와서 참석하였습니다. 그들은 참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 요구 조건에 달하기 위하여 난관에 직면할 각오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형제들이 확고한 그리스도인 믿음을 고수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고난을 예고하는 일들

1960년대 초에 국가주의의 영이 말라위에서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영국과의 협약과 일치하게, 온전한 자치가 총선 이후 1964년 중반에 허락될 예정이었습니다. 한편 반다 박사는 식민지의 국내 수상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총선 전에, 정부는 투표자들이 1963년 12월 30일부터 1964년 1월 19일까지 자진적으로 등록하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말라위에 사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처음으로, (미국에서 발행된)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지가 후에 묘사한 바와 같이, “권력과 신앙이 대결하게 하는 매우 일방적인 전쟁 ·⁠·⁠· 종교 전쟁”에 강제로 떠밀려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전쟁을 선포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서의 가르침과 일치하게 세속 통치자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내며 양심적으로 세금을 납부합니다. (누가 20:19-25; 로마 13:1-7)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추종자들이 ‘세상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들 역시 나라들의 전쟁이나 정치적인 일에 대해 엄정 중립 입장을 유지합니다.—요한 17:16; 사도 5:28, 29.

투표자 등록 열기가 전국을 휩쓸 때, 증인들은 등록하지 않을 권리를 행사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당원들이 증인들의 중립 입장을 알게 되자, 난폭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증인들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어 당원증을 사도록 강요하려는 시도가 행해졌습니다. 이 기간에 지부 사무실에서는 100채 이상의 왕국회관과 1000채가 훨씬 넘는 우리 형제들의 집이 소각되거나 파괴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논밭과 식량 창고가 불살라졌습니다. 그로 인해 유감스럽게도 여호와의 증인의 많은 가족이 이제 식량이나 거처를 잃게 되었습니다. 일부 증인 가족들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이웃 나라인 모잠비크로 도피하였습니다. 몹시 구타당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케네트 침바자라는 여행하는 감독자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학대를 당하고 나서 몇 년 뒤에 그는 사망하였는데, 필시 그가 입은 상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시련 아래서도 충절을 고수함

박해 아래서도 충절을 고수한 경험담은 무수히 많습니다. 예를 들면, 블랜타이어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 자매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에게는 돌보아야 할 자녀가 11명이나 있었습니다. 두 자매의 남편들은 정치적인 압력에 굴복하여 당원증을 샀습니다. 이제 이 자매들도 당원증을 사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매들은 거부하였습니다. 당원들은 이튿날 다시 와서 자매들이 생각을 바꾸었는지 확인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다음날 아침 많은 무리가 자매들을 데려 가려고 왔습니다. 그 후 두 자매를 공공 장소로 끌고 가서 당원증을 사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폭행을 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하고, 구타하였습니다. 자매들은 확고함을 유지하였습니다. 그 후에 자매들은 집으로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다음날 다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자매들은 또다시 구타를 당하였고 이번에는 무리가 보는 앞에서 벌거벗김을 당하였습니다. 그래도 자매들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들 본부에 전화를 걸어서 요한손과 매클러키와 마팜바나하고 통화를 했지.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미 당원증을 샀고 [말라위]에 있는 다른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도 산 것처럼, 당신들도 당원증을 사야 한다고 했어. 그러니까 당원증을 사지 않은 사람은 전국에서 당신들 두 여자뿐이야. 지금이라도 사는 편이 좋을거야.” 자매들의 대답은 이러하였습니다. “우리는 오직 여호와 하느님만을 섬깁니다. 그래서 지부 사무실의 형제들이 당원증을 샀다 해도, 그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를 죽인다 할지라도 타협하지 않을 겁니다.” (비교 로마 14:12) 마침내 두 자매는 풀려 나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 겸손하고도 충실한 두 자매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지만, 여호와와 그분의 법에 대해 깊은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확고한 태도는 시편 56:11의 말씀을 반영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이까.”

우리의 입장을 명백히 밝히기 위한 노력

심각한 사건들이 점점 더 많이 발생함에 따라, 협회는 당국이 박해를 중지시켜 주도록 여러 모로 노력하였습니다. 수상 집무실에 연락을 취하여 반다 박사와의 면담이 1964년 1월 30일에 허락되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야크 요한손은 로마 13장에 근거하여 대화를 나누면서, 여호와의 증인의 중립 입장을 명백히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수상은 듣게 된 내용에 대해 매우 기뻐하는 것 같았으며 요한손 형제가 떠날 때 반다 박사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였습니다.

하지만 단지 나흘 후에 물라녜 지방에 사는 한 집단의 증인들이 공격을 당하였습니다. 엘러턴 음와찬데가 잔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연로한 증인인 모나 음위와울라 자매는 쏜 화살이 목을 관통하였으며, 죽은 사람으로 여겨 버려졌습니다. 놀랍게도, 이 자매는 살아났으며 그의 증언은 후에 폭력배들을 재판에 회부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끔찍한 사건에 대한 소식이 지부 사무실에 전해지자, 수상 집무실로 지급 전보를 보냈습니다.

그 결과, 1964년 2월 11일에 반다 박사 및 두 명의 그의 각료와 다시 한 번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해럴드 가이와 알렉산더 마팜바나가 야크 요한손과 함께 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매우 달랐습니다. 반다 박사는 전보를 집어 들고 흔들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요한손씨, 이런 전보를 보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형제들은 수상에게 우리의 중립 입장과 국법에 순종한다는 점을 차분하게 납득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수상과 그의 각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공격자들의 감정을 고의로 자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모임은 우리에게 불리하게 끝났으며, 그 나라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해 여호와의 증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손 형제는 즉각 추방시키겠다는 협박까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반다 박사는 두 각료가 여호와의 증인이 자극적인 행동을 하였다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함에 대해 더 화를 낸 것 같습니다.

흥미롭게도, 음와찬데 형제 살해 사건에 대한 재판에서 대리 판사인 L. M. E. 에메줄루 씨는 정부측의 주장대로 여호와의 증인들이 어떤 면으로든 공격자들의 감정을 자극하였다는 증거가 전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판사는 이렇게 판시하였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자극적인 행동을 하였다는 증거가 전혀 없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단호하게 자신의 신앙을 전파하여 개종자들을 얻고자 한 것은 사실이지만, 증인들은 시민의 의무를 잘 알고 있었으며 무엇이든 하도록 요청받은 일을 다하였습니다. ·⁠·⁠· 다만 어떠한 정당에도 가입하는 것을 거부하였을 뿐입니다.”

투표자 등록에 대한 열기가 수그러지자, 수상은 그 나라에 평화와 평온이 있기를 호소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유럽인, 경찰, 인도인, 심지어 여호와의 증인에게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1964년 7월에 매우 들뜬 분위기 속에서 니아살랜드 식민지가 독립된 공화국이 되었으며 국명이 말라위로 바뀌었습니다. 마침내 박해가 끝났지만 여호와의 종 여덟 명이 난폭하게 목숨을 잃은 뒤였습니다.

평온했던 짧은 기간

1964년이 끝나갈 무렵, 비교적 평온한 시기가 우리 형제들에게 찾아왔습니다. 몹시 미워하던 이전의 적들 중에는 희생자들이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왕국 소식을 전파하는 일이 또다시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1966년 초엽에, 여호와의 증인의 중립 입장을 반다 박사에게 설명할 기회가 또 있었습니다. 워치 타워 협회는 선교인들이 이 나라에 더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유럽인의 말라위 입국 허가를 통제하고 있던 반다 박사는 선교인이 더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로 인해 반다 박사와 지부의 종인 맬컴 비고와의 면담이 있었습니다. 반다 박사는 자기로선 어느 누구도 정치에 관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하였습니다. 비고 형제는 또다시 우리가 나라의 법에 순종하며 정치 문제에는 중립 입장을 취한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로마 13:1-7.

1967년에는 전도인 평균 수가 1만 7000명 이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평온한 이 시기에 길르앗 졸업생인 키스 이튼과 앤 이튼 두 사람이 더 입국하였습니다. 이들이 지부 사무실에서 요한손 부부를 만났을 때, 린다 요한손은 열정적으로 그들에게 이렇게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에 오셨습니다!” 이들은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다시 악화되다

짧은 언어 습득 과정을 거친 뒤, 키스 이튼은 아내 앤과 함께 지역 활동을 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처음에 이 부부는 케네트 침바자와 그의 가족의 사랑에 찬 지원을 받았습니다. 어린 마임바는 언제나 기꺼이 돕고자 하였으며, 특히 함께 야외 봉사를 할 때면 이튼 형제의 증거용 가방을 기쁘게 들고 다녔습니다.

1967년 4월에 이튼 형제는 팔롬베 지역의 탐보 마을에서 열린 순회 대회에서 일하고 있을 때 라디오 방송을 통해 불안하게 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반다 박사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말라위 청년 개척자 및 말라위 청년 연맹으로 알려진 청년 운동 요원들과, 당원들을 고의로 자극하고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또한 증인들은 당원증을 사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사지 말도록 설득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964년의 경우처럼, 당원증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당원증을 사는 일이 자진적인 것이긴 하였지만, 사기를 거부하는 것은 당원들에 의해 불경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당원증을 사는 것이 “이 나라의 국민인 우리가 이 나라 말라위를 발전시킨 일에 대해 [반다 박사]에게 감사를 표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들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 문제에 대해 확고한 태도를 취하자 분개한 당원들은 형제들이 강제로 따르게 하려는 시도를 재개하였습니다. 괴롭힘과 구타에 관한 보고가 다시 지부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번은, 맬컴 비고는 당원증을 사기를 거부한 이유로 체포된 줌베 회중의 한 형제를 만나 보라는 요청을 몇몇 당원들에게서 받았습니다. 방에 들어가기 전에 비고 형제는 조용히 기도하였습니다. 이 당원들은 워치 타워 협회에서 신도들에게 당원증을 사는 것이 그릇된 일이라고 명백히 알려 주었다는 점을 비고 형제가 그들에게 말해 주기를 처음부터 기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기는커녕, 비고 형제는 협회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과 그 문제에 대해서는 각자가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당원들은 이러한 설명을 듣고 만족해하지 않았습니다. 사방에서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비고 형제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애쓰면서, 당원들은 그가 앞서 한 질문에 대답을 하기도 전에 또 다른 질문을 던지곤 하였습니다. 질문 공세가 두 시간가량 있은 뒤, 그 형제는 마침내 풀려 났습니다. 당원증을 사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금지령이 내려지다!

1967년 9월, 여당인 말라위 국민 의회당 연례 대회 기간에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거기서 통과된 결의안 중 하나는 이러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여호와의 증인 종파를 불법 단체로 선언할 것을 강력히 건의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결의문은 이러하였습니다. “이 종파는 우리 국가를 원활하게 운영하는 데 꼭 필요한 안정된 평화와 평온을 위태롭게 한다.” 그 후에 그 대회의 폐회사에서 당총재는 이렇게 밝혔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어디서나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번 대회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금지해야 한다는 결의문을 어제 통과시켰습니다. 분명히 정부가 이 문제를 조속히 검토할 것임을 여러분에게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과연 ‘말라위의 안정을 위태롭게 하는’ 요소였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 관찰자는 후에 말라위의 증인을 가리켜, “성실하게 세금을 내고, 병든 사람들을 돌봐 주며, 문맹을 퇴치하는” “모범적인 시민”이라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실제로 “이 문제를 조속히 검토”하였습니다. 금지령을 내리라는 행정 명령이 얼마 안 있어 인준되었으며, 1967년 10월 20일에 발효되었습니다. “말라위가 ‘위험한’ 종파에 금지령을 내리다”라는 크고 굵은 활자로 된 신문 표제로 그 사실이 전국에 알려졌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선한 말라위 정부에 위험한” 요소라는 이유로 그러한 조처가 취해졌다고는 하지만, 실제 이유는 증인들이 당원증을 사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임이 분명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서에 근거를 둔 확고한 신념과 일치하게 “사람들보다 통치자로서 하느님께 순종”하는 길을 택하였을 뿐입니다.—사도 5:28, 29.

사전 준비가 성과를 거두다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에, 지부 사무실의 형제들은 여호와의 증인에게 불리한 모종의 공식 조처가 취해지리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전면 금지령을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형제들은 대비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순회 및 지역 감독자들에게 지침과 격려를 베풀기 위하여 이 나라 여러 지역에서 특별한 모임들이 열렸습니다. 회중 집회, 야외 봉사, 출판물 공급, 서신 전달에 관한 실용적인 지침들이 베풀어졌습니다. 상황이 악화되자 이러한 정보는 매우 유용하였습니다.

회중들은 점차 그러한 제안들이 전달되는 대로 열심히 잘 따랐습니다. 협회 양식이 더는 하나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회중 봉사 보고는 백지에 써서 배달원을 통해 지부 사무실로 보냈습니다. 집회 시간은 각 회중의 필요에 따라 변경되었습니다. 한 회중은 마을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인, 일요일 새벽 5시 30분에 집회를 갖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전파 활동과 관련하여, 어떠한 금지령도 여호와의 증인들이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중단시키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사도 당시의 경우처럼, 우리의 충실한 형제 자매들은 이러한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사도 4:20.

금지령이 내려지기 바로 얼마 전에, 지부 사무실은 정통한 소식통을 통해 「관보」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금지령을 발표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이에 따라 행동하여 모든 중요한 서류철과 문서들을, 심지어 일부 장비도 여러 형제들의 집으로 신속히 옮겨 놓았습니다. 출판물 공급품 역시 많은 양을 지부에서 이 나라 전역에 있는 회중들로 발송하였습니다. 한 회중은 이 귀중한 영적 양식을 보관하기 위하여 두 개의 큰 드럼통에 서적을 가득 채운 다음 나중에 사용할 목적으로 땅 속에 묻었습니다. 경찰이 마침내 11월에 재산을 압수하러 지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출판물과 서류철과 장비가 아주 적었기 때문에 놀란 것 같았습니다.

선교인들이 추방되다

예상했던 대로, 외국에서 온 선교인들은 이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선교인들은 떠나기에 앞서 자기들이 매우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강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맬컴 비고는 폭력배들에 의해 집이 파괴된 형제들을 방문하여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러한 공격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순회 감독자인 핀리 음위녜레가 있었습니다. 비고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도착해 보니, 음위녜레 형제는 다 타버린 자기 집을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격려적이었던 것은 그가 나타낸 영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순회구 내의 고통을 당한 형제들에게로 즉시 돌아가서 그들을 강화시켜 주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그는 개인적인 손실을 지나치게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야크 요한손은 북쪽의 릴롱궤로 가서 구금되어 있던 약 3000명의 형제 자매를 만났습니다. 그는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격려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좋은 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떠나면서 그 자신이 격려를 받았다고 느꼈으며 그 일이 믿음을 강화시켜 준 경험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요한손 형제는 후에 담당 관리에게서 사태가 당혹스럽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담당 관리는 금지령을 암시하는 단 한 마디 말을 하면서, 이제 릴롱궤에서 전기 시설이 고장나면 아마 결코 수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가장 훌륭하고 믿음직한 일꾼들이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온 여덟 명의 선교인은 자의로 말라위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 관한 한, 그들은 잘못된 일을 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샤프 부부와 요한손 부부는 경찰의 호송을 받으며 비행장으로 곧장 연행되어 출국 비행기에 타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두 부부는 블랜타이어의 치치리 교도소로 연행되어 그곳에서 며칠 밤을 보냈는데, 맬콤과 키스가 한 감방에 그리고 린다 루이즈와 앤이 또 다른 감방에 갇혔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경찰의 호송을 받으며 공항으로 연행되어 모리셔스로 추방되었습니다. 마침내 비고 부부와 요한손 부부는 케냐로, 이튼 부부는 로디지아로 다시 임명을 받았습니다.

선교인들은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뒤에 남겨 두고 서글픈 심정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말라위 증인들은 도움을 받지도 못한 채, 버려진 상태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전국에 있는 405개 회중에는 사랑에 찬 감독자들인 영적인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32:2) 알렉스 마팜바나가 이곳의 활동을 감독하였으며, 말라위 밭에 대한 감독은 짐바브웨(당시에는 로디지아) 지부로 이전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짐바브웨 하라레에 있는 지부는, 말라위의 순회 감독자들과 그 밖의 인도하는 사람들이 짐바브웨로 와서 지역 대회와 보충 교육 강습에 참석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이러한 충실한 형제들을 통하여, 순회 대회 및 지역 대회 프로그램이 회중들에 전달되었습니다.

새로 밀어닥치는 잔학 행위

하지만 일단 금지 조처가 대중에게 알려지자, 당원들과 말라위 청년 개척자 및 청년 연맹 단원들은 새로 밀어닥치는 끔찍한 박해의 물결에서 앞장섰습니다. 경찰과 법정은 때때로 동정적인 태도를 나타냈지만, 이제 이 나라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이 불법 단체로 분류되어 있으므로 폭력을 중단시키는 데는 무력하였습니다.

박해가 더욱 심해지면서, 이 나라 각처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 집, 식량 창고, 상점들이 파괴되었습니다. 일부 지방에서는 공격자들이 심지어 트럭을 타고 와서 증인들의 소유물을 실어 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물질적인 손실이 금전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말라위의 형제 자매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이 소유한 것 전부였습니다.

또한 말라위 전역에서 구타에 관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특히 우리의 사랑하는 일부 자매들에게는 박해가 몹시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여자들을 성폭행하거나 불구로 만들거나 구타하였다는 보고가 많았습니다. 변태 성욕자들인 공격자들은 아무도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노소를 막론하고 심지어 임신한 자매들도 그러한 잔인한 시련을 당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유산이 된 자매들도 있었습니다.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 도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숲 속으로 피난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웃 나라인 모잠비크에서 잠시 망명 생활을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967년 11월 말까지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밀어닥친 잔인한 공격으로 인해 적어도 다섯 명이 더 목숨을 잃었습니다.

금지령에 대한 반응

포악한 구타 행위도 여호와의 증인을 단념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타협한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삼손 쿰바니이와는 집과 가구가 파괴되었고 옷가지가 전부 갈기갈기 찢겼지만, 그의 믿음은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확신 있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압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보호해 오셨지요.” 이 믿음의 남녀들의 충절은 여호와께 영예가 되며,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라는 사탄의 조롱에 대답이 되기도 합니다.—욥 2:4.

박해는 말라위에 사는 마음이 정직한 일부 사람들을 일깨우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예언하신 말씀과도 일치한 것입니다. 그분은 추종자들에게 그들이 박해를 받고 심지어 통치자들 앞에 끌려갈 것이라고 경고하신 후에, 이러한 격려적인 말씀으로 끝맺으셨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증거를 위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누가 21:12, 13.

한 남편은 아내가 증인으로 활동하는 것을 얼마 동안 반대하였는데, 사실상 박해로 인해 사물을 더 명확히 보도록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금지령이 내려진 후 2주가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아침, 폭도가 그의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그 남자가 증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자기들이 온 것은 단지 그의 아내 때문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남자는 처음에는 문을 열어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집과 집안에 있는 것을 모두 태워 버리겠다고 위협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이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순식간에 그는 사슬에 묶이게 되고 당원증을 사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그는 그때 아내가 정말로 참 종교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그 역시 당원증을 사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구타당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직후 그는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듬해에 이 남자는 여호와께 헌신하여, 아내와 함께 여호와의 종이 되었습니다.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말라위 안팎에서 사람들은 우려를 표명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하느님의 백성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지금 우리는 세상 끝이 다가오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파수대」(영) 1968년 2월호와 「깨어라!」 1968년 8월호에 실린 기사들에서는 세계 도처에서 제기된 공개적인 항의에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의분을 나타내면서 잔학 행위를 중지시키기 위한 조처를 취할 것을 정부측에 촉구하는 수많은 서한들이 쇄도하였습니다. 일부 우체국에서는 이처럼 갑자기 쇄도하는 우편물을 처리하기 위해 가외의 일손이 필요하였습니다. 이 상황에 대한 국제적인 반응이 매우 강렬하고도 지속적이었으므로 마침내 말라위 대통령은 박해가 중단되어야 한다는 법령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후일에 반다 박사는 당원증을 사도록 아무도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강요받아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자유로이 당원증을 갱신하기를 원합니다.” 그 후 점차 또 한 차례 밀어닥친 박해의 물결이 잠잠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일부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중요한 왕국 전파 활동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금지령이 해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눈에 덜 띄는 방법을 사용하여 전파 활동을 재개하였습니다.

지하에서 활동함

이 기간에 마팜바나 형제는 전파 활동을 지역적으로 충실히 돌보았습니다. 그는 로디지아 지부와 계속 접촉하였으며 그 지부 사무실을 통해 시기 적절한 지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경찰이 그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체포를 면한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슬프게도, 그는 1969년에 암인 듯한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 후에 케네트 침바자가 말라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감독하다가 1971년에 뇌출혈로 사망하였습니다. 틀림없이 여호와께서는 장차 “의로운 사람들이 부활”될 때 충절 고수자들인 이 두 사람의 많은 선한 일을 인자하게 기억하실 것입니다.—누가 14:14; 히브리 6:10.

상태가 완화됨에 따라, 말라위 형제들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였습니다. 비공식 증거는 얼마 안 있어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습니다.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파이오니아 활동은 활발해졌습니다. 1971년에는 열심히 좋은 소식을 전하는 925명의 파이오니아와 수많은 회중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파이오니아 명단에는 심지어 한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그레셤 콰지지라—도 남아 있었는데, 그는 숱한 역경과 수많은 개인적인 시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년에도 충성스럽게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978년에 사망한 바로 그 순간까지 계속 여호와를 충실히 섬겼습니다.

형제들이 “뱀과 같이 조심스[러움]”을 나타냈으므로, 회중 보고와 그 밖의 서신이 로디지아의 지부 사무실로 계속 전달되었습니다. (마태 10:16) 이러한 보고에 따르면, 지하에서의 열심 있는 전파 활동이 매우 성공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금지령이 내려지기 직전인 1967년에는 1만 8519명의 전도인 신기록에 달하였습니다. 1972년에는 금지령이 여전히 시행되고 있었고 모잠비크로 도피한 사람들이 많았는데도, 2만 3398명의 전도인 신기록이 보고되었으며 그들은 매월 봉사의 직무에 평균 16시간 이상을 바쳤습니다.

“새로운 구역들”이 증거를 받아들이다

증인들은 전파할 때 매우 조심하였는데도, 체포되어 투옥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교도소를 새로운 구역으로 이용하여 계속 전파하였습니다.

바스톤 모세스 니이렌다는 1969년에 교도소에서 7개월간을 보냈습니다. 일부 재소자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통합 교회에 왜 그가 가입하지 않는지를 물었습니다. 증거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는 모든 재소자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여러 페이지가 빠진 오래 된 낡은 성서를 사용하여 그들에게 성서 진리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지도자까지도 연구를 하였습니다. 교도소에서 석방되기 전에, 니이렌다 형제는 네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어 기뻤습니다.

영어 회중의 활동

빌 매클러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인 데니스와 결혼하였는데, 금지령의 여파로 외국에서 온 모든 선교인이 추방된 뒤에도 여전히 블랜타이어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가족 책임을 돌보기 위해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였습니다. 매클러키의 집은 블랜타이어 영어 회중의 새로운 집회 장소가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갖는 집회는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하여 좀더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열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거나 박수를 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 시기에 로디지아 지부에서 섬기고 있던 기도 오토가 출판물을 말라위 안으로 은밀히 가져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의 아버지는 말라위 호수 기슭에 있는 작은 호텔을 경영하고 있었으므로, 기도가 이곳에 찾아오는 일은 관리들에게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관리들은 기도가 매번 얼마나 많은 성서 출판물을 가져오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출판물은 매클러키의 집에 있는 은밀한 지하 저장실에 보관되었습니다. 지하실을 파고 있을 때, 행인들은 가끔 그 용도가 무엇인지를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야 화장실이지요”라는 말을 그들은 듣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 집회를 한참 보고 있는데, 차 한 대가 그 집 앞에 멈췄습니다. 누구였습니까? 경찰이었습니까? 형제들은 그들이 갖고 있던 연구 서적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문이 열리더니 기도 오토가 명랑하게 걸어 들어왔습니다.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릅니다!

데니스의 설명에 따르면, 그 일이 있은 뒤 “빌은 누군가가 들어오려고 하면 우선 해야 할 일은 손에 들고 있는 출판물을 모두 바구니에 넣는 일이라고 형제들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는 그 바구니를 침실 바닥에 있는 구멍 안으로 떨어뜨려야 하였습니다. 이 구멍은 지하 저장실로 통하였습니다. 바퀴 달린 차 접대용 작은 탁자 역시 매번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들어오면, 우리는 단지 방문해서 차를 마시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점점 악화됨에 따라, 집회를 더는 단지 한 장소에서만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 집들이 사용되었습니다. 때때로 그 집단은 야유회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옷차림을 하고, 숲 속에서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형제들은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비공식 증거를 하여 진정으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진리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소수 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빅터 룰커, 대니얼 마른, 마이크 샤르마가 있었는데,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블랜타이어 회중에서 섬기고 있습니다.

블랜타이어에서의 소송 사건들

1971년에 경찰이 매클러키의 집을 급습하여 협회 출판물 얼마를 발견하였습니다. 매클러키 형제는 고발되어 블랜타이어, 림베의 치안 판사 앞에 출두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지방 증인들은 그 소식을 듣고, 자유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상당수가 매클러키 부부를 지원하려고 법정에 나왔습니다. 치안 판사가 “무죄”라고 판결하자, 형제들은 일제히 큰 박수를 쳤습니다! 하지만 검사는 항소하였습니다. 이제 그 사건은 고등 법원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번에는 빌 매클러키가 유죄 판결을 받아 7년 금고형이 선고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상 그를 투옥시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 대신 그에게 이 나라를 떠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72년 10월, 빌 매클러키가 37년간 충성스럽게 수행해 온 말라위에서의 봉사가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떠나기 전에 형제들을 조직하여, 은밀한 지하 저장실에 있는 모든 출판물을 그들이 와서 조용히 가져가게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서적을 차 한 대분씩 실어 갔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후에 검문소에서 멈추어 서게 되었지만 경찰은 서적 상자를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매클러키 부부가 이 나라를 떠나기 전에 은밀한 지하 저장실 입구는 콘크리트로 봉해졌습니다. 빌 매클러키의 자기 희생적인 충실한 봉사는 말라위의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 속에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세 번째 폭력의 물결이 밀어닥치다

형제들이 안정을 되찾아 새로이 일상 생활을 시작하게 되자, 또다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1972년, 말라위 국민 의회당 연례 대회 기간에 매우 불안하게 하는 결의문들이 채택되었습니다. 이 결의문들 중 하나는 모든 여호와의 증인을 직장에서 해고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무자비하게도, 면제해 주는 일 없이 그대로 시행되었습니다. 믿음직한 증인 고용인들을 계속 쓰고 싶어하는 회사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증인들이 운영하던 사업체는 빼앗기고 재산이 몰수되었습니다. 하지만 상태가 더 악화될 것이었습니다.

그 정당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문 중 하나는, “마을에 사는 [여호와의 증인] 모두를 마을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여호와의 증인을 인간 사회에서 몰아낼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수많은 집이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습니다. 증인들의 농작물을 짓밟고 가축을 죽였습니다. 증인들은 마을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증인들은 전국 도처에서 일어난 약탈 소동에서 문자 그대로 자기들이 소유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청년 운동 단원들은 여태까지 있었던 박해 중에서 가장 격렬하고 잔인한 박해의 물결에 또다시 앞장섰습니다. 그들은 열 명 정도에서 많게는 백 명에 이르기까지 여러 무리를 조직하여,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면서 여호와의 증인들을 찾아냈습니다.

이 나라 구석구석을 뒤져 우리 형제들을 색출해 냈습니다. 블랜타이어에서 일단의 형제들이 한데 모아져 지방의 당 본부로 연행되었습니다. 이 본부 건물은 원래, 협회의 지부 사무실이었는데 1967년에 몰수당한 것입니다. 연행된 형제들 가운데는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에 지부에서 번역자로 봉사하던 그레이손 카피닝가도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당원증을 사기를 확고하게 거부하자, 박해자들은 소금과 고춧가루가 혼합된 것을 형제들의 눈에 비벼 넣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대못이 박힌 널빤지로 형제들을 때렸습니다. 한 형제가 고통스러워 비명을 지르자, 그 악한 사람들은 한층 더 세게 때리면서, “너희 하느님이 와서 널 구하게 해 봐”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사악한 공격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말라위 호수 남단의 케이프매클리어에서는 젤파트 음바이코 주위에 몇 다발의 건초를 매어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그 건초 위에 가솔린을 끼얹고는 불을 질렀습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불에 타 죽었습니다!

자매들 역시 끔찍하게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당원증을 사기를 거부하자, 많은 자매들이 당원들에게서 성폭행을 거듭 당하였습니다. 릴롱궤에서 마골라 자매는 여러 명의 자매와 함께 그 괴로운 일을 피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자매는 임신 중이라서 아주 빨리 뛸 수 없었습니다. 한 폭도가 들개 떼처럼 행동하여, 그 자매를 따라잡아 때려죽였습니다.

릴롱궤 바로 외곽에 있는 분다 농과 대학 교정에서 여섯 명의 형제와 한 자매가 살해되어 그들의 시체가 끔찍하게 토막나 있었습니다. 그 대학 학장인 시어도어 핀니는 반다 박사에게 그 잔학 행위에 대해 본인이 직접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그는 추방되었습니다!

수천 명이 도피하다

대학살의 조짐이 보이자, 여호와의 증인의 대탈출이 1972년 10월에 시작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쪽의 잠비아로 도피하였습니다. 국경에서 국제 연합의 한 감시자는 “난민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팡가스라는 커다란 칼에 베인 것같이 보이는,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고 확언하였습니다.

도피한 증인들은 신다미살레의 난민 수용소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곳은 말라위와 모잠비크와 잠비아의 국경이 만나는 삼각 지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위생적인 여건으로 질병이 급속히 퍼졌습니다. 짧은 기간에 350명 이상이 사망하였는데, 그들 가운데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난민들의 어려운 처지에 관한 소식이 다른 곳에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신속히 전해졌습니다. 구호품이 꽤 많이 답지하였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천막, 옷, 그 밖에도 긴급히 필요한 물품 몇 톤을 헌물하였습니다. 카렐 데 야헤르와 데니스 맥도널드의 인도 아래 작은 대열을 이룬 트럭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로부터 수용소에 도착하였습니다. 영적 필요도 소홀히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트럭 한 대는 성서와 성서 연구 보조 서적 21상자를 운반하였습니다. 말라위 형제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참 그리스도인 사랑의 증거를 보고 매우 행복해하였습니다!—요한 13:34, 35.

하지만 머지않아 난민 증인들은 자기들이 잠비아의 원치 않는 불청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12월 무렵에 잠비아 당국은 난민들이 말라위로 돌아가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낙심천만한 일이었습니다! 도피할 곳이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결국 포기할 것이었습니까? 미카엘 야당가는 이렇게 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 “나는 당원증을 사지 않았기 때문에 치아를 잃었습니다. 당원증을 사지 않았기 때문에 직장도 잃었습니다. 몹시 구타당하고, 소유물이 파괴되고, 어쩔 수 없이 잠비아로 도피하게 되었는데, 이 모든 일은 당원증을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나는 당원증을 사지 않을 겁니다.” 난민들의 충절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시편 필자가 이렇게 말한 바와 같습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9.

남녀를 막론하고 이 말라위 증인들은 성서 히브리 11장에 묘사된 하느님의 종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여호와의 그 고대 숭배자들처럼, 말라위 증인들은 “얼마의 대속물로 석방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타협하거나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고대 숭배자들처럼 말라위 증인들도 “조롱과 채찍질로, 아니 그 이상의 속박과 감옥으로 시련을 받았습니다.” 고대 숭배자들처럼, “세상은 그들에게 합당하지 않았습니다.”—히브리 11:35, 36, 38.

모잠비크 내의 피난처

잠비아에서 돌아오자 난민 증인들은 또다시 말라위에서 사악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말라위에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도피하였는데, 이번에는 모잠비크로 갔습니다. 그 당시에 모잠비크는 아직 포르투갈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이곳의 당국은 우리 형제들을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말라위 남쪽에 사는 형제들은 물라녜 근처의 국경을 건너 카리코의 난민 수용소로 도피하였는데, 많은 형제들은 그곳에서 1986년까지 머물렀습니다.

또한 모잠비크는 데자와 은체우 두 도시 사이에 있는, 말라위의 서부 국경에서 가기가 매우 수월한 나라였습니다. 그 두 도시에서 형제들은 국경 역할을 하는 주요 도로를 걸어서 건너기만 하면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모잠비크의 이 지역에 있는 수용소들은 음랑게니 근처에 자리잡고 있어, 대다수가 그곳으로 도피하였습니다.

카리코 내에 그리고 음랑게니 근처에 있는 이 수용소들은 3만 4000명가량의 남녀와 어린이들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의 모든 회중은 장로들의 인도를 받아 고된 여행을 하여 그러한 수용소로 갔습니다. 증인들이 이렇게 피신할 때, 말라위 당국은 아무도 그들에게 교통편을 지원해 주어서는 안 된다고 명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종들이 수용소에 정착하면서, 이들에게는 새로운 생활 방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물질적인 면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집들이 길게 줄지어 세워졌습니다. 수용소는 깔끔하고 깨끗하게 유지되었습니다. 협회 및 세속 구호 기관에서 받는 배급량의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하여 많은 형제들은 스스로 작물을 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직접 만든 것을 팔거나 주변 마을에서 부업을 찾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물질적인 면으로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생활 필수품을 갖는 것으로 만족해하였습니다. (디모데 첫째 6:8) 그런데 그들은 영적으로는 부유하였습니다!

수용소 내의 조직

케네디 앨릭 딕, 모리스 마브붐베, 윌러드 마텐고와 같은 장로들—그리고 후에 다른 장로들—은 전국 위원회로 섬겼습니다. 그들은 형제들의 영적 필요를 채워 주는 일에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충성스러운 장로들은 “여러분이 돌보아야 할 하느님의 양 무리를 치십시오”라는 성서의 훈계를 명심하였습니다. (베드로 첫째 5:2) 그들은 수용소 내의 여러가지 영적 활동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의 대부분의 가정에서 습관화된 일상 과정에 따라, 당일의 성구 토론으로 매일을 영적으로 시작하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파수대」지를 보조물로 사용하는 성서 연구, 공개 강연, 그리고 대회까지도 모두 정기적으로 가졌습니다. 난민 증인들은 그러한 영적인 마련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집회가 중앙에 있는 한 장소—중앙 연단—에서 열렸습니다. 수천 명의 형제들이 매일 이곳에 모여 성서 교훈을 받고, 수용소 내의 여러가지 임무에 관한 지침도 받곤 하였습니다. 후에 회중들은 각기 왕국회관을 짓고 그곳에서 집회를 갖도록 격려받았습니다. 마침내 여러 수용소에 다섯 개의 순회구가 조직되었습니다.

전국 위원회로 섬기는 형제들과 그 밖의 형제들은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에 선교인들에게서 받은 훈련을 통해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이 덕분에 그 형제들은 수용소 내의 활동을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대체로, 난민 수용소는 큰 규모의 지역 대회와 다분히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부서들을 조직하여, 안전은 물론 청소, 식품 분배를 포함하여 여러가지 필요를 돌보았습니다.

이제는 여호와의 증인 거의 모두가 말라위 밖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일부 박해자들은 여전히 만족해하지 않았습니다. 적들은 때때로 국경을 넘어와서는 인근 수용소에 살고 있는 형제들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예방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전국 위원회는 일단의 형제들을 안내인 겸 파수꾼으로 임명하여, 수용소의 모든 입구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밧손 롱궤는 음랑게니 수용소에서 이 안내인들을 감독할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의 임무는 수용소 내를 자주 돌면서 여러 곳에 배치되어 있는 형제들을 확인하는 일이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 있어 “7-2-7”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실로, 날마다 아침부터 밤까지(7시부터 7시까지) 충실한 롱궤 형제가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수용소 어디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밧손 롱궤는 대부분의 형제들에게서 여전히 “7-2-7”로 불립니다. 음랑게니 수용소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 형제라면 누구나, 그의 본명은 잊었을지라도 그가 자기들을 위해 충성스럽게 수행한 봉사는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잠비크에서의 일시적인 망명 생활은 박해를 면하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아직도 앞에 놓여 있는 시련과 도전에 직면하도록 형제들을 준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서로 더 가까워졌고 여호와를 더 열렬히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후에 여행하는 감독자로 섬긴 레몬 카브와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잘 돌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함께 매우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 형제들을 잘 알게 되고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라위로 돌아간 뒤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시 쫓겨다니다!

유감스럽게도, 박해자들이 휘두르는 폭력에서 벗어난 것은 잠깐이었습니다. 1975년 6월에 모잠비크가 독립을 하게 되자, 국가주의 영이 이 나라도 휩쓸었습니다. 이 나라의 새 지도자들은 여호와의 백성의 중립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타협을 거부하자, 우리 형제들은 음랑게니 지역에서 다시 국경을 건너 박해자들의 수중으로 들어가도록 강요당하였습니다.

돌아가는 난민들은 국경에서 중부 지역의 고위 관리인 J. T. 쿰브웨자 반다 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관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들은 자진해서 말라위를 떠났고 이제 자진해서 돌아왔다. 너희가 살던 마을로 돌아가서 당 위원장과 협조하라.” 말라위 청년 개척자 및 청년 연맹 단원들을 언급하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너희들이 필히 당과 협조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 청년들이 이곳에 왔다.” 이로 보건대 상황이 개선될 희망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때에 말라위로 돌아가도록 강요당한 형제들 가운데는 이 나라를 곧바로 가로질러 가서 다시 남동쪽 국경을 통과하여, 모잠비크의 밀랑게 근처 수용소에 있는 형제들과 합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피데시 은달라마는 1980년대 말에 밀랑게 수용소가 해체될 때까지 그 지역에서 순회 감독자로서 섬겼는데, 그 수용소가 게릴라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그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기질이 온화한 이 형제는 계속 여호와를 열심히 섬기고 있습니다.

1975년에 말라위로 돌아가도록 강요당한 형제들 중 일부는 말라위에 머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이 형제들은 도로를 가득 메우고서 자기들이 살던 마을로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많은 형제들에게 그것은 매를 든 사람들이 두 줄로 늘어선 사이를 뛰어가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형제들에게 그들이 나왔던 마을에 다시 정착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여호와의 증인들이 “당에 협조”하도록 강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청년들”이 도착하였습니다. 청년 연맹의 폭력배들은 우리 형제들의 집을 빙 둘러싸고는 당원증을 살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집집마다 대답은 동일하였는데, “아니오!”였습니다! 거부하자 온갖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까지도 이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을 구타하는 데 가담하였습니다. 남·녀에 대한 사악한 성폭행이 보도되었습니다. 강제로 그리스도인 남녀가 부도덕을 범하게 하려고 그들을 함께 묶어 두었다는 혐오스러운 보고도 있었습니다.

일상 생활을 하는 정상적인 일과 중에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충절에 대한 도전에 끊임없이 직면하였습니다. 병원과 시장과 학교에서, 또한 대중 교통 수단을 이용할 때에도 청년 연맹 단원들은 당원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지 늘 조사하곤 하였습니다. 계시 13:16, 17의 말씀 그대로, 아무도 ‘야수의 표’ 즉 세상의 정치 제도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증거 없이는 ‘사거나 파’는 일, 다시 말해서 단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확고함을 유지하였으며 결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박해자들 역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닥칠 일이 더 있었습니다.

교도소 안으로 모아지다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들 전체가 검거되어 강제 수용소 안으로 모아졌는데, 이 수용소가 운영된 방식은 나치 강제 수용소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어린아이들과 아기들을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의 부모에게서 떼어 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일부 어린아이들은 증인이 아닌 친척들에게 돌보도록 맡겨졌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채 버려지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1976년 1월에는 5000명이 넘는 남녀가 이 나라 전역에 있는 교도소와 수용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 상황은 처음에는 끔찍하였습니다. 과잉 수용 상태는 치사적인 질병을 초래하였습니다. 잔인한 교도관들은 비참한 상태를 가중시켰습니다. 한 교도관은 이런 말로 형제들을 조롱하였습니다. “정부가 정한 대로 우리는 당신들을 트랙터로 사용할 겁니다.” 바스톤 모세스 니이렌다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휴식을 갖거나 식사할 틈도 전혀 없이 혹사당한 적이 종종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악명 높은 드잘레카 강제 수용소에서 한 형제가 화장지에 이렇게 쓴 쪽지를 몰래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 “몹시 아픈데도, 일하러 나가도록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병든 아이들은 도와 병원으로 보내집니다. ·⁠·⁠· 환자가 여호와의 백성이면 그를 돌보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도와 병원을 여호와의 백성의 도살장이라고 부릅니다.”

교도관들은 우리 형제 자매들을 낙담케 하여 그들의 충절을 깨뜨리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교도관들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은 역경을 극복하는 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시멘트 포대 조각에 쓰인 한 쪽지에는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이러한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박해를 받고 돌을 나르는데도 형제 자매들은 모두 매우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나라로부터 여호와의 증인과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보낸 수많은 항의 편지들이 반다 대통령 집무실로 우송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호소는 전혀 소용이 없었으며, 우리 형제들은 여전히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형제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리스도인 집회를 교도소에서 갖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출판물이 몰래 반입되어 형제들 사이에 배포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였습니까? 「연감」 책이 드잘레카 교도소에 있는 형제들에게 이른 경위에 관해 바스톤 모세스 니이렌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감자가 아니면서 교도소 채소밭에서 일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그 형제가 늘 출입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검색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 책을 셔츠 속에 감추고서, 교도관들에게 채소를 배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떠나기 전에 그 책을 한 형제에게 전해 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특히 그 「연감」 책을 갖게 되어 기뻤습니다. 그 당시에는 「연감」에 일용할 성구와 해설이 전부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속히 작업하여, 모든 성구와 해설을 화장지 조각에 베껴 썼습니다. 꽤 많은 화장지 두루마리가 사용되었습니다! 2주 후에 「연감」 책이 한 교도관에게 발각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사본들을 수용소 전체에 배부한 뒤였습니다. 우리는 자매들이 수용되어 있는 구획에까지 사본을 전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이 드잘레카에서 작은 집단들로 나뉘어 거행되었습니다. 협회에 도착한 한 편지에 따르면, “소중한 날인 4월 14일에 1601명이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드잘레카에서 표상물을 취한 사람은 13명이었습니다. 그 보고서에는 이러한 내용도 들어 있었습니다. “연설이 있기 전에 거의 모든 감방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모임이 끝난 후에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교도소 내의 상태가 좀 누그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부 교도관들은 마침내 형제들에게 매우 우정적이 되었습니다. 한 교도관은 퇴직한 후에 진리를 받아들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마쿰바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역시 여호와께 헌신하였습니다. 그러한 일은 사도 바울이 이렇게 단언한 바와 똑같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갇혀 있지 않습니다.”—디모데 둘째 2:9.

금지령 아래서 여호와를 섬기는 일

박해의 강도가 다시금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1979년에는 여호와의 증인 대부분이 교도소에서 석방되었습니다. 이웃 사람들 사이에는 호기심이 팽배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왜 교도소에 갔습니까?” “왜 모두가 여호와의 증인을 박해하는 겁니까?” 그러한 질문들은 성서 토의를 위한 길을 열어 주었으며, 그리하여 그들 중에 여호와의 종이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되면 자기들도 예수께서 예언하신 바와 같이 미움의 대상이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참 종교를 정말로 실천하고 있음을 인식한 것입니다. (누가 21:17; 야고보 1:27) 흥미롭게도, 새로 침례받은 사람들은 이미 여호와의 증인이 된 사람들의 자녀들 가운데서보다도 증거할 때 만난 사람들 가운데서 더 많이 나왔습니다.

그 당시에 집회에서나 야외 봉사에서 사용할 성서 출판물이 어떻게 이 나라에 들어왔습니까? 1970년대 말에 말라위 밭을 돌보는 일이 잠비아 지부로 옮겨졌는데, 잠비아는 말라위에 인접해 있지만 짐바브웨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잠비아의 여러 서적 보관소가 말라위 국경 가까운 곳 요소요소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차량을 가진 아주 소수의 형제들이 차를 몰고 잠비아로 들어가서 커다란 출판물 꾸러미들을 모은 다음 은밀히 말라위로 들어왔습니다. 금지령이 내려진 초기에는 검문소가 몇 군데 없었기 때문에, 이 방법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필요한 서적과 잡지가 형제들의 수중에 들어오면, 집회가 마련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왕국회관에서 공개적인 모임을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그 대신 형제들은 은밀히 모임을 가졌는데, 흔히 밤에 이웃 사람들이나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 곳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여러 마을의 일부 형제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작은 땅이 있었는데, 대개는 마을 바로 외곽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장소는 모임을 갖기에 실용적인 곳이었습니다. 물론,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집회 장소로 가면 분명히 시선을 끌게 되므로, 형제들은 몇 사람씩 갔습니다. 일단 모든 사람이 그곳에 모이면, 집회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왕국 노래를 마음껏 부르지 않고, 단지 낮은 음성으로 불렀습니다. 또한 훌륭한 연설이 있은 뒤 열정적으로 박수를 치지 않고, 다만 양 손바닥을 살짝 서로 비볐습니다.

그렇지만 집회에 참석한 모두는 시기 적절한 영적 양식에 대해 감사하였으며 동일한 교육 프로그램을 즐기고 있는 세계 전역의 형제 자매들과 연합되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러한 집회들은 또한 형제들이 매우 중요한 전파 활동을 위한 준비를 잘 갖추게 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매우 슬기롭게 해야 하였습니다.

담대한 배달원들

한동안 출판물을 별 어려움 없이 말라위로 들여올 수 있었지만, 1980년대 중반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검문소가 이 나라 전역에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찰은 더 빈틈없이 차량을 조사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잠비아 보관소에 있는 출판물을 실어 오기 위해 더는 자동차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수 있었습니까?

자전거를 더 광범위하게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자전거로 숲을 통과하면서 검문소나 국경 통과 지점을 비켜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배달원으로 봉사하는 데는 커다란 용기와 강한 믿음이 필요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느님께서 그들의 충성스러운 봉사를 축복해 주셨음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경험담들을 고려해 보십시오.

렛손 음롱고티는 잡지가 든 큰 포대를 자전거 뒤에 싣고 릴롱궤를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경찰과 말라위 청년 개척자 단원들을 비롯하여 많은 군중이 대통령의 방문을 기대하여 거리에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매우 긴장되었습니다. 그 후 그가 모퉁이를 돌 때 등골이 오싹하게도 포대가 떨어져 열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잡지들이 땅바닥으로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그 형제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우리 형제는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잡지들을 도로 포대에 넣도록 그저 도와 주고 있다는 것을 그는 직감하였습니다. 약간 떨리긴 하였지만, 안심하게 된 그는 경찰과 말라위 청년 개척자 단원들의 눈을 멀게 해 주신 데 대해 여호와께 감사하면서 가던 길로 즉시 다시 떠났습니다.

프레드 라멕 귀리제는 회중 우편물을 전달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카숭구 근처의 언덕을 급히 내려가다가 전방에서, 청년 연맹 단원들이 배치되어 있는 검문소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이르기 전에 그는 멈추어 방향을 바꿔 재빨리 반대 방향으로 달렸습니다. 청년 연맹 단원들이 그에게 멈추라고 소리쳤습니다. “어디로 가는 거야?” 하고 그들은 외쳐 댔습니다. “언덕을 너무 빨리 내려가다가, 미처 방향을 바꾸지 못했습니다!”라고 배달원은 대답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그의 설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보호해 주신 것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용감한 형제들 가운데는 붙잡혀, 교도소에서 복역한 사람들도 여러 명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가장들이었습니다.

정기적인 “관광객”

1987년부터, 잠비아 지부 위원회의 위원인 에드워드 핀치가 말라위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였습니다. 말라위는 이름난 관광지였고 핀치 형제의 친척이 블랜타이어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 형제가 “휴일”에 이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수월한 일이었습니다. 에드워드 핀치는 겨우 열아홉 살 적에 그의 고국인 로디지아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을 때, 매클러키의 비밀 지하 저장실에 출판물을 비축하기 위하여 기도 오토와 함께 말라위에 들어간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이제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핀치 형제는 말라위와 관련하여 더 큰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핀치 형제가 말라위를 방문하는 일은, 충분한 성서 출판물이 말라위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잠비아 지부 사무실에서 염려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핀치 형제와 전국 위원회의 모임이 있었을 때, 위원들은 자기들을 격려해 주고 지침을 더 제공해 줄 외국 손님이 그 자리에 참석해 있어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전국 위원회, 순회 및 지역 감독자들, 배달원들과 비밀리에 갖는 일련의 모임들이 있었습니다. 모두는 회중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 위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열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말라위 국경 근처의 잠비아 보관소에 비축된 출판물이 다시 말라위로 정기적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핀치 형제는 종종, 아내인 린다와 함께 격려적인 “관광객”으로 여러 차례 말라위로 여행하였습니다. 그는 관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형제들을 격려하고 훈련시키기 위해 이 나라 방방곡곡을 여행하였습니다. 금지령 기간에 인도하던 형제들은 그의 방문에 대해 특히 감사하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일하면서 그가 나타낸 사랑과 참을성에 대해 고마워하였습니다.

배달원들을 지원함

물론, 배달원들이 자전거로 말라위의 모든 회중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 1988년에 소형 픽업 트럭을 구입하여, 국내에서 출판물을 배달하는 데 광범위하게 사용하였습니다. 운전자들은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는 지역들에 익숙해져서 슬기롭게 그러한 곳을 피해 갔습니다. 그들 외에도 자원 봉사를 한 용감한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들 가운데는 빅터 룰커가 있는데, 그는 블랜타이어의 영어 회중에서 섬기고 있었습니다. 개인 차를 이용하여 많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그는 종종 밤중에 전국에 있는 여러 은밀한 보관소로 출판물을 운송하였습니다. 1972년 이전에는,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는 시릴 롱이 그와 비슷한 지원을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우리 형제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의약품을 호의적인 제약 회사에서 염가로 구입할 수도 있었습니다.

영적 양식을 공급하는 데 있어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잡지를 성서 용지에 인쇄하고, 서적에 종이 표지를 부착하며, 「파수대」 연구 기사를—소형 잡지로 알려지게 된—특별한 형태로 인쇄하도록 브루클린의 협회 본부에서 승인한 일이었습니다. 에드워드 핀치가 1989년 4월에 배달원들과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우리 출판물의 이 새로운 특별판들에 관해 알려 주자, 배달원들은 감동되어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사랑에 찬 마련에 대해 참으로 감사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전보다 두 배나 되는 출판물을 배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출판물은 접어 숨기기가 훨씬 수월하였습니다. 소형 잡지는 대중 교통 수단을 이용하면서도 드러내 놓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것이 무슨 책인지 몰랐습니다! 참으로, “충실하고 분별 있는 종”은 ‘적절한 때에 영적 양식’을 공급하라는 사명과 일치하게 행하였습니다. (마태 24:45-47) 이 귀중한 “양식” 공급품은 여호와의 종들이 역경 아래서 충절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독특한 회중

유감스럽게도 1990년에, 협회에서 사용하는 작은 트럭이 경찰차와 관련된 사고에 연루되었습니다. 트럭에 들어 있는 것이 경찰에 발견되자, 두 형제는 즉시 체포되어 수감되었습니다. 그 중 한 형제는 레몬 카브와지였습니다.

치치리 교도소에 와서, 카브와지 형제는 그곳에 이미 수감되어 있는 10명의 형제가 딱한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참” 수감자들은 모든 담요를 훔쳐 가고 형제들이 집회를 갖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카브와지 형제는 조처를 취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내인 크리시가 면회왔을 때, 자기 옷 몇 점을 교도소에 갖다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적절히 입을 수 있도록 자기 옷들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다른 수감자들이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후 카브와지 형제는 모든 담요를 수중에 갖고 있는 “고참” 수감자들과 사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어떤 형제에게 설탕 10킬로그램을 사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설탕 1킬로그램으로 담요 한 장을 샀습니다.” 카브와지 형제의 말입니다. 또한 설탕은 “고참” 수감자들의 우정을 ‘사기도’ 하였는데, 그들은 이제 아무런 방해 없이 집회를 갖도록 허용하였습니다.

정기적인 집회가 교도소 뜰에서 열리면서 얼마 안 있어 한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회중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모퉁이 회중이었습니다. 집회가 교도소 뜰의 한 모퉁이에서 열렸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에 모퉁이 회중은 정기적인 참석자 수가 60명을 넘게 되었습니다. 장로 세 명과 봉사의 종 한 명이 있는 이 새로운 회중은 잘 돌보아졌습니다. 회중 구역 역시 매우 생산적이었습니다. 언제나 “집에는”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카브와지 형제가 교도소에서 사회한 다섯 건의 성서 연구 중 후에 두 사람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건강에 좋은” 양식

하지만 모퉁이 회중이 직면한 한 가지 문제는, 출판물을 집회에서 사용하도록 어떻게 교도소 안으로 들여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카브와지 형제는 이 경우에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방금 교도소에서 석방된 형제에게 식품 한 꾸러미를 가지고 다시 찾아오게 하였습니다. 교도관들이 그 꾸러미를 조사할 때 보이는 것이라고는 말라위에서 인기 있는 주요 식품인 카사바 뿌리들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카사바야말로 얼마나 “자양분이 많”고 “건강에 좋은”지를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카사바 뿌리 하나하나의 속을 얇게 베어 냈던 것입니다. 이 뿌리들 속에 소형 잡지, 「추리」 책을 나눈 작은 부분, 「성경을 검토함」 책이 돌돌 말려 넣어져 있었습니다. “건강에 좋은” 이 식품이 그처럼 두 차례 배달된 뒤에, 형제들은 집회 및 성서 연구에서 사용하는 데 필요한 책을 전부 갖게 되었습니다. 카브와지 형제는 교도소에서 보낸 8개월 동안 「파수대」 연구 때 한 기사를 거듭 사용해야 했던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소형 잡지를 많이 받았다고 회상합니다.

오늘날에는 모퉁이 회중이 더는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말라위의 여호와의 백성은 더는 감금된 상태에서 집회를 가져야 하는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형제들이 존경을 받다

점차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공격이 전보다 뜸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문제가 생겼다는 보고가 때때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의 형제들은 확고함을 유지하였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의 백성을 존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음치니이 지역에서 촌장 음자마는 “내 관할 구역에 살고 있는 친애하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 서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관할 구역에 있는 증인들은 모두 매우 선량한 사람들입니다. 내 관할 구역은 1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는 증인들을 가리켜 믿음직한 납세자들이고, 높은 도덕 표준에 고착하며, 깨끗하고 공손하고 근면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한 다음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인 여러분 모두가 계속해서 여러분의 법에 따라 살도록 격려하는 바입니다.”

1990년 초에 블랜타이어 근처의 나테녜에서 열린 순회 대회 때 청년 연맹 단원들에게 체포된 22명 가운데는 오스틴 치고디도 있었습니다. 당시 70대 후반인 치고디 형제는 교도소에서 1년 반을 보낸 후에 석방되었습니다. 일부 청년 연맹 단원들은 이 연로한 사람이 여전히 생존하여 하느님께 충실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매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성서 연구를 요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치고디 형제는 매우 조심성이 있어, 형제들을 위태로운 처지에 빠지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청년들은 끈기 있게 요청하였습니다. 마침내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쁘게도, 몇 사람은 잘 발전해서 침례를 받았으며, 현재 장로나 봉사의 종으로 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다른 충실한 형제인 사무엘 드자오농가는 중립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드잘레카에서 네 차례의 금고형을 견디어 냈습니다. 그 후 1989년에 또다시 당원증을 사기를 확고하게 거부하자, 그는 다섯 번째로 체포되었습니다. 청년 연맹 단원들은 살리마의 경찰서로 그를 연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담당관에게서 이런 말을 듣자 깜짝 놀랐습니다. “이 사람을 또다시 교도소로 보내고 싶으면, 차라리 이 사람과 합류할 준비를 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이 사람이 자기 믿음을 전혀 타협하지 않고 여태까지 어떻게 인내해 왔는지를 여러분이 깨닫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기꺼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들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담당관은 이렇게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마을로 다시 데려가고 더는 괴롭히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는 결코 자기 믿음을 타협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드자오농가 형제는 차에 실려 다시 마을로 가게 되었습니다. 마을에 도착하자, 촌장이 소환되어 우리의 형제가 다시는 괴롭힘을 받지 않게 하라는 주의를 받았습니다. 그때 이후로 사람들은 드자오농가 형제가 괴롭힘을 당할 염려 없이 공개적으로 「파수대」와 「깨어라!」지를 읽거나 이웃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공식 증거

금지령 기간에 걸쳐, 비공식 증거가 행해졌습니다. 하지만 반대가 그다지 심하지 않을 때는 좀더 담대하게 증거하기도 하였습니다. 1990년 초에 은체우 읍에서 성서 진리에 관심을 나타내는 젊은 여자에게 「위대하신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음」 책을 전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혼자서 잘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방문한 형제들은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 달라고 부탁하도록 권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반드시 댁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고 형제들은 당부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그 여자는 남동생인 시몬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남동생은 그 여자가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시몬은 누나에게 그 책을 읽어 주다가, 즉시 진리라는 느낌이 들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시몬과의 정기적인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시몬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점을 혼자서 성서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이 참 종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디모데 둘째 3:12) 시몬 만가니는 급속히 발전하여 같은 해에 침례를 받았으며, 지금은 릴롱궤의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블랜타이어에서 갑작스러운 폭우로 인해 정규 파이오니아인 베스톤 마데야는 예기치 않은 성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작은 교회 건물의 베란다에 가서 비를 피하였습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떤 사람들이 자기 목회자에게 “선한 사람들은 다 하늘로 갑니까?” 하고 질문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대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을 돕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긴 마데야 형제는, 교회 안으로 들어가서 그 질문에 대답해 주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받아들였습니다. 더 많은 질문이 이어졌으며, 오래지 않아 일곱 건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청소년들 역시 증거할 기회를 이용하였습니다. 도로시 나쿨라는 작문 숙제를 받았을 때 크리스마스의 기원에 관해 쓰기로 하였습니다. 담당 교사는 깊은 감명을 받고 그가 쓴 글을 다른 교사들에게도 보여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자료를 어디서 얻었니?” 하고 교사들은 물었습니다. 그 결과 도로시는 교사들에게 17부의 잡지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삼촌에게”

여호와의 종들은 숱한 환난을 인내해야 하였지만, 혼자라고 생각한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지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세계 도처의 형제들의 사랑과 지원을 확신하였습니다.

로디지아(지금은 짐바브웨)와 잠비아의 지부들이 수행한 일 외에도, 장성한 지방 형제들은 말라위의 양 무리가 사랑에 찬 돌봄과 영적 양식을 받도록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요원 사무실(Staff Office)이라고도 하는 전국 위원회는 이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한 일에는 어떠한 것이 포함되었습니까? 여러 해 동안 전국 위원회로 봉사한 레몬 카브와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로, 우리의 책임은 출판물이 우리 형제들에게 꼭 전달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배달원들과 순회 감독자들을 조직하고 격려하는 데 많은 시간을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박해를 당한 형제들을 어떻게 지원하고 강화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격려적인 편지와 공급품이 여러 회중에 전달되었습니다. 우편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서, 형제들은 서로 신분을 노출시키는 일을 피하기 위해 특별한 암호와 별칭을 개발하였습니다. 전국 위원회에서 보내는 편지에는 “S.O.”라고 서명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설령 편지를 도중에 빼앗긴다 해도, 당국은 누가 보낸 편지인지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순회 감독자들은 그들이 섬기는 순회구 번호에 의해 알려졌으며 순회 방문은 “특별한 주간”으로 언급되었습니다. 요즈음도 여전히, “M-11이 머지않아 특별한 주간에 우리를 방문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일부 사람들에게서 듣습니다. 전국 위원회의 경우는 어떠하였습니까? 전국 각처에서 받는 편지는 “사랑하는 삼촌” 앞으로 보내졌으며, 회신은 여러 “조카”나 “조카딸” 앞으로 보냈습니다. 그러한 신중한 접근 방법은 금지령이 내려진 여러 해 동안 서신 왕래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국 위원회의 위원으로 섬긴 장로들은 왕국 권익을 첫째로 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마태 6:33) 엘리손 은중가, 하베리 퀴야, 아드손 음벤데라, 레몬 카브와지와 같은 일부 장로들은 여전히 전 시간 봉사자로서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세운 충실한 모범을 통해 다른 많은 사람들은 생활에서 왕국을 첫째 자리에 두고 역경에도 충절을 유지하도록 격려를 받아 왔습니다.

정치적 변화

새로운 “민주주의” 열풍이 아프리카 남부를 휩쓸기 시작하자, 말라위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92년에, 인권에 관한 기록을 개선하라고 이 나라 정부에 촉구하는 국제적인 압력이 가중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대통령인 반다 박사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습니다. “국민에게 당원증을 사도록 강요하는 사람은 누구나 ·⁠·⁠· 말라위 국민 의회당의 규정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대단히 부당한 일이다. ·⁠·⁠·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러한 일을 하도록 명령한 적이 없다.” 그리하여 반다 박사는 말라위의 우리 충실한 형제들을 25년 동안이나 몹시 괴롭혀 온 일을 중단시켰습니다.

이러한 조처가 있은 뒤, 여호와의 증인들은 대부분의 집회와 대회가 공개적으로 자유로이 열릴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괴롭히거나 박해한다는 보고가 더는 전혀 없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며, 형제들은 이 기회를 온전히 이용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뒤이어 일어날 일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는 경이로운 하느님이십니다!”

1993년 8월 12일은 말라위의 여호와의 증인에게는 참으로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거의 26년 동안 지속된 금지령이 마침내 해제된 것입니다. 처음에 형제들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하였습니다. 1967년에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에는 전국의 신문들이 “‘위험한’ 종파”—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취해진 조처에 관하여 대서특필하였습니다. 이제 금지령이 해제되자, 개미 소리만한 작은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한 형제가 「관보」에 실린 조그마한 공고문을 발견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소식이 서서히 형제들에게 전해지자, 형제들은 기쁨에 넘치면서도 다소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카브와지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금지령이 언젠가 해제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반다 박사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그 일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여호와는 경이로운 하느님이십니다!”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인 1967년에는 약 1만 8000명의 전도인이 회중과 활동적으로 연합하고 있었습니다. 잔인한 반대가 종종 있었던 26년이 지난 뒤인 이제는 전도인의 수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3만 408명의 신기록에 달하였습니다! 우리 형제 자매들의 충절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리하여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이름에 찬양이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새로이 얻은 자유로 인해 기쁨에 넘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일이 앞에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운동

금지령이 해제되었다는 소식이 잠비아 지부 사무실에 알려지자, 에드워드 핀치가 말라위로 파견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관광객으로서가 아니라, 말라위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법적으로 다시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도록 파견된 것입니다. 방문 중에, 에드워드 핀치는 아내와 함께 브랜타이어 영어 회중과 함께 활동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곳의 전도인은 대부분 호별 증거 활동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불안해한 것도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핀치 부부가 약간 설득하자, 전도인이 모두 야외로 나가 봉사의 직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몇 시간 후에 돌아와서 경험담을 나누는 것은 매우 가슴 벅찬 일이었습니다! 많은 집주인들이 진지하게 잘 들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이제 누리게 된 자유에 대해 축하해 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한 뒤에, 형제들은 봉사의 직무에 참여하는 것이 아주 쉬운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말라위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다시 등록시키는 일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말라위에서 협회가 전에 등록된 적이 있다는 증거를 어느 관청에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드워드 핀치가 블랜타이어 등기소에 있는 오래 된 서류 한 뭉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W”라고 표시된 그 서류 뭉치를 뽑아 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등록된 원본이 있었습니다! 이제 법적 절차를 밟는 일이 신속히 진행되었습니다. 1993년 11월 15일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사용하는 법적 기관인 펜실베이니아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다시 등록되어, 여호와의 증인은 하나의 종교로서 말라위에서 또다시 법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 해 말경에, 전국적으로 특별한 전도지 배부 운동을 벌였습니다. 적절하게도, 「여호와의 증인은 무엇을 믿는가?」라는 전도지가 세 개의 주요 언어로 제공되었습니다. 이 전도지 배부 운동은 이중적인 목적에 기여하였습니다. 첫째로, 이 운동은 형제 자매들이 또다시 부지런히 공개적인 봉사의 직무에 참여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둘째로는, 일반 대중이 여호와의 증인에 관한 사실들을 직접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100만 장 이상의 전도지가 배부되었으며, 관심을 나타내는 많은 편지가 잠비아 지부 사무실로 쇄도하였습니다. 또다시 여호와를 찬양하는 공개적인 선포가 말라위의 집집에서 그리고 가두에서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활동을 재조직함

금지령이 해제되었다는 소식이 잠비아에 전해졌을 당시 아프리카 남부 지역을 위한 봉사 훈련 학교의 첫 학급이 잠비아에서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소식을 듣고 벧엘 성원들과 봉사 훈련 학교 학생들은 모두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두 명의 학생은 말라위로 임명을 받고 매우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그들은 1967년 이래로 이 나라로 임명된 외국 출신의 첫 번째 전 시간 종들이었습니다. 앤드루 버드와 카를 오퍼만이라는 이 두 형제는 지금도 릴롱궤의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같은 학급에서 그러한 훈련을 받은 최초의 말라위 사람인 베르나르드 마준다는 그 이후의 학기를 졸업한 사람들과 함께 현재 순회 감독자로서 섬기고 있습니다.

한편 잠비아 지부의 형제들은 말라위의 활동을 재조직하는 일에 관련된 문제들을 계속 처리하였습니다. 그들은 얼마 안 있어,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더는 금지되어 있지 않지만 성서 출판물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법무부 장관과 매우 유익한 면담을 가졌습니다. 그는 즉시 협회 출판물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하는 조처를 취하였습니다. 더욱이, 그는 새로운 지부 사무실이 들어설 적합한 땅을 물색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결과, 릴롱궤에서 12헥타르의 쾌적한 땅을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 나라 중앙에 위치한 이 부지에 새로운 지부 시설을 건축하기 위한 작업이 벌써 착수되었습니다.

회중들이 다시 공개적으로 집회를 갖기 시작하자, 많은 형제들은 금지령이 내려진 이래로 본 적이 없는 벗들을 만나게 되어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집회가 시간을 초과하여도, 아무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습니다. 청중은 형제들의 연설을 듣고 감사의 표시로 단지 양손을 서로 비벼야만 한다는 제한을 더는 받지 않았습니다. 전과는 달리, 연단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정적인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더는 낮은 목소리로 왕국 노래를 부를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제 형제들은 크고 명료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여호와여, 감사합니다”라는 노래가 모두의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형제들은 조직적인 문제에 관한 최신 지식을 갖추는 데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장로들은 협회 사무실이나 그 밖의 특별히 훈련받은 형제들로부터 지침을 겸손하고도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회중 내의 조직적인 절차가 급속히 개선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전도인 수 역시 계속 증가하였습니다. 금지령이 해제되고 나서 그 다음 봉사 연도에 4247명의 새로운 제자가 침례를 받았으며, 8만 8903명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참석하였습니다.

많은 도움을 받다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에 말라위에서 봉사했던 두 선교인 부부가 돌아오리라는 소식이 널리 전해지자 전국의 형제들이 몹시 기뻐하였습니다. 그동안 잠비아에서 봉사해 왔던 키스 이튼과 앤 이튼은 릴롱궤의 사무실 일을 돕기 위하여 1995년 2월 1일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후, 자이르(지금은 콩고 민주 공화국)에 있던 야크 요한손과 린다 요한손이 블랜타이어의 선교인 집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두 부부는 이 나라의 영구 거주자들로 복귀되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오랫동안 일한 이 선교인들과,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에 함께 봉사했던 말라위 형제 자매들은 참으로 행복한 재연합을 누리고 있습니다!

1995년 2월에는 맬컴 비고가 최초의 지구 감독자로서 실로 오랜만에 말라위를 방문하는 특권을 받았는데, 그는 현재 나이지리아 지부에 있지만 금지령이 내려졌을 당시에는 말라위 지부의 종이었습니다. 그의 아내인 린다 루이즈가 남편과 함께 방문하였습니다. 맬컴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참으로 감격적인 경험이자 특권이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었습니다.”

한편, 다른 선교인들과 자격을 갖춘 인근 지부의 형제들 역시 말라위로 임명되었습니다. 야외로부터 편지들이 쇄도하였습니다. 분명히 ‘의 일에서 할 일이 많’았습니다.—고린도 첫째 15:58.

“기쁨이 충만한 찬양자”

1995년 7월과 8월에, 말라위 증인들이 28년 만에 처음으로 지역 대회를 열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의 느낌이 어떠하였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아프리카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대회가 그러하듯이, 가족들은 담요, 단지, 냄비, 심지어 요리용 땔감을 포함하여 온갖 카툰두(짐)를 가지고 왔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금지령이 내려지기 직전에 열렸던 일련의 마지막 대회들을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나이가 너무 어려서 또는 그때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이거나, 당시에는 아직 진리를 배우지 않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이번이 첫 번째 지역 대회였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찬양자”라는 주제는 참으로 매우 적절하였습니다. 대회장에 도착했을 때, 믿어지지 않아 눈을 비벼 대면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계 전역의 동료 숭배자들과 연합하여 이번 대회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어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이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도합 아홉 개의 대회가 열렸으며, 총 7만 7000명 이상이 참석하였습니다! 야외 봉사에서 사용할 새로운 도구인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지식」 책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대회에서는 「지식」 책이 영문으로만 발표되었지만, 형제들은 치체와어로도 번역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기뻐하였습니다.

영어 대회도 있었습니다. 규모가 작기는 했지만, 상당히 국제적인 행사였습니다. 참석자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모잠비크, 자이르, 잠비아, 짐바브웨에서 왔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대회는 블랜타이어의 콰차 회의 센터에서 열렸는데, 이 장소는 정당 대회를 열기 위해 반다 박사에 의해 특별히 건축된 곳이었습니다. 두 명의 지방 형제, 비다스 마도나와 락손 쿠녜가 금지령 기간에 겪은 일에 대해 회견하였을 때 참석자들은 진지하게 잘 들었습니다. 에드워드 핀치 역시 이 대회에 참석하였는데, 이 행복한 행사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날을 위해 참으로 오랫동안 기도해 왔습니다! 그때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빅터 룰커가 딸 안젤린에게 비밀리에 욕조에서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침례를 주는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눈물이 글썽였고 또 목이 메었습니다.” “여호와여, 감사합니다”라는 감동적인 노래로 대회가 끝나게 되었을 때, 또다시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대회에 참석한 기쁨이 충만한 찬양자들은 이 아홉 개의 모든 대회를 오랫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지부 운영이 재개되다

1995년 9월 1일에 말라위 사무실이 다시 지부가 되어, 통치체의 감독 아래 운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사무실이 릴롱궤에 있었습니다. 542개 회중과 3만 명 이상의 전도인이 있었으므로 할 일이 많았습니다.

이제 실로 일이 진척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열 명의 벧엘 봉사자는 처음에는 많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대단히 힘겹게 일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때 이후로 더 많은 벧엘 봉사자들과 그 밖의 자원하는 형제들이 초대되어 도왔습니다. 또한 치체와어와 툼바카어 번역팀들이 잠비아에서 다시 그 언어들의 “고향”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지부는 형제들이 충절을 시험하는 새로운 상황들에 대처하도록 부지런히 도와 왔습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는 기 경배, 부도덕, 마약 남용, 나쁜 교제가 포함됩니다. 수혈과 관련된 문제에 직면한 형제들을 돕기 위하여 병원 안내 봉사부가 마련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여행하는 봉사를 하다가 말라위로 임명이 바뀐 두 형제와 그들의 아내 역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역 감독자로서 훌륭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좀더 최근인 1997년 3월 20일에 기뻐할 만한 일이 또 있었습니다. 정오 라디오 뉴스 시간에 말라위 전역의 증인들은 정부에서 이전 지부 소유지를 협회로 반환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그 소유지는 1967년에 이전 정부에 압수되어 말라위 국민 의회당의 남부 지역 본부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약 30년 동안 공백이 있은 뒤, 이제 그 소유지가 다시 정당한 소유주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이 소식이 그 날 내내 모든 주요 언어로 모든 뉴스 방송으로 거듭 전해졌을 때 이 나라 전역에 매우 좋은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건물은 여호와의 증인의 정기적인 그리스도인 집회를 갖는 장소로 다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라게 하신다

여호와께서는 금지령이 해제된 이래로 참으로 말라위에 있는 종들의 활동을 축복해 오셨습니다. 많은 집주인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을 자기 집으로 기꺼이 초대하고 출판물을 받고 무료 가정 성서 연구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최근에 열린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지역 대회들 중 어느 대회 때에, 한 여자는 나미테테 읍 근처에 함께 모이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큰 무리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 여자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어디서 오고 있습니까? 정말 놀랍습니다! 여러분은 아주 오랫동안 금지령 아래 있었잖아요.” 그 여자는 자신이 본 것에 감동된 나머지 행복한 숭배자들의 무리에 가담하여 프로그램을 귀기울여 들었습니다. 그 후에 그 여자 역시 성서 연구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한때 적이었던 사람들도 진리에 호응하고 있으며, 마음이 감동된 나머지 금지령 기간에 자기들이 한 행동에 대해 사과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정부가 시키는 바람에 여러분에게 그토록 못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형제들은 그러한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한 것을 환영할 정도로 매우 기뻐할 뿐입니다. 심지어 이전에 장관을 지낸 적이 있는 사람도 릴롱궤의 한 파이오니아와 성서 연구를 하고 있는데, 그는 우리 형제들이 1975년에 모잠비크에서 강제로 송환될 때, 형제들을 “환영”하면서 마을로 돌아가서 여당과 협조하도록 당부했던 사람입니다.

증인들은 아무도 적개심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복수할 기회를 노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로마 12:17-19) 이제 그들은 여호와 하느님을 찬양할 자유를 갖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은 오로지 그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봉사의 직무에서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도구라면 어느 것이든 잘 사용하는 법을 간절히 배우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사용하여 추리함」 책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지식」 책 그리고 협회 비디오와 같은 도구를 사용함으로, 수많은 관심자들이 성서 연구를 시작하도록 도와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계속 찾도록 여호와께서 얼마 동안이나 허락하실지 모릅니다. (사도 13:48) 하지만 분명한 점은, 이 나라에서 영적으로 모아들이는 일에 놀라운 잠재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1998년 6월에 가슴 설레게도 전도인 신기록이 보고되었는데, 그 수는 4만 2770명이었습니다! 1998년에 열린 “하느님이 인도하는 생활의 길” 지역 대회에 총 15만 2746명이 참석하였으며, 같은 해에 좀더 앞서 가진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는 12만 412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말라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실로 매우 밝은 장래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이르도록 도울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돌아올 가족 성원들과 사랑하는 벗들을—귀중한 믿음을 타협하기보다는 차라리 기꺼이 죽음을 택한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을 환영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라위가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거할 세계적인 낙원의 일부가 되고, 여호와를 사랑하고 섬기는 모두가 영원히 완전한 생명을 누리게 될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말라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믿음의 심각한 도전들을 인내해 왔습니다. 그들은 세계적인 형제 관계의 일부이며, 그들이 역경 아래서 지킨 충절은 전세계 형제들에게 격려의 근원이 되어 왔습니다. 또한 “순조로운 시기에도 곤란한 시기에도” 좋은 소식을 전파하려는 그들의 간절한 열망은 본받을 만한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디모데 둘째 4:2) 말라위의 증인들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서 “아프리카의 푸근한 심장부”를 발견하였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1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잠비아

신다 미살레 수용소

말라위

말라위 호수

릴롱궤

좀바

블랜타이어

물라녜 산

모잠비크

음랑게니 수용소

밀랑게 수용소

모잠비크

[148면 전면 삽화]

[153면 삽화]

1925년에 침례받은 그레셤 콰지지라

[157면 삽화]

빌 매클러키, 협회의 좀바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모습

[162면 삽화]

말라위의 한 전형적인 마을

[165면 삽화]

알렉스 마팜바나

[170면 삽화]

물라녜 산 근처의 대회장에 도착하고 있는 증인들, 1966년

[177면 삽화]

증인들의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지부 건물의 문에 자물쇠가 채워졌다

[178면 삽화]

핀리 음위녜레는 자기 집이 파괴되었는데도 그의 관심사는 형제들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186면 삽화]

빌 매클러키와 그의 아내인 데니스

[192면 삽화]

중앙 연단. 성서 교훈을 베풀고 수용소 내의 임무를 배정하던 곳

[193면 삽화]

“7-2-7”로 알려진 밧손 롱궤

[194면 삽화]

음랑게니 근처의 나지폴리 난민 수용소. 증인들이 가족을 위해 지은 집들이 있다

[200, 201면 삽화]

증인들은 믿음 때문에 투옥된 적이 있지만 계속 기쁨으로 섬겼다

[202면 삽화]

자유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형제들에게 영적 양식을 전해 준 배달원들

[204면 삽화]

금지령 중에, 에드워드 핀치와 린다 핀치는 말라위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다

[210면 삽화]

강습을 받기 위해 야외 교실에 모인 장로들

[215면 삽화]

말라위로 돌아와서 행복해하는 키스 이튼과 앤 이튼, 린다 요한손과 야크 요한손

[216면 삽화]

지부 위원회 (위에서 아래로): 레몬 카브와지, 키스 이튼, 콜린 카르손

[217면 삽화]

위: 이전 지부 소유지가 반환되자 열렬히 자원하여 그곳을 청소하는 증인들

오른쪽: 지부로부터 회중 출판물 공급품을 받고 있는 형제들

[218면 삽화]

비다스 마도나와 재회한 맬컴 비고. 두 사람은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에 지부에서 함께 봉사한 적이 있다

[220면 삽화]

풀로 엮어 지붕을 인 왕국회관. 600개의 회중이 더 왕국회관을 필요로 하고 있다!

[223면 삽화]

말라위에서 왕국의 좋은 소식을 계속 선포하고 있는 기쁨이 충만한 증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