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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도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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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부채꼴 모양의 카르파티아 산맥 동쪽에 위치한 몰도바는 평원과 깊은 계곡과 좁은 골짜기와 숲으로 덮인 경사지로 이루어져 있는 비옥한 땅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풍경의 3만 400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나라에는 여우, 늑대, 토끼, 오소리, 사슴, 어민족제비, 긴털족제비, 멧돼지 등 다른 여러 동물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비옥한 검은 흙과 대체로 온화한 기후 덕분에 과일, 곡식, 야채와 같은 농산물이 풍부합니다. 천연 샘이 2200개나 있고 강과 하천이 3000개나 있어서 관개 용수가 충분하고 배수도 잘 됩니다. 이 나라의 강과 하천은 모두 남쪽의 흑해로 흐릅니다. 물살이 빠른 드네스트르 강은 이 나라의 주요 수로인데 이 강을 통해 거의 전국으로 운항이 가능합니다. 이 강의 상당 부분은 몰도바의 북·동·남쪽에 있는 나라인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이루거나 국경과 나란히 흐릅니다. 다뉴브 강의 지류인 프루트 강은 서쪽에서 루마니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몰도바가 지나온 격동의 과거

드네스트르 강과 프루트 강 사이에 있는 지역은 수 세기 동안 베사라비아와 몰다비아로 알려져 있었으며 유럽으로 가는 주요 육로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기원전 1000년부터 기원전 1년까지 이 지역은 스키타이의 영토에 속하였습니다. 그 후에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변경 지역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나라는 고트족, 훈족, 아바르족 등 다른 민족들로부터 계속 침략당한 격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13, 14세기에 몰다비아는 타타르의 속국이었고, 16세기에는 오토만 제국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1812년에 튀르크족은 부쿠레슈티 조약에 따라 베사라비아 전역과 몰다비아 절반에 대한 통치권을 러시아에 양도하였는데, 그때부터 베사라비아라는 이름은 그 지역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1918년에 베사라비아는 대(大)루마니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940년에 잠깐 동안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다가, 1944년에 다시 러시아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소련 정권 아래 그 지역은 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소비에트 공산 정권이 무너지자 몰다비아 SSR은 모스크바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1991년 8월 27일에 독립하여 몰도바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 수도는 이전에 키시네프라고 불리던 키시나우입니다.

몰도바는 인구가 1960년대에 급격하게 증가하였지만 1970년 이후로 증가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어 인구가 안정화되었습니다. 현재 인구는 약 430만 명입니다. 몰도바의 많은 사람들은 이 나라의 주요 산업인 포도 재배 및 포도주 양조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몰도바에서는 전 세계 포도주의 약 3퍼센트를 생산합니다. 몰도바산(産) 포도주는 특히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인기가 있습니다. (71면 네모 참조) 하지만 더 큰 포도원이 몰도바를 풍요롭게 해 왔는데 이 포도원은 최상의 열매 즉 여호와께 드리는 찬양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산출합니다.

“거품 이는 포도주를 내는 포도원!”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영적 이스라엘을 “거품 이는 포도주를 내는 포도원”으로 묘사하셨습니다. 예언된 대로 그 상징적인 포도원은 “생산적인 땅의 표면을 소출로” 즉 영양 많은 영적 양식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사야 27:2-6) 그 결과 수백만 명의 “다른 양들”이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연합하게 되었습니다.—요한 10:16.

몰도바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은 그러한 놀라운 예언의 성취에 참여하게 되어 무척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조직이 공급하는 영적 소출이 끊임없이 흘러 들어와, 현재 몰도바에는 주민 229명당 한 명의 전도인이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어떤 마을에는 주민 네 명 중에 한 명은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처럼 성장하기까지는 불 같은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거의 70년간 루마니아의 군주 정치, 파시스트, 공산주의자들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금지령을 내렸으며, 그들을 박해하고 투옥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다른 지역에서 해 오신 것처럼 몰도바에서도 영적 의미의 “거품 이는 포도주를 내는 포도원”에 관한 그분의 예언적 말씀을 성취시켜 오셨습니다. 그분은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여호와는 그것을 잘 지키고 있다. 수시로 내가 거기에 물을 줄 것이다. 아무도 거기에 주의를 돌리지 못하도록, 내가 밤낮으로 그것을 잘 지킬 것이다.” (이사야 27:2, 3) 몰도바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의 역사를 잘 살펴보고, 그들의 용기와 믿음의 모범을 통해서 여호와께 찬양을 돌리는 귀중한 열매를 계속 맺고자 하는 당신의 결심이 강화되기 바랍니다. 반대자 사탄이 당신 앞에 어떤 장애물을 놓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러셀이 밭을 살펴보다

문자적인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맺는 가지는 처음에는 조그만 싹에서 시작됩니다. 몰도바에서 시작된 영적인 성장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 가냘픈 싹을 오늘날 몰도바에서 볼 수 있는 열매 맺는 튼튼한 포도 덩굴로 자라게 하셨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고린도 첫째 3:6) 이 이야기는 19세기 후반에 성경 연구생 찰스 테이즈 러셀이 유럽 여행 도중 이 나라를 방문했던 때부터 시작됩니다.

러셀은 「시온의 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Zion’s Watch Tower and Herald of Christ’s Presence) 1891년 9월호에 자신이 유대인 변호사이자 그리스도인인 요세프 라비노비치라는 사람의 집을 방문한 것에 관해 기록하였습니다. 러셀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가장 흥미로웠던 경험 중 하나는 러시아의 키시네프 [현재는 몰도바의 키시나우]에 있는 요세프 라비노비치 형제의 집을 방문한 일입니다. 그는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으며, 모두가 주 예수의 신자들인 그의 모든 가족들도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 그가 「새벽」[「천년기 새벽」(Millennial Dawn) 시리즈의 서적들]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고 그 가르침에 깊이 공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러셀이 이 몰도바인 벗을 “라비노비치 형제”라고 부른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그 두 사람은 성서를 토의하는 중에 많은 성경적 요점들에 동의하였습니다.

라비노비치와 그의 가족은 당시 키시나우에 있던 5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와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일에 활동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약 125명이 앉을 수 있는 새로 지은 매우 깔끔한 숭배의 집”이 그의 집과 사무실에 연결되어 있었다고 러셀은 설명하였습니다. 라비노비치는 또한 새로운 수동 인쇄기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사용하여 특히 유대인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전도지들을 생산하였습니다. 약 6년 후인 1897년에 라비노비치는 러셀에게 이러한 편지를 썼습니다. “친애하는 러셀 형제에게. 금년을 마무리하면서 정기적으로 받아 보고 있는 당신의 귀중한 잡지 「시온의 파수대」를 통하여 당신이 나에게 영적인 기쁨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멀리서 영적인 양식을 가지고 오는 상인의 배와 같습니다.” 하지만 성서 진리에 대한 이 유대인 남자의 사랑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왕국의 씨가 몰도바에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기 시작할 때까지는 30년이 더 지나야 하였습니다.—마태 13:1-8, 18-23.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환멸을 느끼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에 유럽에서 일어난 극적인 정치적 변화는 몰도바에서 왕국 씨가 자랄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대전쟁—당시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을 그렇게 불렀음—이 끝나자 몰도바는 공산주의가 정권을 잡은 러시아와 관계를 끊고 루마니아에 병합되었습니다. 많은 몰도바 군인들은 전쟁의 공포를 경험하고 환멸을 느끼며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자라면서 정교회에 강한 충성심을 갖도록 교육받았지만 이제는 교회의 가르침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이온 안드로니크가 있었는데 그는 1919년에 고향 마을인 코르제우치로 돌아왔습니다. 전쟁 포로로 있을 때 재림교인들이나 침례교인들과 토의를 한 것이 성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포로 수용소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성서를 가지고 와서 가족 및 이웃들과 함께 성서의 소식에 대해 토의하였고 그들에게도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리에 그로자는 그러한 이웃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쟁 중에 미국에 있다가 여행 중에 얻은 “신약” 한 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안드로니크 가족과 그로자 가족은 가까운 이웃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토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당시에는 성경 연구생으로 알려진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출판물도 입수하였습니다.

일리에 그로자의 딸인 이오아나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 가족이 성경 연구생이 발행한 출판물을 처음 가지게 된 때는 아마 내가 겨우 여섯 살 때였을 거예요. 그 출판물을 어디서 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모와 언니들이 그러한 출판물들에 나오는 성경의 명확한 설명을 흥분해서 토의했던 기억이 나요.”

나중에 이온 안드로니크는 여호와께 헌신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집의 나머지 가족들과 그로자 가족 대부분은 달랐습니다. 이오아나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가 가진 집회는 처음에 우리 두 가족만의 모임이었지요. 우리 집에는 딸만 넷이 있었는데 안드로니크 집에는 딸만 아니라 아들도 몇 있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이 싹트게 되었고, 바실레 안드로니크가 언니인 페오돌리나와 결혼을 하게 되었지요.

곧이어 먼 친척인 투도르 그로자와 다리아 그로자 부부가 우리 성서 연구 집단에 함께하게 되었어요. 투도르는 매우 열정적인 성경 연구생이었답니다. 심지어 그는 출판물을 구하기 위해 또한 가지고 있던 많은 성서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 루마니아 클루지나포카에 있는 지부 사무실을 찾아가기도 하였지요. 몇 년 후 그는 우리 작은 회중에 큰 영적 버팀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지역에 살던 이아쿠보이 가족 역시 우리 집에서 열린 성서 토의에 참여했어요. 그 집의 가장이던 페트루 이아쿠보이는 전에 성서를 배부하던 한 사람에게 후대를 베푼 적이 있었죠. 그 방문객은 페트루에게 성경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켰답니다. 페트루는 짧은 기간 침례교 가르침을 조사해 보고 나서, 진리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어요. 그때가 바로 번창하던 우리 성경 연구생 집단과 연합한 때였지요.

우리 집단은 배우는 것들에 자극을 받아, 대부분 같은 마을이나 이웃 마을에 살고 있던 친구와 친척 모두에게 열정적으로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어요.”

「파수대」(영문) 1921년 12월 15일호에 실린 한 보고는 몰도바에서 왕국 소식이 얼마나 신속히 전파되었는지를 강조하면서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베사라비아[몰도바의 이전 명칭]에서 최근까지 재림교 전파자였던 한 형제는 이렇게 썼습니다. ‘많은 주변 지역을 제외하고도 이 지역에서만 약 200명이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1920년대 초에 시러우치 마을에서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던 일라리온 부가이안이 진리에 관한 지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충실히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성경 연구생인 모이세 치오바누가 독일에서 벌치 시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에서 교도소에 감금되어 있으면서 진리를 배웠습니다. 오래지 않아 한 집단이 형성되었는데 나중에 그 집단은 벌치의 첫 회중이 되었습니다.

루마니아 증인들이 도움을 베풀다

밭을 경작하고 또 하느님의 백성과 새로 연합한 사람들을 강화시키기 위해 1920년대에 루마니아 지부에서는 자격을 갖춘 형제들을 몰도바에 파견하였습니다. 그러한 초기의 복음 전파자들 가운데는 트란실바니아에서 온 바실레 치우카슈가 있었습니다. 그는 루마니아어와 헝가리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코르제우치에 있는 새로운 회중을 방문할 때면 바실레는 항상 일리에 그로자와 그의 가족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이오아나는 그러한 방문을 즐겁게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마도 그 당시 여덟 살밖에 안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치우카슈 형제의 방문이 기억납니다. 그는 정말로 친절한 형제였고, 항상 아주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자러 가려고 하지 않았지요! 언니와 나는 그 형제의 옆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곤 했죠.”

루마니아 증인들은 열정적인 지방 전도인들과 함께 좋은 소식을 가까운 마을들에 계속 전파하였습니다. 코르제우치에서 11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인 타바니에서는 카지미르 치슬린스키가 성서에서 배운 좋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카지미르는 루마니아에서 군 복무를 하던 중에 왕국 소식을 들었습니다. 타바니에서 카지미르의 전파에 맨 처음 반응을 보인 사람들 중에는 두미트루 고로베츠가 있었는데 그는 특히 열정적인 성서 연구생이었습니다. 두미트루나 그와 같은 형제들이 나타낸 열심 덕분에 오늘날 인구 3270명의 타바니에는 증인이 475명이나 있습니다.

1920년대 초에 왕국 소식은 코르제우치에서 3, 4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카라쿠셰니 마을에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카라쿠셰니 마을에서 가장 먼저 진리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블라디미르 룬구가 있는데, 그는 1927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블라디미르는 그리스도인 믿음을 위해 많은 박해를 인내하였고 여호와께 충실을 유지한 가운데 2002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참으로 많은 마을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현재 인구가 4200명인 카라쿠셰니에는 네 명 중에 한 명은 증인입니다!

또 다른 충실한 형제인 알렉산드루 미키트코프는 1929년에 루마니아의 이아시 시(市)를 방문하던 중 처음으로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의 아들 이반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는 우리 마을인 차울에 돌아오자 즉시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에서 그리스도인 집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이반은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는 루마니아 지부와 계속 연락하였고 때때로 장성한 형제들이 루마니아에서 우리를 방문하러 왔습니다. 슬프게도 1931년, 형제들이 그처럼 방문 중일 때 아기였던 여동생이 죽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많은 마을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였습니다. 루마니아에서 온 손님인 버니카 형제가 장례식을 주재하였습니다. 교직자들은 성경 연구생들이 품위 있는 장례식을 치르지 않는다고 소문을 퍼뜨려 놓았는데, 그는 그 소문이 거짓임을 폭로하는 훌륭한 증거를 하였습니다. 더욱이 버니카 형제의 연설은 부활의 희망을 명백하게 설명하였고 참석한 일부 사람들의 마음에 좋은 씨를 심어 주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이러한 사람들 역시 성서 진리의 편에 굳게 서게 되었습니다.

버니카 형제의 영적인 격려는 우리 가족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예로, 형인 두미트루는 콜포처(전 시간 봉사자)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돕고자 하는 열정으로 그는 얼마 안 있어서 몰도바의 아직 증거되지 않은 지역에서 전파하기 위하여 집을 떠났습니다. 가족은 진심에서 우러나와 형의 결심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형이 몹시 보고 싶었습니다. 한편 형이 방문차 집에 들러 야외에서 있었던 흥미진진한 경험담을 많이 말해 주었을 때 우리는 정말 기뻤습니다!”

교직자들의 반대가 거세지다

정교회의 교직자들은 처음부터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다 전에는 자기 교회의 성원이었던 사람들이 성서 진리를 배우고 나서 십자를 긋는 일이나 유아 세례를 거부하자 교직자들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이오아나 그로자가 약 열 살쯤 되었을 때, 그 지역의 정교회 사제는 그의 믿음을 타협시키기 위해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이오아나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아버지는 어린 우리에게 십자를 긋는 일이 비성경적이라는 점을 설명해 주었죠. 하지만 학교에서 사제가 십자를 그으라고 강요하였어요. 나는 그 사람이 무섭기도 하였지만 또 한편 아버지를 불쾌하게 해 드릴까 봐 걱정도 되었지요. 그래서 학교에 가는 대신 헛간에 숨곤 했지요. 하지만 며칠 후에 아버지는 내가 결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아버지는 나를 꾸짖지 않으시고 이유를 설명해 보라고 친절하게 말하였지요. 사제가 두려웠다고 이야기하자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곧장 그 사제의 집으로 갔지요.

아버지는 그 사제에게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어요. ‘만일 당신이 내 딸에게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준다면 종교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아이에게 말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런 일을 해 주지는 않으니, 내가 내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든 간섭하지 마십시오.’ 기쁘게도 그 이후로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 사제는 더 이상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았지요.”

대개 교직자들은 지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그러한 영향력을 이용하여 여호와의 종들의 선한 이름을 헐뜯었습니다. 그래서 교구민들은 형제들을 박대하고 형제들과 이야기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교직자들이 특히 잘 사용하는 방법 중 한 가지는 정치적인 적의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 당시 사람들은 국경 너머 소련에 있던 볼셰비키의 “위협”을 두려워하고 의심하였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정교회 사제들은 성경 연구생들이 십자 긋기를 거부하는 데는 정치적 동기가 있으며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음흉한 교직자들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직위를 더욱 남용하여 예수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것과 똑같이 정부 관리들을 선동하여 하느님의 백성을 반대하게 하였습니다.—요한 18:28-30; 19:4-6, 12-16.

1918년부터 1940년까지 몰도바는 루마니아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당시 루마니아는 왕정 또는 군주제를 택하고 있었습니다. 루마니아 정부는 종무 장관을 임명하였는데 그는 종교적인 문제를 관장하였습니다. 종무 장관은 정교회의 영향을 받아, 성경 연구생들이 하는 일에 반대하고 그들과 그들의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들을 금지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추측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형제들은 볼셰비키들과 결탁해 있다는 혐의로 고발당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에 대한 이러한 모욕적인 공식 조처로 말미암아 1925년 4월 25일 몰도바의 감찰감은 한 경찰 서장에게 이러한 정부 지시를 내렸습니다. “경찰 보안 지시 제17274/925번에 따라 내무부는 만국 ‘성경 연구생’의 선전 활동을 금지하고 중단시키기로 결정하였음을 알리며 이 일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처를 취하기 바란다.”

그러한 공식적인 반대가 형제들에게 미친 영향은 루마니아 지부 사무실에서 1927년 10월 17일에 세계 본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약해 보면, 그 보고서에서는 모든 곳에서 회중 집회가 중단되고 금지되었으며 ‘수백 명의 형제들이 군사 또는 민간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라고 알려 줍니다. 또한 ‘여름에는 집회를 거의 열 수 없었습니다. 특히 회중이 있는 대부분의 마을들에서는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비밀 정보 기관과 경찰이 회중을 철저하게 감시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집회는 숲이나 은폐가 잘된 장소에서 열렸습니다.’

보고서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3월에는 여행하는 감독자의 활동 역시 감소되었습니다. 같은 달에 내무 장관은 콜포처들을 찾아내어 이 모든 “선전원들”을 체포하라는 엄한 비밀 지령을 내렸습니다. 짧은 기간 내에 거의 모든 콜포처들이 교도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우리 형제들은 이 나라에서 활동을 시작한 때부터 반대를 인내해 왔기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우리를 궤멸시키려는 조처가 너무나 철저해서 꼼짝달싹할 수조차 없습니다.’

1920년대가 끝나 갈 무렵, 용기 있는 사람들과 가족들은 계속해서 정교회에서 탈퇴하여 성서 진리를 옹호하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1928년에 한 마을 사제가 상급자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편지에는 시러우치에 있는 그 사제의 교구에 있던 어른들과 아이들 43명의 명단이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성경 연구생’파의 성원들 명단을 동봉합니다. 그들은 노력은 하고 있지만 전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으며 교회조차 없습니다. 대신 그들은 가정 집에서 모입니다.”

사실 그 사제가 작성한 명단은 성경 연구생들이 “전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해 줍니다. 이름이 오른 43명 대부분이 이전에는 정교회의 성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명단에 나오는 아이들 중에는 아그리피나 바르부처가 있는데, 그는 현재 80세가 넘었으며 여전히 여호와께 드리는 봉사에 활동적입니다.

공개적으로 전파하는 일이 어렵게 되자 형제들은 비공식 증거 특히 친척들에게 하는 증거를 집중적으로 하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친척들간의 사교 활동을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 이러한 관습을 활용하였습니다. 당연히 어떤 법령도 가족 성원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전파 활동을 합법화하기 위한 노력

1925년에 전파 활동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진 후로 루마니아 클루지나포카에 있는 지부 사무실의 형제들은 타자기로 50면에 달하는 서류를 작성하여 종무 장관에게 제출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가르침과 믿음에 관한 간략한 기술과 함께 금지령을 해제해 달라는 공식적인 요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 1927년 9월에 형제들 중 한 명이 세 차례에 걸쳐 종무 장관과 개인 면담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마지막 면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숭배의 자유를 옹호해 주는 쪽으로 법이 변경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부는 그 형제들의 청원을 무시하였습니다. 사실 관리들은 계속 법령으로 괴롭힐 계획을 하였고, 여호와의 백성의 상황을 개선시키기는커녕 도리어 악화시켰습니다. (시 94:20; 다니엘 6:5-9) 이와 관련하여 1932년 5월 29일자 공식 문서에는 만국 성경 연구생의 “모든 형태의 활동이 완전 금지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백성을 상대로 한 이 공격은 루마니아와 몰도바에서 일사불란한 운동의 특징이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지방 정부와 관리들은 성경 연구생과 관련하여 어느 정도 자체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자신의 지역에서만이라도 좋은 소식을 변호하고 법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지방 관리들에게 접근하였습니다.—빌립보 1:7.

일부 지역에서는 이러한 노력이 실효를 거두었습니다. 클루지나포카에 있던 지부 사무실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로 옮긴 후 그곳에서 바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오래 계속된 긴 투쟁 끝에 마침내 1933년에 지부는 부쿠레슈티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성서 책자 협회에 대한 법적인 등록을 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일부 탁월한 법관들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가해진 제한 사항들에 동의하지 않음을 공개적으로 나타냈습니다. 예를 들어 1935년 5월 8일에, 클루지나포카 항소 법원은 여호와의 증인에게 내려진 금지령은 위헌이라는 용기 있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판결은 더 나아가 이렇게 계속됩니다. “압수한 책자들[여호와의 증인이 생산한 것]은 사람들 상호 간의 사랑과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무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자들이 체제 전복을 꾀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책자들은 국가의 안전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성의 목소리가 무시되다

하지만 당국은 대체적으로 계속해서 하느님의 백성의 활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1934년 3월 28일에 몰도바 소로카 읍의 보안 사무실 책임자는 키시나우에 있는 자기 상관인 지방 경찰 조사관에게 소로카 근처의 한 마을에는 1927년에 “단 두 가족만이 이 종파의 추종자였지만 그들이 ··· 다른 서른세 가족을 개종시켰다”고 불평하는 편지를 써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증인들이 “교회와 그 종교적 전통과 관습을 거부”하며 “사제의 전례를 요청하는 대신 그들 스스로 숭배를 한다”고 썼습니다. 그는 이러한 말로 편지를 끝맺었습니다. “[증인들은] 계속 새로운 개종자들을 만들며 이것은 확립된 질서와 국가의 안전을 위협한다.”

1937년 5월 6일, 바로 그 지역에 있던 형제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불법 종파 목록에서 제외시켜 달라는 탄원서를 써서 장관에게 보냈습니다. 소로카 지역의 군수가 그 지역의 장관에게 보낸 편지에는 당국의 반응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1937년 6월 15일자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 종무 예술부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법] 종파 목록에서 제외시켜 달라는 그들의 요구에 응할 수 없다. 그들은 그 종파의 이익을 위해 계속 활발히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발행하는 신문인 「모니토룰 오피치알」 1939년 7월 12일호에서는 그러한 적대적인 입장을 확인하면서 여호와의 증인과 그들이 사용하는 모든 법적 단체는 “완전히 금지”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당시 몰도바는 동방 정교회 국가이자 군주가 통치하고 있던 루마니아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관리들은 종교적인 편협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을 대할 때 법적 금지 조치보다 훨씬 더 심한 일도 행하였습니다.

관리들이 난폭해지다

두미트루 고로베츠와 카지미르 치슬린스키의 경험은 전파 활동에 대한 불 같은 반대가 정교회 맹렬 신자인 정부 관리들의 종교적 증오심에 의해 종종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두미트루와 카지미르는 타바니 마을에서 처음 성서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특성과 봉사에 대한 열정 때문에 곧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형제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1936년에 체포되어 호틴 읍(현재는 우크라이나에 있음)의 경찰서로 연행되었습니다.

우선 경찰은 두미트루와 카지미르를 잔인하게 구타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억지로 십자를 긋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두 남자는 계속되는 구타에도 불구하고 확고함을 유지하였습니다. 결국 경찰은 포기하였고 두미트루와 카지미르가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충실한 두 형제가 겪은 시련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파시스트와 공산주의자의 통치 아래서 좋은 소식을 위해 더 많은 고난들을 인내하였습니다. 두미트루는 일찍이 1976년에 러시아 톰스크에서 사망하였고 카지미르는 1990년 11월에 몰도바에서 사망하였습니다.

1930년대에 루마니아 지부는 몰도바의 활동을 감독하였습니다. 당시 지부의 종은 1922년에 침례받은 마르틴 마기아로시였습니다. 그는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 찬 관심에서 우러나와서 특히 형제들이 시련을 겪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 하느님의 백성을 강하게 하고 격려하기 위해, 사위인 팜필 알부와 함께 몰도바 북부의 많은 회중들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러한 방문은 참으로 시기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만간 유럽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진원지가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몰도바는 그 나라를 탐내어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는 더 강한 이웃 나라들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이 황폐되다

1939년 8월 23일, 소련과 독일 나치 정부는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습니다. 일주일 후인 1939년 9월 1일에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그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1940년 6월 26일에 소련의 외무 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루마니아 정부를 상대로 그 당시 베사라비아로 알려진 지역을 소련에 조건 없이 양도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루마니아는 이 요구에 굴복하였고, 1940년 6월 28일에 소련군은 몰도바로 진주하였습니다. 1940년 8월에 소련은 키시나우를 수도로 하는 몰다비아 SSR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소련이 몰도바를 지배한 기간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1941년 6월 22일에 독일은 1939년의 불가침 조약을 위반하고 러시아를 침공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태 진전을 틈타, 루마니아는 독일 편임을 선포하였고 몰다비아 SSR을 소련으로부터 되찾기 위한 노력에 착수하였습니다.

그 계획은 성공하여, 1941년 7월 26일까지 루마니아 군대는 러시아 군대를 드네스트르 강 건너편으로 몰아냈습니다. 결국 1년이 조금 넘는 소련 통치 후에 몰도바는 다시 루마니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1940년 9월부터 정권을 잡은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 장군이 이끄는 극도로 국가주의적인 파시스트 정부인 루마니아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이온 안토네스쿠 정권은, 하느님의 왕국을 충성스럽게 지지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중립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관용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파시스트 지배 하의 혹독한 시련

히틀러 및 추축국과 동맹을 맺은 안토네스쿠의 파시스트 정부는 얼마 안 있어 여호와의 증인을 무력으로 압제하려고 하였습니다. 1919년에 태어난 안톤 픈테아의 예를 고려해 봅시다. 안톤은 십대 시절에 진리를 배웠으며 호별 방문 봉사를 열정적으로 하였습니다. 안톤은 여러 번 구타를 당할 뻔하였지만 루마니아 시민으로서 자신의 믿음에 대해 말할 법적 권리를 담대하게 주장함으로 신체적 학대를 얼마 동안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결국 그를 체포하였습니다. 파시스트 경관은 그를 경찰서로 끌고 가서 밤새도록 구타하였는데 그런 다음 놀랍게도 그를 풀어 주었습니다. 픈테아 형제는 현재 84세이며 지금도 여호와께 충실을 유지하려는 결의에 차 있습니다.

다른 충절 고수자인 파르핀 팔라마르치우크는 1920년대에 몰도바에서 성서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 또한 좋은 소식의 열정적인 선포자가 되었으며 종종 여러 주 동안 집을 떠나 우크라이나의 체르노프치에서부터 리보프에 이르기까지 도시들과 마을들에 전파하기도 하였습니다. 파르핀이 무기를 들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파시스트는 1942년에 그를 체포하여 체르노프치의 군사 법원에 넘겼습니다.

파르핀의 아들 니콜라에는 그 사건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전부 합하여 100명의 형제들이 이 군사 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판결은 즉각 시행되어야 했습니다. 경찰들은 형제들을 모두 모아 놓고는 먼저 총살시킬 10명을 뽑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먼저 다른 90명이 보는 가운데 자신의 무덤을 파야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경찰들은 형제들에게 총을 쏘기 전에 믿음을 부인하고 군대에 복무할 기회를 한 번 더 주었습니다. 두 명이 타협하였고 여덟 명은 사살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열 명을 일렬로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총살을 당하기 전에 죽은 형제들을 묻어야 하였습니다.

형제들이 무덤에 흙을 메우는 도중에 높은 지위에 있는 관리가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얼마나 되는 증인들이 마음을 돌렸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단지 두 명뿐이라는 말을 듣고는 20명을 군대에 보내기 위해 80명을 죽여야 한다면 나머지 92명을 강제 노동 수용소에 두는 편이 더 낫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형 선고는 25년간의 강제 노동으로 감형되었습니다. 하지만 3년이 채 못 되어 진군하던 소련 군대가 루마니아의 강제 수용소에서 증인들을 해방시켰습니다. 아버지는 이 사건을 비롯하여 다른 많은 시련을 견뎌 냈습니다. 아버지는 1984년에 사망할 때까지 여호와께 충실하였습니다.”

정교회 신앙에 따르지 않는 것이 범죄가 되다!

바실레 게르만은 젊은 기혼 남자였습니다. 1942년 12월, 그의 아내가 딸을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파시스트는 그를 체포하였습니다. 바실레는 두 가지 “범죄”로 고발되었는데, 군 복무를 거부하였고 정교회에서 딸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때 일어난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1943년 2월에 다른 충실한 69명의 형제와 함께 체르노프치의 군사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형을 실제로 선고하기 전에 당국은 여섯 명의 범죄자를 처형하는 장면을 강제로 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형당할 명단에 오를 다음 차례는 우리가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형제들끼리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믿음을 확고히 지키고 시련이 끝날 때까지 기쁨을 나타내는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 70명 모두가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적들은 더욱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국은 우리를 총살하는 대신 루마니아 아이우드에 있는 강제 수용소에서 25년간의 강제 노역을 하도록 형을 감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형기조차도 완전히 채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불과 18개월이 지난 1944년 8월에 진군하던 소련 군대가 강제 수용소를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1942년에 파시스트들은 몰도바 시러우치 마을에서 안토네스쿠 장군의 군대에서 복무할 800명의 남자를 징집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니콜라에 아니스케비치를 포함한 다수의 증인들도 있었습니다. 니콜라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징집 절차가 시작될 때 경찰은 우리에게 종교 의식에 참여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우리 증인들은 거부하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집총을 거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경찰은 우리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체포하였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우리를 감금하기 전에 우리가 중립을 지키는 이유에 대해서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설명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우리는 그 지역의 사법 중심지인 브리체니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옷을 벗기우고 철저한 검신을 당하였습니다. 그 후에 계급이 높은 군종 사제가 심문을 하였습니다. 그는 친절하였고 우리의 양심적인 입장을 이해해 주었으며 우리에게 음식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보고서에 우리가 집총을 거부하는 이유는 예수에 대한 우리의 믿음 때문이라고 써 주었습니다.

우리는 브리체니에서 리프카니에 있는 경찰서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경찰은 밤이 될 때까지 우리를 무자비하게 구타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우리를 다른 두 명의 형제와 함께 감방에 넣었고 놀랍게도 여자 한 명을 우리와 같은 방에 있도록 하였는데, 나중에 보니 그 여자는 스파이였습니다. 우리는 여러 날 동안 매일 구타를 당하였습니다. 마침내 나는 체르노프치로 이송되어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습니다. 거기서는 나를 위해 변호사 한 명이 선임되었는데 그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학대로 인해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서 군 당국은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결국 당국은 나에게 형을 선고하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충절을 고수한 담대한 자매들

자매들 역시 광분한 파시스트의 분노를 견뎌 내야 하였습니다. 그런 자매들 가운데는 마리아 게르만이 있었습니다 (바실레 게르만과 가족 관계에 있지는 않지만 같은 회중 출신임). 1943년에 마리아는 체포되어 발라시네슈티에 있는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그 자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경찰은 내가 정교회 교회에 나가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나를 체포했어요. 처음에는 몰도바 리프카니로, 다음에는 우크라이나 체르노프치로 이송되었는데 거기서 형을 선고받았지요.

판사는 나에게 교회에 나가기를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묻더군요. 나는 그에게 오직 여호와만 숭배한다고 말했지요. 이 ‘범죄’로 나는 다른 20명의 자매와 함께 20년 형을 선고받았어요. 우리 중 일부는 30명이나 되는 다른 재소자와 함께 조그만 감방에 끼여 살아야 했어요. 하지만 낮에 나는 밖에 나가 부잣집에서 집안일을 하게 되었지요.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 부잣집 사람들은 간수들보다는 나에게 잘해 주었어요. 최소한 먹을 것은 충분하게 주었거든요!

시간이 지나 우리는 교도소 건물의 다른 사동에 있는 형제들과 접촉하였어요. 이러한 접촉은 유익하였지요. 우리는 형제들에게 영적 양식과 육적 양식을 모두 구해 주어 도울 수 있었거든요.”

다른 많은 몰도바의 증인들처럼 이 충절 고수자들 역시 파시스트의 분노를 인내하였지만 그들은 믿음에 대한 또 다른 공격을 계속 직면해야 하였습니다. 그 공격은 다음 지배 권력이었던 공산주의 러시아로부터 오게 되었습니다.

소련의 술책—강제 이주

1944년, 독일에게 전황이 불리해지고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미하이 왕이 이끄는 루마니아 정부 내 세력이 안토네스쿠 정권을 전복시켰습니다. 그 후 루마니아는 추축국들과 동맹 관계를 끊고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같은 해에, 진군하던 소련 군대는 그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통치권을 다시 주장하였고 몰도바를 몰다비아 SSR로서 소련에 병합하였습니다.

처음에 몰도바의 공산 통치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로운 시기는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증인들이 지역의 정당 선거에 투표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인 중립 문제가 또다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소련의 체제는 정치적 중립을 전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다른 “불순분자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계획을 세웠으며, 1949년부터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한 공식 문서에는 몰다비아 SSR에서 강제 이주시킬 사람들과 관련된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결정”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강제 이주를 당할 사람들 가운데는 “이전의 지주, 대규모 상인, 독일 침략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사람, 독일과 루마니아의 경찰 당국에 협력한 사람, 파시스트 성향의 정당 또는 단체의 구성원, 백군(White Guard)의 일원, 불법 종파의 일원, 그리고 이상 열거된 사람들의 가족들”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들 모두 시베리아 서부로 “무기한” 유배될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강제 이주의 물결은 1951년에 시작되었는데 이번에는 여호와의 증인들만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스탈린이 직접 이러한 강제 이주 명령을 내렸는데, 이것은 북송 작전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720 가족 이상의 증인 약 2600명이 몰도바에서 약 45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시베리아 서부의 톰스크로 유배되었습니다.

공식 지령에는 대기 중인 기차로 데려가기 전에 개인 소유물을 챙길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기차는 “사람을 운송하기에 적합하게 잘 마련된” 것이어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한밤중에 많게는 여덟 명의 군인과 관리들이 증인 가족의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가족들을 깨우고 강제 이주 명령서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대기 중인 기차에 가족을 데려가기 전에 불과 몇 시간만 주어 소유물을 챙기게 하였습니다.

열차는 실제로는 유개 화차였습니다. 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을 40명까지 각 화차 안에 밀어 넣고 2주 동안을 여행하게 하였습니다. 좌석이나 단열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화차의 한 구석에는 바닥에 구멍이 있었는데 그것이 화장실로 사용되었습니다. 형제들을 강제 이주시키기 전에 지방 관리들은 각 사람의 소유물을 등록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개 가치가 거의 없는 것들만 등록하였고 값나가는 물건들은 그냥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러한 모든 불공정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실 증인들을 수송하는 열차들이 철로 교차 지점에서 서로 만날 때면 다른 화차에서 울려 퍼지는 왕국 노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열차에 타고 있던 형제들은 자기들만이 아니라 수백 명의 동료 증인들과 함께 강제 이주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괴로운 상황 가운데 서로 기쁨의 영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은 모두의 마음을 고무시켜 주었고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여호와께 충실을 유지하겠다는 그들의 결심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야고보 1:2.

본받을 만한 믿음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몰도바 사람들 중에는 이반 미키트코프가 있었습니다. 이반은 1951년에 몰도바에서 다른 증인들과 함께 처음 체포되었다가 톰스크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의 침엽수림 지역에서 나무 베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갇혀 지내지는 않았지만 이동할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고 비밀경찰은 계속 그를 철저하게 감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적 형제들과 함께 모든 기회에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였습니다.

이반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힘들고 새로운 환경 가운데서 회중을 조직하였습니다. 자체적으로 출판물을 제작하는 일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우리가 전파한 사람들 중 일부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당국에서는 우리의 활동을 눈치챘고 우리 중 일부를 강제 노동 수용소 형에 처하였습니다.

나는 파벨 단다라, 미나 고라슈, 바실레 샤르반과 같은 동료 증인들과 함께 엄격한 감시를 받는 12년간의 강제 노동 수용소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당국은 이러한 혹독한 형을 가함으로 다른 형제들이 두려워하여 잠잠해지기를 바랐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형제들은 어디로 보내지든 간에 계속 전파하였습니다. 1966년에 나는 형기를 다 마치고 석방되었으며, 톰스크로 돌아가 그곳에서 3년을 머물렀습니다.

1969년에 나는 도네츠 분지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충실하고 열심 있는 자매인 마리아를 만나 결혼하였습니다. 나는 1983년에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이중으로 선고를 받았는데, 5년의 교도소 형과 그다음 5년의 강제 이주 형을 받았습니다. 이해할 만하게도 이번 형은 이전보다 훨씬 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아내와 아이 곁을 떠나 있어야 하였고 그들 역시 시련을 인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형기를 다 마칠 필요는 없었습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이 된 후인 1987년에 나는 석방되었으며 우크라이나로, 나중에는 몰도바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몰도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벌치에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세 개 회중에 370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16개 회중에 1700명 이상의 전도인이 있습니다!”

“바실레처럼 죽고 싶나?”

수용소 관리자들과 KGB(소련 국가 보안 위원회) 요원들은 형제들의 충절을 약화시키기 위해 몇 가지 잔인한 술책을 고안해 냈습니다. 콘스탄틴 이바노비치 쇼베는 할아버지인 콘스탄틴 쇼베가 겪은 일들에 대해 이렇게 알려 줍니다. “1952년에 할아버지는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 동쪽에 있는 치타 지역의 강제 노동 수용소들 가운데 한 곳에서 복역하고 있었습니다. 수용소 관리들은 할아버지와 다른 증인들에게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총으로 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형제들이 타협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관리들은 그들을 수용소 바깥의 숲 가장자리에 소집하였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는데 관리들은 할아버지의 단짝이었던 바실레를 숲 속으로 조금 끌고 들어간 다음 그를 쏘겠다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형제들은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습니다. 얼마 안 있어 두어 번의 총성이 조용한 저녁의 적막을 깨뜨렸습니다.

관리들이 돌아와서는 다음으로 할아버지를 끌고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짧은 거리를 걸어 들어간 다음 공터에 멈추었습니다. 무덤 몇 개가 파여 있었고 하나는 흙이 메워져 있었습니다. 지휘관은 그 무덤을 가리키면서 할아버지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실레처럼 죽고 싶나 아니면 자유를 얻어서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나? 결정할 시간을 2분 주겠다.’ 할아버지에게는 2분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즉시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이 쏜 바실레와는 여러 해 동안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나는 이제 신세계에서 부활되어 그와 다시 만나게 되기를 고대합니다. 나는 바실레와 함께 신세계에 있게 될 거라고 굳게 확신합니다. 하지만 지휘관께서도 거기 계실까요?’

그 대답은 지휘관이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을 수용소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할아버지는 바실레를 만나기 위해 부활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형제들의 믿음을 꺾어 놓기 위해 고안된 잔인한 속임수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공산주의 선전의 역효과

공산주의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증오심과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하느님의 백성을 중상하는 책자와 팜플렛과 영화를 제작하였습니다. 한 팜플렛의 제목은 「이중 바닥」(Double Bottom)이었는데, 이 표현은 형제들이 가방의 밑부분에 만들어 놓은 출판물을 넣을 비밀 공간을 일컫는 말입니다. 니콜라이 볼로샤노브스키는 수용소장이 이 팜플렛을 가지고 자신을 다른 죄수들 앞에서 어떻게 모욕하려 했는지를 돌이켜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수용소장은 막사 중 한 군데에 모든 수감자들을 소집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중 바닥」의 몇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나 자신을 중상하는 말이 들어 있는 구절도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마쳤을 때 나는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아마도 수용소장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틀림없이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지 나의 요청을 수락하였습니다.

나는 수용소장에게 내가 강제 수용소에 오게 되었을 때 나와 맨 처음 면담했던 것을 기억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내 입소 서류를 작성하면서 출신 국가, 시민권 등에 대해 나에게 질문한 것들을 기억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대답했던 내용까지도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나는 수용소장에게 서류에 실제로 무엇이라고 기록하였는지 말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수용소장은 내가 대답한 것을 그대로 기록하지는 않았다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모여 있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다시피, 이 팜플렛 역시 똑같은 방법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수감자들은 박수를 쳤고 수용소장은 화가 나서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분열시켜 정복하려는 음모

실패를 거듭한 소련 당국은 1960년대에 여호와의 증인의 연합을 깨뜨리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였습니다. 1999년에 발행된 서적인 「칼과 방패」(The Sword and the Shield)에서는 정부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던 이전 KGB의 기밀 문서들 중 일부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는 이러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1959년 3월에 열린 ‘여호와 신봉자들[여호와의 증인]을 상대로 한 투쟁’을 이끌고 있던 KGB 간부들의 회의에서는 ‘억압책을 계속 사용하는 것에 더해 분열책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KGB는 종파주의자들을 분열시키고, 사기를 꺾으며, 의심을 품게 할 뿐 아니라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을 날조된 죄목으로 체포하기로 결정하였다.”

“분열책”에는 소련 전역의 형제들 간에 의심의 씨를 뿌리는 단합된 운동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할 목적으로, KGB는 인도하고 있던 여러 명의 주된 형제들이 국가 보안 당국에 협력하고 있다는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KGB가 자기들의 거짓 주장을 너무나도 교묘하게 위장하였기 때문에 많은 증인들은 누구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인지 혼란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KGB의 또 다른 계략은 특수 요원들을 “활동적인” 여호와의 증인들로 행세하도록 훈련시킨 다음 조직 내에서 책임 있는 위치를 얻도록 시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스파이들은 KGB에 정보를 계속 제공해 주었습니다. 또한 KGB는 진짜 증인들에게 비밀리에 접근하여 협조의 대가로 엄청난 액수의 돈을 제시하면서 증인들을 매수하려고 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교활한 방법은 이곳 몰도바에 있던 형제들을 비롯한 형제들의 연합을 깨뜨리는 일에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결과 서로를 의심하는 분위기가 감돌게 되었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조직을 떠나 반대파로 알려지게 된 한 분파를 형성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소련에 있던 형제들은 여호와의 조직, 조직에서 생산하는 영적 양식, 조직에서 임명하는 책임 맡은 형제들을 통로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그 통로에 대한 혼란과 불확실성이 가중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어떻게 혼란을 말끔히 없앨 수 있었습니까? 놀랍게도 소련의 도움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음모를 꾸민 당사자가 자신들이 일으킨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운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하였습니까?

그들은 하느님의 영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에 소련 당국은 소련 전역에 있던 많은 증인 “지도자들”을 러시아 서부의 모르드비니아 공화국에 있는 사란스크 시에서 약 150킬로미터 떨어진 한 강제 수용소에 함께 가두었습니다. 이전에는 형제들 사이의 거리가 엄청나게 떨어져 있어서 의사소통이 서로 제한되어 있었고 오해가 생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소위 반대파에 속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같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면서 꾸며 낸 이야기들과 사실을 분간해 낼 수 있었습니다. 당국은 왜 이 형제들을 모두 함께 감금해 두었습니까? 그들은 아마도 형제들이 서로 대립하게 되고 그리하여 분열이 더욱 깊어지게 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 계획은 머리를 쓴 것이긴 하였지만 여호와의 연합시키는 영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었습니다.—고린도 첫째 14:33.

게오르게 고로베츠는 모르드비니아에 감금되어 있던 형제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가 체포되어 수감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파와 연합하고 있던 한 형제가 우리와 함께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책임 있는 형제들이 여전히 투옥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모두가 새처럼 자유롭게 지내고 있으며 KGB의 후원을 받아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기 때문입니다!”

고로베츠 형제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수감되고 처음 일 년을 보내는 동안 700명 이상이 종교적인 이유로 투옥되었습니다. 대부분은 여호와의 증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한 공장에서 함께 일했고 조직에서 분리된 분파와 연합했던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결과 1960년과 1961년에 많은 문제들이 명확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1962년에는 소련을 돌보던 전국 위원회가 바로 그 강제 수용소 안에서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는 소련에 있는 모든 회중에 보내졌으며 거짓말을 퍼뜨리는 KGB의 운동으로 인해 초래된 피해가 대부분 회복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참다운 통로를 식별함

고로베츠 형제는 1964년 6월에 강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즉시 몰도바로 돌아왔습니다. 타바니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많은 지방 증인들이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먹이고 인도하시기 위해 누구를 사용하고 계시는지에 대해 아직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형제들은 단지 성서만 읽으려고 하였습니다.

세 명의 영적으로 장성된 형제들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문제를 명확히 하도록 돕기 위해 임명되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들 가운데 한 가지는 대부분의 증인들이 살고 있던 몰도바 북부의 회중들을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이들과 다른 그리스도인 감독자들이 많은 박해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계속 충실함을 나타낸 것은, 원래 진리를 가르쳐 준 바로 그 조직을 여호와께서 여전히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는, 박해와 다른 계략에도 불구하고 전파 활동에 계속적인 진전이 있음을 KGB 역시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칼과 방패」에서는 KGB의 반응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심지어 강제 수용소 안에서도 ‘여호와 파의 지도자들이 불온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수용소에 있는 상황에서도 여호와 파의 활동을 계속해서 수행하고 있다’는 보고에 [KGB] 본부는 당황하게 되었다. 1967년 11월에는 [키시나우]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작전을 수행하던 KGB 요원들의 회의가 열려서 ‘이 종파주의자들의 불온한 활동과 반역적인 사상을 막기 위한’ 새로운 대책이 논의되었다.”

이전 형제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다

안타깝게도 몇몇 사람들이 이 “새로운 대책”에 속아서 KGB의 의도대로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탐욕이나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굴복한 사람도 있었고, 증인들에 대한 미움이 자라도록 내버려 둔 이전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당국은 충실한 사람들의 충절을 꺾기 위한 시도로 이러한 자들을 이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투옥과 강제 수용소를 인내한 증인들은, 전에는 형제였지만 이제는 배교자가 되어 버린 사람들로부터 괴롭힘당한 일이 이제껏 겪어 본 일들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배교자들이 앞서 언급한 반대파에서 나왔습니다. 처음에 이 분파에는 단순히 KGB의 그릇된 정보로 인해 혼란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에 와서도 여전히 반대파에 속해 있던 사람들 가운데는 악한 종 반열의 사악한 영을 나타낸 사람들이 얼마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경고를 무시하고 “동료 종들을 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마태 24:48, 49.

그렇지만 KGB와 그들의 앞잡이들이 가한 계속되는 압제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분열시켜 정복하려는 음모는 실패하였습니다. 1960년대 초에 몰도바에서 충실한 형제들이 조직을 재연합시키는 일을 시작하였을 때 그 나라에 있던 대부분의 형제들은 반대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72년 무렵에는 그들 중 대다수가 여호와의 조직과 함께 충성스럽게 일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인식을 나타낸 박해자

공산 통치 기간에 몰도바에 남아 있던 충실한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 전파하는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족, 친구, 급우, 직장 동료들에게 비공식 증거를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조심해야 하였습니다. 몰도바에 있는 많은 공산당 요원들이 공산주의 이념을 광신적으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했지만 모든 공산 당원들이 여호와의 증인을 멸시하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메온 볼로샤노브스키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경찰이 우리 집을 수색하고 많은 양의 출판물을 압수하였습니다. 그리고 담당 경관이 그 목록을 작성하였습니다. 나중에 그 경관은 목록을 가지고 다시 와서 빠진 것이 있는지 확인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작성한 목록을 확인하던 중에 빠진 것이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가족에 대해 논하고 어떻게 더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는지를 논하는 「파수대」였습니다. 경관에게 그 잡지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다소 당황해하면서 ‘아, 그건 내가 집에 가지고 가서 가족과 함께 읽었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읽어 보신 내용은 유익했나요?’라고 내가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오, 물론이오! 정말 좋았소!’”

반대는 누그러지고, 성장은 계속되다

1970년대에 공산 당국은 여호와의 백성들을 체포하고 유배시키던 정책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 개개인은 증거 활동이나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는 일로 체포되었고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판결은 가벼워졌습니다.

1972년에는 몰도바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장로 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게오르게 고로베츠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형제들은 새로운 마련을 크게 기뻐하며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여호와의 영이 작용하고 있다는 부가적인 증거로 여겼습니다. 더욱이 임명된 남자들의 수가 증가하여 몰도바의 회중들은 영적으로 그리고 수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움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때 즈음에는 형제들은 전파 활동을 조직하고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을 조심스럽게 인쇄하는 일에서 상당한 경험을 쌓아 왔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반대가 시작되었을 때 출판물은 몰도바의 두 곳에서 준비되었는데 격렬한 박해를 겪었던 수십 년 동안 오로지 밤에만 인쇄 시설을 가동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중으로 일을 해야 했는데 낮에는 다른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활동을 하고, 또 밤에는 회중들을 위해 출판물을 생산하면서 새벽까지 일하였습니다.

하지만 반대와 감시가 누그러지자 이러한 상황은 변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이제 더 효율적으로 지하 인쇄 시설을 가동할 수 있었고 그 일을 할 자원 봉사자들을 추가로 배정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출판물 생산이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인쇄 기술도 발전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형제들은 타자기로 만들 수 있는 특별한 형판을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종이의 양쪽 면을 동시에 인쇄할 수 있게 인쇄기를 개조하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발전으로 인해 출판물 생산량이 더욱 증가되었습니다. 성서 연구 보조서를 손으로 베껴 쓰던 때는 이제 먼 옛날처럼 느껴졌습니다!

더 많은 출판물이 인쇄됨에 따라 형제들은 자연히 더 많은 성서 연구를 사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욱 개선된 의사소통 수단에 더하여 이와 같은 발전은 이전에 있었던 혼란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 버리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은 몰도바에서 여호와의 백성들이 누리게 될 더 좋은 것들의 예보에 불과하였습니다.

참 숭배가 번영하다

소련의 공산주의는 그 전성기에 정치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골리앗과 같은 존재였지만 참 숭배를 없애지는 못하였습니다. 사실상 소련은 의도한 바와는 달리 강제 이주 계획을 통해 좋은 소식이 “땅의 가장 먼 곳”에 있는 일부 지역에까지 퍼지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사도 1:8) 여호와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를 치려고 만들어지는 무기는 무엇이든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 이것이 여호와의 종들의 유산이며, 그들의 의는 내게서 나온다.” (이사야 54:17) 이 말씀은 정말로 참됨이 증명되어 왔습니다!

1985년에 있었던 정부의 변화로 인해 소련에 있던 여호와의 증인들의 생활이 훨씬 편해졌습니다. 비밀 경찰이 따라다니거나 종교 집회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벌금을 무는 일이 더 이상 없었습니다. 몰도바에 있는 형제들은 계속해서 10명 이하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으로 정규 집회를 보았지만 결혼식이나 장례식과 같은 특별한 기회들을 이용하여 작은 규모의 순회 대회를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 여름에 폴란드의 도시들인 호주프(카토비체 근처), 포즈난, 바르샤바에서 열린 세 개의 국제 대회를 기점으로 전파 활동은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몰도바에서는 수백 명의 대표단이 참석하였습니다. 이제껏 비밀리에 작은 규모의 집회에 참석해 왔던 이 충실한 형제들에게, 모두 같이 여호와를 숭배하는 기쁨에 찬 국제적인 증인들의 무리와 함께한 것은 정말로 감동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몰도바의 형제들은 1991년에 이 나라에서 전파를 시작한 이후 사상 처음으로 순회 대회를 공개적으로 열 수 있게 되었을 때 또 다른 영적 기쁨을 경험하였습니다. 1992년에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 대회는 또 다른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이 대회에 참석한 몰도바 대표단은 1989년에 폴란드에서 열린 세 개의 국제 대회에 참석한 대표단 총 수보다도 그 수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하늘의 수문을 열어 충성스럽고 인식 깊은 자신의 종들 위에 축복을 계속 쏟아 붓기 시작하셨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을 위한 훈련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자 소련의 전국 위원회와 여행하는 감독자들 사이에 서로 더 긴밀하게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89년 12월 당시 60명에 달하던 이러한 영적으로 장성한 형제들은 교육을 받기 위해 우크라이나 리보프에 모였습니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교도소, 강제 수용소, 그 외에 다른 형태의 박해를 인내해 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 학급은 정말로 기쁨에 넘치며 힘을 북돋아 주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형제들은 이전의 어려운 시기에 이미 친밀한 우정을 쌓아 온 사이였습니다.

그 학급에는 네 명의 몰도바 출신 여행하는 감독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리보프에서 받았던 현명한 조언들 특히 전파 활동과 관련된 조언들을 회중에 전달해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새로 얻은 자유를 누리고 있기는 하였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계속 조심스럽게 전파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마태 10:16) 계속 주의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아직은 활동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국회관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다

몰도바에 전파 활동이 처음 자리 잡은 때부터 형제들은 그들 소유의 집회 장소가 필요함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1922년에 코르제우치 마을에 있던 성경 연구생들은 그들의 재원을 사용하여 회관을 건축하였습니다. 집회를 위한 집이라고 부른 그 장소는 다년간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 공식적인 반대가 상당히 누그러지기 시작하였을 때 여러 읍과 마을들에는 수백 명의 전도인이 연합하고 있는 회중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개인 집에서 작은 집단으로 모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왕국회관 건축을 추진할 때가 된 것입니까? 그 점을 알아내기 위해 형제들은 여러 마을 행정관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관리들 중 일부는 매우 협조적이었습니다. 몰도바 북부에 있는 주민 3150명의 페테슈티 마을이 그러한 경우였습니다. 1990년 1월에 지방 형제들은 마을 책임자를 만났는데 그는 그 마을에서는 형제들의 활동에 대한 공식적인 제한 조처가 해제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도 형제들은 여전히 신중했으므로 그 말을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형제의 집을 개조하여 회중이 그 집을 작은 왕국회관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회중에는 전도인이 185명이나 있었습니다!

마을 책임자는 그 공사를 허가해 주었고 형제들은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큰 장애물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특정한 벽을 허물게 되면 그 집이 무너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다시 마을 책임자를 찾아가 문제를 설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새로운 왕국회관을 건축해도 된다고 마을 책임자가 허가해 주었을 때 형제들은 크게 감격하였습니다! 이제 그 회중 성원들은 그 공사에 온 힘을 다 쏟았으며 불과 27일 만에 완공하였습니다.

모든 회중 성원들을 새로운 왕국회관에 수용할 수 있도록 페테슈티 회중은 두 개의 회중으로 분할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새로운 전도인들이 아직 침례를 받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봉헌식 프로그램에 침례를 포함시키는 것은 어떠하였습니까? 형제들은 이러한 생각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침례 연설 후에 모든 사람들이 근처에 있던 강으로 내려갔으며 거기서 80명이 여호와에 대한 헌신을 상징하였습니다.

물론 다른 여러 회중들 역시 왕국회관이 절실히 필요하였습니다. 출판물에 실린 왕국회관의 사진을 보고, 일부 회중들은 그와 비슷한 건물을 지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원을 모으고 독창성을 한껏 발휘하여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만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1990년부터 1995년 사이에 형제들은 30채 이상의 왕국회관을 모두 지방 형제들의 노동력과 재원으로 건축하였습니다.

선택된 일부 왕국회관들은 순회 대회를 위해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대회 참석자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회관 바깥에서 회기를 즐겨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대회 회관 건축을 고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꾸물거리지 않았습니다. 1992년에 형제들은 단지 3개월 만에 몰도바에서는 처음으로 800석 규모의 대회 회관을 코르제우치에 건축하였습니다. 이듬해에 또다시 증인들은 자신들의 노동력과 재원을 사용하여 페테슈티에 1500석 규모의 대회 회관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건축 활동은 매우 시기적절했던 것 같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 정치적인 변화와 경기 하강으로 인해 몰도바의 화폐 가치가 급속도로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몇 년 후에는, 1990년대 초에 왕국회관 한 채를 완공하는 데 필요했던 돈을 가지고는 의자도 구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남부 지방의 왕국회관 건축

몰도바 북부의 회중들과는 달리 남부 지방에는 왕국회관의 수가 훨씬 적었습니다. 그래서 1990년대에 활동이 급속도로 확장되면서 새로 형성된 남부의 여러 회중들은 적당한 집회 장소를 찾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학교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학교를 빌리기는 더 어려워졌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또다시 그분의 조직을 통해 형제들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매우 적절한 때에 통치체는 왕국회관 기금 마련을 통하여 몰도바처럼 회중들이 한정된 재원만 있는 나라에서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데 기금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이러한 마련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키시나우가 그 훌륭한 예입니다. 수도인 그곳에는 1999년에 왕국회관이 단 한 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2002년 7월에는 열 채의 왕국회관이 그 도시에 있는 37개 회중 가운데 30개 회중의 필요를 돌보고 있었고, 세 채가 건축 중이었습니다.

마침내 법적 인가를 받다!

1991년 8월 27일에 몰도바는 독립 국가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대한 금지령은 소련이 내린 것이었으므로 더 이상 효력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약 4000명에 달하던 여호와의 증인은 종교 조직으로 아직 법적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통치체로부터 도움이 되는 지도를 받은 후에 몰도바 사무실은 즉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법적 인가를 얻어 내기 위해 해당 정부 기관과 접촉하였습니다. 새로운 행정부는 그 요청에 대해 호의적이었습니다. 처리되어야 할 필요한 서류 작업 때문에 시간이 걸리기는 하였지만 마침내 1994년 7월 27일에 사무실은 공식 등록 서류를 받았습니다.

몰도바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있어서 이날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금지령과 박해와 투옥을 60여 년간 인내한 후 이제 그들은 공개적으로 여호와를 숭배하고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자체적으로 지역 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법적 인가를 받고 한 달이 지난 1994년 8월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키시나우에서 가장 큰 경기장에 모여 몰도바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지역 대회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정말 감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베델 확장

1995년경에는 왕국 전도인들의 수가 1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키시나우에 있는 조그만 사무실에서 몰도바의 특정 부면의 일을 돌보긴 하였지만 약 2000킬로미터 떨어진 러시아 지부가 전반적인 감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50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루마니아 지부가 있었고 대부분의 몰도바 사람들은 루마니아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루마니아어는 몰도바의 공용어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요소들을 주의 깊이 검토해 본 후에 통치체는 루마니아 지부가 몰도바의 활동을 감독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한편 계속되는 증가로 인해 조그만 아파트 한 채에 불과한 키시나우의 사무실에서는 일을 감당하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확실히 베델 가족을 구성할 때가 온 것입니다. 초기 성원들 가운데에는 이온 루수와 이울리아 루수가 있었습니다. 루수 형제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대리 순회 감독자로 일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베델 가족 성원으로 게오르게 고로베츠가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새로운 임무를 받기 전까지 지역 감독자로 섬겼습니다. 그는 베델 밖에서 살면서 날마다 베델로 출퇴근하였습니다. 길르앗 제67기 졸업생인 구엔테르 마추라와 로사리아 마추라는 루마니아에서 여러 해 동안 섬긴 다음 1996년 5월 1일에 몰도바 베델에 도착하였습니다.

전도인의 수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베델에서 일할 사람도 더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간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1998년에 이르러서는 몰도바 베델 숙소가 다섯 개의 시내 아파트에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일 베델 복합 건물을 건축할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키시나우에 있는 정부 당국은 친절하게도 형제들에게 도시 바로 한가운데에 있는 3000제곱미터의 대지를 제공하였고, 형제들은 그것을 감사히 받아들였습니다. 형제들은 장래의 더 큰 확장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인접한 부동산까지도 매입하였습니다.

지방 회사가 외장 공사를 하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국제 건축 자원 봉사자들과 지역 형제 자매들은 나머지 작업을 수행하였습니다. 건축은 1998년 9월에 시작하였고, 불과 14개월 후에 기대에 찬 베델 가족들은 마침내 모두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 벅차 하면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새로운 베델 복합 건물 봉헌식은 2000년 9월 16일에 있었습니다. 11개 나라에서 온 손님들이 참석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통치체 성원인 게리트 뢰시 형제가 지방 운동 경기장에 모인 1만 명이 넘는 청중에게 연설하였습니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전 세계 여호와의 백성을 연합시켜 주는 따뜻한 사랑의 유대감을 느꼈습니다.

현재 몰도바 베델 가족은 모두 26명입니다. 데이비드 그로제스쿠와 미리암 그로제스쿠 같은 사람들은 외국 지부에서 섬기는 베델 봉사자로 일하기 위하여 다른 나라로부터 왔습니다. 엔노 슐렌치히 같은 사람들은 고향에서 봉사 훈련 학교에 참석하였고 그 후에 외국 임지인 몰도바에서 섬기는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베델 가족이 규모는 작지만 국제적인 다양성은 풍부합니다.

수확하는 일꾼들을 훈련시키다

몰도바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은 수십 년간의 금지령과 박해 가운데서 조심스럽게, 물론 비공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이 호별 방문 봉사와 가두 증거에 공개적으로 참여할 때가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이러한 봉사 부면에도 순종적으로 참여하였는데 특히 가두 증거가 매우 인기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전도인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회중들은 호별 방문 봉사에 역점을 두도록 격려하였고 형제들은 충실하게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전 어느 때보다 이제, 전도인들은 이웃 사람들이 참다운 영적 양식에 얼마나 굶주려 있는지를 인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필요를 채우도록 돕기 위해서 여호와의 조직은 「파수대」, 「깨어라!」 그리고 그 밖의 성서 연구 보조서를 루마니아어와 러시아어 두 가지 언어로 회중들에 공급하였습니다. 동시에 전도인들은 「우리의 왕국 봉사」에 나오는 제공 방법 제안을 적용함으로 봉사의 질을 개선시키고자 부지런히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신권 전도 학교를 통해 베풀어지는 점진적인 훈련을 잘 활용하였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온 경험 많은 장성한 형제들을 통해 더 많은 지원이 베풀어졌는데, 특히 조직적인 차원에서 도움이 베풀어졌습니다. 이러한 유능하고 자진적인 국제적인 돕는 자들은 열매 맺는 포도나무를 받쳐 주는 격자 틀과 같이 회중들을 지탱시켜 주고 안정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급속한 성장의 시기

몰도바에서 제자들의 수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인구 66만 2000명의 수도 키시나우에서 매우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1991년 1월, 여호와의 증인이 법적 인가를 받기 전에는 키시나우에 단지 두 개의 회중과 약 350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2003년 1월에는 37개 회중과 3870명이 넘는 전도인으로 불어났습니다! 한 회중에서는 단 9개월 만에 101명의 성서 연구생이 새로운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급속도로 증가하기 때문에 도시에 있는 회중들이 불과 2년 정도만 지나면 분할하게 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1993년 8월에 몰도바 전역에는 6551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수는 2002년 3월까지 1만 8425명으로 늘어 9년 사이에 280퍼센트의 증가를 보았습니다! 같은 기간에 정규 파이오니아의 수는 28명에서 1232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부읍장에서 파이오니아로

여호와에 대한 지식에 이르게 된 사람들 가운데는 이전에 공산주의자였던 사람들이 다수 있는데 그중 일부는 공직에 있던 사람도 있습니다. 발레리우 므르자 역시 그러한 사람인데 그는 인구가 약 3만 9000명인 소로카 읍의 부읍장이었습니다. 퍼레이드가 있는 특별한 행사 때면 발레리우는 단상 위에서 고관들과 함께 있으면서 행진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경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소로카 읍에서 유명 인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발레리우는 성서 연구를 하기 시작하여 침례를 받았습니다. 발레리우의 증거를 받고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냈습니까? 므르자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저를 집 안으로 초대해 주었습니다. 전파하기 정말 좋은 기회들이 많았으며, 우리가 사는 도시는 나와 아내에게 참으로 생산적인 구역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므르자 형제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베델에서 일년 간 봉사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그 부부는 순회 활동을 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이 돕다

몰도바는 인구당 전도인 비율이 현재 유럽에서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마을과 조그만 도시들에는 아직도 증인이 전혀 없는 곳이 있습니다. 어려운 경제 상황으로 인해 대부분의 전도인들과 파이오니아들은 더 필요한 구역에서 봉사할 수가 없습니다. 좋은 소식이 전체 구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전파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루마니아 지부에서는 몰도바에서 봉사할 약 50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를 임명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20명 이상은 루마니아, 러시아, 우크라이나에서 열린 봉사 훈련 학교에서 제공하는 훈련으로부터 유익을 얻은 형제들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이러한 복음 전파자들은 얼마의 아주 훌륭한 결과를 거두었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 특별 파이오니아인 세르게이 지겔과 옥사나 지겔이 1995년에 커우셰니를 임지로 받았을 때 그 읍에는 전도인 15명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집단만 있었습니다. 지겔 부부는 지방 형제들이 새로운 성서 연구를 많이 시작할 수 있게 도왔습니다. 그들은 또한 기쁨에 찬 파이오니아 영을 나타냈으며, 그 결과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커우셰니에는 두 개의 회중에 약 155명의 전도인이 있으며 이것은 불과 7년 동안에 열 배나 증가한 것입니다! 한편 지겔 부부는 더 많은 회중을 도울 수 있는 순회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님

인간 통치는 그 형태가 어떠하든 나름대로 문제가 있습니다. 루마니아의 군주 정치, 파시스트의 독재 정치, 공산 통치 아래서 몰도바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들은 교직자들의 반대, 금지령, 박해, 강제 이주와 맞서 싸워야 하였습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웃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처해야 하기 때문에 부부 모두가 직업 전선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직업을 찾기조차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동시에 사람들이 물질주의와 도덕적 타락에 영향을 받아 범죄와 부패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은 교묘하게 영성을 위협하는 이러한 문제들에 직면하여 승리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증인들은 경험을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배웠으며, 시험이나 유혹에 직면하게 될 때 도움을 얻기 위해 그분을 바라볼 것입니다.—디모데 둘째 3:1-5; 야고보 1:2-4.

현재의 상황은 계시록 14장에 나오는 두 가지 상징적 수확에 관한 내용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는 예언된 바와 같이 이 마지막 날에 번성하고 있는 악한 작물인 “땅의 포도나무”를 수확하는 것입니다. (계시 14:17-20; 시 92:7) 이 “포도나무”는 머지않아 그 모든 썩은 열매와 함께 뿌리째 뽑혀 “하느님의 분노의 큰 포도 압착조에” 던져질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들은 그때가 오기를 진정으로 고대합니다!

한편 그때까지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동료들은 영적인 번영 가운데 기뻐합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거품 이는 포도주를 내는 포도원”은 양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풍부하고 영양 많은 영적 양식을 계속 넉넉하게 생산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어떻게 그 점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소중한 포도원을 스스로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27:2-4) 이 점은 몰도바에서 참으로 훌륭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진실로 사탄의 계획은 그것이 박해이든, 강제 이주이든, 거짓 선전이든, 거짓 형제이든 간에 하느님의 백성에게 고난을 주기는 하였지만 결코 영적인 패배를 안겨 주지는 못했습니다.—이사야 54:17.

그렇습니다. “시련을 계속 인내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승인을 받게 될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계속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1:12) 이러한 귀중한 말씀을 염두에 두고서, 몰도바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를 통해 감동을 받아 여호와를 “계속 사랑”하고 “시련을 계속 인내”하며 “계속 많은 열매를 맺”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5:8.

[각주]

^ 6항 문맥에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베사라비아와 몰다비아 대신 몰도바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몰도바의 국경은 예전의 베사라비아와 몰다비아의 국경과 같지는 않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베사라비아의 일부는 현재 우크라이나 안에 있으며 몰다비아의 일부는 루마니아 안에 있다.

[71면 네모와 삽화]

러시아와 동유럽의 포도주 저장고

몰도바는 여름이 길고 토양이 비옥하여 포도주 생산에 이상적이다. 따라서 몰도바의 포도주 산업은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지역 주민들이 기원전 3세기 말엽에 그리스인들과, 그리고 기원 2세기 후반에 로마인들과 관계를 맺게 되자 포도주 생산은 대폭 증가하게 되었다.

오늘날 포도주 생산은 몰도바 농업의 주된 부분을 차지하며 거의 130개에 달하는 포도주 양조장에서는 매년 무려 1억 4000만 리터의 포도주를 생산한다. 그중 대략 90퍼센트의 포도주를 수출하는데, 주로 수출하는 나라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이며 러시아에는 80퍼센트, 우크라이나에는 7퍼센트를 각각 수출한다.

[72면 네모]

몰도바의 개요

국토: 몰도바 중부와 북부는 숲이 우거진 고원과 스텝 즉 풀로 뒤덮인 초원이 있는 삼림지대이다. 남부는 대부분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는 스텝 지역이다.

주민: 몰도바계 주민이 인구의 삼분의 이를 차지한다. 그 나머지는 주로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가가우즈인, 불가리아인, 유대인이 순서대로 차지하고 있다. 몰도바인들은 대부분 동방 정교회에 속해 있다.

언어: 공용어는 루마니아어이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도시에서, 러시아어도 사용하며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생활: 주된 산업은 농업과 식품 가공업이다. 제조업 부분이 현재 발전하고 있다.

식품: 농작물에는 포도, 밀, 옥수수, 사탕무, 해바라기 등이 있다. 가축으로는 주로 육우(肉牛), 젖소, 돼지를 키운다.

기후: 온도는 1월에 섭씨 영하 약 4도이고 7월에 약 섭씨 21도이다. 전반적으로 기후가 온화하며 겨울도 비교적 온난하다. 연 평균 강수량은 약 500밀리미터 정도이다.

[83-85면 네모]

그리스도인 중립의 훌륭한 모범

제오르제 바카르치우크: 바카르치우크 형제는 여호와의 증인으로 양육받았다. 1942년 12월에 파시스트는 군 복무를 하도록 그 형제를 징집하였다. 그는 집총을 거부해서 칠흑같이 깜깜한 감방에 먹을 것도 거의 받지 못한 채 16일간 감금되어 있었다. 당국은 그를 다시 불러서 만일 전에 명령을 받은 대로 무기를 든다면 형을 취소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그는 아직 형을 선고받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 일로 인해 제오르제는 25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1944년 9월 25일 소련 군대가 진주하였을 때 그는 풀려나게 되었다. 하지만 두 달이 채 못 되어 소련은 그를 징집하려고 하였다. 그는 성서로 훈련받은 양심에 어긋나게 행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십년 간 여러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12개월 동안 가족들은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5년간 복역 하고 나서 1949년 12월 5일에 바카르치우크 형제는 석방되었다. 그는 코르제우치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으며 1980년 3월 12일에 사망할 때까지 충실을 유지하였다.

파르핀 고레아치오크: 고레아치오크 형제는 1900년에 태어나, 1925년부터 1927년 사이에 흘리나 마을에서 성서 진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친형제들인 니콜라에와 이온과 함께, 그 마을 최초의 성경 연구생들인 다미안 로슈와 알렉산드루 로슈로부터 진리를 배웠다.

1933년에 파르핀은 다른 증인들과 함께 체포되어 코틴 읍으로 이송되었는데 거기서 심문을 받고 전파했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받았다. 1939년에는 마을 사제의 선동으로 인해 인근에 있는 길라버츠 마을의 경찰서로 끌려갔다. 거기서 경찰은 매트 없는 판자 침대에 엎드리게 하여 그를 묶고는 수 차례 발바닥을 때렸다.

파시스트가 권력을 잡자 파르핀은 또다시 체포되어 감옥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같은 해에 소련은 그를 풀어 주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군 복무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즉각 다시 체포되었다. 그들은 그 형제를 키시나우에 있는 교도소에 여러 달 동안 감금하였다가 그 후에 풀어 주었다.

1947년에 소련은 파르핀을 또다시 체포하였는데 이번에는 하느님의 왕국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8년간의 유형을 선고하였다. 1951년에 그의 자녀들도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다. 하지만 그 자녀들은 아버지에게 가서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사실 그들은 아버지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파르핀은 유배 중에 심각한 병에 걸려 끝까지 충실을 유지한 가운데 1953년에 사망하였다.

바실레 퍼두레츠: 퍼두레츠 형제는 1920년에 코르제우치에서 태어나 1941년에 파시스트가 정권을 잡고 있을 당시 진리를 배웠다. 그로 인해 그 역시 파시스트에 이어 공산주의자의 통치하에서 고난을 당하였다. 그는 담대하게 공산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볼셰비키들에게 총을 쏘지 않았으며 파시스트들 역시 죽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성서에 근거한 양심적인 입장 때문에 바실레는 소련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의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의 형기는 5년으로 줄게 되었고 1949년 8월 5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북송 작전이 개시되었을 때 그는 세 번째로 체포되었다. 그래서 1951년 4월 1일에 바실레와 그의 가족들은 시베리아로 가는 유개 화차를 탔다. 그곳에서 5년을 보낸 후 그들은 몰도바 코르제우치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실레는 이 연감 기사가 준비되는 중이던 2002년 7월 6일에 여호와께 충실한 가운데 사망하였다.

[89, 90면 네모와 삽화]

‘봉사에 바친 내 인생을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겠습니다’

이온 사바 우르소이

출생: 1920년

침례: 1943년

약력: 공산 통치 기간에 순회 감독자로 봉사함.

나는 몰도바 카라쿠셰니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진리를 배웠습니다. 아내는 1942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아내의 장례식을 치를 때 폭도가 공동묘지에서부터 나를 쫓아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종교를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해에 파시스트 정부는 나를 군에 징집하려고 하였습니다. 나는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려는 열망 때문에 군 복무를 거부하였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나중에 그 선고는 25년 형으로 감형되었습니다. 나는 여러 수용소로 계속 이송되었습니다. 내가 루마니아 크라이오바에 감금되어 있을 때 소련 군대가 와서 우리를 풀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공산 당원들이 나를 다시 투옥시키는 바람에 거의 자유를 맛볼 수 없었습니다. 나는 러시아 칼리닌으로 보내졌습니다. 2년 후인 1946년에 그들은 내가 살던 마을로 가게 해 주었으며 거기서 나는 전파 활동을 재조직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그 후 1951년에 공산 당원들은 또다시 나를 체포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많은 증인들과 함께 나를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를 시켰습니다. 나는 196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집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나의 생애를 뒤돌아보면 여호와께서 나에게 충절을 고수할 힘을 주신 상황들을 많이 기억할 수 있습니다. 나는 창조주께 드리는 봉사에 바친 내 인생을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겠습니다. 현재 나는 노령과 쇠약해지는 건강 때문에 겪는 한계와 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 육체가 청년의 활력을 다시 얻게 될 신세계에서의 생활에 대한 확실한 희망은 “훌륭한 일을 행하다가 포기하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을 강하게 해 줍니다.—갈라디아 6:9.

[100-102면 네모와 삽화]

노래할 것이 너무 많아요

알렉산드라 코르돈

출생: 1929년

침례: 1957년

약력: 소련 정권하에서 고초를 겪었으며 현재 회중 전도인으로 섬기고 있음.

노래에 대한 사랑은 내가 진리를 발견하게 해 주었고 후에 믿음이 시험받게 되었을 때 영적으로 강한 상태를 유지하게 해 주었습니다. 내 이야기는 내가 십대 시절이던 1940년대에 왕국 노래를 부르고 성서 토의를 하며 여가를 즐기던 일단의 청소년들을 코르제우치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부터 시작합니다. 그처럼 성서 토의를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배우게 된 영적 진리는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나는 곧 좋은 소식의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나는 1953년에 열 명의 다른 증인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키시나우에 있는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나는 왕국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영적인 힘을 유지하였는데, 한 간수는 그 노래를 듣고 몹시 화를 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긴 교도소야. 노래 부르는 곳이 아니라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살아오면서 나는 항상 노래를 불렀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왜 그만둬야 하죠? 당신이 나를 가둘 수는 있어도 내 입을 봉할 수는 없어요. 내 마음은 자유롭고 나는 여호와를 사랑해요. 그래서 노래할 것이 너무 많아요.”

나는 북극권 근처의 인타에 있는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25년을 복역하도록 선고받았습니다. 짧은 여름 동안에는 다른 증인들과 함께 근처의 숲에서 일을 했습니다. 이번에도 우리가 외우고 있던 많은 왕국 노래들이 영적으로 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마음속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그곳의 간수들은 키시나우의 간수와는 달리 우리에게 노래하도록 권하였습니다.

인타 수용소에는 삼 년 삼 개월 삼 일 동안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사면을 받은 덕분에 석방되었습니다. 아직 몰도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 톰스크로 갔습니다. 역시 교도소에서 복역했던 남편을 그곳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우리는 4년 동안 헤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체포되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여호와에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물침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톰스크에 있는 형제들에게 그 문제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 역시 침례받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즉시 침례 마련을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금지령 때문에 밤에 근처 숲 속에 있는 호수에서 침례를 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약속된 시간에 우리는 톰스크 교외를 벗어나 의심을 사지 않도록 둘씩 짝지어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우리 모두가 호수에 안전하게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따라가야 하였습니다. 처음에 계획은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우리 앞에 있던 두 연로한 자매가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갔고 우리 뒤에 있는 사람들 역시 충실하게도 우리를 따라 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10명 정도 되는 우리 일행은 어둠 속에서 길을 헤매게 되었고 축축한 풀숲 때문에 피부까지 흠뻑 젖어서 덜덜 떨었습니다. 그 지역에는 곰과 늑대가 자주 출몰한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의 모양이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우리는 이상한 소리만 나면 깜짝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당황하거나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나서 조용히 서서 왕국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면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간절하게 기도도 하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우리 쪽으로 바람에 실려 돌아오는 같은 노랫소리를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형제들이 우리의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신속히 손전등을 켜서 우리가 그들 쪽으로 찾아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잠시 후, 우리는 얼음같이 찬 물속에 잠겼지만 너무 기뻐서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나는 지금 74세이며 처음 진리를 발견한 곳인 코르제우치에 돌아와 살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고 있지만 노래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하늘의 우리 아버지께 찬양할 노래 말입니다.

[104-106면 네모와 삽화]

부모의 본을 따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바실레 우르수

출생: 1927년

침례: 1941년

약력: 회중의 종으로 섬겼으며 지하에서 출판물을 생산하였음.

나의 부모인 시메온 우르수와 마리아 우르수는 1929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나는 오 남매 중에 맏이였습니다. 파시스트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중립적인 입장 때문에 체포되어 25년의 강제 노동 수용소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인근의 코르제우치에 있는 회중의 영적 형제 자매들이 어린 우리를 보살펴 주었고 우리 가족의 농장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먹을 것이 항상 넉넉했습니다. 진리 안에 있지 않았던 연로한 외할머니 역시 우리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열네 살이었습니다.

부모의 훌륭한 본이 있었기에 나는 동생들을 영적으로 돌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매일 동생들을 일찍 깨워서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 일부를 함께 토의하였습니다. 동생들이 항상 일찍 일어나고 싶어 한 것은 아니었지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좋은 연구 습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부모가 일찍 석방되어 1944년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부모는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한 모습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정말 기쁨에 찬 재회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듬해에 소련 당국은 아버지를 체포하여 북극권 위쪽에 있는 시베리아의 노릴스크에 수감하였습니다. 나는 삼 년 후에 활달하고 영적인 정신을 가진 자매인 에밀리아와 결혼하였습니다. 우리는 사실상 함께 자랐기 때문에 아내를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혼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아서 나는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우리는 키시나우로 보내졌는데 거기서 25년간 강제 노동을 하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아내는 이제 부모뿐만 아니라 큰형마저 빼앗긴 나의 동생들을 사랑스럽게 돌보아 주었습니다.

나는 결국 북극권 북쪽에 있는 악명 높은 보르쿠타 강제 노동 수용소에 있는 탄광으로 보내졌습니다. 2년 후인 1951년에 아내와 세 명의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은 시베리아 서부의 톰스크로 추방되었습니다. 1955년에 아내는 나와 함께 지내려고 보르쿠타로 옮겨 달라는 요청을 하였습니다. 보르쿠타에서 아내는 세 명의 아이들 가운데 첫째를 출산하였는데 우리는 그 딸의 이름을 타마라라고 지었습니다.

1957년 9월에 사면이 선포되었고 우리는 석방되었습니다. 하지만 한 달 후에 나는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러시아 사란스크 부근의 모르드비니아에 있는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다른 많은 형제들 역시 그곳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더 많은 형제들이 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부인들은 우리를 면회하러 올 때 출판물을 어떻게 해서든 몰래 반입하여 정기적으로 공급해 주었으며 우리는 그에 대해 깊이 감사하였습니다. 1957년 12월에 아내는 그때까지 아내의 부모와 함께 있던 우리 딸 타마라를 돌보기 위해 시베리아 서부의 쿠르간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아내와 7년간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만이 타마라를 국영 탁아소에 보내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나는 1964년에 석방되었지만 몰도바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사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여전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쿠르간에서 아내와 딸과 함께 살 수 있었으며 그곳에서 나는 회중의 서적 연구 사회자로 섬겼습니다. 1969년에 우리는 코카서스에 있는 크라스노다르로 이사하였습니다. 거기서 8년을 봉사한 후 우리는 우즈베키스탄의 치르치크로 이사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지하 인쇄 시설에서 일하였습니다. 마침내 1984년에 허가를 받아 몰도바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티기나에 정착하였는데, 이 도시는 인구가 16만 명인데 전도인은 단지 18명에 불과했습니다. 몇 해가 지나 이 작은 집단은 성장하여 거의 1000명의 전도인과 파이오니아로 이루어진 9개의 회중이 되었습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강제 노동 수용소와 교도소에서 여러 해를 보낸 것을 후회할 것 같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게 있어서 하느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세상을 사랑하느냐 하는 쟁점은 열네 살 때 막 침례받았을 때에도 분명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섬기기로 결심하였으므로 타협해야겠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야고보 4:4.

[삽화]

왼쪽: 바실레 우르수

더 왼쪽: 바실레와 그의 아내 에밀리아, 딸 타마라

[108-110면 네모와 삽화]

어린 소년이 꽃으로 내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발렌티나 코조카루

출생: 1952년

침례: 1997년

약력: 소련 정권 아래서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수업 중에 무신론을 가르쳤음.

1978년에 나는 몰도바 페테슈티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또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교무 회의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 자녀들에게 주의를 기울여 무신론을 가르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나는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증인인 원생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여러 독창적인 방법을 시도하였습니다. 나에게는 좋은 생각처럼 여겨지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화단 두 군데를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화단 한 군데는 아이들이 꽃을 심고, 물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화단은 손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나는 그 화단의 주인은 하느님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 자신이 그 화단을 돌보실 거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열렬히 그 계획을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자기들의 화단에 꽃을 심고, 물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는 동안 “하느님의 작은 정원”은 잡초가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화창하고 맑은 날에 두 개의 화단 앞에 아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먼저 아이들이 기울인 훌륭한 노력을 칭찬해 주고 그다음에 잘 생각해 놓은 몇 마디 말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자신의 화단에 아무일도 하지 않은 것을 봤지요? 이 화단에는 주인이 없는 것이 분명하지 않나요?”

아이들은 정말 그런 것 같다고 동의하였습니다. 그러자 나는 이렇게 말해서 한 방 먹이려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본 것처럼 하느님은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만 계신 분이기 때문에 화단이 이 모양인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정말로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꽃도 가꾸고 다른 일도 할 수 있겠어요?”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아이들의 반응을 살폈습니다. 부모가 증인인 한 어린 소년이 눈에 띄었는데, 그 아이는 갈수록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그 아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아이는 옆에 있던 땅으로 뛰어가 민들레 한 송이를 뽑아 들더니 나에게 가지고 와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약 하느님이 안 계신다면 누가 이 꽃을 자라게 했죠? 우리 중 아무도 돌보지 않았는데요.” 그의 논리적인 말은 나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나는 그 아이가 강력한 논증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깨달았습니다.

나는 공산주의 사상으로 교육받으며 자라 왔기 때문에 성서를 조사하는 다음 단계를 밟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하지만 1995년에 나는 지방 증인을 찾아가 성서 연구를 요청하였습니다. 나의 연구 사회자 중 한 명이 이전에 내가 가르친 원생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확실히 공산 체제는 나에게 훌륭한 세속 교육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삶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가르쳐 주지 못하였습니다. 여호와와 그 용기 있는 어린 소년 덕분에, 현재 나는 하느님이 정말로 계시며 그분은 자신이 창조하신 인류를 주의 깊이 돌보신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 역시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영적인 지식과 세속적인 지식을 둘 다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13-115면 네모와 삽화]

유배지에서 태어나다

리디아 세바스티안

출생: 1954년

침례: 1995년

약력: 증인 어머니와 믿지 않는 아버지의 양육을 받은 후로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증인들과 접촉하지 못했음.

어머니와 할머니는 1940년대 초에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좋은 분이었지만 그 당시에 성서 진리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1951년에 이르러 어머니는 두 명의 자녀를 출산하였고 이제 쌍둥이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4월에 당국은 우리 가족을 갈라놓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일하러 나간 사이에 출산을 앞둔 어머니와 자녀 둘을 시베리아행 기차에 태우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되기 전에 가까스로 아버지에게 연락을 했고 아버지는 급히 집으로 왔습니다. 아버지는 증인이 아니었지만 기차를 타고 가족과 함께 유배지로 떠났습니다.

시베리아로 가는 도중에 어머니는 쌍둥이를 출산하기 위해 아시노 마을에 잠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가족은 톰스크 지역으로 계속 가야 했고, 아버지는 톰스크에서 숙소를 마련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형제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몇 주 후 어머니와 갓 태어난 쌍둥이가 가족에게로 왔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쌍둥이는 가족이 처해 있었던 극악한 생활 조건 때문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배 생활 도중에 나와 내 쌍둥이 형제를 포함하여 네 명의 아이가 더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 모두를 충성스럽게 돌봐 주었습니다. 마침내 1957년에 우리는 고향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비밀경찰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지만 계속 우리 마음에 성서 원칙을 부지런히 심어 주었습니다.

한편 아버지는 자녀들이 좋은 세속 교육을 받게 하는 데 주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키시나우로 갔습니다. 후에 나는 결혼하여 카자흐스탄으로 이사하였는데 거기서 부모뿐 아니라 여호와의 조직으로부터도 떨어져 있게 되었습니다. 1982년에 키시나우로 돌아와 그 즉시 여호와의 백성의 회중을 찾기 시작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8년 동안 그 도시에서 여호와를 숭배하기 원하는 사람은 나 혼자뿐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두 명의 여자가 여호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더 잘 들어 보려고 가까이 갔습니다. 그 여자들은 내가 KGB 요원이라고 생각했는지 화제를 바꿔 버렸습니다. 그들이 걸어가기 시작하자 내가 따라갔으니 그들은 분명 몹시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재빨리 다가가서 얼마간 토의를 한 후에 나의 진심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마침내 여호와의 조직과 연합하고자 했던 나의 꿈이 실현된 것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남편은 나의 행동에 반대하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1992년에 나는 척추 수술을 받았고 병원 침대에 여섯 달을 꼼짝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하였습니다. 살아오면서 그처럼 울적했던 그 시기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들인 파벨이 여호와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나타내어 1993년 키예프 국제 대회에서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나는 다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1995년에 나 역시 여호와에 대한 나의 헌신을 상징하였습니다.

현재 우리 가족 중에는 증인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여호와와 언제나 나에게 확고한 본이 되어 준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 가족에 대해 참으로 충성스러웠던 아버지 역시 사망하기 전에 여호와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게 되어 정말 가슴 뿌듯합니다.

[117, 118면 네모와 삽화]

우리의 희생은 여호와의 희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미하이 우르소이

출생: 1927년

침례: 1945년

약력: 파시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음.

나는 1941년에 좋은 소식의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1942년, 내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교실에는 루마니아의 미하이 왕, 안토네스쿠 장군,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우리는 교실에 들어갈 때 사진 앞에서 몸을 굽히고 십자를 그어야 하였습니다. 우리 중 세 명이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지방 경찰은 우리를 잔인하게 구타하였습니다. 우리는 밤새도록 학교에 있다가, 아침에 코르제우치로 보내져서 다시 구타를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코르제우치에서 군법 재판을 받을 곳으로 가기까지 이곳저곳으로 약 100킬로미터를 걸어 다녔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발에서는 피가 났습니다. 결국에는 아마도 나이 때문인지 나는 실형을 받지 않고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열여덟 살 때 소련 당국은 나를 징집하였습니다. 다시 나는 중립을 타협하기를 거부하였고 잔인하게 구타를 당하였습니다. 내 친구인 게오르게 니멘코도 그런 구타를 당하였고, 그 때문에 중상을 입어 6주 후에 사망하였습니다. 다시 나는 집으로 돌려보내졌는데 아마 이번에도 나이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소련 당국은 1947년에 나를 다시 체포하였고 이번에는 내가 군 복무를 거부하면 총살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대신 두 달 동안 나를 독방에 가두고 나서 볼가-돈 운하 공사 현장에서 강제 노동을 하도록 보냈습니다. 그 일은 매우 위험했으며 여러 사람이 죽었습니다. 한번은 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사고가 있었는데 나는 아슬아슬하게 상해(傷害)를 피할 수 있었으며 몰도바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결혼을 하였습니다. 1951년 당시 임신한 아내 베라와 나는 추방되어 처음에는 기차를 나중에는 배를 타고 북극에 가까운 거대한 삼림 지역인 시베리아의 타이가로 이송되었고 거기서 나는 나무 베는 일을 하였습니다. 아내와 나는 한 오두막 안에서 다른 열여섯 가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1959년에 몰도바에 있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어려웠던 시절에 그리고 그 이후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은 나를 강하게 해 주었습니다. 한 가지는 형 이온이 세운 믿음의 모범이었습니다. (89면 참조) 형은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감형될 거라는 사실을 몰랐으면서도 타협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 시련을 인내할 때 그분이 나를, 그리고 나중에는 나의 아내를 어떻게 항상 돌보아 주셨는지를 숙고하면 나는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아들을 보내어 대속물로 죽게 하신 여호와의 희생에 비하면 우리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특별한 희생에 대해 숙고하는 것은 내가 하루하루를 기쁘게 보내도록 도와줍니다.

[121-123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의 인자한 돌보심을 느꼈습니다

미하일리나 게오르기차

출생: 1930년

침례: 1947년

약력: 금지령이 내려진 시절에 연락원 및 번역자로 일함.

나는 1945년에 진리를 배웠고 고향 마을인 글로데니와 인근 마을인 페트루네아에서 이웃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을 즐겁게 수행하였습니다. 학교 당국은 내가 학교에서 증거했다는 이유로 졸업장을 주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렇긴 하였지만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을 루마니아어나 우크라이나어에서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돕는 일에 내가 받은 교육을 사용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침례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번역하는 일이 발각되어 북극권 북쪽의 보르쿠타에 있는 강제 수용소에서 25년을 복역하도록 선고를 받았는데 그곳에는 자매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계속 전도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출판물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다름 아닌 수용소 안에서 우리가 사용할 출판물을 생산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루는 당국으로부터 증인으로 오해를 받아서 체포된 한 젊은 여자를 만났습니다. 나는 그 여자에게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목적과 일치하다면 자신의 백성을 자유롭게 해 주실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조사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는 성서 연구에 동의하였고 자매가 되었습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이 자매는 수용소에서 일찍 석방되었습니다.

후에 나는 카자흐스탄의 카라간다로 이송되었습니다. 마침내 1956년 7월 5일에 나 또한 석방되었습니다. 나는 톰스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알렉산드루 게오르기차를 만나 결혼하였는데 남편 역시 믿음 때문에 교도소에서 6년을 복역하였습니다. 우리 둘은 비밀경찰이 우리를 계속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시베리아의 넓은 지역에서 계속 전파하였습니다. 그다음 우리는 바이칼 호에서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인 이르쿠츠크로 이사하였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비밀리에 출판물을 계속 만들어 냈습니다. 후에 우리는 키르기스스탄의 비슈케크에서도 봉사하였습니다. 증거를 할 때 조심하기는 했지만 남편은 붙잡혀 10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검사는 남편이 미결수로 있는 동안에는 면회를 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면회가 일반적으로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왜 이러한 친절을 베풀어 주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젊은 부부고 아이도 있잖소. 어쩌면 당신들이 결정을 재고할지도 모르잖소.” 나는 검사에게 남편과 나는 오래 전에 여호와를 섬기기로 결정하였고 우리는 계속 충실함을 유지하기로 결심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성서에서도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되어 있지 않소.” (전도 9:4) 나는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말한 살아 있는 개는 하느님의 신세계를 상속받지 못하지요.”

남편은 교도소에서 10년 형기를 꼬박 채웠고 추가로 1년간 가택 연금에 처해졌습니다. 남편이 석방되고 우리는 카자흐스탄으로 갔다가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가서 활동을 도왔습니다. 우리는 많은 지역에서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이 여호와에 관해 배우도록 돕는 비할 데 없는 특권을 누려 온 것에 기뻐하면서 마침내 1983년에 몰도바로 돌아왔습니다.

돌이켜 보면 내 삶이 항상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증인이 아닌 이웃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역시 많은 문제들에 대처해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점은 우리가 고난을 겪는 것은 좋은 소식을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의 인자한 보호와 돌보심을 체험하였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시련 너머에 있는 영광스럽고 영원한 장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80, 81면 도표와 그래프]

몰도바—연대표

1891년: C. T. 러셀이 베사라비아 키시네프(현재는 몰도바 키시나우)를 방문하다.

1895

1921년: 연례 보고에 따르면 200명 이상이 성서 진리를 받아들이다.

1922년: 첫 번째 “집회를 위한 집”이 코르제우치에 건축되다.

1925년: 성경 연구생의 활동이 금지되다.

1930

1940년: 루마니아가 베사라비아를 소련에 양도하고, 베사라비아는 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명칭이 바뀌다.

1941년: 루마니아가 몰도바를 다시 점령하다. 파시즘과 전쟁의 흥분 때문에 증인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다.

1944년: 소련이 몰도바를 재점령하다. 박해가 계속되다.

1949년: 소련이 여호와의 증인들과 다른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하다.

1951년: 스탈린이 북송 작전을 개시하다.

1960년대: KGB가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 분란과 분열을 일으키려고 시도하다.

1965

1989년: 증인들이 더 많은 종교적 자유를 누리게 되다. 몰도바 대표단이 폴란드 대회에 참석하다.

1991년: 몰다비아 SSR의 명칭이 몰도바 공화국으로 변경되다. 최초의 순회 대회가 열리다. 본부 대표자가 처음으로 지구 방문을 하다.

1994년: 여호와의 증인이 법적으로 등록되다. 최초의 지역 대회가 키시나우에서 열리다.

2000

2000년: 키시나우에 새로운 베델 집이 봉헌되다.

2003년: 1만 8473명의 전도인이 몰도바에서 활동 중이다.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총 전도인 수

총 파이오니아 수

20,000

10,000

1895 1930 1965 2000

[73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우크라이나

몰도바

브리체니

타바니

리프카니

시러우치

코르제우치

차울

페테슈티

소로카

벌치

페트루네아

키시나우

커우셰니

드네스트르 강

프루트 강

루마니아

이아시

[66면 전면 삽화]

[74면 삽화]

일리에 그로자, 초창기 몰도바의 증인들 중 한 사람

[75면 삽화]

투도르 그로자

[78면 삽화]

이오아나 그로자

[92면 삽화]

파르핀 팔라마르치우크와 그의 아들 니콜라에

[93면 삽화]

바실레 게르만

[94면 삽화]

니콜라에 아니스케비치

[95면 삽화]

마리아 게르만

[96면 삽화]

증인들을 시베리아로 이송하는 데 사용된 유개 화차

[98면 삽화]

이반 미키트코프

[99면 삽화]

콘스탄틴 쇼베

[107면 삽화]

니콜라이 볼로샤노브스키와 「이중 바닥」 팜플렛

[111면 삽화]

게오르게 고로베츠

[126면 삽화]

페테슈티에 있는 대회 회관

[131면 삽화]

몰도바 전국 위원회,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데이비드 그로제스쿠, 아나톨리 크라브치우크, 티베리우 코바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