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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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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남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산악성 열대 우림 속에는 뱀과 아메리카표범이 숨어 있다. 이 나라는 면적과 인구 양면에서, 남 아메리카에서 가장 작은 나라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숭배자들의 용기에 대해서라면,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항시 겨루던 대영 제국과 네덜란드 제국은 1667년 7월 31일 평화 협정에 서명하고 영토를 교환했다. 즉 네덜란드는 뉴암스테르담을 영국에 넘겨 주었고, 영국은 수리남을 네덜란드에 넘겨 주었다. 아마 우리는 이 교환에서 영국이 차지한 것—뉴암스테르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영국은 그 명칭을 뉴욕으로 바꿨다. 하지만, 수리남은 어떠한가?

한때는 네덜란드령 기아나로 불리다가, 나중에 수리남으로 바뀐 이 나라는 가이아나, 브라질 및 프랑스령 기아나 사이에 끼어 있으며, 남 아메리카의 북동 해안에 놓여 있다. 이곳의 열대성 기후는 플로리다(미국)를 연상케 한다. 수리남은 플로리다 반도에 비해 좀 작은 편이다. 그러나, 잠깐, 만약 푸른 바다에서 수영을 하거나 백사장에서 포근히 휴식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수리남은 적합한 곳이 아닐 수 있다. 사실상, 이 나라의 질퍽질퍽한 해안은 너무나 삭막해 보이기 때문에, 초기 개척자들은 그곳을 가리켜 황야의 해안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모험을 좋아하는 편이라면, 방충제, 말라리아 약, 모기장을 챙겨 와서, 모든 자연의 세계에서 가장 울창하고 신비스러운 곳, 이 장엄한 열대 우림을 탐사해 보라.

항공기에서 내려다 보면, 뒤덮고 있는 열대 우림은 단조로운 초록빛 융단을 형성하고 있는데, 다만 북쪽을 향해 대서양으로 굽이쳐 흐르는 여러 개의 강줄기에 의해 찢겨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융단 아래를 들여다보면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다채로운 서식지, 이를테면 날랜 재규어(아메리카표범), 화려한 마코앵무새, 청승맞게 짖는 원숭이 및 커다란 뱀 애나콘다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수리남의 인종 역시 다채롭다. 원주민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었다. 후에 커피 농장에서 일하도록, 서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이 이송되어 왔다. 그후 도망한 노예들 곧 부시 니그로들이 종족을 형성하여, 수리남의 80퍼센트를 덮고 있는 무성한 열대 우림 속으로 조금씩 퍼져 나갔다. 그후에 동인도인과 인도네시아인이 들어왔다. 그 외에도 중국인, 레바논인, 유대인, 네덜란드 개척자들의 후손들이 있다. 수리남의 400,000 인구가 때때로 “축소판 세계”라고 불리는 이유를 이해할 만하다.

이 나라에는 힌두교인, 이슬람교인, 모라비아교인(프로테스탄트), 로마 가톨릭 교인, 정령 숭배자, 물신 숭배자 및 그 외의 종교인들의 다양한 신앙이 고루 분포하여, 종교적 잡동사니를 이루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더하여 네덜란드어(공용어)를 비롯해 스라난 통고어(지방어)에 이르기까지 약 열 가지 언어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어, 「수리남—일곱 민족의 나라」라는 책에서 국민의 연합은 아직도 “요원하다”고 기술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금세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한 가지 언어—성서 진리의 “순결한 언어”—가 수리남으로 들어와, 이 언어를 배우는 곳은 어디에서나 연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스바냐 3:9, 신세) 하지만, 도시며, 시골이며, 열대 우림 지역으로 진리를 파급시키는 데는 용기, 인내, 희생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후원이 필요하였다. 여호와의 종들은 어떻게 성공을 거두었는가? 우리와 함께 지난 90년간에 걸친 왕국 전파 활동의 두드러진 점들을 회상해 보도록 초대하는 바이다. 그러면 1903년으로 되돌아가 보자. 장소는 수리남의 북서 지방이다.

진리가 나룻배를 타고 들어오다

나룻배는 코란타인 강 하구를 힘들게 서서히 건너면서, 가이아나로부터 수리남의 작은 도시 니브니케리로 승객들을 날랐다. 승객 중 한 사람인 헤르보네트 씨는 20대 중반인 상인으로, 빨리 배에서 내려 갖고 온 책들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기다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의 친구들—제과업자 마리 돈크, 식료품상 알프레트 보이텐만, 그리고 제화업자 율리안 디크무트—은 그러한 책 속에 담긴, 성서 진리에 대한 간결한 설명에 곧 매료되었다. 머지않아 이 네 친구는 제과업자 마리 돈크의 집에서 성서 연구 집단을 형성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미국에서 보내 온, 워치 타워 협회의 초대 회장 찰스 T. 러셀이 저술한 출판물들을 더욱 연구하였다.

마리 돈크는 말에 재능이 있는 유대인으로, 그 집단을 인도하였고, 손님들에게 연구 집단에 가담하도록 권고하였다. 손님들의 반응이 느리자, 마침내 이 제과업자는, 니케리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기억하고 있는, “냔 브레데 손드로 프레데!”(마음 놓고 빵을 잡수시오!)란 표어를 사용하였다. 지금은 83세가 된, 알프레트 보이텐만의 딸, 린 보이텐만은 “그 말의 뜻은 집회가 끝난 후 사람들에게 무료로 빵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그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집회 참석자 수가 마치 갓 반죽한 빵 반죽처럼 불어났다. 그러나 제과업자 돈크가 청중에게 일요일에 시골 구역에서 있을 전파 활동에 함께 참여하자고 권고하자, 대부분의 집회 참석자들은 중단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1910년부터 1914년까지, 몇몇 충실한 사람은 돈크 형제를 따라 니케리 외곽의 한 간척지로 가서, 카카오 농장의 배수로 안으로 들어가 침례를 받았다. 지금은 86세가 된 제임스 브라운은, “그러한 침례 행사는 수백명의 구경꾼의 이목을 끌었다”고 말한다. 그는, 돈크 형제가 정장을 한 새로운 제자를 물속에 잠기게 하면서 큰 소리로 “아버지의 이름으로”라고 외쳤을 때 정신없이 쳐다보던 일을 지금도 기억한다. 돈크 형제는 그 다음 그 사람을 두번째로 잠기게 하면서 “아들의 이름으로”라고 소리쳤고, 또 세번째는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외쳤다. 그와 같이 행해지고 나면, 그 침례자는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오시오! 침례를 받고 계속 사십시오!”라고 외쳤다. 몇몇 사람이 침례를 받기 위해 왔지만, 대부분 세상이 1914년에 끝나리라는 두려움에서 그렇게 하였다. 1914년이 왔다가 지나가자, 그들 중 상당수가 떨어져 나갔다.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였습니다’

하지만, 1920년경, 전진하고 있던 성경 연구생들은, 한 형제가 미국으로부터 배편으로 와서 「창조 사진극」을 보여주었을 때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제임스 브라운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온 마을의 화제였습니다. 나는 일찍 카카오 농장에 있는 헛간으로 가서 맨 앞줄에 앉았습니다. 그 장소는 500명의 사람으로 꽉 찼었지요. 상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것—환등, 영화, 음악—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한 남자가 일어서서 ‘오늘 밤에 하나님의 왕국이 니케리에 임하였습니다!’라고 말하더군요.”

이제 다시 성장이 시작되었다. 1930년대 초기에 형제들은 돈크 형제의 집 뜰에다 조그만 집회 장소를 지었다. 하지만, 니케리 회중을 또 시험하는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한 겸허한 형제가 앞으로 나아가다

1930년대 중반에, 마리 돈크가 성경의 도덕관과 어긋나는 생활을 하고 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집회들을 사회하고 있었다. 상황을 누가 바로잡을 것인가?

체구가 작고 말씨가 부드러운 알프레트 보이텐만은 1903년에 침례를 받은 이래로 재정적으로 회중을 슬기롭게 지원해 왔었다. 린은 이와 같이 회상한다. “그러나 어느 집회 도중에, 나의 아버지가 앞으로 나아가, 목소리를 높여 이제부터 집회 장소를 우리 집 거실로 옮길 것이라고 발표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형제는 이 조처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몇몇은 제과업자 돈크 편에 남아 있었고, 그 집단은 점차 해체되고 말았다.

그리고 보이텐만 형제는 뉴욕의 협회 본부에 연락하여, 서적을 받았으며, 1936년부터 그에게 맡겨진 회중을 충실하게 섬겨 왔다.

그러나 잠깐 우리의 주의를 동쪽 240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25년 전의 과거로 돌려보자. 우리는 1911년에 수도 파라마리보에 도착했다.

가난한 화가가 본을 세우다

파라마리보의 항구를 방문하는 동안, 미국에서 온 순례자(당시는 순회 감독자를 그렇게 불렀음)들인 블레이크와 파우엘은 바베이도스 태생인 30대 후반의 온유한 화가, 프레데릭 브라이그바이그트를 만났다. 프레데릭은 진리를 깨닫고서, 아내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친구 한 사람에게도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그의 자그만 목재 가옥에서 집회들을 사회하기 시작했다.

순례자들처럼, 프레데릭은 성서 진리를 전할 방법들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일을 하는 도중에 목수인 빌렘 텔그트에게 증거하였다. 이 목수는 들은 것을 좋아했으며, 그의 친구 한 사람과 함께 “진실한 성경 연구생”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고, 연구생의 수는 셋에서 다섯으로 증가했다.

브라이그바이그트 형제는 그러한 집회에 대해 깊은 인식을 나타냈다. 몇년 전에 빌렘 텔그트는 이렇게 말했다. “가난하였지만, 브라이그바이그트 형제는 항상 집회 때는 새로 다림질한 하얀 양복을 입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식사를 못한 날에는 그의 빈 뱃속에서 쪼르륵쪼르륵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럼에도 그는 모든 집회를 동일한 열정으로 사회하였습니다.”

브라이그바이그트 형제의 본에 감동을 받아, 빌렘 텔그트는 1919년 2월 19일에 침례를 받았으며, 후에 왕국 권익의 확장에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대중에게로 나아감

1920년대에 성경 연구생들은 수도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에 그들 중 한 사람인 그라함 형제가 북적거리는 시장 맞은편 가게 앞에 긴 의자를 하나 놓으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그는 낡은 가방을 열고 협회의 다채로운 양장본 서적들을 진열해 놓곤 하였다. 평일마다, 영어를 사용하는 이 연로한 형제는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장보러 나온 사람들은 흔히 그 가방 주위로 모여 무리를 이루었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였다. 최근에 78세에 사망한 레오 뮈아이덴은 이와 같이 말하였다. “하지만 그라함 형제는 말을 간결하게, 아주 간결하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 나는, 그의 가방에 있는 소책자에서 한 젊은 남자가 뛰어가는 그림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라함 형제에게 ‘이 사람은 어디로 뛰어가는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연로한 형제는 나를 쳐다보고는 ‘읽어 보면 알게 될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뿐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왕국으로 도피하라」 책자를 읽고 그 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국 소식이 확성기로 전해지다

파라마리보의 주민들은 책을 통해서 왕국 소식을 배워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음반을 통해서도 왕국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떻게 말인가? 증인들에 공감하고 있던 어느 가게 주인 코르넬뤼스 보이그트는, 일요일 밤이면 그의 집 2층에 축음기와 강력한 확성기를 설치하였다. 텔그트 형제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처음에는 로마 가톨릭의 미사를 녹음한 것을 들려주었고, 다음에는 종교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이 충분히 모이면, 음반을 바꾸어 걸고, 음량을 최대 한도로 높였습니다. 갑자기 2대 협회장 조셉 F. 러더퍼드의 목소리가 청중에게로 그리고 더 멀리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나 평일 저녁이면, 보이그트는 청중을 모을 필요가 없이, 자기 집 옆에 있는 진료소에서 유명한 의사인 아들 루이스가 진료를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었다. 대기실이 환자들로 가득 차면, 보이그트는 축음기를 틀었다. 의사의 아내, 헬렌 보이그트는 이렇게 회상한다. “좋든 싫든 환자들은 러더퍼드 형제의 연설을 들어야 했습니다.” 서적과 음반을 통해, 증인은 이제 대중의 눈과 귀로 침투해 들어갔다.

하나가 셋이 되다—그러나 증가는 없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수리남의 지평선 너머 멀리서 벌어졌기 때문에, 이곳 형제들은 전쟁의 치명적인 영향력을 받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파라마리보 회중에서는 약간의 동요가 일고 있었다. 무슨 동요였는가? 형제들 사이에 알력이 있었다.

1938년 이래 집회에 참석해 온, 80세 된 레오 리프데는 이렇게 말한다. “1945년경, 회중은 세개의 집단으로 갈라져, 세곳에서 별도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 집단은 모두 자기들을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칭하였습니다.” 더욱이 1946년에 삼대 협회장 네이선 H. 노어가 수리남을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되었을 때, 이들 “세 집단은 ‘자기들의’ 협회장을 영접하기 위해 기대에 차 있었다”고 뮈아이덴 형제는 설명한다. 노어 형제의 반응은 어떠할 것인가?

1946년 4월 1일 월요일에 노어 형제는 당시 부협회장인 프레더릭 W. 프랜즈와 함께 파라마리보에 도착했다. 바로 그날 밤에 모든 분파로부터 39명의 형제가 프랜즈 형제와 노어 형제의 연설을 듣기 위해 중립적 장소인 학교 운동장에 모였다. 그리고는 질의 시간중에 형제들은 각기 다른 견해를 내세웠다. 협회장은 얼마 동안 귀담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충분히 들었었다.

뮈아이덴 형제는 이렇게 회상한다. “노어 형제는 간단하게 답변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선교인이 여기 오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손을 들었지요. 노어 형제는 ‘좋습니다. 이 달에 선교인이 올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약속대로 1946년 4월 27일에 길르앗 졸업생인 앨빈 린도가 정말로 왔다.

새로운 시대의 시작: 선교인이 도착하다

26세인 미국인 앨빈 린도가 밥티스타 형제와 같이 와서, 각기 다른 분파들을 모아 한 집단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한달 후, 린도 형제는 ‘보고를 낸 전도인 수는 2명에서 18명으로 증가하였다’고 기쁘게 보고하였다. 한편, 노어 형제는 수리남을 위한 좋은 소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46년 6월 1일부터 지부 사무실이 개설될 것이라고 편지하였다. 노어 형제는 “파라마리보에서의 왕국 사업을 추진해 나갈 때가 되었음을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지부 감독자로 임명된, 린도는 일을 착수하였다. 먼저 그는 지부 사무실을 밥티스타 형제의 집에서 즈바르텐호벤브뤼그 가(街) 50번지에 있는 널찍한 2층 건물로 옮겼고, 1층은 왕국회관으로 꾸몄다. 그런 다음, 주간 서적 연구, 봉사회, 「파수대」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다음에는 형제들에게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 다음에, 린도 형제는 “우리는 공격하러 갑니다!”라고 광고했다. 오래 된 한 사람은 이와 같이 회상한다. “그는 「자녀」 책을 집집으로 배포하는 일에 참여하자고 우리를 초대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망설였지요. 그러나 린도 형제는 나에게 ‘가라앉든지 헤엄을 치든지 양자 택일을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가방에 책을 챙겨 넣고 회관 주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 새로운 출판물을 제공하였습니다. 기쁘게도, 순식간에 가방이 비었습니다.”

하지만, 서적을 배부하는 것보다는 연설하기를 더 좋아하던 몇몇 형제는, ‘우리는 워치타워 협회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 우리는 러셀 목사를 믿는단 말이야’하고 불평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가라앉”고 말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형제는 그 서적 배부 운동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훈련을 받을 필요성을 느꼈다. 이어 몇달간 바로 그러한 훈련이 베풀어질 것이었다.

진보적인 교육이 베풀어진 한 해

1946년 9월에 파라마리보 회중에 신권 전도 학교가 소개되었다. 같은 달에 왕국회관에서 갖는 공개 강연 운동이 시작되었다. 광고지는 경찰을 포함한 대중의 주의를 끌었다.

첫 강연이 있기 전 수요일에, 연사가 경찰서로 소환되었다. ‘워치 타워 협회가 활동하는 나라는 여기가 처음인가요?’라고 경찰관들은 물었다. 수리남은 협회가 진출한 최근 나라들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서, 그들은 더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이래 공개 집회가 개최되었다.

그 다음 달 10월에 파라마리보 회중은 길르앗 졸업생들인 필리스 고슬린과 비비언 고슬린뿐 아니라, 맥스 개레이와 앨시어 개레이를 영접하였다. 지방 형제들과 나란히 일함으로써, “워치타워에서 온 다섯명의 미국인”은 선교인으로서, 그 도시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들은 전도인들이 진보하도록 도왔다.

1946년말에, 선교인들의 수고와 애정어린 돌봄으로 많은 것이 성취되었다. 전파 활동이 증가하였고, 분열은 연합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더 많은 발전이 예상되었다.

12월에는 “즐거운 백성 신권 대회”라는 최초의 대회가 열렸다.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의 발표로 인해 불붙은 20명의 전도인은 단지 한 시간 만에 8,000매의 공개 강연 광고지를 배포하였다. 213명이 참석하였다. 사상 최고의 참석 수였다!

같은 달에 형제들은 「파수대」와 「깰 때이다」지를 앞에 들고, 번화가를 다니면서 행진을 하였다. 호기심에 찬 행인들이 전도인들 주위로 모였다. 당나귀 수레를 타고 가던 한 남자는 잡지를 갖고 있는 자매를 보고는 당장 수레를 길모퉁이로 몰고 가 세웠다. 그는 잡지를 원하였다. 그날 오전에 잡지 101부가 전해졌다. 가두 증거가 궤도에 오른 것이다!

옛날로 되돌아가다

1948년에 전도인 수는 100명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그때 열대 지방의 어두움이 낮을 엄습하듯 돌연히, 증가가 감소로 바뀌었다. 1949년 3월 무렵에는 겨우 88명의 전도인만 활동하고 있었다. 다시 알력이 생긴 것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한 선교인이 선교인 집에서 있은 심각한 비리를 폭로한 것이다. N. H. 노어 형제와 M. G. 헨첼 형제가 본부로부터 1949년 4월에 방문하여 체류하는 동안 그 문제를 조사하였다. 후에, 당시 가이아나의 선교인이었던 존 헤머웨이가 그 문제를 상세히 조사하도록 파견되었다. 밝혀진 사실로 인하여 세명의 선교인이 떠나게 되었고, 전도인 59명의 회중은 개레이 부부에게 맡겨졌다. 형제들은 다시 옛날로 되돌아갔다. 문제는 어떻게 그들을 다시 움직이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맥스 개레이가 임시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으며, 침울한 시기에 자상한 목자로 알려졌다. 지금은 76세로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는 넬리에 반 마알센은 이와 같이 돌이켜본다. “회중의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 기간에 슬프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는 따뜻하게 이렇게 말한다. “맥스는 사랑이 많은 형제였습니다. 그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었지요. 심지어 지금도, 개레이 형제와 자매를 생각할 때면 눈물이 난답니다.”

석달 동안 맥스 개레이는 말하자면, 그 위축된 집단의 상처를 감싸준 셈이었다. 그후 1949년 11월에, 캐나다 출신인 새로운 길르앗 졸업생 J. 프랜시스 콜먼과 S. “버트” 시모나이트가, 형제들이 다시 일어서도록 돕기 위해 왔다.

이보다 전에 지부와 선교인 집은 게메에네란즈 가 80번지에 위치한 협소한 장소로 이사했었다. 따라서 새로 온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프린센 가에다 두번째 집을 빌렸다. 당시 27세였던, 버트 시모나이트가 새로운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1950년 1월 22일에 형제들은 여호와의 조직이 나타낸 감정 이입을 정말 개인적으로 느꼈다. 그날 노어 형제는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수리남까지 특별 여행을 하였다. 노어 형제는 75명의 형제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험담하고 악의적인 말을 할지라도, 그로 인해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영위하는 생활과 전파하는 소식으로, 여러분은 진리를 찾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과거에 어떻게 했든지 또는 앞으로 어떻게 하든지 개의치 말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흘간의 세워주는 교제를 나눈 후, 노어 형제는 형제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강화된 그들은 전진하였다.

다시 제 궤도에 오르다

파라마리보 회중이 도로 제 궤도에 오름에 따라, 선교인들은 이제 서쪽 니케리로 주의를 돌렸다. 그곳에서 보이텐만 형제와 다섯명의 전도인은—파라마리보에서 사람들이 들락날락하였음에도 동요하지 않고—1936년 이래로 중단 없이 왕국 소식을 전파하고 있었다. 당시 71세였던 보이텐만 형제를 돕기 위해, 개레이 부부는 니케리로 이사하였다. 나중에 집회 장소는 보이텐만 형제의 집에서 가우베르뇌르 가에 있는 선교인 집으로 옮겨졌다.

당시 40대 후반이었던 믿음직한 형제들, 존 브라운과 제임스 브라운은 개레이 형제를 도우면서, 덕분에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 얼마 후에 존과 제임스는 수요일 밤이면 등불 아래서 니케리와 인근 마을에서 옥외 공개 강연을 하였다.

그후 그들의 친형제, 안톤 브라운도 진리를 받아들였고, 주민들이 “브라운 교회”라고 부른 그 회중은 활동을 더욱 넓혀 나갔다. 1953년 2월 니케리에서 최초의 순회 대회가 열릴 무렵에 전도인 수는 21명으로 세배나 증가했다. 회중이 선교인들의 활동으로 유익을 얻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러면, 다른 선교인 버트 시모나이트와 프랜시스 콜먼은 파라마리보에서 어떻게 해나가고 있었는가?

야외 봉사 대 약

버트와 프랜시스는 오래 된 전도인들 중 몇몇이 재활동하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툭하면 그러한 전도인들은 틀에 박힌 대답으로, “형제, 나는 갈 수 없습니다. 약을 먹었거든요” 하면서 야외 봉사에 나가기로 한 약속을 회피하였다.

그렇다. 열대 지방에서는 때때로 장에 생기는 기생충 때문에 그러한 대답이 사실일 수도 있다. 버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이 옳든 그르든 간에 나는, 이 조그만 회중에서 엄청난 분량의 약을 먹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어떤 대책을 세울 수 있겠는가?

반 마알센 자매가 도움을 주었다. 야외 봉사를 나오지 않은 어느 날, 그 자매는 “형제, 사실을 말하지요. 난 너무 피곤했거든요”라고 말했다. 자매의 정직한 말에 감동되어, 키가 큰 버트는 몸을 구부려 그를 살짝 껴안으면서, “넬리, 내 기억으로는, 자매가 나에게 처음으로 진실을 말해 준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버트는 그 말이 전도인들 사이에 퍼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틀림없이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먹는 약의 분량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 같았거든요.”

아들들”

회중의 많은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 선교인들을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전도인들의 집과 마음 한구석에는 버트와 프랜시스가 차지하게 되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오래 된 사람들에게 버트와 프랜시스 이야기를 하면, 침침한 눈이 반짝이고 주름잡힌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추억들을 되살린다.

이제는 91세가 된 오마(할머니) 드 브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버트와 프랜시스는 친척 같았어요. 그들은 아들들이었지요.” 흔들 의자에 앉아서 그는 이웃집의 2층을 가리킨다. “저기서 그들이 살았어요. 쾌활한 이웃이었습니다.”

오마의 딸, 루스는 이렇게 말을 시작한다. “버트가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들리면, 그가 봉사 나간다는 걸 알았습니다.”

딸 힐레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리고 프랜시스가 자기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두개의 숟가락으로 이상하게 음악 소리를 낼 때면,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나 버트가 왕국 노래 81번, ‘깨어 왕국 환희의 노래를 부르라!’를 목청껏 부르고 있을 땐, 그가 샤워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다른 딸인 데테가 이와 같이 맞장구친다. “그리고 음식 타는 냄새가 날 땐 그들이 연구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마는 그들을 위해 음식을 마련해 주기 시작했다. 그는 환한 얼굴로 웃으면서, 이와 같이 덧붙여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음식을 담은 팬을 빗자루에 묶어, 우리집 2층 창문에서 불쑥 내밀었지요. 그러면 버트가 이웃집에서 긴 팔을 쭉 뻗어 팬을 잡아챘습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된 것입니다!”

프랜시스가 그 무서운 열대성 질병 필라리아에 걸렸을 때, 형제들은 얼마나 슬펐겠는가! 열이 나고 다리가 부어 오르는 병에도 불구하고, 프랜시스는 2년 이상 더 선교 봉사를 계속하였다. 그렇지만, 프랜시스는 마침내 그 병으로 인하여 캐나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콜먼 형제는 회중에서 튼튼한 기둥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회중의 영은 괄목할 만하게 향상되었으며, 전도인의 수는 83명으로 증가하였다.

소중한 일꾼들에 대한 추억

전도인 수가 증가하였기 때문에, 버트 시모나이트는 브루클린에 이렇게 편지하였다. “금년에 100명선을 돌파한다면,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1952년 4월에 전도인 수는 30퍼센트 증가하여 109명이 되었다.

당시의 소중한 두 일꾼 헨드릭 케르크와 윌리엄 잭을 만나보자. 마음을 끄는 미소와 다정한 눈을 가진 키가 큰 헨드릭은, 공손한 일반 사람들에게보다는 경찰에 더 잘 알려진 깡패 두목이었었다. 버트는 이렇게 회상한다. “헨드릭은 다듬지 않은 다이아몬드였습니다.” 그는 진리를 받아들였고, 회중을 온 마음을 다해 지원하였으며, 나중에 그 고장에서 최초로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그리고 쾌활하고 지칠 줄 모르는, 70대의 일꾼 윌리엄이 있었다. 그는 가난한 오두막에서 살았으며, 여러 군데 기웠지만, 깨끗한 옷을 입고 다녔다. 그는 통나무배 카누를 타고, 강둑을 따라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증거하는 데 여러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관심가진 사람들을 발견하면, 그는 심장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먼 거리를 여행하여 그들을 방문하였다.

버트는 이렇게 회상한다. “어느 이른 아침에, 우리는 관심가진 한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여러 시간 노를 저어 상류로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도착하여, 조금 휴식을 취한 다음, 저녁 6시경에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잭 형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책을 연구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파수대」로 바꾸어 연구하였고, 그 다음에는 내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동안 세번째 출판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거리 때문에, 그는 다만 두번째 주마다 이 가족을 방문할 수 있었지만, 그 시간을 중요하게 활용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이튿날에 노를 저어 돌아왔습니다. 행복한 한때였습니다.”

지부 감독자의 특별 전략

1951년 12월에 좋은 소식이 발표되었다. 추가로 네명의 선교인, 쉐드릭과 윌마 포이너, 뮤리얼 시모나이트, 코니 맥코널이 수리남으로 임명된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좋지 않은 소식이 전달되었다. 그리스도교국의 식민지 교직자들의 영향을 받은 법무 장관이, 그들 어느 누구에게도 입국을 허락해 주기를 거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부 감독자는 계속 그를 방문하였다. 법무 장관은 마침내, ‘두 선교인은 입국이 허용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을 선택하시오’라고 말했다. 회중은 형제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시모나이트는 포이너 부부를 선택하였다. ‘요청이 수락되었다.’ 그러나 지부 감독자는 이 문제를 그것으로 끝내려 하지 않았다.

버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 나는, 뮤리얼 시모나이트는 나의 누이 동생인데, 그의 입국을 금지함으로 우리를 갈라놓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법무 장관은 그 요청을 선뜻 거절할 수 없었다. ‘요청이 수락되었다.’ 그러나 코니 맥코널을 위한 허락을 얻어낼 방도는 없었다. 이제 4점 중 3점은 득점하였다. 하지만, 버트는 아직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는 전략을 바꿨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의 누이 동생이 캐나다, 퀘벡에서 코니 맥코널 자매와 같이 봉사하고 있을 때 보낸 편지를 통해 그 처녀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후 1953년 뉴욕 대회에서 그를 만났을 때, 우리는 약혼을 하였고, 그는 나의 약혼녀로서 수리남에 입국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결혼을 하였지요. 결국 4점 모두를 득점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나에게 큰 만족을 가져다 주었으며, 우리 모두에게 통쾌한 웃음을 안겨 주었습니다.”

시골로 진출하는 첫 단계

그때까지 형제들은 파라마리보와 니케리의 도시 지역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1953년에 레오 투아르트가 메르조르그 마을로 이사함으로써 진리가 그곳으로 들어갔다.

당시 마흔살의 레오는 1944년 이래 진리와 접해 왔었다. 키가 작으면서 활달한 성격으로 갈색의 만년 중절모를 쓰고 다니는 레오는 파라마리보 항구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했으며, 정직한 사람으로 아주 이름나 있었다. 마을에서 존경받는 사람이었으나, 레오는 제자를 삼는 일에 관한 한, 마을 사람들 가운데서 아직 이렇다 할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지부가 “습격 부대” 곧 헨드릭 케르크를 파견할 때까지는 그랬다.

얼마 안 되어, 헨드릭과 레오는 세 남자와 접촉하였는데, 이들은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다. 여호와의 영에 감동된 데다 헨드릭의 빈틈없는 감독에 잘 따름으로써 이 세 사람은 발전하여 침례를 받았다. 레오와 함께 이들은 손발이 척척 맞는 한팀이 되었다.

그들의 다음 계획, 즉 왕국회관 건축을 하는 일에서도 협동이 관건이었다. 이들 중 아무도 가진 돈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 새로운 세 형제들은 농토의 일부를 따로 떼어놓았고, 벼를 심어, 수확물의 수입을 건축 사업에 기증하였다.

하지만, 투아르트 형제는 벼를 심을 농토마저 없었다. 그는 건축 사업에 기여하기 위해 은행에서 200길더를 대부받았으며, 변변찮은 수입에서 조금씩 조금씩 갚아나갈 셈이었다. 이 네명의 가난한 형제는 목표를 달성하여, 훌륭한 왕국회관을 건축하였다.

그런데, 건축 사업이 절반쯤 진척되었을 때, 이 형제들은 파라마리보에서 개최되는 특별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공사를 멈추게 되었다. 1954년 1월 18일 월요일 저녁에, 이들은 노어 형제와 헨첼 형제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인 159명 가운데 끼어 있었다.

“그 대회에서 노어 형제와 헨첼 형제는 우리의 새 왕국회관을 가서 보고싶다고 하였습니다”라고 이제 77세인 레오 투아르트 형제는 회상한다. 그는 중절모를 고쳐 쓰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약간 걱정이 되었습니다만 그럴 필요가 없었지요. 두 형제는 우리가 한 일에 대해 칭찬해 주었습니다. 노어 형제는 ‘다만 회관 앞에 있는 그 아름다운 망고나무는 잘라내지 마십시오.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줄 겁니다’라고 조언해 주더군요. 우리는 노어 형제의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나무는 아직도 거기 서서, 시원한 그늘과 망고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시골 지역으로 진출해 들어감

증가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지부 사무실은 즈바르텐호벤부뤼그 가에 있는 4층 건물로 이전되었다. 1층은 파트마라고 불리는 제화점이 차지하였다. 2층에는 왕국회관과 주방이 있었고, 3층은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으로 사용하였고, 꼭대기층은 서적 창고로 사용하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해서, 당시 28세였던 뮤리얼 시모나이트는 파라마리보에서 남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인 온베르다히트와 파라남까지 정기적으로 전파 여행을 하였다. 일주일에 한번씩 뮤리얼을 따라갔던 헬렌 보이그트는 이렇게 회상한다. “아침 일찍 우리는 보크사이트 광산으로 광부들을 나르는 버스에 무임 승차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광산 근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파하였고, 점심 때가 되면 가지고 간 샌드위치를 먹고 더 전파한 후, 광부들과 같이 돌아왔습니다. 피곤하였지만, 만족한 기분으로 저녁 6시쯤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뮤리얼은 차분하고 호리호리한 루디 파테르를 만났는데, 그는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루디는 진리를 더 멀리 전파하기를 원했고, 교통 수단—큼직한 할리 데이비드슨 오토바이—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뮤리얼은 일찍 파라남으로 가서, 온종일 봉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나는 할리를 타고 파라남으로 가서 뮤리얼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성서 연구를 두건 더 사회하였습니다. 자정이 거의 되어, 뮤리얼은 할리 오토바이의 뒷자리에 올라탔으며, 우리는 부-웅하고 집으로 달렸습니다.”

결혼식, 아니면 자동차?

그러한 마을에서의 반응은 장래성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루디는 더 많은 전도인이 같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동차를 한대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루디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저축한 돈이 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은 다가오는 결혼 비용으로 쓸 것이었습니다. 나는 성서를 연구중이던 약혼녀, 마리와 함께 그 문제에 관해 의논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결혼을 연기하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영국제 힐만을 샀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다섯 사람이 시골에 가서 전파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1954년에 파라남, 온베르다히트와 그 외곽의 세 군데에 연구 집단이 생겨났다.

그건 그렇고, 결혼식은 결국 거행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파테르 형제와 자매는 파라마리보에서 아주 감사하게 여기는 전도인들이다.

감독 직분의 변동

1954년 끝무렵, 여러 가지 변동이 있었다. 생산적인 선교인들인 쉐드릭 포이너와 윌마 포이너가 이 나라를 떠났다. 맥스 개레이와 앨시어 개레이는 쿠라사오로 전임되었으며, 그곳에서 10년 더 선교인으로 봉사한 후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최초의 본고장 특별 파이오니아들인 헨드릭 케르크와 제화업자 율리안 디크무트의 딸인 멜리 디크무트가 새로운 구역으로 파견되었다. 버트 시모나이트의 아내 코니가 아기를 낳을 예정이라서, 시모나이트 형제를 대신하여 지부 감독자로 봉사할 다른 선교인을 파견할 필요가 생겼다.

따라서 1954년 11월에, 버트는 이 나라에서의 감독의 직분을 스물 두살밖에 안 된 내성적인 네덜란드 선교인 디르크 스테겡가에게 인계하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스테겡가 형제가 감당해 낼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선교인 생활을 시작함

이제 57세가 된 디르크는 이와 같이 회상한다. “내가 도착한 지 이틀 후, 버트와 코니는 순회 사업을 하기 위해 떠났으며, 뮤리얼은 외국에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안해 하며 그 큰 집에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디르크가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에, 에-흐 에-흐하고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가 그의 침실을 뚫고 지나갔다. 그 집 옆모퉁이로 증기 기관차가 기적을 울리며 돌고 있었다. 기차가 다시 속력을 내자, 슈 슈 슈하는 엔진 소리에 거리에서 나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기름기 썪인 연기와 불똥이 거리며, 집이며, 그의 방 어디에나 온통 있었다. 디르크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그 다음에, 뉴욕에서 가져온 100퍼센트 나이롱 셔츠들에 불똥들이 춤을 추며 내려앉아, 즉시 태워서, 수많은 구멍을 남기는 걸 보고는 아연 실색하였습니다. 비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날이 열기며 소음이며 연기며 불똥은 끊이지 않았고, 셔츠에 구멍이 계속 생겼다. 디르크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런데다 설상가상으로, 부엌에서 커다란 쥐들이 설치고 다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때는 더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헬렌 보이그트는 외로운 선교인을 동정하여, 식사를 마련해 줌으로써 그가 환영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었다. 디르크는, “헬렌은 어머니와도 같았습니다”라고 감사의 말을 한다.

하지만, 다른 선교인들이 돌아온 후, 디르크는 곧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는 버트의 지도를 받아 일에 착수하게 되었다.

몇달 뒤, 디르크와 버트는 도전적인 구역들, 즉 손대지 못한 열대 우림 지역에 주의를 돌렸다. 그들은 ‘거기에 발판을 놓을 수 있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알아보기 위해, 1955년 9월 가방에 짐을 챙겨 넣고, 증기 기관차를 타고서, 빽빽한 우림 속으로 들어갔다. 왕국 전파 역사상 흥미진진한 장이 시작된 것이다.

적대하는 구역에서의 「깰 때이다」 통신원들

그때까지는 우림의 주민들, 즉 아메리카 인디언과 부시 니그로들 중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부시 니그로 중에는 1947년, 수도를 방문하는 기간에 유숙했던 군인 막사에서 연설이 제공되었을 때 처음으로 왕국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소수 있었다.

또한 1950년에 두 형제가 수리남 강변에 있는, 1,300명의 부시 니그로가 사는 간세 마을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모라비아 교회 목사가 “두 사람의 거짓 예언자가 책을 팔고 있다!”고 떠들썩하게 퍼뜨렸다. 증인들이 한 연로한 남자의 오두막에서 책 네권을 막 전한 후, 부추김을 받은 수백명의 교회 성원이 몰려와 그들을 강 있는 데까지 추격하였다. 형제들은 허둥지둥 카누를 타고 노를 저어, 간신히 몰매맞는 일을 피하였다.

이제, 그로부터 5년 후, 기차가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카벨로 들어가고 있을 때, 그 사건이 버트와 디르크에게 떠올랐다. 카벨은 종착역인데, 그곳에서 노를 저어 두 시간 걸리는 거리에 목적지인 간세가 있었다. 그들이 이번에는 어떤 대우를 받을 것인가? 적대적인 반응을 예방하기 위해, 지부에서는 부시 니그로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취재하러 두명의 「깰 때이다」 통신원이 간세를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그 마을 촌장에게 보냈었다. 촌장은 통신원들을 환영한다고 답변했었다.

버트와 디르크가 카누를 타고 간세에 도착한 그날, 촌장과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마중나와 있었다. 디르크는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왕족처럼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머물 숙소로 안내하였는데, 그 마을의 일급 주택 중 하나였어요. 그 다음에는 그들은 우리를 강까지 호위하고 가서, 우리가 목욕을 마칠 때까지 공손의 표시로 돌아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그들과 교제를 즐겼으며, 대화는 스라난 통고어를 아는 버트가 거의 다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마을을 구경하는 동안 이 형제들은 조심스럽게 몇몇 마을 사람들에게 증거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 일요일 아침 일찍 그들은 카벨로 떠났다. 거기서 그들은 다음날의 기차를 기다리기 위해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

배를 타고 선교인들을 뒤따라감

하지만, 선교인들이 간세를 떠난 지 몇 시간 후, 18세의 부시 니그로인 프레데릭 바히테르가 그곳에 도착하였다. 친구들이 그에게 여호와의 증인으로 생각되는, 키 큰 백인 두 사람이 다녀갔다고 알려 주었다. 프레데릭은 낙심하였다. 1년간이나 여호와의 증인을 찾고 있었는데, 이제 그들이 이곳에 들렀다가 다시 떠나버렸다니! 그러나 프레데릭은 선교인들이 그 다음날 기차를 타고 갈 것이라는 말을 듣고, “기차가 떠나기 전에 그들을 따라잡아야 해”라고 말했다. 그는 과연 해낼 수 있을 것인가?

월요일 아침, 선교인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자그마하고 수줍음 타는 부시 니그로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신들이 우리 마을에 전도하러 왔었나요?”라고 프레데릭은 물었다. 그 말을 듣고 놀란 선교인들은, “그런데요, 왜 묻지요?”라고 대답했다.

“당신들이 오셨을 때 저는 만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가르침에 대해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어 왔습니다.” 선교인들은 프레데릭과 함께 앉아, 안식일, 침례, 왕국 및 그 외 다른 것에 관한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총명한 소년이 처음에 어떻게 여호와에 관해 알게 되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였다. 프레데릭의 이야기는 이러하였다.

1950년에 두 형제가 간세에서 쫓겨나기 바로 전에 프레데릭의 삼촌에게 4권의 책을 전했었다. 4년 후, 프레데릭은 그 책을 발견하여 읽고서 죽은 자들의 실제 상태에 대해 배워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줄곧, 그는 그의 종족의 미신적인 축제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모라비아 교회를 그만두었고, 언젠가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 월요일 아침에 그의 소원이 성취된 것이다. 하지만, 이제 기차가 역에 들어오고 있었다. 선교인들은 그에게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주었고, 수도에 오는 길이 있으면 지부 사무실을 방문해 달라고 초대한 후에 떠났다. 프레데릭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최초의 부시 니그로 형제!

그 다음 달 10월에, 한 맨발의 청년이 선교인 집의 문을 두드렸다. 디르크 스테겡가는 이렇게 회상한다. “프레데릭은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다 읽고 모든 세부점을 기억하였으며, 진리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2주일 동안 매일, 그는 선교인 집으로 와서 연구하였지요. 그렇지만 집회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몹시 궁금하였습니다.”

디르크는 이와 같이 말을 잇는다. “어느 날, 그를 다시 초대하였는데, 프레데릭은 아래로 내려다보고는 ‘신을 신발이 없어요’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는 들어가기를 부끄러워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구호물자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를 원치 않았기에 신발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영화를 상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워서 아무도 신발을 신지 않은 것을 못 볼 것입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날 밤 관중 가운데 있는 프레데릭을 보고 우리는 참으로 기뻤습니다.” 프레데릭은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란 영화에서, 수천명의 아프리카인이—신발을 신지 않고서도—즐겁게 여호와를 섬기는 것을 보고 아주 기뻐하였다!

2주일 후 프레데릭은 또 하나의 기대, 즉 그해 12월에 있을 “승리의 왕국” 대회에 참석할 기대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대회에 참석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저축하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일했다. 그는 그 일을 해냈다. 12월 11일에 그는 침례를 받았다. 그날 최초의 부시 니그로 형제를 환영하게 되어 우리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늘날, 바히테르 형제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면서 성구를 기억하는 특출한 능력을 아주 잘 사용하고 있다. 디르크는 이렇게 요약한다. “프레데릭의 경험은, 우리는 여호와의 수중에 있는 보잘것없는 도구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결국, 우리가 프레데릭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찾아낸 것입니다.”

협회 영화가 정부의 결정에 영향을 주다

그해초에, 바히테르 형제에게 도움을 준 그 동일한 영화가 다른 면으로 사용된 적이 있었다. 어떤 면으로인가? 두명의 새로운 선교인이 수리남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지부 사무실에서는 입국 허락을 신청하였지만, 완강한 프로테스탄트 교인인 법무 장관에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법무 장관이 휴가차 부재중에, 이슬람교인인 사법 경찰 장관과의 면담을 신속히 주선하였다.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디르크는 이와 같이 말한다.

“그 장관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인 후, 밑줄친 「파수대」지를 철해 놓은 폴더를 꺼냈습니다. 그런 다음, 한 잡지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이 세상의 5개년 계획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수리남은 5개년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계획을 반대하는 종교를 우리는 원치 않습니다.’”

지부 감독자는 정부에 순종하는 일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그러자 그 장관은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허락을 얻는 데 실제로 장애가 된 것은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었다. 디르크는 이와 같이 계속 말한다. “그 장관이 이슬람교인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그리스도교국이 우리를 싫어하는 이유는 우리가 삼위일체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슬람교인들과 같이, 우리는 유일한 참 하나님을 믿는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장관은 그 점에 흥미를 가졌으며, 더욱 공감을 갖게 되어,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여러 주가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자 나중에 증인이 된, 루이스 보이그트 박사가 이런 제안을 하였다. “그 장관과 법무 장관 대리는 나의 환자이므로, 내가 그들 부부를 우리 집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여러분 선교인도 오셔서 귀 협회의 영화를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아마 편견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정부 관리들은 정말 협회의 영화를 구경하고 감명을 받았다. 디르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두 주일 후에, 우리는 허가서를 받았습니다.” 선교인 빌렘 곧 “빔” 반 세아일과 그리티에 곧 “그레” 반 세아일은 장도에 오르게 되었다.

싸늘한 대우

1955년 12월 7일에, 법무 장관은, 그 무렵에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서 격분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낡은 화물선 코티카가 부두에 닿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승객인 빔 반 세아일과 그레 반 세아일이 하선하자, 법무 장관은 그들을 자기 앞에 출두하도록 명하였다. “법무 장관은 마치 우리가 죄인인 것처럼 바라보았습니다”라고 빔은 회상한다. “그는 이렇게 언명했지요. ‘여러분은 파라마리보 안에서만 일할 수 있어요. 만일 도시에서 한 발짝이라도 나가서 전도한다면, 추방될 것이오!’ 그리고는 우리에게 그러한 제한 사항이 담긴 문서를 건네주면서 가도록 허락하더군요. 그건 정말 따뜻한 환영이었습니다”라고 반 세아일 형제는 익살스럽게 말한다.

하지만, 이 두 선교인은 회중에 단단히 보탬이 되었다. 사실, 그들은 수리남으로 오기 전에 이미 훌륭한 봉사 기록을 남겼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있을 동안 진리를 배웠고 1945년에 침례를 받았으며 그 후 순회 사업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들의 각별한 도움으로, 증가가 있게 되었다. 지부는 1956년 2월에 “회중을 둘로 분회하였다”고, 4월에는 “목표 달성을 하였다! 47퍼센트 증가하였다”고, 6월에는 “전도인 200명 선을 도달하였다!”고 편지하였다. 지부는 “전망이 밝다!”고 결론지었다.

한편, 아기 캔티의 출생으로 식구가 불어난, 시모나이트 형제 가족은 그 이듬해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기 위하여 코로니에 있는 코코넛 농장으로 이사하였다. 그러나 그후 1957년에, 버트의 건강이 나빠져 그들은 캐나다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수리남에 있는 8년 동안 마음과 영혼을 바쳤다. 여호와의 축복으로 버트는, 회중이 유년 시절의 불안정한 상태에서, 소위 책임감있는 청년기의 믿음직한 상태로 성장하도록 성공적으로 보살폈다. 결코 작은 업적이 아니었다! 오늘날 시모나이트 가족은 과테말라에서 왕국 권익을 돌보는 일을 돕고 있다.

가난한 자매의 믿음의 행동

1955년에, 제화점 위층에 있던 허물어질 것 같은 왕국회관에서 집회를 본 후, 스텔라 다울라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집으로 걸어갔다. 망고나무와 카이닛나무로 에워싸인 그의 조그만 집으로 들어설 무렵, 그의 생각은 확고해졌다. “우리 대지를 회중에 주어, 여기에 보다 좋은 회관을 짓게 해야지.” 그는 역시 증인인 어머니와 그 점을 상의하였고, 두 사람은 ‘기증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스텔라는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집을 대지 뒤쪽으로 옮길 수 있는지를 다만 물어보았다. 형제들은, “문제 없습니다. 우리가 옮겨드리지요”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다울라트 자매의 소유지—증조 할머니가 노예에서 해방되던 1863년에 받은 것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는 그에게 거처 외에도 다른 것을 제공해 주었다. 나무의 과일을 따서 팔았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조그만 소득원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 소유지를 포기한다는 것은 생계 수단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였다. 한 형제는 “스텔라의 결정은 믿음의 행동이었다”고 경탄해 한다.

형제들은 감사함으로 그 선물을 받았지만, 건축할 자금이 모자랐다. 하지만, 몇달이 지난 후, 그들에게는 건축하는 일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왜 그랬는가? 1955년 12월에, 백명이 넘는 사람이 그 낡은 왕국회관에 앉아 있을 때,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구조로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빔 반 세아일은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걱정했습니다. 바닥이 곧 내려앉아 모두 아래층에 있는 신발들 가운데로 떨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집회가 끝날 때, 맨 첫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앉아 있으라는 광고가 있었다. 그런 다음, 그 다음 줄에 앉아 있는 형제들이 나갔으며, 회관에서 모두 나갈 때까지 그렇게 하였다. 빔은 이와 같이 덧붙인다. “그날 우리는 영단을 내려, ‘돈이 있든 없든, 회관을 짓도록 합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새 왕국회관이 신기원을 알리다

1919년에 침례를 받은 빌렘 텔그트가 건축 공사를 감독하였다. 그는 스텔라에게, “가구를 꺼내려고 신경쓸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집을 그대로 옮겨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형제들이 그 부서질 듯한 집을 통나무에 실어 뒤뜰로 굴려갈 때 지나가던 사람들은 흥미 진진하게 바라보았다. “창문을 거리로 향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전망이 한결 좋겠어요”라고 스텔라가 부탁했다. 문제 없었다. 집을 4분의 1쯤 돌려놓았다. 그런 다음, 스텔라는 집으로 들어가서, 벽에 걸린 그림들을 정돈하고, 의자를 창문 앞에 갖다 놓고 건축 공사를 하는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지켜볼 준비를 하였다. 무엇이 보였는가?

먼저, 형제들은 나무를 뽑아냈다. 그 다음, 기초를 놓고, 두껍고 견고한 콘크리트 벽을 쌓아올렸다. 그러고 나자 자금이 바닥났다. 하지만, 협회에서 자금을 대여해 주었으며, 건축이 계속되었다. 6개월 걸려 그리고 13,000길더(약 470만원)의 비용을 들여 200개의 좌석을 갖춘 회관이 완공되었다. 봉헌식은 1957년 1월 13일로 정해졌다.

건축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전도인은, “이 회관은 이제 아마겟돈 때까지 쓰겠어요”라고 한마디씩 했다. 그러나 봉헌식을 가진 후, 그런 확신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899명이나 참석하였으니 말이다! 청중은—회관 안에서, 창턱에서, 그리고 바깥에서—모두 증인들로 구성된 합창단의 멋진 공연을 곁들인, 연설과 환등 프로그램을 즐겼다. 행복한 형제들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갈 때, 파라마리보에서의 확장의 신기원을 감지할 수 있었다.

뱀 부리는 사람이 이웃으로

때가 되어 선교인 집은 보다 나은 곳으로 이사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무렵 그 집은 쥐뿐 아니라 뱀의 놀이터가 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타파이츨랑겐(왕뱀)을 갖고 마술을 행하는 한 주술사가 뱀들을 갖고 선교인 집 뒤뜰에 와서 살았다. 이따금씩, 2미터나 되는 왕뱀들이 바구니에서 나와 자전거를 두는 선교인 집 광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빔 반 세아일은 이와 같이 말한다. “그레와 뮤리얼이 자전거를 가지러 갔다가, 천장에 매달려 있는 왕뱀들을 정면으로 보곤 하였습니다.” 그레는 이와 같이 덧붙인다. “뱀들은 심지어 부엌으로 가는 계단을 기어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이 파라마리보의 베이데 가로 이전하였을 때, 선교인들이 후회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작별 인사!

1958년 뮤리얼 시모나이트가 떠난 이후, 선교인 가족은 넷으로 줄어들었다. 그 헌신적인 일꾼은 많은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도왔었다. 그는 당시 라이베리아의 지부 감독자였던 선교인 월터 클린크와 결혼한 후, 진리 때문에 그 나라에서 무척 가혹한 대우를 인내해야 했다. 병이 나자 그 부부는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현재, 뮤리얼은 미국에서 남편을 따라 순회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1958년에, 최초의 본고장 특별 파이오니아인, 25세의 막스 라이츠가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게 되어 그와의 작별 인사가 있었다. 막스는 코로니에서 교사로 일할 때 버트로부터 진리를 배운, 생각깊은 형제인데, 길르앗 제 32기 학급에 참석한 다음, 수리남으로 돌아왔다. 그를 기다리는 일감이 있었다!

열대 우림 주민들이 도움을 청하다

길르앗을 막 졸업한 막스는 투지를 요하는 임명을 받았다. 즉 열대 우림 속 강변에 사는 관심자들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막스가 첫 번째 여행을 한 지 몇주 후에, 지부는 어느 부시 니그로 마을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어느 종족에 속한 사람이 이렇게 편지하였다. ‘라이츠 형제를 보내 주어 복음을 알게 해주시니 행복하며 이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나는 집집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나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도 좋은 소식에 대해 더욱 배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은 크고도 분명하게 “우리는 하고 싶지만, 도움이 필요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순회구에서 도움을 베풀어, 선체 밖에 10마력짜리 모터가 달린 작은 배를 한척 샀다. 세 사람의 탑승자가 수리남 강 상류로 올라갔다. 이 형제들은 이중적 사명, 즉 모든 마을에서 전파하고, 특별 파이오니아를 파견할 장소를 찾으라는 사명을 띠고 있었다.

100킬로미터쯤 내륙으로 들어간 후, 형제들은 놀랍게도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한 마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열대 우림의 구석구석에서 모여든 800명의 부시 니그로가 수력 발전소와 댐 공사를 하기 위해 그곳에 임시로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형제들은 광범위하게 영향을 줄 발견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수랄코콘드레 마을은 여러 다양한 종족들—사라마카네르족, 아우카네르족, 마투아리르족, 알루쿠족, 파라마카네르족, 크빈티족—에 속한 사람들에게 모두 한 장소에서 전파할 놀라운 기회를 준 것이다! 확실히, 이곳이야말로 특별 파이오니아를 파견해야 할 곳이었다.

두달 후에 그 배는 다시 돌아왔다. 배에 실은 서적이며 쌀 부대며 주방 용기며 해먹 곧 달아매는 그물 침대는, 탑승자인 막스 라이츠와 프레데릭 바히테르가 체류할 계획을 하고 왔음을 알리는 것들이었다. 반대하는 촌장이나 교직자들이 없는 가운데, 다양한 종족에서 모인 20명의 부시 니그로가 가도 보르투 스마(하나님의 말씀의 사람들)와 성서를 연구하였다. 그 명칭은 마을 사람들이 형제들을 가리켜 한 말이다. 나중에는 집회도 마련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수랄코콘드레 마을에 열대 우림 지역 최초의 회중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나서 1963년말에 댐 공사가 끝나자, 부시 니그로들은 각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 중 21명은 귀중한 것,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갔다. 이렇게 하여 진리는 열대 우림 전역에 흩어져 있는 여러 마을로 퍼져나갔다. 라이츠 형제는, “수랄코콘드레를 발견한 것은 여호와의 인도였습니다”라고 결론짓는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인도해 들이십니다”

여호와의 인도는 또한 사라마카 강을 따라 일어난 일에서도 분명하였다. 1960년말 어느 날 아침, 하나님을 경외하는 세도라는 부시 니그로가 배를 저어 교회로 갔다. 수년 전에 그는 정령 숭배를 버리고 모라비아교인으로 침례를 받았고, 하나님을 더 잘 섬겨 보려고 그 교회에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였었다.

그날 아침 교회에 다가갔을 때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교회 앞에서, 상품을 가득 올려 놓은 가판대를 보았다. 교회 바자가 한창이었다. 예수께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쫓아낸 성서 기록이 떠오르자, 그는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시장이 설 수 있담?’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주 불쾌한 나머지 그는 집으로 되돌아가, 아내에게 “다시는 교회에 안 나가겠소!”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섬기려는 그의 열망은 약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친지 한 사람이 증인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자, 그는 즉시 관심이 생겼다. ‘아마 이 사람들이 참 그리스도인들인지도 몰라’하고 생각하고서, 찾아볼 결심을 하였다. 1961년 1월에, 세도는 친구 바야 미스댠과 함께 수도로 가서 대회가 열리고 있던 축구 경기장에 들어섰다. 많은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한때 우루과이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였고, 지금은 디르크의 아내가 된 나탈리 호이트 스테겡가는 이와 같이 회상한다. “그들을 보았을 때, ‘부시 니그로군요!’란 말이 무심결에 튀어나왔습니다. 정말 감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프레데릭 바히테르만이 부시 니그로 형제였는데, 이제 뜻밖에 두 사람이 더 나타난 것이다. 스테겡가 자매는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 선교인들은 서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인도해 들이십니다. 그들이 찾아오고 있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실로, 세도와 바야는 인도된 사람들이었다. 여호와의 요구 조건들을 배워 알게 되자마자 그들은 결혼을 법적으로 등록하였으며, 침례를 받고, 사라마카 강을 따라 열정적인 전파자로 일하였다.

그러는 동안 다른 파이오니아들도 이 나라의 가장 동쪽에 있는 마로니 강을 따라 관심자들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1960년대초에 3개의 강을 따라 발판이 놓였다. 열대 우림에서의 전진 기반이 놓인 것이다.

스라난 통고어판 첫 출판물

그 여러 해 동안에 진리를 받은 부시 니그로들 중에는 필리 슬라그탄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필리는 열성적인 정치가였지만 증인이 되었으며, 필라리아 병을 앓아 한쪽 다리가 심하게 부어올랐는데도 참을성있게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를 스라난 통고어로 번역하였다. 그것은 지방어로는 협회의 첫 출판물이었다. 그후에 슬라그탄트 자매는 다른 출판물들을 스라난 통고어로 번역하였다. 결국 그 병으로 그 자매는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고, 네덜란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내가 네덜란드를 방문할 때마다 부시 니그로 형제들은 자기들의 편지를 나에게 건네주면서 그 자매에게 전달해 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최초의 번역자의 애정어린 수고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시골의 많은 사람을 찾아감

1960년대초에, 왕국 전파에 사용될 도구들이 더 추가되었다. 1961년 대회에서, 밀턴 G. 헨첼은 네덜란드어판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책을 발표하였다. 여덟달 후에, 모두 3,800권이 전해졌다.

바로 그 대회 주간에, 전국 규모의 라디오 방송사 아핀티는 헨첼 형제와 회견을 하였다. 회견이 끝난 후, 헨첼 형제는 정규 방송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방송국의 소유자는 그에 동의하였으며, 그 이래 근 30년 동안,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라는 주간 15분 프로그램이 방송되어 성서 진리가 전파되어 왔다.

라디오 방송을 이용하여 좋은 소식을 방송하는 것에 더하여, 형제들은 무척 힘든 일이었지만, 협회 영화를 널리 상영하기도 하였다. 한 파이오니아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벨 앤드 하우엘 영사기며 물레상자들이며 발전기를 오토바이에 실어 가죽끈으로 묶고서, 나는 시골로 달렸습니다. 영화는 마을 사람들을 수백명씩, 더욱이 모기를 수천 마리씩 모아들였습니다.” 1961년까지 30,000명이 이 영화를 통해 왕국 소식을 들었다. 말하자면 시골 토양의 겉흙을 갈고 나서 씨를 뿌린 셈이었다. 이제는 심겨진 진리의 씨에 물을 주기 위해 다시 일꾼을 보낼 때가 되었다. 하지만 누가 갈 것인가?

자원하는 젊은 개척자들

시골에서 기꺼이 봉사하고자 하는 파이오니아들의 필요성을 예상하고서, 디르크 스테겡가와 빔 반 세아일은 십여명의 청년을 모았다. 당시 20세였던 유수프 슬레만은 이와 같이 회상한다. “일주일에 한번씩, 디르크와 빔은 성서 교리, 야외 봉사에서 당하는 이의 및 우리가 직면할 문제들을 토론하였습니다. 그러한 훈련을 받은 후, 우리에게 기대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우리는 나가서 새 길을 닦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걸어서, 버스나 자전거나 카누를 이용하여 새 임명지로 갔다.

당시 20대초였던 유능한 형제, 파울 나렌도르프는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한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 “간이 침대는 내 양다리 사이에 걸쇠로 채우고, 옷 가방이며 서적 가방이며 기타 소지품들은 뒷부분에 실었습니다. 그러나 1963년에 결혼하게 되자 짐은 두배로 늘어났습니다.—이제 간이 침대는 두개가 되었고 옷가방은 더 커졌고, 증거 가방도 두개요, 물론 아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때가 행복했습니다”라고 덧붙인다.

당시 23세였던 힐레 드 브리스는 열 아홉살이었던 누이 동생 루스와 함께 수리남 북서부의 어느 마을로 파견되었다. 힐레는 이와 같이 회상한다. “한달 수당 45길더(미화 25달러)에서, 집세로 15길더를 냈습니다. 상수도도 전기도 없었어요! 도랑에 괸 물을 이용하여 목욕을 하고, 빗물을 받아 식수로 사용하였습니다.”

루스는 이렇게 회상한다. “석유를 충분히 살 돈이 없어, 우리는 단지 집회 때만 등불을 켰습니다. 그 외 다른 날 밤에는 어둠 속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서적을 주고 식품을 받음으로 우리는 항상 수지를 맞출 수 있었습니다. 어려웠지만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여기에도 뱀이 나옵니까?”

이 젊은 파이오니아들이 겪은 감동적인 경험 중 하나는 격지 전도인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대서양 해안 근처의 오두막에서 산, 당시 60대였던 가난한 어부 리헤넬 링게르와 함께 파울 나렌도르프가 여행할 때, 같이 따라가 보기로 하자.

대개 혼자였지만 링게르 형제는 매주 전파할 목적으로 여행을 하였다. 이번에는 파울이 그를 따라갔다. 그들은 새벽 세시에 출발하여, 어느 아메리카 인디언 마을까지 세 시간 동안 상류로 노를 저어 가서, 그날 온종일 전파하였다. 저녁 일곱시에 그들은 집에 돌아왔다. 두 시간 후에 따뜻한 음식을 그날 처음으로 먹었다. 실로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그러나 도시 소년 파울은 걱정이 되어, “여기에도 뱀이 나옵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요. 좀 있어요. 대개 사카스네키[열대 방울뱀]지요”라고 링게르 형제는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그 뱀에 물리면 죽지요”라고 파울은 갑자기 숨을 죽이며 말했다. “지난주에 한 마리 나타났지요”라고 링게르 형제는 파울의 바로 머리 위 초가 지붕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놈이 나타났어요. ‘가만 거기 있어. 맛을 좀 보여줄테니’하고 혼자 중얼거렸지요. 식사를 끝내고, 접시를 씻고 난 다음, 단도로 해치웠지요. 이만큼이나 컸어요”라고 손을 1.2미터나 펼쳐 보이면서 덧붙여 말했다. 파울은 또다시 숨을 죽였다.

하지만 링게르 형제는 그의 집에 온 방문객을 겁내 줄 의도는 없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일상 생활의 한 부면이었다. 파울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날 밤 나는 몸을 웅크리고 이불을 머리까지 푹 덮고 잠이 들기 전 한참 동안 여호와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렇다. 1960년대의 그러한 젊은 파이오니아들 중에는 경험을 통해 성숙해진 사람들이 많으며, 오늘날 그들은 회중의 기둥들이다.

열정적인 학생이 들어오다

그 당시의 또 다른 파이오니아인 19세 된 세실 피나스는 수도에서 서쪽으로 약 190킬로미터 떨어진 촌락 바게닝겐에서 지칠 줄 모르게 일하였다. 거기서 그는 21세의 기계공, 아돌프 “예프” 게페리를 만났는데, 그는 진리를 듣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예프와의 성서 연구는 서너 시간씩 계속되었다. 한번은 연구를 하고 난 후, 세실과 그 형제의 짝은 “예프, 피곤하군요. 집에 가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중간쯤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라고 예프는 대답하였다. 이 파이오니아들은 중간쯤 와서 멈췄지만, 예프는 계속해서 성서 질문들을 하였다. 이 파이오니아들은 계속 걸었고 예프는 뒤따랐다. 집에까지 와서, 파이오니아들은 “잘 가요, 예프”하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예프는 계속 질문을 하였다. 세실이 말했다. “이봐요, 예프. 질문이 더 많이 있겠지만, 난 자야겠습니다. 내가 대답을 못하거든 잠든 줄 아세요.” ‘그것 좋은 생각이다’고 예프는 생각하였다. 그는 마루에 누웠고, 이야기는 세실이 잠잠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다음날, 예프는 그의 소지품들을 챙겨 파이오니아들이 사는 집으로 왔다. 세실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알아채기 전에 그는 이미 이사를 했습니다. 우리는 여가가 있을 때마다 연구를 하였습니다. 3개월 만에, 예프는 침례를 받았고 2년 후에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예인선이 새로운 왕국회관으로

바게닝겐의 세명의 기계공 중 한 사람인 열성적인 예프는 폐기 처분된 한 예인선을 가리키며, 이런 제안을 하였다. “저걸 사서, 수리하여 팔아 왕국회관 기금으로 사용합시다.” 그 주인들은 “그건 고칠 수 없는 것이오. 녹슨 고물이오. 그냥 가져 가시오”라고 말했다.

사람 높이의 갈대들을 치우고 보니, 그 폐물은 여러 조각이 나 있었다. 그래서 형제들은 없어진 부품들을 사서, 그 예인선을 하나씩 하나씩 보수해 나갔다. 2년이 지난 후에, 이제 엔진을 시동해 볼 날이 왔다. 예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린 흥분해 있었습니다. 한 형제가 엔진에 시동을 걸었지요. 그런데 잘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탄성을 발했어요. 그리고는 그 예인선은 움직이기 시작했지요. 또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정말로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 예인선은 15,000길더(약 550만원)에 팔렸다. 그 돈에다 차용한 돈을 합쳐 왕국회관과 파이오니아를 위한 집을 건축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시골 지역에 참 숭배를 위한 또 하나의 기지가 생겼다.

그후 수년 동안 여러 파이오니아와 선교인이 그 기초 위에 쌓아 올렸다. 현재, 나미비아 출신인 길르앗 졸업생, 리안 뒤 란과 마르타 뒤 란은 바게닝겐에서 사랑받는 일꾼으로 봉사하고 있다.

1963년에 텔그트 형제는 연로한 손으로 또 건축 공사를 하였는데, 바로 수도에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을 짓는 일이었다. 형제들에게 새로운 장소를 잘 알리기 위해 정지 작업이 안 된 그 부지에서 대회가 개최되었다. 수백명의 발이 그 땅을 밟아 평평하게 하여 건축 공사 준비를 해주었다. 그후, 대다수가 은퇴한 기능공들인, 백명의 자진 봉사자가 왔고, 일년 반 후에 건물을 완성하였다. 그 이층 건물에는 사무실, 왕국회관 그리고 선교인을 위한 방들이 있다. 1964년 8월 이후로, 비헤르스트라트에 있는 이 새로운 시설은 지부 사무실로 사용되어 왔다.

「낙원」 책이 길을 닦다

지부 건축 공사가 끝난 다음, 형제들은 세개의 강, 사라마카, 수리남, 타파나호니 강을 따라 전파하는 데 집중하였다. 세실의 친형제인 넬 피나스와, 바야 미스댠은 멀리 있는 타파나호니 강을 따라 아우카네르 부시 니그로들을 방문하였다. 그곳은 여태까지 증인들이 방문한 적이 없는 지역이었다. 그렇지만 왕국 소식은 그곳에도 이미 전해져 있었다.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란 책이 길을 닦아 놓은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1959년에 넬 피나스는 수리남 북동쪽 마을인 알비나에서 만난, 글을 모르는 아우카네르 여자 에드비나 아파손에게 그 책의 그림들을 설명해 준 일이 있었다. 에드비나는 배워 알게 된 것을 좋아했지만, 일곱달 후에는 타파나호니로 돌아가고 말았다. 연락이 끊겼다.

하지만, 8년 후 넬은 타파나호니를 방문하기 일주일 전에, 수도에서 에드비나를 만났다. 그 여자는 「낙원」 책의 그림들을 사용하여 그의 종족 사람들에게 줄곧 전파해 왔다고 말했다. 넬이 타파나호니로 떠난다는 말을 듣고, 그 여자는 두명의 관심자 곧 젊은 남자인 야부와 젊은 여자인 툐니를 방문해 달라고 그에게 부탁하였다.

마음을 흐뭇하게 한 반응

타파나호니에 도착한 지 이틀 후, 형제들은 야부가 사는 마을, 야브사를 찾아냈지만 그는 외출하고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저녁에 야부는 형제들을 찾아왔다. 그는 악귀 숭배를 박차고 나왔으며,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직장에서 오일 동안 휴가를 얻어 하루에 여덟 시간씩 형제들과 연구하였다. 그 기간이 지난 후, 그는 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기를 원하였다.

이제 형제들은 20세의 부시 니그로 소녀인 툐니를 찾아나섰다. 이 소녀는 자기가 사는 마을, 그란보리에서 「낙원」 책의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이미 전파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술사인 그의 오빠가 그 책을 빼앗아가 버렸다. 툐니는 울면서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제발 나에게 「낙원」 책을 또 한권 주십시오.” 그 두 형제가 그 소녀를 몹시 찾고 싶어한 것도 당연하다!

어느 날 툐니는 증인들이 인근 마을에 왔다는 말을 들었다. 급히 그는 그 마을로 노를 저어갔다. 그러나 형제들은 떠나고 없었다. 얼마나 실망했겠는가! 하지만 나중에 형제들은 다시 돌아와서 삼일 동안 그와 연구를 하였다. 그는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을 때, 친척들이 피를 빼지 않은 짐승 고기를 주곤 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항상 거절했다. 아버지는, 그가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때리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나를 죽이려고 협박해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단지 그림을 통해서 진리를 배운, 글을 모르는 소녀가 그렇게 한 것이다! 그의 믿음에 감동되어, 형제들은 그에게 마지막 남은 「낙원」 책을 주었다. 그는 그 책을 껴안았다.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는 기도를 들어 주신 것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했다.

두달이 지난 후, 형제들은 파라마리보로 돌아갔지만, 나중에 넬과 아내 게르다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기 위해 타파나호니로 이사하였고, 열대 우림의 그 발판 위에 건축해 나갔다.

길르앗으로부터의 많은 도움

그후 곧 1968년에 길르앗 졸업생들인, 캐나다 출신 로저 버브러지와 글로리아 버브러지, 독일 출신 롤프 비크호르스트와 마르그레트 비크호르스트가 도착하여 선교인 가족 성원은 배로 불어나 넷에서 여덟이 되었다. 새로 온 선교인들은 온화한 성품에다 다른 사람들의 복지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겸비하고 있어 이들은 본고장 형제들에게 곧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보다 일찍이 또 길르앗 졸업생 알베르트 수르가 파라마리보에 도착했었다. 1953년에 길르앗 20기를 졸업한 후, 알베르트는 13년 동안 쿠라사오에서 선교인으로 일하다가, 간질병으로 선교 봉사를 그만두고 수리남에 있는 친척들에게로 이사온 것이다. 그는 병에 개의치 않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다시 시작했는데 결국 건강이 나빠져서 경로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알베르트는 왕국 전파 활동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곳을 찾아 그를 방문해 보자.

아침에 그는 「파수대」와 「깰 때이다」 잡지를 오락실에 눈에 잘 띄게 놓는다. 그리고 나서 옆에 있는, 시력이 좋지 않은 80세 노인을 위해 당일의 성구를 커다란 글자로 쓴다. 그런 다음에, 그는 거주자들과 간호원들에게 잡지를 전한다. 하루가 끝날 때, 알베르트는 정신을 가다듬고 개인 연구를 한다. 지금은 68세가 된 알베르트는 이와 같이 말한다. “건강이 나빠져서 봉사를 더 많이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아직도 내 마음은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최근의 어느 달에 126시간을 전파한 일은 겸허하게도 언급을 회피한다. “알베르트 같은 묵묵히 힘써 일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라고 한 선교인은 말한다.

“물 대회”

몇년 동안 전도인의 수는 500명 선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러다가 전도인 수가 550명을 넘었다. 이렇게 증가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부 보고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가 활동에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1970년 대회는 “물 대회”로 기억되고 있다. 1월 16일 밤에, 1902년 이래 최대의 폭우가 쏟아져, 파라마리보와 대회장인 스타디움이 침수되었다. 그레 반 세아일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날 아침에 일부 전도인들은 일어나 보니, 집이 무릎 높이까지 물에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장 대회장으로 향했습니다.” 대회 조직자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 진흙탕 물을 헤치고 1,200명이 넘는 사람이 스타디움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대단히 놀랐습니다. 그때까지 그렇게 많은 군중이 모인 일은 없었습니다.”

오, 그 버스들!

홍수는 가끔 일어나지만, 대회 전후에 버스 고장은 툭하면 있는 일이었다. 1960년대말의 어느 일요일에, 48명이 파라마리보로 다시 데려다 줄 30인승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버스가 오지 않았다. 롤프 비크호르스트는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운전 기사를 찾아 나섰는데 그는 주위에다 수백개의 버스 엔진 부품을 벌여 놓고 있었습니다. 운전 기사 말로는 ‘기어 박스에 문제가 생겼지만, 곧 고친다’는 것이었습니다.”

네 시간 후에야 여행이 시작되었다. 곧 뭔가 타는 냄새가 버스 안을 가득 채웠다. 운전 기사는 “넷째 기어만 작동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하였다. 자정이 지나, 버스는 내리막길을 굴러 자그만 연락선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넷째 기어만으로 어떻게 오르막길을 올라갈 것인가? 롤프는 계속 이와 같이 말한다. “참 볼 만한 광경이었습니다. 웽웽거리는 엔진 소리와 왕국 노래에 맞춰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심지어 아기를 업은 어머니들까지도 버스를 밀었습니다. 버스는 오르막길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해냈습니다. 그날 새벽 3시에, 우리는 집에 도착했습니다.”

한번은 니케리 회중도 대회에 가기 위해 버스를 세냈다. 이 회중은 아침 일곱시에 떠났지만, 10시 무렵에 버스가 한적한 비포장 도로상에서 고장나고 말았다. 운전 기사는 “갔다 오겠습니다”라고 약속하고는 가버렸다.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라고 승객 중 한 사람이었던 막스 라이츠는 말한다. 식품과 물이 다 떨어지자, 두 형제가 도움을 청하러 운하를 따라 걸어갔다. 열 다섯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들은 배 한척을 타고 돌아왔다. 그래서 여행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240킬로미터의 거리를 30시간 여행하여 정오에 대회장에 도착하였다. 웃으면서, 막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오, 그렇지요. 버스에는 ‘환영’이라는 이름이 쓰여졌습니다!”

머물기로 결심하였다

나탈리 스테겡가가 아기를 낳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스테겡가 부부는 1970년 9월에 선교인 집을 떠났다. 디르크 스테겡가는 16년 동안 부지런한 지부 감독자였다. 이제 이 나라에서의 감독의 직분은 선교인 빔 반 세아일에게 인계되었다.

디르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머물기로 결심하였지만, 힘들었습니다.” 나탈리는 이와 같이 덧붙인다. “살 곳은 찾았지만, 집세 낼 돈이 부족하였습니다. 심지어 목욕 수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친구들이 도움을 베풀었고, 디르크는 아내와 딸 케릴을 부양할 수 있는 일자리를 구했다. 오늘날에도 스테겡가 부부는 수리남에 있으며, 세 사람 모두 전 시간 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이주 덕분에 회중과 학교가 생겨나다

1970년대초에 수천명의 부시 니그로가 일자리를 구하러 수도로 이주해 왔다. 마르그레트 비크호르스트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들 중에는 네덜란드어를 알아듣지 못하지만, 우리 회중의 네덜란드어 집회에 참석함으로써 진리에 대한 열망을 나타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돕기 위하여, 프레데릭 바히테르는 그들의 종족 언어로 대회의 내용을 요약하여 제공해 주었다. 나중에, 더 많은 집회를 조직하였고, 1971년 6월에 수도에서 최초의 부시 니그로 회중이 형성되었다.

최근에 읽고 쓰기를 배운 두명의 부시 니그로 자매가 이 새로운 회중의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어, 여러 가족이 여호와의 편에 서도록 도왔다. 이번에는 이 새로운 제자들이 읽고 쓰기를 배우고 싶어하였다. 그리하여 회중에서는 읽기 학교를 마련하였다.

1975년부터 스라난 통고어판 「읽기 쓰기 교본」이란 소책자가 한주에 두번씩 여러 학급을 가르치는 데 사용되어 왔다. 여덟명의 교사 중 한 사람이었던 엘비라 피나스는 이렇게 알려 준다. “학생들은 충실하게 수업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들은 직접 성서를 읽고 싶어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또한 인내심을 나타냈습니다. 한 연로한 자매는 칠년 동안 이 학급에 참석하여, 이제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 인구의 20퍼센트가 문맹이지만, 우리의 학교 덕분에 침례받은 증인들 가운데서는 그 비율이 단지 5퍼센트로 줄어들었다.

신앙의 충돌

읽기 학교는 또 다른 이점이 있었다. 1974년에 에드비나 아파손 (「낙원」 책의 삽화를 통해 진리를 배워 알게 된, 글을 모른 여자)은 이렇게 편지하였다. ‘기쁘게도 나는 타파나호니 주변에서 봉사하도록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습니다. 내가 그곳을 떠날 때는 읽을 줄을 몰랐지만, 이제는 읽을 줄 압니다. 나의 종족을 도울 준비를 더 잘 갖췄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에드비나가 그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였다. 왜 그러한가? 그의 종족 사람들은 죽은 조상들에 대한 공포 속에서 살고, 먹고, 일하고, 잠을 자며, 그뿐 아니라 악령들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하여 부적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들은 또한 강이며, 나무며, 돌에도 산 영들이 들어 있다고 믿으면서, 자연을 숭상하고 있다. 에드비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생활 방식을 조금이라도 바꾼다면 소란이 생깁니다.”

에드비나가 월경 기간을 맞이할 때, 성서의 가르침과 종족 신앙이 처음으로 충돌하였다. 생각해 보라. 마을 사람은 월경중인 여자가 가까이 있으면, 부적이 효력을 잃어 악령이 온 가족을 치명적인 병으로 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 일을 예방하기 위해, 월경중인 여자는 모두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신앙은 악귀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조장된 것이기 때문에, 에드비나는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였다. 예상한 대로 이 행동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그는 협박을 받았고, 몽둥이로 맞았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와 성서를 연구한 여자들 중 몇 사람도 그의 담대한 태도를 본받음으로써 결국 의절당하고 집에서 쫓겨났다. 에드비나는 그들을 받아들였고, 이 두려워하지 않는 단합된 여자들은 종족의 보복을 받았지만, 전파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때가 되자 예기치 않은 구출자가 나타났다. 그는 누구였는가?

저주받은 남자가 하나님의 승인을 얻다

일찍이 아파손 자매는 70대의 주술사, 파이투에게 전파한 적이 있었다. 그는, 적수 관계에 있는 주술사의 저주로 건강이 나빠지고 그물 침대 곧 해먹에 갇힌 신세가 되어, 아마카(해먹)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 파이투는 성서 소식을 빨리 이해하였으며, 마을 사람들에게는 놀라웁게도 어느 날, 해먹을 박차고 나와서, 우상, 부적 및 약들을 모아 챙겼다. 그리고는 카누를 타고 가서 마법 소지품들을 모두 강물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후로 그의 건강은 좋아졌고, 그는 전파자들을 변호하는 데 앞장섰다.

먼저, 파이투는 박해로 인하여 집 잃은 여자들을 위해 집을 지었다. 그 다음에, 그는 그 여자들이 생계를 마련할 수 있도록 농사 지을 토지를 개간하였다. 이제 그 여자들은 신속하게 발전하여 침례를 받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인 댜리 자매는 받은 도움에 감동한 나머지, 이와 같이 탄성을 발했다. “어떻게 여호와께 감사를 드려야지요? 그 방법은 파이오니아 봉사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날까지 그렇게 해오고 있다. 1975년에 파이투는 침례를 받았고, 바로 그 해에 전도인 20명으로 구성된 회중이 에드비나의 마을, 고도올로에 설립되었다. 이들 참 숭배를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실로 크나큰 보상이 아닌가!

인종이 다른 그룹들이 잘 화합되다

하지만, 참 숭배는 수리남의 전체 주민 중 이슬람교와 힌두교 계층으로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는가? 1970년대초까지는, 거기에서 나온 사람은 겨우 몇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1974년에 드디어 지부 사무실은 인도네시아 출신의 얼마의 이슬람교인이 반응을 나타냈다고 보고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용감하게도 그렇게 하였다. 어째서인가?

“많은 사람은 엄격한 전통적인 가정에서 살아갑니다”라고 여러 이슬람교인에게 진리를 가르친, 인도네시아 출신의 길르앗 졸업생 잔 부이스와 조안 부이스는 설명한다. 잔은 이렇게 덧붙인다. “흔히 그들은 이러한 전통에서 벗어나면 박해를 받습니다. 한번은 이슬람교인인 젊은 남자와 성서를 연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마루를 거칠게 쓸어, 내가 환영을 못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뿌연 먼지 속에서 연구하였습니다.” 그래도 소용이 없자, 가족은 화를 내면서 시비를 걸기 시작하였다. 그 남자가 그것도 무시해 버리자, 그는 쫓겨났고, 가족에게서 의절당하였다. 그는 수도 밖으로 이사하여 성서 연구를 계속하였으며, 그와 그의 아내는 증인이 되었다.

잔은 이와 같이 회상한다. “여러 해 후에, 이 형제의 가족과 친척들은, 그들 가운데서 결혼 문제가 없는 사람은 오직 그 형제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요청한 후, 증인들에 대한 가족과 친척들의 견해는 한결 더 좋아졌습니다.” 이 형제의 용기 있는 행동에 자극을 받은 다른 이슬람교인들이 우리와 연합하게 되었다.

힌두교인은 어떠한가?

동인도인이 오늘날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인종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의 생활이 종교 의식으로 둘러싸여 있기는 하지만, 왕국 소식은 점점 더 많은 수의, 진리를 사랑하는 힌두교인을 여호와의 조직으로 이끌고 있다. 니케리 시 부근 힌두교 가문에서 태어난 소녀 샤마 칼루가 그 적절한 예이다.

열 두 자녀 모두를 소중히 돌보며, 부지런히 논 농사를 짓는 샤마의 아버지는, 그에게 어렸을 때부터 힌두교에 충실하고 동인도의 힌두교인과만 결혼해야 한다고 일깨워 주었다. 샤마는 이렇게 알려 준다. “우리 지역에서 어떤 젊은이가 그러한 규율을 어기면 언제나, 아버지는 눈물겹게 자신의 소원을 나에게 되풀이하였습니다.” 샤마는 아버지를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슬픔을 안겨 주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1974년에 19세의 샤마는 사범 대학을 다니기 위해 파라마리보로 이사하였다. 그곳에 사는 오빠의 집에서 그는 「파수대」와 「깰 때이다」지를 보게 되었다. 기사에 관심이 끌렸지만, 의문도 생겼다. 샤마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잡지를 전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한 증인 부부가 나를 방문하였습니다.”

선교인인 로저 버브러지와 글로리아 버브러지는 그와 일주일에 두번씩 연구를 하였다. 로저는 이와 같이 설명한다. “머지않아, 그는 회중 집회에 참석하였고 야외 봉사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76년 9월에 이 열성적인 소녀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졸업한 후, 샤마는 니케리에서 교사직을 갖게 되어, 부모 곁으로 이사오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딸의 새로운 신앙에 대해 걱정하였지만, 한편 교사인 딸의 신분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샤마는 근처의 힌두교 지역에서 전 시간 전파하기를 갈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해결책을 알아냈다.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였지만, 근무 시간이 끝난 후에는 파이오니아를 하였다. 수개월 내에 그는 힌두교인과의 연구를 18건 사회하게 되었고, 그의 열성은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침례를 받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글로리아는 이렇게 덧붙인다. “동시에, 샤마는 부모를 사랑으로 대하였고, 가문의 관습을 지켰지만, 필요할 때에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후 머지않아, 여호와께 대한 그의 사랑은 시험을 받게 되었다.

‘주 안에서만 결혼하라’

이 무렵 샤마는 20대 중반이 되었다. 대부분의 힌두교인 여자들이 15세에서 19세 사이에 결혼하고 독신 여성이 드물기 때문에, 가족과 친척은 구혼자가 집을 들르도록 주선하였다. 하지만, 샤마는 그들 중 어느 누구와도 결혼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는 그 압력을 견디고 “주 안에서만”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여호와께 간청하였다. (고린도 전 7:39) 하지만,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그는 동인도인 배우자감을 만나 결혼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여호와의 조직에 그런 배우자감이 없다면 독신으로 살겠다”고 맹세하였다.

28세 때에, 그는 충실함에 대한 상을 받았다. 샤마는 네덜란드에 사는 동인도인 출신의 회중 장로인 알폰스 쿤디비하리를 만났다. 그들은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하기로 결정하였다. 샤마의 부모는 알폰스를 만나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어느 날 샤마는 성서를 펴서 그리스도인 장로에 대한 여호와의 요구 조건을 어머니에게 읽어 주었다. 어머니는 주의 깊게 듣고는 “훌륭한 남편을 맞이하겠구나”라고 말했다. 그후, 샤마의 부모 집에서 감동적인 주례사를 듣고 난 후, 그의 아버지는 깊이 감동된 나머지 선교인에게로 걸어 올라가서 “당신네 하나님이 나에게 한 아들을 주셨소!”라고 말했다.

1984년 이래 샤마는 네덜란드에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지만, 수리남에서의 그의 훌륭한 본은 아직도 기억되고 있다. 그는 추세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그 이래 줄곧, 한때 힌두교인이었던 사람들이 형제 관계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기발한 착상

1974년 8월 무렵 전체 주민의 여러 계층에서 이러한 좋은 반응이 있어 831명이란 전도인 신기록에 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회 참석자 수는 두배나 되었다. 점증하는 이 무리를 수용하기 위해 어디에서 대회를 개최할 것인가? 일부 형제들은 기발한 착상을 제안하였다.

‘대회장 연단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왕국회관을 짓는 것이다.’ 어떻게 말인가? ‘왕국회관의 바닥을 지상 1미터로 높게 만든다. 그리고는 두개의 커다란 미닫이 문을 회관의 옆벽에 단다. 대회중에 이 문들을 열어 놓으면 회관이 연단이 된다. 그런 다음 사람들에게 햇볕이나 비가 들지 않도록 막아 줄 커다란 지붕을 이 연단 앞에 붙이면, 열대 지방에 알맞은 대회 회관이 마련된다.’

폭 40미터, 길이 200미터인 대지를 매입하였고, 건축이 시작되었다. 1년 후인 1976년 11월 28일에 이 아담한 대회장은 봉헌되었고, 그후 여러 해 동안 형제들을 위해 잘 사용되고 있다.

노아—강의 화제거리

타파나호니 강 주변에서 전도인이 증가하자, 또 건축 계획을 하게 되었다. 즉 회중 전체 성원을 수도에서 열리는 대회로 운송할 만큼 충분히 큰 코르얄(통나무 배 카누)을 만들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 내부 일을 감독한 세실 피나스는 이와 같이 이야기한다. “그 공사는 도전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큰 코르얄은 이전에 결코 만들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파이투 형제는 ‘우리는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코르얄 건조 전문가인 파이투 형제는 거대한 나무 하나를 선택하였고, 형제 넷이 하루 만에 그 나무를 베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두달 동안 그 나무 속을 파내어, 길이가 18미터나 되는 사상 최대의 카누를 만들었다. 곧 증인들의 이 배는 강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 배가 지나갈 때마다, 마을 어린이들은 “노아 프사!”(노아가 지나간다!)라고 소리쳤다.

열대 우림에서의 최초의 왕국회관

1976년 9월에, 교사들인 네명의 젊은 증인이 타파나호니 주변에 정착했을 때 새 회중인 고도올로 회중은 또 한 차례의 도약을 하게 되었다. 교사들 중 한 사람, 하르트비흐 툔 아 산은 이와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해 그곳에 갔지만, 주된 이유는 그 새 회중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참을성있게, 글을 모르는 형제들에게 읽기, 쓰기를 가르쳤으며, 그 다음에 그들은 회중의 그 다음 활동 계획, 즉 고도올로에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일에 자원하여 참여하였다.

일찍이 촌장 알루파이시는 형제들에게 회관을 건립할 부지를 제공하였었다. 형제들은 돈이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착수할 것인가? 형제들은 이와 같이 추리해 봤다. “나무는 숲속에 있다. 모래와 자갈은 강가에 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것을 가져올 힘을 주신다.” 그들에게 없는 것이라곤 시멘트뿐이었다. 그것을 얻는 데 카누 노아가 도움이 되었다.

노아가 안전하고 편리한 여행 수단으로 호평을 받았기 때문에, 정부 관리들은 강을 건너는 데 이 배를 일년에 약 4,000길더(약 150만원)의 세를 내고 사용하였다. 이 수입으로 수도에서 시멘트를 샀다. 그러나 그 시멘트를 어떻게 고도올로로 옮길 수 있겠는가? 노아가 또 도움이 되었다.

키가 크고 건장한 부시 니그로이자 평판 있는 조타수인 도 아메돈과 그외 다른 형제들은 알비나에서 50킬로그램짜리 시멘트 40부대를 코르얄에 실었다. 그리고는 그들은 흘수가 깊은 노아를 조타하여 마로니 강을 올라가 남쪽으로 술라(급류)로 향했다. 이러한 급류들에는 만바리(남자들의 비명[급류를 통과할 때 지른다]), 풀루구두(잃어버린 소지품[급류가 많은 배를 침몰시켜 사람들이 소지품을 잃었다])와 같은 이름이 붙어 있다. 그들이 이러한 급류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것인가?

탑승자들은 첫 번째 격류의 굉음을 들었다! 그들 앞에서 강물이, 흡사 거대한 계단과도 같은 많은 바위에서 굴러 떨어져서는, 길을 막고 있는 커다란 돌들에 부딪힌 다음 험한 수로들을 헤치고 나와, 노아를 강타하였다. 뱃머리에 선 형제는 빠져나갈 틈이 있는지 이 거치른 강을 세밀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쥐고 있는 기다란 삿대를 거품이 일고 있는 물속으로 꽂아, 몸을 활처럼 구부리고서는 노아를 어느 한 수로 속으로 저어 넣었다. 그는 손짓을 했다. 기관이 멈췄고, 노아는 이제 술라의 기슭에서 계류되었다.

도 아메돈은 시멘트 한 부대를 홱 들어 머리에 올렸다. 미끄러운 바위를 하나씩 건너 뛰면서 그는 힘들여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 마른 곳에 그 부대를 내려 놓았다. 다른 형제들도 뒤따랐다. 하나씩 하나씩, 모든 부대가 건너편으로 운반되었다. 이제 형제들은 조심스럽게 노아를 끌어당겨 흰 물결을 통과시킨 후, 시멘트 부대들을 다시 실었다. 여행은 그 다음 술라가 있는 곳까지 계속되었는데, 이곳에서도 끌어 올리고, 건너 뛰고, 잡아당기고, 다시 싣고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마침내 일곱 군데의 급류를 통과하여 11일이 지난 후, 이 시멘트는 고도올로에 도착되었다.

그동안 다른 형제들은 수목을 잘라 냈고, 자매와 어린이들은 250통의 모래와 자갈을 건축 공사장으로 운반해 놓았다. 건축이 시작되었고, 1년 후인 1979년 4월 15일에, 열대 우림에서의 최초의 왕국회관이 봉헌되었다.

그러면 노아는 어떻게 되었는가? 세실 피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보통 카누는 수명이 약 4년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근 10년 동안 사용되어 왔습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세실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은퇴하였죠. 하지만 가끔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이름을 갖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므두셀라라고 말입니다!”

침체—이유는?

1970년대 후반에, 이 나라에서의 전파 활동이 감소되었다. 1977년에 1퍼센트 감소, 1978년에는 4퍼센트 감소, 1980년에는 7퍼센트 감소가 있었다!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많은 이민 때문이었다.

수리남이 1975년 11월에 독립 국가가 되었을 때, 수천명의 수리남 사람은 정치적 소요를 우려하여 네덜란드로 이민을 갔다. 사회학자 J. 무르란드가 그의 저서 「수리남」에서 지적하였듯이, 이민자들 중에는 ‘직업, 교육 혹은 사회적 안전을 찾아서 혹은 식구들과 재결합하기 위하여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무르란드는, 그 당시에는 ‘만나면 묻는 말이 “떠납니까?”가 아니라, “언제 떠납니까?”였다’고 덧붙인다. 이주가 중단된 때인 1981년까지, 거의 주민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떠났다. 오늘날 네덜란드에는 200,000명의 수리남인이 살고 있다. 바로 그들 가운데 수백명의 증인은 새로운 환경에서 여호와를 계속 섬기고 있다.

증인을 위한 새로운 추진력

활동이 다시 점차 가속화되는 데 도움이 된 한 가지 마련은 1976년에 지부 위원회를 구성한 일이었다. 지부의 종 빔 세아일은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이 되어, 다른 지부 위원인 세실 피나스, 넬 피나스, 디르크 스테겡가와 함께 책임을 분담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새로운 마련은 영적인 일들을 보다 더 잘 균형잡히게 인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국의 회중들은 1974년부터 1980년 사이에 도착한 10명의 선교인을 더 맞이하여 추진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 중 두 사람, 한스 반 부레와 수시 반 부레는 갓 임명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두 사람 다 수십년의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각각 길르앗 21기와 16기 졸업생이었으며,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선교인으로 일했었다.

수리남에 도착한 지 2개월 후에, 그들은 순회 사업을 시작했다. 60세인 한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 임명은 우리가 이 나라와 형제들을 빨리 아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수시는 이와 같이 덧붙인다. “사람들이 우리의 서적을 얼마나 잘 받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한 예를 들자면? 수시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습니다. 순회 사업을 하는 2년 반 동안, 우리 두 사람은 약 4,000권의 서적과 10,000부의 잡지를 전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할 전파 활동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열대 우림에서 또 하나의 “문”이 열리다

일찍이 정부는 멀리 떨어진 수리남 남서부의 열대 우림까지 장장 350킬로미터나 되는 도로를 만들었다. 이 도로 덕분에 또한 새로운 구역 곧 코란타인 강변에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 마을들인 아푸라와 바스하보로 진출하는 활동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1977년에 미국 출신의 증인 페피터 애버내시와 세실리아 키즈가 건축 회사에 고용된 남편들과 함께 아푸라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현장 숙소에서 살게 되었을 때, 그 문이 열렸다. 후에, 이 자매들이 그곳에 살고 있는 아라바크 인디언들과 접촉하는 일을 돕도록 두명의 선교인이 파견되었다. 그 자매들은 성공하였는가?

페피터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수십건의 성서 연구를 마련하였습니다. 후에, 세실리아와 나는 그들을 일주일에 두번씩 방문하였습니다. 우리는 아침 네시에 일어났으며, 일곱시경에 첫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고, 오후 다섯시경에 다시 집으로 왔습니다.” 이년 동안 이 자매들은 영어를 말하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열심히 가르쳤다. 하지만, 그때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누가 그들이 시작해 놓은 일을 계속할 것인가?

교직자의 반응

1980년 9월에 선교인, 헤르만 반 셀름과 카이 반 셀름이 그들의 낡은 랜드-로버를 운전하여 정글로 들어가 아푸라로 향했으며, 그후 5년 동안 머물렀다. 카이는 이와 같이 회상한다. “우리는 30건의 성서 연구를 인계받았고, 그 외 더 많은 연구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세개의 서적 연구 집단으로 조직하였다. 공개 강연에는 마을 주민 60명이 모였고, 그 이듬해에는 169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얼마 후 여섯 사람은 야외 봉사에 참여할 준비가 되었으며, 교회에서 탈퇴한다는 편지를 썼다.

교직자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사제는 탈퇴서들을 움켜쥐고 이렇게 고함을 쳤다. “감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나에게 성구를 인용하기까지 하다니!” 그는 선전 포고를 하였다. 성서 연구생들은 일자리며 집을 잃게 될 것이라는 협박을 당했으며, 학교도 진료소도 공동 묘지도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반대 때문에 연구 수는 줄어들었다. 집회 참석자 수도 감소되었다. 집회에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단지 빈 상자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카이는 이와 같이 회상한다. “우리는 속이 아주 상했습니다. 하지만, 격려하고 전파하는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기쁘게도 핵심적인 연구생들은 굳게 섰고, 침례를 받았으며, 아푸라 회중을 형성하였습니다.”

“언제 우리를 방문할 것입니까?”

1982년에 가이아나에 있는 한 마을인 오레알라에서 몇몇 아메리카 인디언이 노를 저어 코란타인 강 상류로 약 여덟 시간 여행한 다음, 선교인들을 찾아와, “언제 우리를 방문할 것입니까? 우리는 성서를 연구하고 싶습니다”하고 부탁하였다. 아푸라 집단이 자체적으로 설 수 있었던 그 무렵, 선교인들은 오레알라로 매월 여행하고 있었는데, 일부 마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증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헤르만은 이와 같이 이야기한다. “어느 날 아침에 한 연로한 사냥꾼을 만났는데, 그는 「위안」지를 읽곤 하였지만, 나중에 협회와의 연락이 끊어졌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라디오를 가리키면서, ‘뉴욕에 여러분의 방송국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내 라디오로는 그 방송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더군요. WBBR 방송은 1950년대에 중단되었다고 말하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저었습니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뒤진 것을 만회하는 데 최상의 시기라고 말하면서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오레알라에서,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이 자상한 아버지들로 변화되는 데 어떻게 성서 연구가 도움이 되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보람있는 일이었다. 50세인 한 남자에게 가족 연구를 사회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는데, 그는 다소 무뚝뚝한 방법이긴 했지만 한번 시도해 봤다. “읽어!”하고 그는 명령했다. 그리고는 질문을 하였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대답해 봐! 겁먹지 말고.” 그러자, 자녀들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연구 방법은 개선되었다. 후에 자녀들이 집으로 달려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족 연구가 있어요!”하며 그들은 미소를 지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형제들은 오레알라에서 건축 부지를 기증받았으며, 길르앗 졸업생인 (현재 아푸라에서 봉사하고 있는) 예트로 뤼벤하겐은 지방 형제들이 자체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일을 도왔다. 이것은 또 하나의 인종,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연합케 하는 “순결한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표시였다.—스바냐 3:9, 신세.

영어를 사용하는 주민들 가운데서의 증가

1970년대에 가이아나 출신의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 근로자로서 니케리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래서 영어 집회를 시작하기 위해 두명의 선교인을 그곳에 파견하였다. 이 외국인 근로자들은 반응을 보였다. 현재 30명의 전도인으로 구성된 회중이 하나 있다.

이 새로운 전도인들 중에는 여러 해 동안 진리를 갈구해 온 사람들도 있다. 예로서, 열 두살 된 인드라데비는 가이아나에서 한 이웃 사람으로부터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책을 받았다. 그 소녀는 그 책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후에 그는 결혼하여, 니케리 근처에 있는 논 농사를 위한 간척지인 클레인헤나르로 이사하였다. 1982년에 한스 반 부레가 그를 만났다. 한스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의 몇 가지 소지품 가운데서, 낡은 「낙원」 책을 보았습니다. 인드라데비는, 1962년에 그 책을 받은 후로 항상 가지고 다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여호와에 관해 더 많이 배우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20년이 지난 후 그의 소원은 성취되었습니다!” 그는 연구를 하였고, 힌두교 신들의 그림들을 없애버렸고, 침례를 받았다.

가이아나 사람들 가운데서의 이와 비슷한 반응은 파라마리보에서도 있었다. 1980년에 그곳에 조그만 집단이 하나 형성되었다. 1982년에는 전도인이 20명으로 불어났고, 4년 후에 그 수는 90명으로 증가하였고, 최근의 집회 참석자 수는 앞으로 더 증가할 전망을 보여준다.

“일부 사람에게는 집회 참석하는 데 희생이 요구되지만, 참석자 수가 150명이 넘습니다”라고 영어 회중에 속한, 선교인 파울 반 드 레프는 말한다. 예로서, 수입이 적은 한 가족은 아침 여덟시에 집을 나서서, 상당한 거리를 걸은 다음, 한 시간 이상 버스를 기다렸다가, 집회에 참석한다. 다시 집에 돌아오게 되면 오후 2시경이 된다. 파울은 이와 같이 덧붙인다. “매주 그들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하루의 수입을 버스 요금으로 씁니다.”

오늘날, 영어를 사용하는 약 150명의 증인이, 파라마리보에서 연합하여 여호와를 숭배하고 있는 세개 언어 그룹 중 하나를 형성하고 있다.

충격을 받아 현실로 돌아오다

1980년 2월 25일에, 파라마리보 주민들은 총성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일단의 하사관이 정부를 전복시킨 것이다. 이 사상 최초의 쿠데타는 자기 만족에 빠져 있던 수많은 수리남인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나라에는 전쟁의 타격이나, 전염병의 만연이나, 허리케인의 재해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수리남은 신의 축복받은 땅”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1980년 이래 경제적 난관이 가중됨에 따라, 많은 사람은 이제 바로 그들의 목전에서 성서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1982년에 정치적 소요가 있자 외국 원조가 중단되고, 이 나라의 경제는 마비되었다. 식품 가격이 치솟았고, 빈곤이 발생하였다. 파라마리보의 한 장로는 이렇게 보고한다. “그 이래, 부시 니그로 형제 중 다수가 한달에 겨우 미화 200달러 정도밖에 안 되는 수입으로 열명 혹은 그 남짓한 자녀의 의식주를 마련하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렇지만, 경제적 난관이 형제들을 둔화시키지는 못했다. 그와는 반대로, 물질적으로 궁핍해진 한 회중에서는 전도인 171명 중 106명이 최근에 보조 파이오니아를 하였다! 전국적으로 전도인 수는 1986년에 1,200명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서적 배부도 계속 증가하였다. 레오 투아르트에게 물어 보자. 그는 46년 동안 출판물을 항구에서 지부 사무실로 운송하였다. 투아르트 형제는 이렇게 회상한다. “수년 전에, 우리는 한달에 십여 상자를 받았습니다. 2륜 마차를 75센트에 빌려, 모든 상자를 지부로 운반하였습니다.” 그는 밝게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2주마다 100상자 정도 받으며, 트럭을 빌려 운반합니다.” 오늘날, 수리남에서는 연중 매월 32,000부 이상의 「파수대」와 「깰 때이다」 잡지가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주민 13명당 1부꼴이다!

그러나 레오 투아르트 외에도 활동의 증가에 각별히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에 한 교직자가 지부 사무실을 방문하여, 자신의 양떼에게 여호와의 증인처럼 열심을 품도록 촉구하였다고 한 선교인에게 말했다. 그 교직자는,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라고 개탄해 하면서, “여러분의 비결은 무엇입니까?”하고 질문하였다. 그 형제는 “성령입니다”라고 답변해 주었다.

격전의 와중을 통과하여

1986년 중반쯤, 게릴라전이 터졌다. 몇달 후에는 마로니 강변의 마을 알비나를 중심으로 군대와 소위 정글 코만도(대부분이 부시 니그로임) 사이에 전투가 벌어짐에 따라, 수리남 남동부에 살고 있는 부시 니그로 형제들은 파라마리보에서 개최되는 대회에 참석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세실은 이와 같이 설명한다. “참석한다는 것은 격전의 와중을 통과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대회를 놓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참석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대회 열흘 전에, 60명의 형제 자매와 어린이는 전투 지역을 향해 카누를 타고 내려갔다. 금요일에 그들은 알비나에 도착하여, 왕국회관에서 해먹을 묶고 거기서 잠을 잤다.

동이 트기 전에, 총성이 연이어 알비나의 거리에 울려 퍼졌다. 정글 코만도가 그 마을을 휩쓸었고, 군대가 반격을 가해, 총탄이 회관 지붕을 연이어 스쳐 날아갔다. 증인들은 급히 숨을 곳을 찾았고, 그날 내내 엎드려 지냈다.

그날 밤, 그들 중 한 사람이 간신히 지부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와서 우리를 데려가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 일요일 오후에 세명의 장로가 출발하였다. 밤 11시경에 그들은 오도 가도 못 하게 된 형제들에게 이르렀다.

장로들은 그 다음날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부시 니그로 형제들은 “지금 떠납시다. 총격이 또 시작될지 모릅니다”하고 재촉하였다. 장로들은 기도로 여호와의 인도를 구하였고, 자정이 지나서 사람들을 가득 태운 세대의 차가 천천히 수도로 향했다.

운전한 형제 중 한 사람, 파울 나렌도르프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도로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군인 검문소에 접근하자,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군인들은 정글 코만도와 싸우고 있었는데, 많은 수가 젊고 건장한 남자들인, 60명의 부시 니그로를 태운 호송차가 이제 그들 앞에 불쑥 나타난 것입니다.” 이들은 정글 코만도로 오인될 것인가?

기둥 뒤에서 군인 한 사람이 호송차에 서라고 신호를 하였다. 파울은 계속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탱크의 포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중무장을 한 군인들에게 에워싸였습니다. 단 하나의 수상한 움직임이라도 있으면, 발사될 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증인이라고 설명하자, 군인들은 차를 검색하고 우리를 보내 주었습니다.”

파라마리보에 도착했을 때, 형제들은 알비나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적절한 시간에 떠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돌아가야 한다

대회가 끝난 후, 형제들은 군대가 알비나로 통하는 하나뿐인 도로를 폐쇄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부시 니그로 형제들은 또다시 갇히게 되었다. 그들은 두 주일 동안 기다렸다. 그러나 이제 열대 우림에 대한 향수가 강해진 나머지, 그들은 “우리를 강으로 데려다 주십시오. 거기서부터는 우리가 집으로 가겠습니다”하고 간청하였다.

계획을 짰다. 그리고 여호와의 인도를 구하였다. 먼저 열명의 조타수 형제와 몇명의 장로가 파라마리보에서 알비나로 가는 것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한 장로는 이와 같이 이야기한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군인들은 우리를 보고도 돌려 보내지 않았습니다.” 부시 니그로 형제들은 마침내 마로니 강을 보게 되자, 기뻐 춤추었다.

그 다음날 자매와 어린이들이 떠났으며, 역시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저지당했다. 강에서, 조타수 형제들은 배를 타고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감격적인 재회였다!

또 한번의 여행을 계획하였다. 두대의 트럭에 96부대의 쌀, 16배럴의 가솔린, 7배럴의 등유 그리고 여러 가지 식품을 싣고서, 또 형제들은 검문소 쪽으로 차를 몰았다. 이러한 공급품은 정글 코만도가 장악하고 있는 영역으로 운송되는 것이었는데도 그리고 여하한 물품도 그곳으로 보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는데도, 보초병들은 이 트럭을 보내 주었다. 한 형제는 “기적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작용한 것이 분명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주일 후, 모든 공급품과 함께 60명의 형제가 집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삼일간의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5주를 소비하였다. 몇 주일 후에, 군인들은 내륙으로 들어가는 모든 공급품을 차단하였고, 심각한 식품 부족이 초래되었다. 그러나 대회에 참석했던 형제들에게는 앞으로 여러 달 동안 먹을 식품과 전파 여행에 필요한 가솔린이 있었다. 세실은 이와 같이 말한다. “돌이켜 보면, 여호와께서 우리가 적시에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 도망하다

그 이듬해, 싸움은 파라마리보 동쪽에 있는 광산 도시, 뭉고로 옮겨졌다. 군대가 진입하였지만, 치열한 저항에 부딪혔다. 총탄이 도시를 쪼개놓는 듯하였고, 집들은 화염에 싸였고, 사람들은 살기 위해 도망하였다.

그곳에 사는 대부분의 형제는 열대 우림으로 피신하여, 안전을 위해 도피하였다. 일부는 파라마리보에 도착하였고, 또 일부는 프랑스령 기아나와의 국경인 마로니 강으로 배를 저어 갔다. 그들은 폭이 5킬로미터인 이 강을 건너, 프랑스령 기아나로 들어갔다. 약 50명의 증인이 이 국경을 넘어 목숨을 구했다.

프랑스령 기아나의 증인들은 즉시 식품, 의복, 시트, 담요 및 의약품을 그들에게 공급하였다. 마르티니크의 지부 사무실에서도 신속히 도움을 베풀었고, 도피한 형제들을 돕기 위해 특별 기금을 마련하였다. 세실 피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난민 수용소 당국자들은 우리 조직이 얼마나 신속하게 구호품을 보내 오는지를 보고 얼떨떨해 하였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 앞서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조타수 겸 목자

이 혼란기에, 노아를 조타하여 급류를 통과했던 조타수, 도 아메돈은 유능한 목자가 되었다. 1974년에 그의 종족 가운데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기 위해 파라마리보를 떠난 아우카네르 부시 니그로인 그는 사람들을 잘 보살피고, 그들의 문제를 잘 이해해 주며, 유능한 조직자이기도 하다. 사실상, 성서에 기초한 그의 충고가 너무나 고맙기 때문에, 이제 40세밖에 안 되었지만, 그의 종족은 그를 “파피”(아버지의 애칭)라고 부른다.

처음에, 그는 타파나호니 강 주변에 있는 형제들을 도왔다. 그런 다음 1980년대 중반에, 그와 다른 파이오니아들은 마로니 강쪽으로 옮겼다. 반응은 아주 좋았다. 그러나 이곳의 부시 니그로들은 너무 흩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 모두를 찾아가기란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1985년에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어떻게?

그 해에, 통치체는 열대 우림에서 일하는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위한 가솔린 수당의 인상을 승인하였다. 선외 모터에 쓸 여분의 연료가 있게 되자, 파이오니아들은 한 촌락에서 그 다음 촌락까지 카누를 타고 갔고, 많은 관심자를 발견하였다. 1985년에 약 30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새 회중이 가카바 마을에 형성되었다. 몇 개월 후, 전도인 수는 50명으로 증가하였고, 이 전도인들 중 약 20명은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다. 오래지 않아, 도 아메돈은 또 시멘트 부대를 싣고 급류를 건너고 있었다. 열대 우림에 두번째 왕국회관이 생겼다!

열배의 증가

최근에 이 지역을 방문한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 빔 반 세아일은 이렇게 보고한다. “일단의 젊은 형제들이 마로니 강에 있는 한 아름다운 섬에 200석의 왕국회관을 완공하였다. 그 다음에 그들은 자원하여 여태껏 전파한 적이 없는 강, 라바로 배를 타고 나아갔다. 그곳, 알루쿠 부시 니그로들 가운데서도 진리가 전파되고 있다.”

내란에도 불구하고, 왕국 소식은 열대 우림으로 깊숙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10년 전에 타파나호니 강변에서 일한 20명의 부시 니그로 형제는 현재 200명의 전도인으로 증가되어, 수리남 동부의 강들 일대에 4개의 회중이 조직되었다. 열배의 증가가 있었다!

이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증가가 나타났다. 많은 회중은, 집회 참석자 수가 전도인 수의 두배나 되었고, 이 많은 사람을 다 수용하기에는 왕국회관이 너무 비좁아졌다고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1987년초에, 통치체는 이 나라 지부에 폭 34미터, 길이 60미터 되는 커다란 대회장과 네채의 왕국회관을 건축하도록 허락하였다. 이것은 시기에 적절한 결정이었다.

당시 대회 회관 관리인, 헨크 판만은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가 시멘트를 구입한 후 얼마 안 있어, 이 나라에 시멘트가 바닥났습니다. 건축 현장들은 문을 닫았지만, 우리는 끝까지 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후에, 네덜란드 지부에서 컨테이너 네대 분량의 건축 자재를 보내 줌으로, 도움을 베풀었다. 일단의 건축 기술자와 수백명의 자진 봉사자가 일년 반 동안 일하여, 네곳에 아름다운 새 집회 장소를 완공하였다.

건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1955년에 소유지를 기증한 스텔라 다울라트가 기억나지 않는가? 집을 옮긴 후, 그는 그곳에서 만족스럽게 살았다. 하지만, 최근에 그 회중은 집회에서 “다울라트 자매를 위해 새 집을 지을 것입니다”라고 광고하여 그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의 옛집 옆에다, 형제들은 널찍한 벽돌집을 한채 지어, 78세가 된 스텔라에게 기증하였다. 스텔라는 눈물을 글썽인 채, “참으로 여호와께서 주신 훌륭한 선물입니다!”라고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수고를 잊지 않으신다

스텔라와 같이, 수리남에서 여호와의 축복을 경험한 사람들은 많다. 지면의 부족으로 충실한 그들 모두를 언급할 수 없어 서운하다. 하지만, 여호와의 봉사에서의 그들의 매일매일의 인내를 여호와께서는 무심히 보아 넘기시지 않는다. 그분은 그들이 “행한 일과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잊으시지 않”는 분이다.—히브리 6:10, 새번역.

지난 40년 동안, 41명의 선교인이 지방 형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일하였으며, 그들 중 다수는 자신들이 나타낸 열심으로 인하여 기억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18명의 길르앗 졸업생은 아직도 이 나라 전역의 여러 회중에서 귀중한 일꾼으로 일하고 있다.

우리는 1,466명의 전도인(그들 중 3분의 2는 네덜란드어를, 4분의 1은 스라난 통고어를 그리고 나머지는 영어를 사용함)을 일으켜 주신 것에 대해서 여호와께 감사드린다. 이들 역시 모두 순결한 진리의 언어를 터득하였다. 그러나 1989년 기념식에 4,443명이 참석한 것을 보면, 모아들이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전도인 수의 세배가 넘는 수이다!

증인들이 이렇게 증가함에 따라, 또 다른—새로운 지부 사무실—건축 계획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파라마리보 교외에 있는 3헥타르의 대지를 구입할 계획을 하였다. 이 새로운 지부 시설을 갖추게 되면, 지부 사무실은, 더욱더 큰 소리로 ‘오라. 목마른 사람도 오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받으시오’하고 외치는 초대에 호응하는 모든 사람을 돌보는 데 필요한 준비를 더 잘 갖추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전세계적으로, ‘용감하게 되어 “여호와는 나를 돕는 분”이라고 말하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에 따라, 여호와께서 우리의 수고를 계속 축복해 주시기를 바란다.—계시 22:17, 새번역; 히브리 13:6, 신세.

[각주]

^ 115항 “수리남 부시에서의 생활”이란 이 통신원들의 기사가 「깰 때이다」(영문) 1956년 2월 8일호에 실렸다.

[252면 도표]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수리남

최고 전도인 수

2,000

1,466

810

561

361

67

1950 1960 1970 1980 1989

평균 파이오니아 수

400

236

 

 

 

 

63

54

41

10

1950 1960 1970 1980 1989

[192면 네모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카리브해

코란타인 강

가이아나

수리남

니브니케리

파라마리보

바게닝겐

메르조르그

뭉고

온베르다히트

파라남

알비나

오레알라

사라마카 강

마로니 강

그란보리

타파나호니 강

브라질

프랑스령 기아나

[네모]

수도: 파라마리보

공용어: 네덜란드어

주요 종교: 힌두교

인구: 400,000명

지부 사무실: 파라마리보

[194면 삽화]

60년 이상이나 여호와를 충실히 섬긴 알프레트 보이텐만

[197면 삽화]

1920년경에 「창조 사진극」을 본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린 보이텐만과 제임스 브라운

[199면 삽화]

1919년에 침례를 받고, 후에 이 나라의 왕국회관 건축자가 된 빌렘 텔그트

[207면 삽화]

선교인 “아들들”을 돌봐 준 할머니 드 브리스

[215면 삽화]

프레데릭 바히테르는 증인이 된 최초의 부시 니그로였다

[218면 삽화]

스텔라 다울라트가 대지를 기증하여, 수도에서 최초의 왕국회관이 건축되었다

[230면 삽화]

경로원에서 증거하고 있는, 길르앗 20기 졸업생, 알베르트 수르

[241면 삽화]

지부 위원회 위원들: C. 피나스, W. 반 세아일, N. 피나스, D. 스테겡가

[246면 삽화]

레오 투아르트는 거의 반세기 동안 증인으로 일해 왔다

[251면 삽화]

비헤르스트라트 8-10에 위치한 현재의 지부 사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