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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그 배후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작품—그 배후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제5장

작품—그 배후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앞장들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대 과학에 의해 발견된 사실들은 우주와 지상 생물에 모두 시작이 있었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풍부히 제시합니다. 그것들의 시작이 있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입수할 수 있는 증거를 연구한 후에, 많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제일 원인(第一原因)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람들도 이 원인에 인격적인 특성을 부여하는 일은 싫어할지 모릅니다. 창조주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싫어하는 그러한 태도는 일부 과학자들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우주에는 시작이 있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하느님이 어떻게 세계를 창조하였는지 알”고 싶은 욕망을 표현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인격체이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공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우주에서 느낄 수 있는, “교리도 없고, 인간의 특성을 닮은 하느님에 대한 개념도 없는 종교적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노벨상 수상자인 화학자 후쿠이 게니치도 우주에서 볼 수 있는 위대한 구조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상호 연관되어 있는 위대한 구조를 ‘절대자’ 혹은 ‘하느님’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쿠이는 그러한 구조를 가리켜 “자연의 특이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격적인 특성을 띠고 있지 않은 원인(原因)에 대한 그러한 믿음은 동양의 종교 사상과 대단히 유사한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많은 동양 사람은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심지어 자연에 해당하는 한자에도 표현되어 있는데,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스스로 되다” 혹은 “스스로 존재하다”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우주에서 느낄 수 있는 종교적 감정이 불교에 잘 표현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붓다는 우주나 인간의 생성에 창조주가 관여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도에서도 자연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으며, 신도교인들은 신이란 죽은 자들의 영이 자연의 일부가 된 것에 불과하다고 믿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러한 사상은 고대 그리스에 널리 퍼져 있던 견해와 비슷합니다. 철학자인 에피쿠로스(기원전 341-270년)는 ‘신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믿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인간은 자연의 산물로서, 아마도 자연 발생이나 자연의 적자 선택의 산물일 것이라고 그는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당신은 아마, 오늘날 유행하는 그와 비슷한 사상이 결코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에피쿠로스파 사람들과 같은 시대의 사람들로 그리스의 스토아 학파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자연이 곧 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들은 사람이 죽으면 사람의 몸 속에 있던 인격적인 특성을 띠고 있지 않은 에너지가 에너지의 바다로 재흡수되어 신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연의 법칙과 협조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그와 비슷한 견해를 들어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인격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논쟁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나온 지식은 모두 이상한 것이라고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사상이나 믿음들이 난무하는 가운데서, 일세기의 한 유명한 교사는 역사상 가장 의미 심장한 연설 가운데 하나를 하였습니다. 의사이자 역사가인 누가는 이 연설을 기록해 놓았는데, 우리는 사도들의 활동이라는 책 17장에서 그 연설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그 연설은 제일 원인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확고히 하고, 그 제일 원인과 관련해서 우리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00년 전에 행해진 연설이 어떻게 오늘날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까?

그 유명한 교사 바울은 아테네의 고등 법정에 초대되었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인격체이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에피쿠로스파 사람들과 스토아 학파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연설 서두에서, 그들이 사는 도시에서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그리스어로, 아그노스토이 테오이)라고 새겨진 제단을 보았다고 말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일부 사람들은 생물학자 토머스 H. 헉슬리(1825-95년)가 “불가지론자(agnostic)”라는 말을 만들었을 때 이 표현을 넌지시 언급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헉슬리는 “궁극적인 원인(하느님)이나 사물의 본질적인 특성은 알려지지 않았고 알 수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 단어를 적용하였습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주장해 온 것처럼, 창조주는 정말 “알 수 없는” 분입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말은 바울의 표현을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바울은 창조주가 알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분이 그 아테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날의 우리들과는 달리, 창조주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많이 입수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지성을 가진 인격체이신 설계자가 계셔서, 그분의 특성들 때문에 우리가 그분에게 끌리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한 점에 유의하십시오.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경건한 정성을 바치는 그것을 내가 여러분에게 널리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 그분은 실로 하늘과 땅의 이시므로 손으로 만든 신전에 살지 않으십니다. 또한 무엇이 필요한 것처럼 인간의 손으로 돌봄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그분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한 사람에게서 각 나라 사람들을 만드시어 온 지면에 살게 하[셨습니다].” (사도 17:23-26) 참으로 흥미 있는 추리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은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이라고 암시한 것이 아니라, 아테네에 제단을 만든 사람들과 청중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 그분을 모르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그 사람들에게—그리고 그 이후 그의 연설을 읽어 온 모든 사람들에게—창조주를 알기 위해 노력하라고 강력히 권고하였습니다. “그분은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17:27) 우리가 만물의 창조주의 창조물을 관찰한다면 그분이 계시다는 증거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바울이 재치 있게 소개한 것임을 당신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창조물을 관찰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분의 특성 중 얼마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주가 존재함을 지적하는 여러 가지 증거를 살펴보았습니다. 한 가지 증거는 지성적으로 조직된 광대한 우주로서, 그 우주에는 분명히 시작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또 다른 증거는 지상의 생물이며, 우리 몸의 세포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설계도 그 증거 가운데 포함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증거는 우리의 뇌이며, 또한 뇌로 인해 우리가 자신에 대해 총체적 자각을 가질 수 있고 미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창조주의 작품 중에서 우리에게 매일 영향을 미치는 다른 두 가지 예를 먼저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렇게 하면서 ‘이것은 그것을 설계하고 마련하신 분의 특성에 대해 무엇을 알려 주는가?’ 하고 자문해 보십시오.

창조주의 작품으로부터 배움

창조물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창조주에 대하여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또 다른 경우에, 소아시아의 군중에게 연설하면서 그 한 가지 예를 언급하였습니다. “지나간 세대들에는 [창조주께서] 모든 이방 사람들로 자기 길을 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자기를 증언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로부터 여러분에게 비와 열매 맺는 계절을 주시는 선한 일을 하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음식과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사도 14:16, 17) 창조주께서 인류에게 식품을 마련해 주심으로 자신의 특성을 알려 주신 방법에 대해 바울이 제시한 예에 유의하십시오.

오늘날 일부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식품을 구하기 어렵지 않은 상황을 당연시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식품을 충분히 구하지 못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식품을 조금이라도 구할 수 있는지의 여부도 창조주의 지혜와 선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과 동물이 식품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복잡한 순환계 덕분입니다. 그 가운데는 물 순환, 탄소 순환, 인 순환, 질소 순환이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광합성 작용의 경우, 식물이 이산화탄소와 물을 원료로 사용하고 햇빛을 에너지원으로 이용하여 당(糖)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에 더하여, 식물은 광합성 작용 중에 산소를 방출합니다. 이것을 “폐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이 부산물이 결코 폐기물이 아닙니다. 산소를 들이마시고 그것을 이용하여, 우리 몸에 들어온 음식을 신진 대사하는 일 즉 태우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 일의 결과로 생긴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식물은 그것을 광합성을 위한 원료로 사용하여 재순환시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작용에 대해 기초 과학 시간에 배웠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작용이 덜 중요해지거나 덜 놀라운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 몸의 세포에서는 물론 동물의 몸의 세포에서도, 인은 에너지를 전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인을 얻습니까? 역시, 식물로부터입니다. 식물은 흙에서 무기 인산염을 흡수한 다음 유기 인산염으로 전환시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기 인산염 형태로 인을 함유하고 있는 식물을 섭취한 다음, 그것을 필수적인 활동에 사용합니다. 그 후에, 인은 인체가 내보내는 “노폐물”의 형태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그러면 식물은 다시 인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질소를 필요로 하는데, 질소는 우리 몸의 모든 단백질 분자와 DNA 분자의 구성 요소입니다. 우리는 생명 유지에 매우 필수적인 이 원소를 어떻게 얻습니까?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공기의 약 78퍼센트가 질소이지만, 질소를 직접 흡수할 수 있는 식물이나 동물은 없습니다. 따라서 공기 중의 질소는 다른 형태로 바뀌어야만 비로소 식물이 섭취할 수 있으며, 그 후에 사람이나 동물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전환시키는 일 즉 고정시키는 일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어납니다. 한 가지 방법은 번개의 활동에 의한 것입니다. * 질소 고정은 또한 완두콩이나 콩이나 앨팰퍼와 같은 콩과(科) 식물의 뿌리의 혹에 사는 세균에 의해서도 일어납니다. 이 세균들은 대기 중의 질소를 식물이 사용할 수 있는 물질로 전환시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녹색 식물을 먹을 때, 우리 몸이 단백질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질소를 섭취하게 됩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열대 우림 속에서도, 사막에서도, 심지어 영구 동토층이 있는 툰드라 지역에서도 콩과 식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지역이 불에 타버릴 경우에도, 콩과 식물은 대개 첫 번째로 다시 군락을 이루는 식물이 됩니다.

이러한 재순환 체계는 놀랍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재순환 체계마다 이전 순환에서 나온 폐기물을 활용합니다. 필요한 에너지는 주로 태양에서 오는데, 태양은 무공해에다 무한하고 끊임없는 에너지원입니다. 자원을 재활용하려는 인간의 노력과 참으로 대조가 됩니다! 인간이 만든 제품은 환경에 무해한 것이라 해도, 인간이 만든 재활용 체계가 복잡해서 지구를 더 깨끗이 하는 데 기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에서는, 제품을 고안할 때, 가치가 높은 성분을 재생시켜 쉽게 재활용할 수 있도록 고안해야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이 자연계의 순환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창조주의 선견지명과 지혜에 대해 무엇을 알려 줍니까?

편파적이 아니고 공정하다

창조주의 특성 가운데 일부를 더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한 가지 체계—우리 몸의 면역계—를 더 고려해 보기로 합시다. 면역계 역시 세균과 관련이 있습니다.

“세균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종종 세균의 해로운 영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대부분의 세균은 인간에게 무해하며 많은 세균은 실제로 이롭기까지 하다”고,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말합니다. 사실상, 세균은 생명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세균은 방금 언급한 질소 순환뿐 아니라,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몇몇 원소와 관련된 순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화관도 세균을 필요로 합니다. 대장에만도 약 400종의 세균이 있어서, 비타민 K를 합성하고 노폐물을 처리하는 일을 돕습니다. 우리에게 또 유익이 되는 일로, 세균은 소가 풀을 우유로 변화시키는 일을 돕습니다. 그리고 치즈, 요구르트, 피클, 사우어크라우트(양배추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것), 김치 등을 만들 때 발효에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세균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균이 우리 몸 가운데 원래 있어야 할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침투해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되면 최고 2조 개에 달하는 우리 몸의 백혈구 세포가 우리에게 해로울지 모르는 세균과 싸우게 됩니다. 「사이언스」지의 편집인인 대니얼 E. 코슐런드 2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면역계는 외부 침입자를 인식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면역계는 종류가 다른 약 1000억[100,000,000,000] 개의 면역 수용기를 만들어 놓기 때문에, 외부 침입자의 모양이나 형태가 아무리 다양해도 그 침입자를 인식해서 제거할 수 있는 보충 수용기를 가지고 있다.”

침입자와 싸우기 위해 우리 몸이 사용하는 한 가지 세포는, “대식가”라는 의미를 지닌 매크로파지 즉 대식 세포입니다. 대식 세포는 우리 몸의 피 속에 들어온 이물질을 마구 먹어 치우기 때문에 아주 알맞은 이름입니다. 예를 들면, 대식 세포는 침입 바이러스를 잡아먹은 다음 잘게 분해합니다. 그런 다음 그 바이러스에서 취한 단백질을 전시해 보입니다. 이 소량의 단백질은 우리 면역계에 빨간 깃발과 같은 표시가 되어, 외부에서 침입한 유기체들이 우리 몸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경보를 울리는 역할을 합니다. 면역계의 또 다른 세포, 즉 보조 T세포는 바이러스의 단백질을 인식하면, 대식 세포와 화학 신호를 주고받습니다. 이 화학 신호 자체도 어리둥절할 정도로 다양한 기능을 가진 특별 단백질로서, 침입에 대한 우리 면역계의 반응을 조절하고 도와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작용의 결과 특정 바이러스와 격렬한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보통 감염되지 않고 이겨냅니다.

사실, 훨씬 많은 일이 관련되어 있지만, 이상의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우리의 면역계가 얼마나 복잡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처럼 복잡한 구조를 지니게 되었습니까? 그것도 아무런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우리 가족의 경제적 지위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보건 혜택의 불공평성과 비교해 보십시오. WHO의 사무국장인 나카지마 히로시 박사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WHO[세계 보건 기구]에게는, 점점 심해지는 불공평이 그야말로 생사가 달린 문제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건강으로 사회적 불공평의 대가를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상파울루의 빈민가에 사는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한탄하는 말을 당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훌륭한 보건 혜택이란, 사치스러운 쇼핑 센터의 진열장에 진열되어 있는 물건과 같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쳐다볼 수는 있지만, 그것을 살 능력은 없지요.” 세계 도처의 수많은 사람들도 그와 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공평 때문에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아프리카로 가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료 혜택을 베풀었으며, 그러한 노력을 바친 데 대한 상으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와 비슷한 선행을 해 온 남녀들을 보면 그 사람들의 어떤 특성이 떠오릅니까? 그러한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공의에 대한 의식이 있어서, 개발 도상국에 사는 사람들도 의료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당신도 아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제적 지위나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놀라운 면역계가 우리 몸 속에 내재되어 있도록 베풀어 주신 분은 어떠합니까? 그러한 사실은 창조주가 사랑과 공평과 공의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점을 훨씬 더 잘 대변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창조주를 알게 됨

이상 언급한 체계는 창조주의 작품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예에 불과하지만, 그것만 고려해 보아도 창조주가 실재하는 지성 있는 인격체임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분의 특성과 창조 방식에 우리의 마음이 끌리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수많은 예들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 생활 가운데서 아마, 어떤 사람의 작품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사실상 그 사람을 잘 알기에 충분하지 않을 수 있음을 경험해 왔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을 오해하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 사람이 오해나 비방을 받아 왔다면, 그 사람을 만나서 그의 말을 들어 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 상황에서 그가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지 그리고 그가 어떤 특성들을 나타내는지 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주의 강력한 창조주를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실재하는 인격체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대해 많은 점을 밝혀 주셨는데, 당신 자신의 언어를 포함하여 2000개가 넘는 언어로 전체 혹은 일부를 구할 수 있는 한 책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책—성서—은 당신이 창조주를 알고 창조주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도록 초대합니다. 그 책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그 책은 또한 어떻게 그분의 벗이 될 수 있는지도 알려 줍니다. (야고보 2:23; 4:8) 그 책에 흥미를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창조주의 창조 활동에 대한, 사실에 입각한 흥미진진한 기록을 고려해 보도록 당신을 초대하는 바입니다.

[각주]

^ 21항 번개에 의해 흡수 가능한 형태로 전환된 일부 질소는 비와 함께 땅으로 떨어진다. 식물은 이 질소를 자연이 공급해 준 비료로 사용한다. 사람과 동물이 식물을 섭취하여 이 질소를 이용하고 나면, 질소는 다시 암모니아 합성물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고, 일부 질소는 결국 질소 가스로 다시 전환된다.

[79면 네모]

합리적인 결론

우주에 시작이 있었다는 점에 과학자들은 전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한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또한, 그러한 시작이 있기 전에 뭔가 실재하는 것이 틀림없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점에도 의견이 일치한다. 일부 과학자들은 항상 존재하는 에너지가 그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가 하면 우주보다 먼저 존재했던 상태로서 원시 혼돈 상태가 있었다고 가정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무슨 용어를 사용하든 간에,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어떤 것이 있었다고 가정한다. 즉 무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어떤 것—시작이 없는 어떤 것—이 있었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그 문제는, 영원한 어떤 이 있었다고 가정하느냐 아니면 영원한 그 누군가가 있었다고 가정하느냐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생물의 기원과 특성에 대해 과학이 알게 된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당신에게는 이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게 더 합리적인 것 같은가?

[80면 네모]

“생명에 필수적인 각 원소—탄소, 질소, 황—는 세균에 의해, 가스 형태의 무기 화합물에서 식물과 동물이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된다.”—「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

[78면 도해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당신은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까?

우리가 속해 있는 우주

↓ ↓

시작이 없었다 시작이 있었다

 

↓ ↓

원인(原因)이 없었다 원인(原因)이 있었다

↓ ↓

영원한 어떤 것이 영원한 그 누군가가

그 원인 그 원인

[75면 삽화]

많은 동양 사람은 자연이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믿는다

[76면 삽화]

뒤에 성채가 보이는 이 언덕에 서서, 바울은 하느님에 관해 생각을 자극하는 연설을 하였다

[83면 삽화]

하느님께서는 현대 의학이 베풀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능가하는 면역계를 우리 각자에게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