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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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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 2014년  9월

 체험기

하느님을 섬기는 보람 있는 삶

하느님을 섬기는 보람 있는 삶

는 어린 시절부터 인종적 편견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소심한 성격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위로를 받고 싶었던 나는 그 말씀을 알아보려고 가까운 가톨릭 성당에 나갔지요. 하지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운동에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체조와 보디빌딩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리앤드로에 헬스클럽을 열었고, 보디빌더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미국 보디빌더 챔피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각 같은 몸을 만들어도 마음의 공허감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성경을 이해하게 되다

가 운영하는 헬스클럽의 한 친구는 내가 성경을 알아보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아는 사람을 만나 보라고 제안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여호와의 증인이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는 4시간 동안 내 질문에 성경을 직접 펴서 대답해 주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저녁에 다시 와 달라고 했으며, 우리는 그날 밤 자정까지 성경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게 된 것이 기뻐서 다음 날 그를 따라다니며 전도 봉사를 어떻게 하는지 봐도 되냐고 물어보았죠. 그가 사람의 질문에 성경을 펴서 대답하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정리한 다음, 파이오니아(여호와의 증인의 전 시간 봉사자)였던 그와 전도 봉사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는 1948년 5에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의 카우팰리스 경기장에서 열린 대회 때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같은 해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어머니를 방문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머니는 성경 진리를 잘 받아들이셨고 얼마 안 있어 여호와의 증인이 되셨죠. 어머니는 가족의 반대가 있었는데도 여러 해 후에 돌아가실 때까지 하느님께 충실하셨습니다. 다른 가족은 여호와의 증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될 사람을 만나다

1950에 콜로라도 주 그랜드정크션으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 빌리를 만났습니다. 1928인 빌리는 경제 대공황을 겪으며 성장했습니다. 빌리의 어머니인 미니는 석유램프의 깜빡거리는 불빛 아래 매일 밤 딸에게 성경을 읽어 주었습니다. 빌리는 네 살 때 글을 읽을 수 있었고 여러 가지 성경 이야기를 줄줄 외웠습니다. 1940년대 말에 빌리의 어머니는 여호와의 증인과 성경을 공부하면서 지옥이 고초의 장소가 아니라 인류의 일반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도서 9:5, 10) 빌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1949에 빌리는 보스턴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돌아와 성경을 진지하게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빌리는 학교 교사가 되려는 생각을 접고 하느님께 헌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1950에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 국제 대회 때 침례를 받았습니다. 얼마 후 는 빌리를 만나서 결혼을 했고, 함께 전 시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오리건 주 유진에서 봉사를 시작했고 평생 친구로 지낼 사람을 많이 사귀었습니다. 1953에는 오리건 주 그랜츠패스로 이사해서 그곳에 있는 작은 회중을 지원했습니다. 그 후 같은 해에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이 선교인을 양성하는 길르앗 학교 제23기 학급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학교는 뉴욕 시에서 북서쪽으로 400킬로미터쯤 떨어진 뉴욕 주 사우스랜싱 인근에 있었습니다.

브라질에서 선교 봉사를 하다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지 5개월 후인 1954년 12에 우리 부부는 브라질로 가기 위해 프로펠러가 두 개 달린 비행기를 탔습니다. 이륙한 지 한 시간쯤 지나서 비행기의 엔진 하나가 고장 났지만 버뮤다에 무사히 착륙할 수 있었죠. 쿠바에서 또 한 차례 비상 착륙을 하면서 36시간 동안 힘들게 여행한 끝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 사무실에 도착했습니다.

임대한 장소였던 바우루 최초의 왕국회관—내가 만든 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1955

그곳에 잠시 머문 다음, 우리 부부는 선교인 집을 개설하기 위해 다른 두 선교인과 함께 상파울루 주 바우루로 떠났습니다. 바우루 시의 인구는 5만이 넘었으며, 우리는 그곳에서 활동한 최초의 여호와의 증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민의 집을 방문하기 시작하자, 즉시 그 지역의 가톨릭 사제가 우리의 활동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우리를 따라다니며 집주인에게 우리의 말을 듣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몇 주도 안 되어 우리와 성경을 공부하는 대가족이 진리를 받아들였고, 나중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내 다른 사람도 우리와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침례받은 그 가족의 친척 중에 유명한 사교 클럽의 회장이 있었습니다. 나는 대회를 열기 위해 그 클럽의 시설을 사용하기로 계약했죠. 지역의 사제가 계약을 취소하라고 압력을 넣자 그 회장은 클럽 회원을 만나 “여러분이 계약을 취소하면 저는 사임할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곳에서 대회를 여는 것이 승인되었지요.

이듬해인 1956에 우리는 상파울루 주 산투스에서 열리는 지역 대회에 초대되었습니다. 우리 회중에서 거의 40이 기차를 타고 그곳까지 여행했습니다. 대회가 끝나고 바우루에 돌아와 보니, 집에 편지가 한 통 와 있었습니다. 그 편지는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을 방문하는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하도록 나를 임명하는 편지였습니다. 그때부터 거의 25간 그 봉사를 하면서 드넓은 브라질의 대부분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1년 만에 바우루에는 열심 있는 왕국 전도인로 이루어진 집단이 생겼습니다

그 시절의 전도 봉사

그 당시에는 여행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우리는 버스나 기차나 마차나 자전거로 혹은 도보로 여행했으며, 그러다 보니 브라질에서 안 가 본 곳이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방문한 도시들 중에는 상파울루 주의 자우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사제가 우리에게 항의하고 나섰습니다.

“‘내 양들’에게 전도하지 말아요!” 하고 그는 공격적으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선생님의 양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양이죠” 하고 우리는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적인 전파 활동을 보여 주는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라는 영화를 상영할 마련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제가 우리를 공격하려고 폭도를 동원했습니다. 우리는 즉시 경찰에 신고했죠. 사제가 교구 신자로 이루어진 폭도를 이끌고 극장에 도착했을 때는 경찰이 대열을 이루어 그 폭도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영화를 매우 흥미 있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어디에서 봉사하든 그와 같은 종교적 증오와 반대를 겪었습니다. 예를 들어, 산타카타리나 주 블루메나우 근처의 브루스키에서 우리가 만난 두 파이오니아는 극심한 반대를 받으며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은 인내와 끈기를 나타낸 결과 풍부한 상을 받았습니다. 50여 년이 지난 현재 그 지역에는 번창하는 회중이 60가 넘으며, 인근의 이타자이 시에는 아름다운 대회 회관도 있습니다!

여행하는 봉사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대규모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동료 증인과 즐겁게 일한 것입니다. 1970년대에 나는 거대한 모룸비 경기장에서 열리는 대회의 감독자로 일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약 100의 인근 회중에 편지를 보내, 대회 전날 밤에 경기장을 청소할 자원봉사자를 회중로 10씩 보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날 밤 몇몇 축구 선수은 경기장을 떠나면서 이렇게 비웃었습니다. “여자이 잔뜩 모여서 빗자루랑 대걸레로 뭘 하겠다는 거야?” 하지만 자정이 되자 경기장 전체가 깨끗해졌습니다! 경기장 관리 책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직원이 일주일 내내 할 일을 여러분 여호와의 증인은 몇 시간 만에 끝내 버렸군요!”

미국으로 돌아오다

1980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얼마 후에 아내와 나는 캘리포니아 주 프리몬트에 사시는 어머니를 돌봐 드리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밤에 건물을 청소하는 일자리를 구했고 계속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면서 그 지역의 포르투갈 사람에게 전도했습니다. 그 후에 가까운 샌와킨밸리로 이사하여, 새크라멘토부터 베이커즈필드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포르투갈어 사용자를 찾아다녔습니다. 현재 캘리포니아 주에는 약 10의 포르투갈어 회중이 있습니다.

1995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내와 나는 장인이 사시는 플로리다 주로 이사했습니다. 장모은 이미 1975에 돌아가셨죠. 우리는 장인을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 드린 다음, 2000에 콜로라도 주 남서부에 있는 고원 사막 지대로 이사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전 시간 봉사를 하면서 나바호와 우테 보호 구역에 사는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전도했습니다. 슬프게도 아내는 2014년 2에 사망했습니다.

약 65년 전에 나의 많은 질문에 성경을 펴서 대답해 준 여호와의 증인을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의 대답이 성경이 실제로 가르치는 내용과 일치한지 확인하기를 정말 잘했습니다. 그 덕분에 하느님을 섬기며 보람 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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