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하위 메뉴 바로 가기

목차 바로 가기

여호와의 증인

한국어

2016 여호와의 증인 연감

수라바야 회중, 1954

 인도네시아

길르앗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길르앗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1951년 7에 자카르타의 작은 회중 성원은 함께 모여, 길르앗 훈련을 받고 인도네시아에 들어온 최초의 선교인인 피터 밴더헤건을 환영했습니다. 그해 말까지 네덜란드와 독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세 명의 선교인이 더 도착해 인도네시아의 전도인 수가 거의 두 배로 증가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선교인인 프레드리카 렌스커르스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손짓 발짓을 해 가며 호별 방문을 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는데, 많은 사람이 네덜란드어를 할 줄 알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주로 네덜란드어로 전파했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로널드 재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중 몇몇 사람은 인도네시아어로 된 짧은 연설문이 들어 있는 증거 카드를 사용했어요. 나는 그걸 외워서 그대로 말하려고, 매번 문을 두드리기 전에 증거 카드를 살펴보곤 했지요.”

선교인이 앞장서서 훌륭한 인도를 베푼 덕분에 겨우 1년 사이에 전도인 수가 34에서 91으로 증가했습니다. 1951년 9월 1에 자카르타 중부에 있는 안드레 엘리아스의 집에 워치 타워 협회 지부 사무실이 세워졌습니다. 로널드 재카가 지부의 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다른 구역이 열리다

1951년 11에 피터 밴더헤건은 북술라웨시 마나도로 임명되었는데, 그곳에는 테오 라투가 아내와 함께 세운 작은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곳 사람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고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깊이 존중했습니다. 많은 집주인이 증인을 집 안으로 초대 성경 교리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형제은 한 번에 열 명 정도 되는 사람에게 이야기하곤 했는데, 15쯤 지나면 그 수가 50명 정도로 늘어났습니다. 한 시간도 안 되어 듣는 사람의 수가 200으로까지 늘어나서 앞마당을 가득 메우기도 했습니다.

1952년 초에 앨버트 멀트비와 진 멀트비 부부가 인도네시아에서 두 번로 큰 도시인 동자바의 수라바야에 선교인 집을 세웠습니다. 그 집에 여섯 명의 선교인 자매이 더 살게 되었는데, 그은 게르트루트 오트, 프레드리카 렌스커르스, 수지 스토베, 메리언 스토베, 에벌린 플랫, 미미 하르프였습니다. 프레드리카 렌스커르스 이렇게 말합니다. “현지인은 대개 온건한 이슬람교인이었고 아주 친절했어요. 많은 사람이 마치 진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습니다. 성서 연구를 시작하기가 수월했죠. 3이 안 돼서 수라바야 회중의 전도인은 75으로 늘었습니다.”

자카르타에 있던 선교인 집

그즈음 서수마트라 파당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아지스라는 남자가 지부 사무실에 영적인 도움을 구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1930년대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파이오니아과 연구를 했는데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있을 때 증인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얼마 후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소책자를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그는 “소책자에서 자카르타 주소를 발견하고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라고 썼습니다. 지부 사무실은 순회 감독자인 프란스 판플릿을 즉시 파당으로 파견했습니다. 프란스가 가 보니 아지스는 이웃에 사는 한 남자에게 증인에 대해 이야기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나자르 리스라는 공무원이었는데, 영적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두 남자 모두 가족과 함께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아지스 형제는 나중에 장로로서 충실하게 봉사했습니다. 나자르 리스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그의 자녀 여러 명도 현재 여호와의 증인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프란스 판플릿과 여동생 넬

얼마 후 프란스 판플릿은 동칼리만탄의 발릭파판에 있는 네덜란드 출신의 한 무활동 형제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전쟁으로 파손된 정유 시설을 다시 세우고 있었습니다. 프란스는 봉사할 때 그 형제를 데리고 다녔고 그가 몇몇 관심자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게 했습니다. 그 형제는 발릭파판에 작은 집단을 만든 뒤 네덜란드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 새로 침례받은 자매인 티티 쿠틴이 남칼리만탄에 있는 반자르마신으로 이주했습니다. 티티는 다약족 공동체에 속한 친족에게 전파하여 많은 사람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왔습니다.  새로 진리를 배운 이 사람들 중 일부는 칼리만탄 오지에 있는 고향 마을로 돌아가 여러 집단을 세웠는데, 이 집단은 활동적인 회중으로 발전했습니다.

인도네시아어 출판물을 생산하다

전파 활동이 가속화되자 더 많은 인도네시아어 출판물이 필요해졌습니다. 1951에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이 인도네시아어로 번역되었지만, 인도네시아어 맞춤법이 개정에 따라 지부에서 번역본을 수정해야 했습니다. * 마침내 책이 발표되었고, 그 덕분에 많은 인도네시아 사람이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953에 지부 사무실은 인도네시아어 「파수대」지 250를 인쇄했는데, 이것은 12년 만에 다시 발행된 것이었습니다. 등사판으로 찍은 이 12짜리 잡지에는 처음에 연구용 기사만 실렸습니다. 3년 뒤에는 면수가 16으로 늘어났고, 외부 인쇄 업체를 통해 매달 1만 부가 발행되었습니다.

1957에는 처음으로 월간 「깨어라!」지가 인도네시아어로 발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배부 수가 1만 부에 도달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종이가 부족했기 때문에, 형제은 종이를 사용하기 위해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형제이 낸 신청서를 담당한 정부 관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파수대」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잡지 중 하나죠. 여러분이 발행할 새로운 잡지를 위해 종이 사용 허가를 내 드릴 수 있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 1항 1945년 이래 인도네시아어 맞춤법은 두 차례에 걸쳐 크게 개정되었는데, 주된 이유는 이전 네덜란드식 맞춤법을 대체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