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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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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마음이 지혜로우시”지만 겸손하시다

“마음이 지혜로우시”지만 겸손하시다

1-3. 여호와께서 겸손한 분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아버지가 어린 자녀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해 주기를 원합니다. 마음을 감동시키고 싶어합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할까요? 자녀를 위협하듯 우뚝 서서 거친 표현을 사용해야 할까요? 아니면 자녀의 눈 높이로 몸을 낮춰 온화하게 호소하듯 말해야 할까요? 지혜롭고 겸손한 아버지라면 분명히 온화한 방법을 택할 것입니다.

2 여호와는 어떤 아버지이십니까? 거만한 아버지이십니까, 아니면 겸손한 아버지이십니까? 거친 아버지이십니까, 아니면 온화한 아버지이십니까? 여호와는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일에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지식과 지성이 사람을 반드시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한 적이 있습니까? 성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식은 우쭐대게 합니다.’ (고린도 첫째 3:19; 8:1) 하지만 ‘마음이 지혜로우신’ 여호와께서는 또한 겸손하십니다. (욥 9:4) 그분이 조금이라도 지위가 낮아서 그런 것이거나 위대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거만이 없으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거만이 없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여호와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그분에게는 더럽히는 특성인 거만이 없습니다. (마가 7:20-22) 또한, 예언자 예레미야가 여호와께 한 말에 유의해 보십시오. “정녕 당신의 영혼은 [여호와께서 친히] 기억하시고 제 위에 낮게 굽히실 것입니다.” * (애가 3:20) 생각해 보십시오! 우주의 주권자이신 주 여호와께서 기꺼이 “낮게 굽히”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완전한 인간인 예레미야에게 호의적인 관심을 보이시기 위해 예레미야와 같은 수준으로 몸을 낮추신 것입니다. (시 113:7) 그렇습니다. 여호와는 겸손하신 분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겸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혜와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겸손을 나타내시는 방법

4, 5. (ㄱ) 겸손이란 무엇이고, 겸손은 어떻게 나타나며, 겸손을 결코 약함이나 소심과 혼동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대하실 때 어떻게 겸손을 나타내셨으며, 여호와의 겸손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로 중요합니까?

4 겸손은 자기를 낮춘 정신, 오만이나 교만이 없는 상태입니다. 마음의 내적 특성인 겸손은 온화, 참을성, 합리성과 같은 특성을 통해 나타납니다. (갈라디아 5:22, 23) 하지만 이 경건한 특성을 결코 약함이나 소심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경건한 특성은 여호와의 의로운 분노나 파괴 능력의 사용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호와께서는 겸손과 온화을 통해서 자신에게 막강한 힘이 있음을 나타내시는데, 즉 자신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십니다. (이사야 42:14) 겸손은 어떻게 지혜와 관련이 있습니까? 성서에 대한 한 참고 문헌에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겸손은 궁극적으로 ··· 비이기심이라는 말로 정의되며, 모든 지혜의 근본 바탕이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지혜는 겸손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겸손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지혜로운 아버지는 자녀를 겸손하고 온화하게 대한다

5 다윗 왕은 여호와께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당신은 내게 당신의 구원의 방패를 주시고, 당신의 오른손은 나를 붙들어 주시며, 당신의 겸손은 나를 크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시 18:35) 사실, 여호와께서는 이 한낱 불완전한 인간을 위해 행동하고 매일같이 그를 보호하고 붙들어 주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구원을 얻게 된다면—그리고 마침내 왕으로서 어느 정도 크게 되기까지 한다면—그것은 순전히 여호와께서 이처럼 자신을 기꺼이 낮추시기 때문을 깨달았습니다. 사실이지, 여호와께서 온화하고 사랑 많은 아버지처럼 우리를 대하시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낮추실 정도로 겸손하시지 않다면, 우리 중에 누가 구원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6, 7. (ㄱ) 성서에서 여호와를 가리켜 결코 겸허하다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온화과 지혜의 관계는 무엇이며, 이 면에 있어서 최고의 모범이 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6 겸손과 겸허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겸허는 충실한 사람이 배양하는 아름다운 특성입니다. 겸손과 마찬가지로, 겸허도 지혜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잠언 11:2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겸허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다.” 하지만 성서에서는 결코 여호와께서 겸허하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 사용된 겸허라는 말은 자신의 한계를 올바로 알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전능자께서는, 자신의 의로운 표준 때문에 스스로에게 부과하시는 한계 말고는 한계가 없으신 분입니다. (마가 10:27; 디도 1:2) 뿐만 아니라, 가장 높으신 그분은 아무에게도 복종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겸허라는 개념은 결코 여호와께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7 그러나 여호와는 겸손하고 온화한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종에게, 참 지혜에는 온화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지혜에 속한 온화함”에 대해 말합니다. * (야고보 3:13) 이 면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보이신 모범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여호와께서는 겸손하게 위임하시고 귀 기울여 들으신다

8-10. (ㄱ) 여호와께서 기꺼이 책임을 위임하시고 귀 기울여 들으시는 것이 주목할 만한 일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전능자께서는 천사을 대하실 때 어떻게 겸손을 나타내셨습니까?

8 여호와의 겸손에 대한 가슴 뭉클한 증거는, 그분이 기꺼이 책임을 위임하시고 귀 기울여 들으시는 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이 실제로 책임을 위임하시고 귀 기울여 들으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여호와는 도움이나 조언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사야 40:13, 14; 로마 11:34, 35) 그런데도 성서에서 거듭거듭 알려 주는 바에 의하면,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낮추시어 책임을 위임하시고 귀 기울여 들으십니다.

9 를 들어, 아브라함의 생애 중에 있었던 한 가지 유명한 사건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 세 명의 방문객이 찾아왔는데, 아브라함은 그 중 한 방문객을 “여호와”라고 불렀습니다. 그 방문객은 사실은 천사이었는데, 그 중 한 천사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왔고 그분의 이름으로 행동하였습니다. 그 천사가 말하고 행동할 때, 그것은 사실상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아브라함에게, 그분이 “소돔고모라에 대한 불평의 부르짖음”, 큰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려가기로 굳게 결심하였으니, 그이 행하는 것이 모두 그것에 대해 내게 이른 부르짖음대로인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도 내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창세 18:3, 20, 21) 물론, 여호와의 말씀은 전능자께서 몸소 “내려가”신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이번에도 그분은 자신을 대표하는 천사을 보내셨습니다. (창세 19:1)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여호와께서 그 지역의 실제 상태를 직접 ‘아실’ 수가 없었습니까? 물론 아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하는 대신, 겸손하시게도 그 천사에게 상황을 조사해 보고 소돔에 있는 롯과 그의 가족을 찾아가 보도록 하는 임무를 주셨습니다.

10 여호와께서는 또한 귀 기울여 들으십니다. 한은 여호와께서 천사에게 악한 왕 아합을 몰락시킬 여러 가지 방법을 제안해 보라고 요청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한 천사의 제안을 받아들이시고 그 방법을 실행에 옮기라는 임무를 그에게 주셨습니다. (열왕 첫째 22:19-22) 참으로 겸손하시지 않습니까?

11, 12.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겸손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11 여호와께서는 심지어 개인적인 우려를 표명하고 싶어하는 불완전한 인간의 말도 기꺼이 귀 기울여 들어 주십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겠다는 자신의 의도를 아브라함에게 먼저 말씀하시자 그 충실한 사람은 당황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은 당신에게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온 땅의 ‘심판관’께서 옳은 일을 행하지 않으시렵니까?” 하고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그 도시에서 의로운 사람 50을 찾을 수 있다면 여호와께서 그 도시을 용서하시겠느냐고, 그는 질문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용서하시겠다고 확약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재차 질문을 하면서 그 숫자를 45으로, 그 다음에는 40으로, 그리고 또 줄여 나갔습니다. 여호와의 확약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 숫자가 10으로 줄어들 때까지 끈질기게 질문하였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인지 아직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벗이자 종인 아브라함이 그런 식으로 우려를 표명하는 것을 참을성 있게 그리고 겸손하게 허락하셨습니다.—창세 18:23-33.

12 매우 명석하고 학식이 많은 사람 가운데 자기보다 지능이 훨씬 떨어지는 사람의 말을 아주 참을성 있게 잘 들어 주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 우리 하느님은 그토록 겸손하신 분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와 위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또한 여호와께서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탈출 34:6) 가장 높으신 분이 하시는 일에 의문을 제기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던지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여호와여, 부디 분노하여 격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고 간곡히 말하였습니다. (창세 18:30, 32) 물론, 여호와께서는 분노하여 격해지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는 참으로 “지혜에 속한 온화함”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여호와는 합리적이시다

13. 성서에 사용된 “합리적인”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이며, 이 단어가 여호와를 적절하게 묘사하는 단어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13 여호와의 겸손은 또 다른 아름다운 특성인 합리성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에게는 이 특성이 유감스러울 정도로 결여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지성 있는 피조물의 말에 기꺼이 귀 기울여 주실 뿐만 아니라, 의로운 원칙과 상충되지 않을 때에는 기꺼이 양보하기도 하십니다. 성서에 사용된 “합리적인”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양보하는”을 의미합니다. 이 특성 역시 하느님의 지혜의 특징입니다. 야고보 3:17에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 합리적[입니다].” 모든 면에서 지혜로우신 여호와께서는 어떤 의미로 합리적이십니까? 우선, 그분은 적응력이 뛰어나십니다. 그분의 이름 자체가 가르쳐 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즉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되시는 분입니다. (탈출 3:14) 이 사실만으로도 그분이 뛰어난 적응력과 합리성의 영을 가지고 계신 분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14, 15. 여호와의 하늘 병거에 대한 에스겔의 환상은 여호와의 하늘 조직에 대해 어떠한 점을 가르쳐 주며, 그 조직은 세상의 조직과 어떻게 다릅니까?

14 여호와의 적응력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주목할 만한 성구가 있습니다. 예언자 에스겔은 영적 피조물로 이루어진 여호와의 하늘 조직에 대한 환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외경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거대한 병거를 보았는데, 항상 여호와의 지휘를 받는 그분 자신의 “교통 수단”이었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움직이는 방법이었습니다. 거대한 바퀴이 사방으로 향해 있고 눈이 가득하여, 사방 어디든지 볼 수 있었고 또 정지하거나 몸을 돌리지 않고도 즉시 방향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병거는 인간이 만든 다루기 힘든 교통수단처럼 둔중하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번개와 같은 속도로 움직일 수 있고, 심지어 직각으로 방향을 바꿀 수도 있었습니다! (에스겔 1:1, 14-28)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조직은, 그 조직을 지휘하고 있는 전능하신 주권자와 마찬가지로, 적응력이 대단히 뛰어나고,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과 그러한 상황이 요구하는 필요에 부응할 수 있습니다.

 15 인간은 그러한 완벽한 적응력을 단지 본받으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주 많은 경우, 인간과 인간의 조직은 적응력을 보이기보다는 경직되어 있으며, 양보하기보다는 비합리적인 태도를 나타냅니다. 예를 들면, 초대형 유조선이나 화물 열차도 그 크기나 힘으로 인해 외경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상황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부응할 수 있습니까? 화물 열차 앞 선로에 어떤 물체가 떨어질 경우, 화물 열차가 그것을 피해 방향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갑자기 멈추어 선다는 것도 그리 용이한 문제가 아닙니다. 화물을 가득 실은 열차는 제동을 건 후에도 거의 2킬로미터를 간 다음에야 멈추어 설 수 있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초대형 유조선은 엔진을 끈 후에도 8킬로미터를 더 항진할 수 있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엔진을 가동한다 하더라도, 그 유조선은 여전히 3킬로미터는 더 갈 것입니다! 경직되기 쉽고 비합리적인 태도를 나타내기 쉬운 인간의 조직도 그와 비슷합니다. 인간은 교만 때문에, 변하고 있는 필요와 환경에 적응하기를 흔히 거부합니다. 그러한 경직된 태도로 인해 기업은 파산하고 정부은 심지어 전복되기까지 합니다. (잠언 16:18) 여호와나 그분의 조직이 그러한 인간의 조직과는 전혀 다른 것에 대해 우리는 참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합리적을 나타내시는 방법

16. 여호와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롯을 대하실 때 어떻게 합리적인 태도를 나타내셨습니까?

16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롯과 그의 가족은 여호와의 천사로부터 “산간 지방으로 도피하시오”라는 분명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롯에게 달갑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여, 부디 그러지 마십시오!” 하고 그는 간청하였습니다. 산간 지방으로 도피하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확신한 롯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소알이라는 가까운 도시로 도피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그 도시도 멸망시키실 생각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롯의 두려움은 그럴 만한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산간 지방에서도 롯을 살아 있게 보존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롯의 간청 들어주셔서 소알을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자, 내가 또 당신에게 이 정도까지 사려 깊음을 나타내[겠소]” 하고 천사는 롯에게 말하였습니다. (창세 19:17-22) 여호와께서 나타내신 참으로 합리적인 태도가 아닙니까?

17, 18. 니네베 사람을 대하실 때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자신이 합리적을 나타내셨습니까?

17 여호와께서는 또한 진심 어린 회개에 반응을 나타내셔서 언제나 자비롭고 올바른 일을 하십니다. 예언자 요나가 악하고 폭력적인 도시 니네베로 보냄을 받았을 때 있었던 일을 고려해 보십시오. 요나가 니네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선포한 영감받은 소식은 아주 간단하였습니다. 즉 그 강대한 도시가 40일 있으면 멸망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니네베 사람이 회개한 것입니다!—요나 3.

18 이러한 사태의 변화에 여호와께서 나타내신 반응과 요나가 나타낸 반응을 비교해 보면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여호와께서는 조정을 하시어, “남자다운 전사”가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 (탈출 15:3) 반면에, 요나는 융통성 없고 훨씬 자비 없는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합리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앞서 언급한 화물 열차나 초대형 유조선과 같은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자기가 멸망을 선포했기 때문에 멸망이 일어나야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참을성 있게, 참을성 없는 예언자에게 합리성과 자비에 대한 잊지 못할 교훈을 해 주셨습니다.—요나 4.

여호와는 합리적인 분으로서 우리의 한계를 이해하신다

19. (ㄱ)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면에서 여호와께서 합리적인 분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잠언 19:17에서는 여호와께서 “선하고 합리적인” 주인이시며 또한 대단히 겸손한 분을 어떻게 알려 주고 있습니까?

19 마지막으로,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면에서도 합리적이십니다. 다윗 왕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조를 잘 아시고 우리가 흙을 기억하신다.” (시 103:14)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한계와 우리의 불완전성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하십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서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성서에서 대비하듯이, 인간 주인들 가운데는 “선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쁘게 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 첫째 2:18) 여호와는 어떤 주인이십니까? 잠언 19:17에서 하는 말에 유의해 보십시오. “낮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이여호와께 빌려 드리는 것이[다].” 선하고 합리적인 주인이라야만 낮은 자를 위하여 하는 친절한 행동을 모두 놓치지 않고 주목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성구에서는, 우주의 창조주께서 사실은 그러한 자비의 행동을 하는 한낱 인간에게 자신이 빚진 것처럼 생각하신다는 점도 암시하고 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겸손한 태도가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20. 여호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을 하신다는 어떤 보증이 있습니까?

20 여호와께서는 오늘날 자신의 종을 대하실 때 이전과 똑같이 온화하고 합리적이십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 그분은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천사을 사자로 보내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동료 신자에게 자신이 감옥에서 석방되도록 “계속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그리하여 내가 여러분에게 더 빨리 돌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덧붙여 말한 것을 상기해 보십시오. (히브리 13:18, 19)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실제로 여호와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하시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을 그분이 하시게 할 수 있습니다!—야고보 5:16.

21. 여호와의 겸손을 보고 결코 어떤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분에 대한 어떤 인식을 가져야 합니까?

21 물론, 여호와의 겸손을 드러내는 이러한 특성들—온화함, 기꺼이 귀 기울여 주시는 것, 참을성, 합리성—중에 여호와께서 자신의 의로운 원칙을 타협하심을 의미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은 여호와의 도덕 표준에 물을 타서 자기의 양 떼의 귀를 즐겁게 해 주면서 자기이 합리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디모데 둘째 4:3) 하지만 편의를 위해 타협하는 인간의 경향은 하느님의 합리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거룩하신 분이므로, 자신의 의로운 표준을 결코 오염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레위 11:44) 그러므로 여호와의 겸손의 증거인 여호와의 합리성을 본연의 특성 그대로 사랑하도록 합시다. 우주에서 가장 지혜로운 분이신 여호와 하느님께서 또한 더할 나위 없이 겸손한 분을 생각할 때 당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지 않습니까?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온화하고 참을성 많고 합리적인 하느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 3항 고대의 서기관들 즉 소페림은 이 성구를 변경시켜, 여호와가 아니라 예레미야가 낮게 굽힌다고 해 놓았다. 그은 하느님께서 그러한 겸손한 행동을 하시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결과, 많은 번역판은 이 아름다운 성구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에서 빗나가 있다. 하지만 「신 영어 성서」에서는 정확하게도, 예레미야가 하느님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기억해 주십시오, 제발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게로 몸을 굽혀 주십시오.”

^ 7항 다른 번역판에서는 “지혜에서 나오는 겸손”, “지혜의 특징인 부드러움”이라고 말한다.

^ 12항 흥미롭게도, 성서는 참을성과 거만을 대비시켜 이야기한다. (전도 7:8) 여호와의 참을성은 그분의 겸손에 대한 또 다른 증거가 된다.—베드로 둘째 3:9.

^ 18항 시편 86:5에서는 여호와가 “선하시고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알려 준다. 시편의 이 구절을 그리스어로 옮길 때, ‘기꺼이 용서하신다’는 표현에피에이케스 즉 ‘합리적이시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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