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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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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3. (ㄱ) 예수로 하여금 자기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하게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ㄴ) 예수의 사랑의 어떤 부면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까?

자기 아버지처럼 되려고 애쓰는 어린 소년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 아들은 아마 자기 아버지의 걷고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흉내 낼지 모릅니다. 머지않아 그 소년은 심지어 자기 아버지의 도덕적·영적 가치관까지 그대로 흡수할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이 자기가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사랑과 존경은 그 소년으로 하여금 자기 아버지처럼 되고 싶게 만듭니다.

2 예수와 그분의 하늘의 아버지 사이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한은 예수께서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 14:31) 다른 피조물이 존재하기 오래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이 아들보다 여호와를 더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랑은 이 헌신적인 아들로 하여금 자기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하게 만들었습니다.—요한 14:9.

3 이 책의 앞 장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어떻게 여호와의 능력과 공의와 지혜를 완벽하게 본받으셨는지를 논의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어떻게 반영하셨습니까? 예수의 사랑의 세 가지 부면—자기 희생적인 영, 부드러운 동정심, 기꺼이 용서하시는 태도—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4. 예수께서는 자기 희생적인 사랑과 관련하여 어떻게 인간으로서 최고의 모범을 세워 놓으셨습니까?

4 예수께서는 자기 희생적인 사랑과 관련하여 뛰어난 모범을 세워 놓으셨습니다. 자기 희생에는 다른 사람의 필요와 관심사를 자기의 것보다 비이기적으로 앞세우는 것이 포함됩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그분은 친히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영혼을 내주는 것, 이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요한 15:13) 예수께서는 우리 위해 자신의 완전한 생명을 기꺼이 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한 것으로서는 가장 위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다른 면으로도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5. 하느님의 독생자가 하늘을 떠난 것이 사랑에서 우러나온 희생이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5 하느님의 독생자는 인간으로 존재하시기 전에 하늘에서 특권받은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여호와와 그리고 수많은 영적 피조물과 친밀한 교제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개인적으로 누리던 이점이 있었지만, 이 소중한 아들은 “자기를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여 사람의 모양이 되셨습니다.” (빌립보 2:7) 그분은 “악한 자의 권세 안에 있”는 세상에서 죄 많은 인간들 가운데서 사시기 위해 기꺼이 오셨습니다. (요한 첫째 5:19) 하느님의 아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참으로 사랑에서 우러나온 희생이 아닙니까?

6, 7. (ㄱ) 예수께서는 지상 봉사 기간에 어떻게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나타내셨습니까? (ㄴ) 요한 19:25-27에는 비이기적인 사랑의 어떤 감동적인 예가 기록되어 있습니까?

6 예수께서는 지상 봉사 기간 내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분은 전적으로 비이기적이셨습니다. 봉사의 직무에 온전히 몰두하신 나머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익숙해 있어서 정상적으로 추구하는 안락까지도 그분은 희생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라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8:20) 예수께서는 숙련된 목수였기 때문에 얼마의 시간을 내서 자신을 위해 안락한 집을 지으실 수도 있었고, 아름다운 가구를 만들어 팔아서 가외의 돈을 버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물질적인 것을 얻기 위해 자기의 기술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7 예수의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참으로 감동적인 예요한 19:25-27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맞게 된 오후에 예수의 정신과 마음을 차지했을 것이 분명한 많은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기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그분은 제자들, 전파 활동, 그리고 특히 자신의 충절과 그것이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에 미치게 될 영향에 대해 염려하셨습니다. 사실, 인류의 미래가 온통 그분의 어깨 위에 지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으시기 불과 얼마 전에 예수께서는 또한, 그때에는 아마 과부였을 자기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염려 나타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마리아를 친어머니처럼 돌봐 달라고 부탁하셨으며, 그 후 그 사도는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를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돌봐 드릴 수 있는 마련을 하셨습니다. 참으로, 비이기적인 사랑의 부드러운 표현입니다!

“불쌍히 여기셨다”

8. 예수의 동정심을 묘사하기 위해 성서에서 사용하는 그리스어 단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8 예수께서는 자기 아버지처럼 동정심이 많으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를, 고난에 처해 있는 사람을 측은히 여기셔서 기꺼이 도움을 베푸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예수의 동정심을 묘사하기 위해, 성서는 “불쌍히 여기셨다”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합니다. 한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영향을 미치는 감정을 ··· 묘사하는 단어이다. 동정심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그리스어 단어 중 가장 강력한 단어이다.”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깊은 동정심으로 예수께서 영향을 받으신 몇 가지 상황을 고려해 보십시오.

9, 10. (ㄱ) 어떠한 상황이 예수와 사도로 하여금 조용한 곳을 찾아가도록 만들었습니까? (ㄴ) 사람로 인해 사생활이 방해를 받았을 때 예수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셨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9 영적인 필요에 응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셨다. 마가 6:30-34의 기록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표현하도록 예수를 움직인 것이 주로 무엇이었는지를 알려 줍니다. 그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십시오. 사도은 방금 광범위한 전파 여행을 끝마쳤기 때문에 흥분해 있었습니다. 그은 예수께 돌아와 자기이 보고 들은 것을 전부 열렬히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큰 무리가 몰려와, 예수와 사도에게 식사를 할 겨를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항상 주의 깊이 살피시는 예수께서는 사도이 피곤을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여러분은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십시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북쪽 끝을 가로질러 조용한 곳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이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실을 들어서 알게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북쪽 해안선을 따라 달려왔으며 배보다 앞서 맞은편에 도착하였습니다!

 10 예수께서는 자기의 사생활이 방해를 받았기 때문에 화를 내셨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보고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큰 무리를 보시고 그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이 목자 없는 양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을 영적인 것을 필요로 하는 개인로 보셨습니다. 그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인도하거나 보호해 줄 목자가 없는 양과 같았습니다. 자상한 목자가 되어야 하는데도 냉정하기만 한 종교 지도자이 평민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 7:47-49) 그분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에게 “하느님의 왕국에 대하여”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누가 9:11)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르쳐 주게 될 내용에 대한 그 사람의 반응을 보기 전에도 그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사실에 유의하십시오. 다시 말해서, 부드러운 동정심은 무리를 가르친 결과를 보고 생긴 것이 아니라, 무리를 가르치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분은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셨다’

11, 12. (ㄱ) 성서 시대에 나병 환자은 어떻게 여겨졌으며, 하지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예수께 가까이 왔을 때 그분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ㄴ) 예수께서 만지신 것은 그 나병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한 의사의 경험은 그 점을 어떻게 예시합니까?

11 고통을 덜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셨다.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예수께서 동정심이 많은 분을 알았으며, 그래서 그분에게 이끌렸습니다. 이 점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오는 가운데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예수께 가까이 왔을 때 특히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누가 5:12) 성서 시대에는 다른 사람이 감염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나병 환자를 격리시켜 놓았습니다. (민수 5:1-4) 그런데 나중에 랍비 지도자은 나병에 대한 가혹한 견해를 조장하여, 그들 자신이 세운 압제적인 규칙을 부과하였습니다. *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나병 환자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지 유의해 보십시오. “또한 나병 환자 하나가 그분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하여 ‘당신이 원하기만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에 그분은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며 ‘내가 원합니다. 깨끗하게 되십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 그에게서 나병이 사라[졌다].” (마가 1:40-42) 나병 환자가 그곳에 와 있는 것 자체가 법에 어긋나는 일임을 예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외면하시지 않고 매우 측은히 여기셔서 다른 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사람을 만지신 것입니다!

12 그렇게 만져 주신 것이 그 나병 환자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 당신은 짐작할 수 있습니까? 일례로, 한 가지 경험을 고려해 보십시오. 나병 전문가인 폴 브랜드 박사는 자기가 인도에서 치료한 한 나병 환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진찰 과정에서 그 박사는 나병 환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통역을 통해 그 사람이 받게 될 치료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나병 환자가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뭔가 말을 잘못했나요?” 하고 의사는 물었습니다. 통역은 그 젊은 남자에게 그 사람의 언어로 물어본 다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의사 선생님. 선생님이 이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어 주셔서 울음이 나온 거랍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여러 해 동안 자기를 손으로 만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 예수께 가까이 온 나병 환자에게 있어서, 그를 만진 것은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한 번의 만짐이 있자, 그를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로 만들었던 그 병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13, 14. (ㄱ) 나인이라는 도시에 가까이 가실 때 예수께서는 어떤 행렬과 마주치셨으며, 그 사정이 몹시 딱하였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예수의 동정심은 그분으로 하여금 나인의 과부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들었습니까?

13 슬픔을 없애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셨다.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시고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7:11-15의 기록을 고려해 보십시오. 그 일이 발생한 것은, 예수의 봉사의 직무가 중간 정도 수행되었을 무렵, 그분이 갈릴리의 도시  나인의 외곽에 가까이 가고 계실 때였습니다. 그 도시의 성문에 가까이 가고 계실 때 예수께서는 한 장례 행렬과 마주치셨습니다. 사정이 몹시 딱하였습니다. 외아들인 한 젊은이가 죽었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그 과부는 아마 전에도 한 번 그러한 장례 행렬—남편의 장례 행렬—을 따라간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자기 아들의 장례 행렬을 따라가게 되었는데, 그 아들은 아마 그를 부양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여자를 따라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애곡하는 소리를 내는 사람과 애가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9:17, 18; 마태 9:23) 하지만 예수의 시선은 비탄에 젖은 어머니, 아들의 시신을 옮기는 운구대 가까이서 걷고 있을 것이 틀림없는 그 여자에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14 예수께서는 아들을 잃은 그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에게 위안을 주는 어조로 “그만 우십시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청받지 않으셨는데도 그분은 운구대로 가까이 가서 그것을 만지셨습니다. 그러자 운구대를 메고 가던 사람이—그리고 아마 나머지 사람도—멈추어 섰습니다. 예수께서는 권위 있는 목소리로 생명 없는 시신을 향해 “젊은이, 내가 그대에게 말하는데, 일어나시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마치 깊은 잠을 자다가 깨어난 듯,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다음 이어서 우리는 매우 감동적인 기록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어머니에게 넘겨 주셨다.”

15. (ㄱ)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신 것에 관한 성서의 기록은 동정심이 행동과 어떤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줍니까? (ㄴ)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어떻게 예수를 본받을 수 있습니까?

15 우리는 이러한 기록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각각의 경우에, 동정심이 행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유의해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의 곤경을 보고는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 수 없었으며, 그처럼 동정심을 느끼고는 행동하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모범을 따를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을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 그 일을 합니다. 하지만 그  은 또한 동정심에서 우러나온 활동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가 사람에 대해 예수께서 느끼신 것처럼 느낀다면, 우리의 마음은 그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도록 우리를 움직일 것입니다. (마태 22:37-39) 고통을 당하고 있거나 비탄에 잠겨 있는 동료 신자에게 동정심을 나타내는 것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기적으로 신체적 고통을 치료하거나 죽은 사람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솔선해서 관심을 표현하거나 적절하고도 실용적인 도움을 베풂으로, 동정심을 실제로 나타낼 수는 있습니다.—에베소 4:32.

“아버지, 그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16. 기꺼이 용서하시는 예수의 태도는 고통의 기둥에 달려 있을 때에도 어떻게 분명히 나타났습니까?

16 예수께서는 또 다른 중요한 방법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완벽하게 반영하셨는데, 그분은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시 86:5) 기꺼이 용서하시는 태도는 고통의 기둥에 달려 있으실 때에도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시면서도 예수께서는 무엇에 관해 말씀하셨습니까? 처형자을 징벌해 달라고 여호와께 부르짖으셨습니까? 그와는 반대로, 예수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 가운데는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 그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은 자기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누가 23:34. *

17-19. 예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도 베드로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나타내셨습니까?

17 예수의 용서에 대한 한층 더 감동적인 예는 아마 그분이 사도 베드로를 대하신 방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매우 사랑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의 생애의 마지막 밤 니산월 14에 베드로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여, 저는 감옥에라도 죽음에라도 당신과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후에 베드로는 예수를 안다는 사실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로 부인하는 말을 할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성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 자신이 저지른 심각한 죄로 인해 크게 상심한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습니다. 같은 날 나중에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그 사도는 아마 ‘주께서 나를 용서해 주셨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였을 것입니다.—누가 22:33, 61, 62.

18 베드로는 오래 기다리지 않아 그 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니산월 16일 아침에 부활되셨고, 아마 바로 그날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나셨을 것입니다. (누가 24:34; 고린도 첫째 15:4-8) 그토록 강하게 자신을 부인한 그 사도에게 예수께서 그처럼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회개한 베드로에게, 그가 아직도 사랑받고 있고 그의 주에 의해 소중히 여김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안심시켜 주시는 것 이상의 일을 하셨습니다.

19 얼마 후,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자신의 주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 그가 예수를 사랑하는지 세 차례에 걸쳐 물으셨습니다. 세 번째 질문이 있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당신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당신이 아십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읽으실 수 있는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에 대해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의 사랑을 천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분의 “어린 양들”을 “먹이”고 “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요한 21:15-17) 이전에 베드로는 전파하라는 임명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누가 5:10)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는 놀라울 정도의 신뢰를 나타내시어, 그에게 훨씬 더 무거운 책임—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될 사람을 돌보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얼마 후 예수께서는 제자이 하는 활동 가운데서 베드로가 두드러진 역할을 하게 해 주셨습니다. (사도 2:1-41) 예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신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베드로는 틀림없이 매우 위안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있는가?

20, 21.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20 여호와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참으로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의 사랑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합니까? 성서는 우리에게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고 강력히 촉구합니다. (에베소 3:19)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의 생애와 봉사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많은 점을 가르쳐 줍니다. 하지만 온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에는 성서에서 그분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을 배우는 것 이상의 일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21 ‘알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실제로,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사랑을 나타낼 때—다른 사람을 위해 비이기적으로 우리 자신을 내주고, 동정심을 가지고 그의 필요에 응해 주고, 마음으로부터 그을 용서해 줄 때—우리는 진정으로 그분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경험을 통해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더 그리스도와 같이 될수록, 예수께서 완벽하게 본받으신 분이신 우리의 사랑 많으신 하느님 여호와께 그만큼 더 가까이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도록 합시다.

^ 11항 랍비이 만든 규칙에서는, 아무도 나병 환자에게 4큐빗(약 1.8미터) 이내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였다. 그리고 바람이 불 경우에는, 나병 환자가 적어도 100큐빗(약 45미터)은 떨어져 있어야 하였다. 「미드라시 라바」에서는, 한 랍비가 나병 환자에게서 몸을 숨겼으며, 또 한 랍비는 나병 환자을 멀리 쫓아내기 위해 그에게 돌을 던졌다고 알려 준다. 따라서 나병 환자은 사람에게 배척당하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멸시받고 환영받지 못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 16항 누가 23:34의 처음 부분이 일부 고대 사본에는 빠져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이 권위 있는 다른 많은 사본에 나와 있기 때문에, 「신세계역 성경」을 비롯하여 다른 많은 번역판에는 이 표현이 들어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기둥에 못 박은 로마 군인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 같다. 그은 예수가 실제로 어떤 분인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물론, 그 처형을 선동한 종교 지도자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 알면서도 악의적으로 행동한 것이었기 때문에 훨씬 더 큰 비난을 받아 마땅하였다. 그들 중 다수는 결코 용서를 받을 수 없었다.—요한 11:4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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