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바르샤바—2015​년 1​월 27​일, 나치 독일​의 강제 수용소​이자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의 해방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수천 명​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이 악명 높은 수용소​는 나치​가 표적​으로 삼은 인종​의 사람​들​을 없애는 데 주​로 사용​되었지만, 독일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 출신​의 여호와​의 증인​을 조직적​으로 박해​하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번 기념 행사​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국립 박물관​과 국제 아우슈비츠 협회​가 주관​합니다. 폴란드 대통령​인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가 참석​할 예정​이며, 세계 전역​의 일부 나라​들​도 공식 대표단​을 보낼 것​입니다. 또한 이 행사​는 인터넷​으로 생중계​될 것​입니다.

아우슈비츠​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에 의해 합병​된 폴란드 도시​인 오시비엥침 시​의 교외 지역​에 있습니다. 아우슈비츠​는 1940​년 6​월​에 그곳​에 도착​한 약 700​명​의 폴란드인 수감자​를 수용​하는 독일 강제 수용소​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규모​가 급속도​로 커져 40​개 이상​의 수용동​과 보조 수용동​을 갖춘 거대​한 수용소​가 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있는 4​개​의 가스실​에서는 하루​에 2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우슈비츠​가 운영​된 약 5​년 동안, 400​명 이상​의 여호와​의 증인​을 포함​해 최소 110만 명​이 이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국립 박물관 웹사이트​에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역사​에 관한 문헌​에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수감​된 여호와​의 증인(수용소 기록​에는 성경 [연구생]이라고 나옴)에 대해 간단​한 언급​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수감자​들​이 수용소​의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 도덕적 원칙​을 고수​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볼 때 이​들​에게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박물관 기록​에 따르면, 최초​로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수감자​들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들​이 있었으며, 그 수용소​로 보내진 수많은 증인 가운데 35​퍼센트 이상​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안제이 샬보트 (IBV 수감자 108703): 1943​년​에 나치​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보내졌습니다.

나치 정부​는 일찍이 1933​년​부터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표적​으로 삼았으며 독일 전역​에서 증인 조직​을 금지​했습니다. 증인​들​의 도덕적 원칙​과 관행​은 나치​의 이념​과는 양립​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증인​들​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하일 히틀러!”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히틀러​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증인​들​은 군대​와 관련​된 일​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았는데, 나치 정권​은 이​를 반국가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1943​년​에 체포​되어 겨우 19​세​의 나이​로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안제이 샬보트​는 “군복무​를 거부​하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증인 조직​에서 탈퇴​한다는 뜻​을 밝히는 동시​에 그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선언​하는 문서​에 서명​하기​만 하면, 즉각 석방​시켜 주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샬보트 씨​는 서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와 같은 서약서​에 서명​해 믿음​을 부인​하기​만 하면 석방​시켜 주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치​의 공식 문서​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을 “IBV”로 지칭​했는데, 이것​은 증인 조직​을 가리키는 독일어 공식 명칭(Internationale Bibelforscher-Vereinigun, ‘만국 성경 연구회’라는 뜻​임)의 약자​였습니다. 나치​는 증인​들​이 보라색 삼각형​이 달린 죄수복​을 입게 했습니다. 이 표시 덕분​에 증인​들​은 수용소 내​에 있는 동료 신자​들​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힘​을 북돋워 주기 위해 매일 저녁 점호​가 있기 전​에 함께 만났습니다. 또한 증인​들​의 친절​과 믿음​에 감명​을 받은 다른 수감자​들​과 성경​에 관해 토의​하는 비밀 모임​들​도 조직​되었습니다. 상당수​의 수감자​들​이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1945​년 1​월 27​일 토요일 아침, 당시 ‘붉은 군대’로 불리던 소련군​이 오시비엥침​에 도착​했습니다. 오후 3​시​경​까지, 아우슈비츠 1​호, 아우슈비츠 2​호(비르케나우), 아우슈비츠 3​호(모노비츠)에서 약 7000​명​의 수감자​들​이 소련군​에 의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스타니스와프 자용츠. 1943​년 2​월 16​일​에 아우슈비츠​에 도착​했습니다.

소련군​이 진격​해 올 것​이라고 생각​한 나치​는 아우슈비츠​에 있던 수​만 명​의 수감자​를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는데, 그 가운데​는 여호와​의 증인​인 스타니스와프 자용츠도 있었습니다. 자용츠 씨​를 비롯​해 약 3200​명​의 수감자​들​은 야보주노 보조 수용동​을 떠나 수북​이 쌓인 눈​을 헤치며 악명 높은 죽음​의 행진​을 했습니다. 숲 속​에 외따로 있던 아우슈비츠 보조 수용동​인 블레흐하메르까지 3​일​에 걸쳐 행진​하는 동안 생존​한 사람​은 2000​명​이 안 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자용츠 씨​는 자신​과 다른 수감자​들​이 그 수용동​에 숨어 있을 때 곧바로 전투​가 이어졌던 것​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탱크​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어느 쪽 탱크​인지 가서 확인​해 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아침​이 되어서야 러시아군​이라는 걸 알 수 있었죠. ··· 숲 속​에 있는 넓은 공터​로 러시아 군인​들​이 들어오고 있었고, 그렇게 해서 악몽 같았던 수용소 생활​도 끝​이 났습니다.”

올해 1​월 27​일​에는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을 기념​해 세계 전역​의 여러 도시​에서 회의​나 전시회​들​이 열릴 예정​입니다.

보도 관련 연락처:

국제: J. R. Brown, 홍보부, 전화 +1 718 560 5000

독일: Wolfram Slupina, 전화 +49 6483 41 3110

폴란드: Ryszard Jabłoński, 전화 +48 608 555 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