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31

20  주간 첫날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일찍 무덤에 가 보니+ 무덤에서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했다. “사람들이 주를 무덤에서+ 꺼내 갔는데 어디에 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무덤을 향해 떠났다.  두 사람이 함께 달리기 시작했으나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 무덤에 먼저 도착했다.  그가 몸을 굽혀 안을 보니 아마포 천이 그곳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마포 천이 그곳에 놓여 있었다.  그분의 머리를 감쌌던 천은 시신을 쌌던 천과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말려 있었다.  무덤에 먼저 도착했던 다른 제자도 안으로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그들은 아직도 그분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 10  그 제자들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11  그러나 마리아는 계속 무덤 바깥 가까운 곳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가 울면서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신이 뉘어져 있던 곳에 앉아 있었는데 한 천사는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은 그에게 “여자여, 왜 울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사람들이 내 주를 꺼내 갔는데 어디에 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14  이 말을 하고 돌아서서 보니 예수께서 거기에 서 계셨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했다.+ 15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여자여, 왜 울고 있습니까?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 그는 그분이 동산지기인 줄로 생각하고 말했다. “여보세요, 당신이 그분을 옮기셨다면 어디에 뉘었는지 알려 주세요. 그러면 제가 그분을 모셔 가겠습니다.” 16  예수께서 “마리아!”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어로 “랍보니!”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더 이상 나를 붙잡지 마십시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내 아버지+ 곧 여러분의 아버지께, 내 하느님+ 곧 여러분의 하느님께 올라간다’고 말하십시오.” 18  막달라 마리아는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습니다!” 하고 말하며, 그분이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전했다.+ 19  그날 곧 주간 첫날이 저물 때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을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그러자 그들은 주를 보고 기뻐했다.+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여러분을 보냅니다.”+ 22  이 말씀을 하신 다음 그분은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23  여러분이 어떤 사람의 죄든지 용서하면 그 죄가 용서를 받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 죄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이며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의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습니다.”+ 26  8일 후에 그분의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었고 도마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들이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손가락을 여기에 대어 보고 내 손을 보십시오. 또 당신의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십시오. 더는 의심하지* 말고 믿으십시오.” 28  그러자 도마가 “나의 주, 나의 하느님!”+ 하고 말했다. 2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은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습니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30  참으로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두루마리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3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기록한 것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여러분이 믿게 하고, 또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각주

직역하면 “믿지 못하지”.

연구 노트

주간 첫날: 니산월 16일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 바로 다음 날이 한 주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주간 첫날: 마 28:1 연구 노트 참조.

무덤: 또는 “기념 무덤”.—용어 설명 “기념 무덤” 참조.

예수께서 사랑하신 사람: 예수께서 특별히 사랑하셨던 사람을 가리킨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에 관한 언급이 5번 나오는데, 이 구절은 그중 첫 번째 경우이다. (요 13:23; 19:26; 20:2; 21:7, 20) 이 제자는 일반적으로 세베대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형제인 사도 요한인 것으로 여겨진다. (마 4:21; 막 1:19; 눅 5:10)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요 21:2에 “세베대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한 번 나올 뿐, 사도 요한의 이름은 이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다른 이유는 요 21:20-24에서 이 복음서의 필자를 가리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라고 언급한다는 점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그 제자에 관해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남아 있게 하는 것이 내 뜻이라 해도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그 제자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보다 더 오래 살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사도 요한에게 잘 부합된다.—요한복음 책명요 1:6; 21:20 연구 노트 참조.

또 다른 제자 하나: 사도 요한을 가리키는 것 같다. 요한이 자신을 “또 다른 제자”로 언급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사실과 잘 부합된다. (요 13:23; 19:26; 20:2; 21:7; 21:20 연구 노트 참조)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만한 점은 예수께서 부활되신 후의 상황에 관해 알려 주는 요 20:2-8에서도 요한과 베드로를 함께 언급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갈릴리 사람인 요한이 어떻게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가 되었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요한은 대제사장의 집안 사람들과 알고 지냈기 때문에 문을 통과하여 뜰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베드로도 들어오게 해 줄 수 있었다.—요 18:16.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계셔서: 예수께서는 창조의 시작부터 자신이 아버지와 누려 온 따뜻한 유대감과 친밀한 감정을 묘사하신 것이다. (잠 8:30) 요한은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을 기록할 때 그리스어 동사 필레오(“애정을 가지다”)의 한 형태를 사용했다. 이 동사는 절친한 친구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매우 친밀한 유대감을 가리키는 데 자주 쓰인다. 예를 들어 이 단어는 예수와 나사로 사이의 우정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요 11:3, 각주; 11:36, 각주) 또한 부모와 자녀 사이의 애정을 가리키는 데도 쓰였다. (마 10:37) 그리스어 필레오는 여호와께서 아들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 갖고 계신 따뜻하고 강한 개인적 애착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되었으며, 제자들이 하느님의 아들에 대해 갖고 있는 따뜻한 감정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다.—요 16:27.

여러분에게 애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스어 동사 필레오는 “애정을 가지다”, “좋아하다”, “아끼다”, “입을 맞추다”로 번역된다. (마 23:6; 요 12:25; 막 14:44) 이 동사는 절친한 친구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매우 친밀한 유대감을 가리킬 수 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에 가까이 가셨을 때 “눈물을 흘리셨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보십시오. 저분이 나사로에 대해 얼마나 애정이 깊었는지[그리스어 동사 필레오의 한 형태]!” (요 11:35; 11:36, 각주) 이 동사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친밀한 유대를 가리키는 데도 쓰인다. (마 10:37) 이 구절(요 16:27)에서 이 단어는 여호와께서 아들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 갖고 계신 따뜻하고 강한 개인적 애착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며, 제자들이 하느님의 아들에 대해 갖고 있는 따뜻한 감정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요 5:20에서는 동일한 단어가 아버지께서 아들에 대해 가지고 계신 강한 애착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예수와 베드로 사이에 이 대화가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그분을 세 번 부인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베드로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아보려고 세 차례나 질문을 하시자 “베드로는 근심했다.” (요 21:17) 요 21:15-17에 나오는 요한의 기록에는 두 가지 그리스어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하나는 사랑하다로 번역된 아가파오이고 다른 하나는 애정을 갖고 있다로 번역된 필레오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하고 두 번 물으셨다. 두 번 모두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에게 “애정”을 갖고 있다고 진지한 태도로 분명하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당신은 나에게 애정을 갖고 있습니까?”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다시 한 번 그렇다고 단언했다. 베드로가 예수를 사랑한다고 분명하게 말할 때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랑과 애정이 있다면 베드로가 어린양들 즉 그분의 제자들을 영적으로 먹이고 “돌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요 21:16, 17; 벧전 5:1-3)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분에 대한 사랑을 세 번 확언할 기회를 주신 다음 그에게 양들을 돌볼 책임을 맡기셨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 자신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의 행동이 용서받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말끔히 없애 주셨다.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다른 제자: 또는 “예수께서 애정을 품으셨던 다른 제자”. 예수께서 특별히 사랑하셨던 사람을 가리킨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또는 “애정을 품으셨던” 제자에 관한 언급이 5번 나오는데, 이 구절은 그중 세 번째 경우이다. (요 13:23; 19:26; 20:2; 21:7, 20) 이 제자는 일반적으로 사도 요한인 것으로 여겨진다. (요 13:23; 18:15 연구 노트 참조) 이 구절을 제외한 네 경우에는 그리스어 아가파오가 사용되었다. 이 구절에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필레오가 사용되었다. 필레오는 「신세계역」에서 종종 “애정을 갖다; 애정을 품다”로 번역된다.—마 10:37; 요 11:3, 각주; 11:36, 각주; 16:27; 21:15-17; 고전 16:22; 딛 3:15, 각주; 계 3:19, 각주. 요 5:20; 16:27; 21:15 연구 노트 참조.

성경 말씀: 시 16:10이나 사 53:10을 가리키는 것 같다. 메시아에 관한 일부 예언들은 예수의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메시아가 배척당하고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될 것에 관한 예언을 이해하지 못했다.—사 53:3, 5, 12; 마 16:21-23; 17:22, 23; 눅 24:21; 요 12:34.

히브리어: 영감받은 성경 필자들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유대인들이 사용한 언어를 가리켜 “히브리어”라고 불렀다. (요 19:13, 17, 20; 행 21:40; 22:2; 계 9:11; 16:16) 또한 부활되어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께서 타르수스의 사울에게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언어도 “히브리어”라고 언급한다. (행 26:14, 15) 행 6:1에서는 “히브리어를 하는 유대인들”과 “그리스어를 하는 유대인들”을 구별하여 언급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구절들에서 “히브리어”라고 번역된 표현이 “아람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표현이 실제로 히브리어를 가리킨다고 생각할 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다. 예를 들어, 의사 누가는 바울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히브리어로” 연설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바울의 연설을 듣던 사람들은 히브리어로 된 모세 율법을 연구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사해 문서를 구성하는 많은 단편과 사본들 가운데 대다수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처럼 많은 성경 기록물과 성경 이외의 기록물이 히브리어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당시 히브리어가 일상생활에서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아람어로 된 단편들도 일부 발견된 점으로 보아 두 가지 언어가 모두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경 필자들이 “히브리어”라는 표현을 아람어나 시리아어라는 의미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은 것 같다. (행 21:40; 22:2. 행 26:14 비교) 일찍이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아람어”와 “유대인의 언어”를 구분하여 언급했다. (왕하 18:26) 또한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왕하 18:26의 내용을 이야기할 때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별개의 언어로 언급했다. (「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 X, 8 [i, 2]) 히브리어에 아람어와 상당히 비슷한 단어들이 있으며 아람어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단어들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필자들이 아람어를 가리켜 히브리어라고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히브리어: 요 5:2 연구 노트 참조.

랍보니!: “나의 선생님”을 의미하는 셈어 단어. 일부 학자들은 “랍보니”가 원래는 “랍비”보다 더 존중심이나 친근감을 나타내는 칭호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구절과 요 1:38에서 요한은 “랍보니”와 “랍비”를 둘 다 선생님이라고 번역했다.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무렵에는 “랍보니”라는 칭호에서 “나의”를 의미하는 1인칭 접미사가 그 특별한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상 나를 붙잡지 마십시오: 그리스어 동사 합토마이는 “만지다”를 의미할 수도 있고 “붙잡다; 매달리다”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일부 번역판에서는 예수의 말씀을 “나를 만지지 마십시오”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을 만지는 것조차 못하게 하신 것이 아니었다. 부활되신 예수를 본 다른 여자들이 “그분의 발을 붙잡”았을 때, 예수께서 그것을 막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마 28:9)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곧 하늘로 올라가실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주와 함께 있으려는 간절한 마음 때문에 예수께서 떠나시지 못하도록 그분을 꼭 붙잡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 더 이상 자신을 붙잡지 말고 제자들에게 가서 자신이 부활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떠날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는 점을 확신시켜 주셨다.

내 하느님 곧 여러분의 하느님: 예수께서는 기원 33년 니산월 16일에 막달라 마리아와 대화를 나누면서 이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을 보면 부활되신 예수께서 아버지를 자신의 하느님으로 여기셨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분의 아버지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느님이셨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틀 전에 형주에 달려 계실 때 예수께서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외치셨다. 그렇게 해서 그분은 시 22:1의 예언을 성취시키셨으며 아버지가 자신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인정하셨다. (마 27:46; 막 15:34; 눅 23:46) 요한 계시록에서도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내 하느님”이라고 부르신다. (계 3:2, 12) 이러한 기록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분의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숭배하는 것처럼, 부활되어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숭배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유대인들: 요한복음에서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유대 민족이나 유대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예루살렘이나 그 인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또한 좀 더 좁은 의미로 사용되어, 모세 율법과 관련된 인간 전통에 철저히 고착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킬 수도 있는데, 그러한 전통은 모세 율법의 정신과 어긋나는 경우가 많았다. (마 15:3-6) 그러한 “유대인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들은 예수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나타낸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다. 문맥을 볼 때 이 구절과 요한복음 7장의 몇몇 구절들에서 이 단어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가리킨다.—요 7:13, 15, 35ㄱ. 용어 설명 “유대인” 참조.

유대인들: 유대교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요 7:1 연구 노트 참조.

도마: “쌍둥이”를 의미하는 아람어에서 나온 그리스어 이름이다. 사도 도마는 디두모라는 그리스어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 이름 역시 ‘쌍둥이’를 의미한다.

‘쌍둥이’: 요 11:16 연구 노트 참조.

내 하느님 곧 여러분의 하느님: 예수께서는 기원 33년 니산월 16일에 막달라 마리아와 대화를 나누면서 이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을 보면 부활되신 예수께서 아버지를 자신의 하느님으로 여기셨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분의 아버지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느님이셨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틀 전에 형주에 달려 계실 때 예수께서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외치셨다. 그렇게 해서 그분은 시 22:1의 예언을 성취시키셨으며 아버지가 자신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인정하셨다. (마 27:46; 막 15:34; 눅 23:46) 요한 계시록에서도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내 하느님”이라고 부르신다. (계 3:2, 12) 이러한 기록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분의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숭배하는 것처럼, 부활되어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숭배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말씀’은 신이셨다: 또는 “‘말씀’은 신성을 지니고 계셨다; ‘말씀’은 신 같은 분이었다”. 요한의 이 말은 ‘말씀’(그리스어 로고스. 이 구절에 나오는 ‘말씀’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즉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이나 특징을 묘사한 것이다. ‘말씀’은 하느님께서 다른 모든 것을 창조하는 데 사용하신 맏아들로서 탁월한 지위를 가지고 계시므로, ‘말씀’을 “신; 신 같은 분; 신성을 지닌 분; 신격을 가진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합당하다. 많은 번역자들은 그분을 전능한 하느님과 동일시하여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몇 가지 점을 고려해 보면, 요한이 ‘말씀’과 전능한 하느님이 동일한 분이라는 의미로 그 말을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먼저, 이 구절의 앞부분과 다음 구절은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고 분명히 언급한다. 또한, 1절과 2절에는 그리스어 테오스가 세 번 나오는데, 첫 번째와 세 번째는 그리스어 정관사와 함께 사용되었지만 두 번째는 정관사 없이 쓰였다. 많은 학자들은 두 번째 테오스에 정관사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맥에서 정관사와 함께 사용된 테오스는 전능한 하느님을 가리킨다. 반면에 문법 구조를 볼 때 여기서 정관사 없이 사용된 테오스는 성질을 묘사하는 것으로, ‘말씀’이 지닌 특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된 여러 성경 번역판들은 이 표현을 번역할 때 「신세계역」과 동일한 방식을 사용하여 ‘말씀’이 “신이셨다; 신성을 지니고 계셨다; 신격을 가진 존재였다; 신 같은 분이었다”와 같이 번역한다.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을 콥트어 방언인 사히디어와 보하이르어로 번역한 고대 역본들을 들 수 있다. 기원 3, 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역본들은 요 1:1에 나오는 첫 번째 테오스와 두 번째 테오스를 각각 다르게 번역했다. 그러한 번역 표현은 ‘말씀’이 가진 특성, 즉 그가 하느님과 유사한 본성을 지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말씀’을 그의 아버지인 전능한 하느님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이 구절과 일치하게, 골 2:9에서는 그리스도에게 “하느님의 특성의 모든 충만함”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벧후 1:4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들도 “신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알려 준다.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으로, 「칠십인역」에서는 그리스어 테오스가 히브리어 이나 엘로힘을 번역할 때 주로 사용된다. 히브리어 엘로힘은 “하느님” 또는 “신”으로 번역되며, 기본적으로 “위력 있는 자; 강한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히브리어 단어들은 전능한 하느님을 가리킬 때만 아니라 다른 신들과 인간들을 가리킬 때도 사용된다. (요 10:34 연구 노트 참조) ‘말씀’을 “신” 즉 “위력 있는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 9:6의 예언과 조화된다고 볼 수 있다. 그 예언에서는 메시아가 (“전능한 하느님”이 아닌) “위력 있는 신”으로 불릴 것이며, 자신의 백성 모두에게 “영원한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알려 준다. 그의 아버지인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그 일을 이룰 것이다.—사 9:7.

나의 주, 나의 하느님!: 그리스어 원문에는 “하느님”(테오스)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다. 일부 학자들은 도마가 놀라서 외친 이 표현이 예수에게 말한 것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예수의 아버지인 하느님을 부르는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학자들은 그리스어 원문을 볼 때 이 표현을 예수를 부르는 말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견해가 맞다 하더라도, 도마가 어떤 의미로 “나의 주, 나의 하느님”이라고 말했는지는 영감받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 비교해서 이해해야 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 일이 있기 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 곧 여러분의 아버지께, 내 하느님 곧 여러분의 하느님께 올라간다”라는 소식을 전하셨기 때문에, 도마가 예수를 전능한 하느님으로 생각했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요 20:17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도마는 전에 예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그분을 “오직 한 분의 참하느님”이라고 부르시는 것을 들었다. (요 17:1-3) 따라서 도마가 예수를 “나의 하느님”이라고 부른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일 수 있다. 그는 예수를 전능한 하느님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신”으로 여겼다. (요 1:1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도마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여호와의 종들이 그분이 보내신 천사들을 불렀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예수를 부른 것일 수 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일부 사람들은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를 대면했을 때 그 천사가 마치 여호와 하느님인 것처럼 그를 대하거나 그에 대해 언급했다. 때로는 그 기록의 필자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천사들에 대해 기록했다. 도마는 그런 기록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창 16:7-11, 13; 18:1-5, 22-33; 32:24-30; 삿 6:11-15; 13:20-22 비교) 따라서 그와 비슷하게, 도마도 예수가 참하느님의 대표자이자 대변자임을 인정하여 예수를 “나의 하느님”으로 불렀을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주”와 “하느님” 앞에 그리스어 정관사가 사용된 것을 볼 때 이 단어들이 전능한 하느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문맥에서 관사가 사용된 것은 단지 그리스어 문법 때문일 수 있다. 그리스어에서는 정관사가 붙은 주격 명사가 호격 즉, 어떤 대상을 부르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한 예를 눅 12:32과 골 3:18–4:1과 같은 성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이 성구들에 나오는 “적은 무리”, “아내”, “남편”, “자녀”, “아버지”, “종”, “주인”에 해당하는 표현들 앞에는 정관사가 사용되었다. 그와 비슷하게, 벧전 3:7의 원문에도 “남편”에 해당하는 표현 앞에 정관사가 있다. 따라서 요 20:28에서 그리스어 정관사가 사용된 것은 도마가 무슨 의도로 “나의 주, 나의 하느님!”이라고 말했는지 파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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